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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까야나(ekayana), ‘하나로 통하는 길’인가 ‘유일한 길’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2. 20. 17:44

 

 

에까야나(ekayana), ‘하나로 통하는 길인가 유일한 길인가?

 

 

 

영화를 볼 때

 

종종 영화를 본다. 영화관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TV에서 본다. 요즘 EBS에서는 지난 시절 유명한 외화 뿐만 아니라 한국영화도 특선하여 보여 준다. 고화질로 서비스 되는 HDTV로 영화를 보면 볼만 하다.

 

영화를 볼 때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 있다. 영화속의 배경도 함께 보는 것이다. 사무실이 나오는 장면이라면 그 때 당시 분위기도 파악 하는 것이다. 60년대 한국영화라면 사무실에 전화 한대가 고작이다. 오늘날 각자 책상에 PC가 갖추어져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따진다면 원시적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 때 당시 사람들의 생각도 원시적이었을까?

 

흘러간 영화 중에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면 오늘날 드라마를 보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보통신의 측면에서 본다면 원시적이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있어서 실시간으로 정보검색이 가능하고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하고 스마트폰으로 채팅을 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영화속의 연인들은 약속장소를 정하기 위하여 공중전화를 활용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 때 당시의 사람들이 오늘날 사람들보다 생각하는 것 등이 원시인수준이었을까?

 

과학의 잣대로

 

최근 과학을 전공하는 어느 교수의 칼럼이 교계신문에 실려 있다. 칼럼을 올릴 때 마다 반응이 뜨겁다. 그래서 넷상에서는 댓글전쟁이 한창이다. 그런데 교수의 글을 보면 과학을 대단히 강조 한다.

 

그 교수에 따르면 과학의 시대는 문명의 시대와 같은 것으로 본다. 그래서 이제 과학의 발달로 뇌와 의식의 비밀이 풀리고 있다. 종교인들이 민망할 정도로 그 비밀이 마구 파헤쳐지고 있다. 임사체험, 유체이탈, 황홀경, 비전, 그리고 신비적 합일 등이 인정사정없이 해체된다.”라고 하였다. 마치 과학만능시대를 보는 것 같다.

 

이렇게 과학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 26백년 전 부처님이 말씀을 기록한 초기경전은 모두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의 시대에 도저히 검증될 수 없는 악마에 대한 이야기, 하느님(범천)에 대한 이야기, 제석천에 대한 이야기 등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의 눈으로 본다면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이야기는 누군가 꾸며 낸 환망공상이 될 것이다.

 

과학의 잣대로 이 세상을 바라 보았을 때 초기경전에 의존하여 삶을 살아 간다면 매우 어리석은 행위라 볼 수 있다. 보이지도 않은 것, 있지도 않은 것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는 과학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천년전 미개한 원시인 수준의 사람들이 과학을 몰라서 꾸며낸 이야기로 보는 것과 같다. 과연 수천년전의 사람들의 사고는 오늘날 현대인들의 사고와 달리 원시적이었을까?

 

초기경전을 접하고

 

초기경전을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난다. 처음에는 초기경전이 있는 줄도 몰랐다. 우리나라 불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대승경전을 통하여 불교를 접하였다. 그런데 대승경전을 보면 현실의 내용과는 달랐다.

 

대승경전의 어느 구절을 보면 마치 SF판타지 소설을 접하는 듯 하였다. 이렇게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을 접하다 보니 대승경전을 불신하게 되었다. 누군가 소설을 쓰듯이 꾸며낸 이야기처럼 보였다. 사실 그랬다.

 

대승경전은 필요에 따라 대승논사들이 쓴 것이다. 다만 책을 출간할 때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 하는데, 이는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 가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더구나 대승경전을 보면 대단히 장황하다. 그래서일까 법정스님이 번역한 한역화엄경 해제글에 따르면 “사실 80 권 화엄경을 읽어내기란 어지간한 인내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라 하였다. 그리고 “비현실적 묘사에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 놓은 장광설”이라 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보통불자가 화엄경과 같은 대승경전을 읽어 내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러다 초기경전을 접하였다.

 

초기경전은 대승경전과 달랐다. 대승경전에서는 부처님 이야기가 별로 없으나 초기경전에서는 주로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현실에서 살아 가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이다.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 우정에 대한 이야기, 사업에 대한 이야기 등 현실의 내용과 동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었다. 대승경전에서는 부처님이 보이지 않았지만 초기경전에서는 부처님이 보였다.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처럼

 

초기경전에도 대승경전에서 보는 것과 같이 황당한 이야기도 종종 보인다. 악마, 하느님(브라흐마), 제석천 등이 등장한다. 그러나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등장하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에 초월적 존재가 등장한다고 하여도 그다지 거부감이 없다. 그저 그러려니하고 받아 들인다. 그럼에도 일부 불자들은 초월적 존재나 신비한 이야기가 나오면 무조건 부정한다. 부처님은 현세적 이익에 대한 가르침을 전달하셨지 내세와 윤회에 대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본질이 아니라고 한다. 특히 근본불교를 한다는 스님이나 교수의 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사념처 등만 모아서 한권으로 된 경전을 따로 만들자고 주장한다. 마치 바이블처럼 한권으로 된 초기경전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아마 초월적 존재나 신비한 이야기는 모조리 빠질 것이다. 마치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처럼 될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제1권에는

 

과학을 신봉하는 자나 단멸론적 근본불교주의자 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상윳따니까야 제1권에는 초월적이고 신비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남방 테라와다 불교국가에서는 제1권이 가장 인기 있다고 한다.

