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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의 대상을 피난처로 삼지 않네”뱀의 경(S4.6)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 1. 22:55

 

 

집착의 대상을 피난처로 삼지 않네뱀의 경(S4.6)

 

 

 

뱀의 경(S4.6)’에서

 

마라상윳따 여섯 번째의 경은 삽빠경(sappa, S4.6)’이다. ‘뱀의 경이라 한다. sappaa snake를 뜻하기 때문이다.

 

악마가 이번에는 무시무시한 뱀으로 변신하여 부처님 면전에 섰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 악마의 몸은 커다란 나무로 만들어진 것 같았고 턱은 술을 거르는 채와 같았으며 두 눈은 꼬쌀라 국의 놋쇠그릇과 같았다. 입에서 혓바닥을 내는 것은 천둥과 더불어 번개가 나타나는 것과 같았고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소리는 대장장이가 풀무질할 때의 소리와 같았다.(S4.6)”라고 설명 되어 있다. 경에 따르면 무시무시하게 생긴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인가 인가?

 

경에서 턱은 술을 거르는 채와 같았으며라 하였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목은 술 거르는 체와 같았고라 하였다. 턱과 목, 그리고 라고 한 것이 다르다.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채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주석을 인용하여 주정제조업자들이 역어 만든 여과장치(Srp.I.173)”로 설명하고 있다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은 이 부분과 관련하여 각주를 하지 않았다.

 

전재성님은 에 대하여 술을 거르는 채’로 비유 하였다. 이는 ‘soṇḍikākilañjaṃ’에 대한 번역이다.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채로 사용하는 돗자리나 바구니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는 무엇을 말할까?

 

네이버국어사전에 따르면 에 대한 여러 뜻이 있다. 그 중에 긴 나무 막대기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발구, 달구지, 수레 따위의 앞쪽 양옆에 댄 긴 나무.” 또는 가마, 들것, 목도 따위의 앞뒤로 양옆에 대서 메거나 들게 되어 있는 긴 나무 막대기라고 설명 되어 있다. 채에 대하여 영어로도 stick, racket, club으로 설명 되어 있다.

 

각묵스님은 체에 대하여 술 거르는 체’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에 대하여 국어사전을 찾아 보면 가루를 곱게 치거나 액체를 밭거나 거르는 데 쓰는 기구. 얇은 나무로 쳇바퀴를 만들고 말총, 헝겊, 철사 따위로 쳇불을 씌워 만든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각묵스님의 번역이 바르게 되어 있다. 키질할 때 대나무로 엮어 만든 것이나 망사형철사로 되어 있는 조리 기구에 대하여 라 하는 것이다.

 

후드라 번역하였을까?

 

그런데 각묵스님은 체에 대하여 을 설명하는데 사용하였다. 반면 전재성님은 이라 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its hood, like a large brewer's sieve”라 하였다. brewer는 맥주 양조업자를 말하고, sieve는 가루나 돌 등을 걸러내는 체를 말한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양조업자가 가루를 걸러내는 체와 같은 후드라고 번역 된다. 문제는 그 체에 해당되는 것이 턱인지 목인지에 대해서이다. 그렇다면 뱀에도 목이 있을까?

 

뱀에게도 목이 있을 수 있으나 구분이 되지 않는다. 뱀 특유의 형상을 보면 머리에서 꼬리까지 일직선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턱은 있다. 입을 벌리면 턱의 형상이 보이기 때문이디. 그렇다고 하여 체에 대하여 턱이라고 설명해 놓은 것이라 볼 수 있을까?

 

빠알리 원문에 phao라는 말이 있다. 빠알리 사전에는 ‘The hood of a snake, especially of a cobra’라 설명 되어 있다. 코브라가 머리를 세웠을 때 후그 같은 형상을 말한다. 후두는 외투 등에 달린 모자를 뜻한다. 두건이라고 한다. 자동차의 보닛을 후드라고도 한다.