 

상윳따니까 1권에는 상윳따니까야 전체를 마치 한권으로 요약해 놓은 듯 하다. 또 게송이 매우 풍부하여 법구경못지 않다. 이렇게 본다면 상윳따니까야 1권은 상윳따니까 전체를 요약해 놓은 것이라 볼 수 있고, 더구나 게송이 풍부하여서 부처님의 말씀 전체가 잘 요약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상윳따니까야 제1권에  마라상윳따(S4)가 있다. 이를 성전협에서는 악마의 모음이라 하였고, 초불연에서는 마라상윳따라 하였다.

 

부처님과 악마의 대화

 

마라상윳따에서는 주로 악마와 부처님, 악마와 부처님의 제자들과의 대화가 등장한다. 가장 먼저 나오는 이야기는 부처님이 막 깨달음을 얻었을 때이다. ‘고행의 경(S4.1)’에 따르면 이와 같이 들었다. 한 때 세존 께서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직후 우리벨라 마을의 네란자라 강가에 있는 아자빨라 보리수 아래에 계셨다.(S4.1)”라고 시작 된다.

 

아자빨라보리수(ajapālanigrodhamūle)

 

여기서 아자빨라보리수(ajapālanigrodhamūle)’가 등장한다. 이 나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Ajapālanigrodhamūle: 부처님이 최상의 올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은 장소, 아자빨라(ajapāla)는 염소치기 또는 암송하지 못함을 뜻 하는데, 이 나무 밑은 염소치기들이 쉬곤 했기 때문에, 나이 든 바라문이 베다를 암송하지 못하게 되자 이 나무 밑에서 거처를 마련하고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니그로다는 뱅골보리수로 한역에서는 용수 또는 니구율이라고 한다.

 

(상윳따1 985번 각주, 전재성님)

 

 

각주에 따르면 ajapālanigrodha‘ajapāla(염소치기)+nigrodha(뱅골보리수)’의 뜻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초불연에서는 염소치기의 니그로다나무라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the Goatherd's Banyan Tree’라 하였다. ‘염소치기의 반얀나무라는 뜻이다.

 

반얀나무(Banyan Tree)?

 

빅쿠보디는 nigrodha에 대하여 반얀나무(Banyan Tree)’라고 구체적으로 나무명을 표현 하였다. 반얀나무는 어떻게 생겼을까? 검색해 보니 반얀나무는 수간이 가장 큰 나무라 한다. 한 나무에서 가지가 뻗어 나와 큰 숲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또 이 나무의 특징은 가지에서 뿌리가 내려 땅에 닿으면 그대로 기둥 뿌리가 되어 나뭇가지들을 스스로 받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반얀나무(Banyan Tree)

 

 

 

아자빨라니그로다보리수가 등장하는 경

 

부처님의 깨달음과 관련하여 아자빨라니그로다보리수는 초기경전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율장대품에서는 아자빨라니그로다 이야기라 하여 오만한 바라문이 등장한다. 또 율장대품과 상윳따니까야, 맛지마니까야, 디가니까야 등에서 사함빠띠 브라흐마와 관련하여 아자빨라니그로다 나무가 등장한다. 그리고 마라상윳따에서 등장한다. 아자빨라니그로다 나무가 등장하는 경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등장인물

 

1

율장대품

아자빨라니그로다이야기

거만한 바라문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시고 두 번째 해탈의 지복을 누릴 때

2

상윳따니까야

고행의 경(S4.1)

악마 빠삐만

부처님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직후

3

상윳따니까야

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S6.1)

브라흐마 사함빠띠

부처님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직후

 

 

 

등장인물을 보면 각각 다르다. 거만한 바라문이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흥흥거리는 오만한 바라문과 아자빨라니그로다 나무이야기(2014-10-05)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S6.1)과 하느님의 경(S47.18)

 

아자빨라니그로다 보리수가 관련 이야기중에 브라흐마 사함빠띠가 등장한다. 그것이 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S6.1)’이다.

 

그런데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아자빨라니그로다보리수에 대하여 한 곳이 더 나오는 경이 있다고 하였다. 상윳따니까야 하느님의 경(Brahmasutta, S47.18)’을 말한다. 이 경에서 사함빠띠는 사념처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이는 S6.1 에서 진리를 펼치시기를 설해 달라는 것과 대조적이다.