 

그런데 율장대품에 용왕 무짤란다 이야기가 나온다. 경에 따르면 용왕 무짤란다가 세존의 몸을 똬리로써 일곱 번 감아올리고 머리 위에 크나큰 후드를 펼치고 섰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대하여 궁극적 행복(parama sukha)이란? 무짤린다 용왕이야기(2014-10-10)’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여기서 후드를 펼치고 있는 용왕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Mucalinda

 

 

아마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악마가 뱀으로 변신하여 부처님의 면전에 섰을 때 매우 무시무시하게 생긴 것으로 묘사 되어 있는데, 커다란 코브라가 후드를 펼치고 겁을 주고 있는 장면이 연상 된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이 번역한 턱은 술을 거르는 채와 같았으며는 적절한 번역이 아니다. 더구나 라는 말은 잘못 사용된 것이다. ‘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각묵스님은 목은 술 거르는 체와 같았고라 하였는데 역시 적절치 않은 번역이다. 뱀에는 목이 보이지 않음에도 목이라 한 것이 어색한 것이다. 그런데 빅쿠보디는 “it’s hood, like a large brewer's sieve”라 하였다. 이는 phao에 대하여 뱀의 후드라 번역한 것은 적절하다고 보여진다.

 

집착의 대상을 피난처로 삼지 않네

 

부처님은 악마가 무서운 뱀의 형상으로 변신한 것을 알아채었다. 그리고 게송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Sappasutta(뱀의 경, S4.6)

 

빠알리어

Yo suññagehāni sevati

seyyā so muni attasaññato,
Vossajja careyya tattha

so patirūpa hi tathāvidhassa ta.

Carakā bahū bheravā bahū

atho asasirisapā bahū,
lomampi na tattha iñjaye

suññāgāragato mahāmuni.


Nabha
phaleyya pahavī caleyya

sabbe ca pāā uda santaseyyu,
Sallampi ce urasi pakappayeyyu

upadhīsu tāa na karonti buddhāti.

upadhīsu tāa na karonti buddhāti

전재성님역

[세존]

홀로 텅 빈 집에서 살면서

스스로를 삼가는 사람은 훌륭하네.

거기서 세상을 버리고 사니

그러한 사람에게 그 삶은 어울리네.

 

오가는 것과 두려운 것이 많고

등에와 독사가 우글거리지만

텅 빈 집에 사는 위대한 해탈자는

머리털 하나 까딱하지 않네.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흔들리고

모든 뭇삶들이 놀랄지라도

깨달은 님들은 가슴에 화살이 겨누어져도

집착의 대상을 피난처로 삼지 않네.”

집착의 대상을 피난처로 삼지 않네

각묵스님역

빈집에 머물면서 자기 제어하는 자

그는 뛰어난 자이면서 진정한 성자로다.

모든 것을 버린 뒤에 거기 머물러야 하나니

그러한 사람에게 그것이 어울리기 때문이다.

 

살아 움직이는 것과 두려운 것이 많고

파리와 파충류도 거기에는 많지만

이러한 빈집에서 머무는 대성자는

머리털 하나조차 미동하지 않도다.

 

하늘이 쪼개지고 땅까지 흔들려

모든 생명들이 두려워서 떨고 있고

가슴에는 창이 날아와 꽂힌다할지라도

부처님들은 재생의 근거를 피난처로 삼지 않도다.

재생의 근거를 피난처로 삼지 않도다

빅쿠보디역

“He who resorts to empty huts for lodging

He is the sage, self-controlled.

He should live there, having relinquished all:

That is proper for one like him.

 

“Though many creatures crawl about,

Many terrors, flies, serpents,

The great sage gone to his empty hut

Stirs not a hair because of them.

 

“Though the sky might split, the earth quake,

And all creatures be stricken with terror,

Though men brandish a dart at their breast,

The enlightened take no shelter in acquisitions.”

no shelter in acquisitions

 

 

 

 

 

등에란 무엇인가?

 

번역에서 서로 다른 단어가 있다. 두 번째 게송에서 asasirisapā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등에와 독사라 하였다.

 

asasirisapāasa+sirisapā의 합성이다. asa‘a gadfly., 牛虻라 하고, sirisapā에 대하여 ‘artisan, , はう, 爬虫類라고 빠알리사전에 설명되어 있다.

 

각묵스님은 asasirisapā에 대하여 파리와 파충류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flies(파리떼), serpents(뱀들)”이라 하였다.

 

전재성님은 asa에 대하여 등에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파리라 하였고, 빅쿠보디는 flies(파리떼)’라 하였다. 어느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까?

 

전재성님은 등에라 하였다. 생소한 말이다. 사전을 찾아 보니 등엣과, 노랑등엣과, 동애등엣과, 재니등엣과 등에 속한 곤충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되어 있다. 사전에 등재 되어 있는 말이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등에는 파리목( Diptera) 등에과( Tabanidae)에 속하는 곤충들 또는 좀더 세분하여 등에속( Tabanus) 곤충들을 말함이라고 설명 되어 있다. 좀더 자세한 설명을 보면

강건한 곤충으로서 집파리처럼 작은 것부터 호박벌처럼 큰 것까지 있으며, 서양에서는 'greenheaded monster'(녹색머리를 한 괴물이라는 뜻)라고도 한다.”라 되어 있다. 사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등에(Tabanus trimaculatas, horse fly)

 

 

생긴 모습이 마치 파리처럼 생겼다. 그런데 백과사전에 따르면 흡혈성도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흡혈성인 암컷은 사람과 가축에 피해를 많이 주는 해충이며, 숙주로부터 하루에 9㎖ 이상되는 피를 빨아먹는 경우도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나 농작물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해충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이 잠잠한 밤이 되어야 농사 일을 할 수 있다라고도 설명이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asa’에 대한 번역어 등에가 생소하긴 하지만 적절하다고 본다. 이는 등에가 흡혈성이 있고 농작물에 해를 끼치는 등 해로운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독사를 뜻하는 sirisapā와 함께 쓰여 asasirisapā라 하였는데, 이는 숲속이나 빈집에서 홀로 사는 수행자에게는 매우 귀찮고 피하고 싶은 곤충이나 파충류인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asa에 대하여 각묵스님이 파리라고 한 것과 빅쿠보디가 flies(파리떼)’라고 번역한 것은 그다지 적절치 않아 보인다. 파리가 해로운 곤충이긴 하지만 모기처럼 피를 빨아 먹으면서 고통을 주는 곤충은 아니기 때문이다.

 

asa(등에)’가 들어간 경을 보면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asa’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그것은 이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경을 소개 해 놓았기 때문이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see asati] a yellow fly, gadfly (orig. “the bite”) Nd2 268 (=pingala-makkhika, same at J.III,263 & SnA 101); usually in combn with other biting or stinging sensations, as °sirisapa Sn.52, & freq. in cpd. asa-makasa-vāt’ātapa-sirisapa-samphassa M.I,10= A.II,117, 143=III,163; A.III,388; V,15; Vin.I,3; Nd2 s. v. (enumd under var. kinds of dukkhā); Vism.31 (here expld as asana-makkhikā or andha-makkhikā). (Page 291)

 

(asa, PCED194)

 

 

등에를 뜻하는asa’라는 말이 초기경 도처에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Sn.52, M.I,10가 눈에 띈다.

 

먼저 Sn.52를 찾아 보았다. 이는 숫따니빠따 52번째 게송이라는 뜻이다. 찾아 보니 무소의 뿔경(Sn1.3)에 있다. ‘asa’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갈증,

그리고 바람과 열기와 쇠파리와 뱀,

이러한 모든 것을 극복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stn52, 전재성님역)

 

 

주석에 따르면 바람과 열기와 쇠파리와 뱀에 대하여 외적인 요인의 장애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내적인 번뇌와 함께 육체적으로 고통을 주는 외부환경을 말한다. 그런데 번역에 쇠파리와 뱀이라 하였다. 이는 asasirisape’의 번역어이다. 상윳따에서는 등에와 독사라 한 것과 비교 된다. 번역의 일관성이 부족해 보인다.

 

asa’가 나오는 경이 맛지마니까야에도 있다. PCED194에서는 M.I,10라 하였다. 찾아 보니 모든 번뇌의 경(M2)에 실려 있다. ‘asa’가 들아간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수용에 의해서 끊어져야 하는 번뇌는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성찰에 의해서 이치에 맞게, 추위를 막고 더위를 막거나 등에, 모기, 바람, 열기, 뱀과의 접촉을 막거나 수치스런 곳을 가리기 위하여 의복을 수용한다. (M2, 전재성님역)

 

 

전재성님 번역의 모든 번뇌의 경을 보면 등에, 모기, 바람, 열기, 라는 말이 나온다. 이들이 피부에 닿으면 해롭기 때문에 귀찮고 성가시고 피하고 싶은 것들이다. 그래서 번뇌가 생겨난다. 번뇌가 생겨 나지 않게 하려면 옷을 입어서 막으면 될 것이다. 따라서 의복을 수용함으로 인하여 성가시게 하는 번뇌를 피해 갈 수 있음을 말한다. 이를 수용에 의해서 끊어져야 하는 번뇌라 한다.

 

경에서 등에라 번역한 것은 asa’에 대한 것이다. 상윳따니까야에서 표현된 등에라는 말과 일치한다. 그러나 숫따니빠따에서 쇠파리라 한 것과는 일치 하지 않는다.

 

초불연에서는asa’에 대하여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초불연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 경에 따르면 날파리, 모기, 바람, 뙤얕볕, 파충류(M2)”라고 번역하였다. ‘asa’에 대하여 날파리라 한 것이다. 상윳따에서는 파리라 한 것과 비교된다.

 

빅쿠보디는 MDB에서 “from contact with gadflies, mosquitoes, wind, the sun, and creeping things,(M2)”라 하였다. ‘asa’에 대하여 ‘gadflies’라 한 것이다. gadflies에 대하여 영어사전을 찾아 보니 등에, 귀찮은 사람, 가축에 모여드는 파리류의 총칭라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이 등에라 번역한 것은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초불연에서 파리’, 또는 날파리라 번역한 것은 매우 좁게 적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오온이 재생의 근거이다

 

세 개로 이루어진 게송에서 가장 핵심 구절이 있다. 그것은 세 번째 게송의 마지막 구절 “upadhīsu tāa na karonti buddhāti”이다. 이 구절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집착의 대상을 피난처로 삼지 않네(S4.6)”라 하였다.

 

집착의 대상을 피난처로 삼지 않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인간이 집착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 즉 오온을 뜻한다. (Srp.I.174)”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그러나 이 개념은 사실상 인간이 삶에서 애착하는 것을 의미한다(1024번 각주)”라 하였다. 모든 존재가 나의 소유, 나의 존재, 나의 자아로 나타낼 때 집착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각묵스님은 재생의 근거를 피난처로 삼지 않도다.(S4.6)”라 하였다. upadhīsu에 대하여 재생의 근거라 번역한 것이다. 이는 전재성님의 집착의 대상이라 번역한 것과 대조가 된다. 그렇다면 왜 재생의 근거가 된다고 번역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각주를 보면 여기서 재생의 근거란 오온으로서 재생의 근거이다(.1 460번 각주)”라 하였다.

 

빠알리어 upadhīsuupādhi의 형태로서 'substratum of existence'로 설명된다. ‘존재의 기층이라는 뜻이다. 빅쿠보디는 shelter in acquisitions’라 하였다. 직역하면 획득한 것들 내에서 천막라는 뜻이다. upadhī에 대한 또다른 사전적 의미는 ‘substratum of re-birth’이다. ‘재생의 기반이라는 뜻이다. 각묵스님이 번역한 것과 유사하다.

 

우빠디(upādhi) 게송

 

빠알리어 우빠디(upādhi)가 들어 있는 게송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기뻐함의 경(Nandati sutta, S1.12)’이 그것이다. 이에 대하여 소유는 기쁨인가 슬픔인가? 윤회의 땔감 우빠디(upadhi) 기뻐함의 경(S1.12)(2013-10-12)’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이 경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세존]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아들로 슬퍼하고,

외양간 주인은 소 때문에 슬퍼하듯이

사람의 슬픔은 집착의 대상에서 생겨나니

집착하지 않는 자는 기뻐할 것도 없으리.(S1.12,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집착의 대상이 아들이나 소임을 알 수 있다. 집착함으로 인하여 슬픔이 생겨난다는 가르침이다. 이때 집착의 대상이라는 말은 우빠디를 번역한 것이다. 우빠디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재생의 근거(소유물)로 옮긴 원어는 upadhi이다. 이 단어는 upa+dha(to put)에서 파생된 명사로 문자적으로는 그 위에 무엇이 놓여진을 의미하며 그래서 삶에 필요한 토대나 소지품이나 설비 등을 뜻한다. 이것은 외적인 입장과 내적인 입장에서 살펴볼 수 있다.

 

외적인 입장에서(objectively) 보자면 얻어진 것들을 뜻하는데 자신의 재산이나 소유물을 뜻한다. 내적인 입장에서(subjectively) 보자면 갈애가 생겨서 소유하려는 행위를 말한다. 이것은 다시 태어남(재생)의 근거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빠디(upadhi)는 우빠다나(취착, upadana)와 유사하다. 물론 이 두 단어의 어원은 다르다. 이 두 입장을 고려해서 역자는 재생의 근거(소유물)

옮겼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재생의 근거로 정착시키고 있다.

 

(초불연 상윳따 71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은 우빠디에 대하여 재생의 근거라 하였다. 그리고 집착의 대상으로서 외적대상과 내적대상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외적인 것은 재산과 같은 소유물이고, 내적인 것은 갈애에 따라 소유하려는 행위라 하였다.

 

그런데 이 각주는 주석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초불연의 견해가 실린 것이다. 그러나 빅쿠보디의 견해와 내용이 같다.

 

왜 악마는 뱀으로 변신하여 후드를 쳤을까?

 

악마는 왜 무서운 뱀으로 변신하여 부처님 면전에 섰을까? 더구나 빅쿠보디의 번역에 따르면 마치 코브라가 천막을 펼치듯이 후드까지 펼쳤다고 한다. 하지만 전재성님이나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또는 라고만 되어 있을 뿐 상황이 제대로 설명이 되어 있지 않다. 각주에서도 설명이 없다 보니 악마와 대면한 모습이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빅쿠보디의 영역 후두라는 말에서 힌트를 찾았다. 무짤란다 용왕이야기에서  용왕이 부처님을 비바람으로 부터 보호 해 주기 위하여 부처님의 몸을 일곱번 감싸 후두를 쳤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빅쿠보디가 번역한 게송에 결정적인 힌트가 나온다. 그 말은 세 번째 게송의 마지막 구절에 The enlightened take no shelter in acquisitions”라는 말이다. 이를 직역하면 깨달은 자는 획득한 것들 내에서 그 어떤 천막도 가지지 않았다가 될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지금 악마가 뱀으로 변하여 마치 코브라가 머리를 치켜 들고 커다란 후드를 펼친 형상을 하고 있다. 그것도 천둥과 번개가 사납게 치는 밤이다. 이럴 때 코브라형상의 커다란 후드 안으로 들어 가면 비바람으로부터 보호 될 것이다.

 

코브라형상의 후드로 들어 간다는 것은 오온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이는 재생의 원인이 된다. 십이연기에서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라는 정형구가 이를 잘 말해 준다.

 

집착은 업으로서 존재를 유발하고 만다. 만일 무시무시한 코브라 형상의 뱀이 커다란 후드를 펼쳤을 때, 번개와 천둥, 비바람이 무섭다고 하여 안전한 천막안으로 들어 간다면 세세생생 윤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은 자들은 이를 악마의 유혹으로 알고 그 천막으로 들어 가지 않는다. 그 천막은 재생의 원인이 되는 기반이고, 재생의 원인이 되는 피난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 것이다.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흔들리고

모든 뭇삶들이 놀랄지라도

깨달은 님들은 가슴에 화살이 겨누어져도

집착의 대상을 피난처로 삼지 않네.’(S4.6)

 

 

 

2015-01-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