 

S6.1에서는 사함빠띠가 부처님에게 오염된 자들이 생각해낸/ 부정한 가르침이 일찍이 마가다 인들에게 퍼져 있으니,/ 불사의 문을 열어 젖히소서!”라고 하였다. 그리고 게송의 말미에서는 세존께서는 가르침을 설하여 주소서라고 말한다. 여기서 가르침(dhamma)’은 어떤 것일까?

 

네 가지 새김의 토대(사념처)

 

S6.1에서는 사함빠띠가 부처님에게 가르침을 설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어떤 가르침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S47.18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함빠띠의 말로 알 수 있다.

 

 

[사함빠띠]

세상의 존귀한 님이여, 그렇습니다.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이여, 그렇습니다. 이것이 뭇삶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게 하고 괴로움과 근심을 소멸시키고 바른 방도를 구현하게 하고 열반을 실현시키기 위한 하나로 통하는 길 곧, 네 가지 새김의 토대입니다. 네 가지란 무엇입니까? 세상에 수행승이….”

 

(하느님의 경- Brahmasutta, 상윳따니까야 S47.18,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직후 홀로 고요히 명상하고 계실 때 생각이 떠 올랐는데 그것은 사념처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괴로움과 근심을 소멸 시키는 방도와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길이 있다고 하였다.

 

S47.18에서는 네 가지 진리(사성제)’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서 사념처를 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생각을 읽은 하느님(브라흐마) 사하빠띠가 부처님 면전에 마치 힘 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사이에나타났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이 생각하신 바를 말하고 있는 장면이다.

 

에까야나(ekayana), ‘하나로 통하는 길인가 유일한 길인가?

 

이렇게 본다면 사념처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괴로움을 소멸하고 열반을 실현 하기 위하여 팔정도를 실천한다고 하였는데 수행으로 관점으로 보았을 때 사념처가 매우 중요한 방법임을 알 수 있다.

 

전재성님은 열반을 실현시키기 위한 하나로 통하는 길이라 하여 사념처에 대하여 하나로 통하는 길이라 하였다. 그러나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유일한 길이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the one-way path’라 하여 한 방향의 길이라 번역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빠알리어 에까야나(ekayana)’하나로 통하는 길’, ‘유일한 길’, ‘the one-way path(편도길)’등으로 번역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맛지마니까야 염처경(M10)’에서는 에까야나(ekayan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하나의 길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ekayana magga에 대하여 행선지로 이르는 가장 가까운 길, 지름길을 뜻한다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열반으로 이르는 길은 사념처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길은 37조도품으로 설명되는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수단 즉,  팔정도, 칠각지, 오근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은 여러 갈래의 길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최단 거리 길이 바로 사념처라는 것이다.

 

에까야나(ekayana)’에 대하여  하나의 길, 하나로 통하는 길의 의미가 있다.그러나 초불연에서는 유일한 길이라 하였다. 이는 에까(eka)라는 말이 숫자 ‘One’을 뜻하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하였을지 모른다. 마치 마치 유일신교에서 하나를 뜻하는 하나가 또한 전체를 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라 한 것과 유사해 보인다. 그런데 유일신교에서 하나님은 유일신이라는 것이다.

 

 에까야나(ekayana)’에 대하여 유일한 길이라고 한정해 버리면 다른 깨달음의 수단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37조도품에  따르면 깨달음의 수단은 사념처 뿐만 아니라 사정근,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 등이 있다. 그런데 사념처에 대하여 오직 하나의 유일한 길이라고 한정해 버리면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이런 모순이 있어서인지 에까야나(ekayan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하나로 통하는 길또는 하나의 길로 번역한 것으로 본다.

 

수행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괴로움을 소멸하여 열반에 이르게 하게 위하여 수행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사념처가 가장 빠른 길이다. 그래서 S47.18에서는 사함빠띠가 부처님의 생각을 마음으로 알아차리며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역(S47.18)

 

빠알리어

Ekāyana jātikhayantadassī

magga pajānāti hitānukampī

Etena maggena atarisu pubbe

tarissanti ye ca taranti oghanti.

Ekāyana

전재성님역

[싸함빠띠]

태어남을 소멸시켜 그 궁극을 보는 님,

뭇삶에 대한 이익과 애민을 갖춘 님께서는

하나로 통하는 길을 알아 그 길을 따라

거센흐름을 건넜고 건널 것이고 지금도 건너고 있네.

하나로 통하는 길

각묵스님역

태어남과 소멸을 보시고, 중생의 이익을 위하며,

연민심을 가진 분께서는 유일한 이 길을 아신다.

그들은 이전에도 이 길을 따라 폭류를 건넜고,

미래에도 건널 것이며, 현재에도 건너고 있다.”

유일한 이 길

빅쿠보디역

“The seer of the destruction of birth,

Compassionate, knows the one-way path

By which in the past they crossed the flood,

By which they will cross and cross over now.”

the one-way path

 

 

 

 

사함빠띠가 건넜고 건널 것이고 지금도 건너고 있네라고 하였다. 여기서 건넜고는 부처님을 뜻한다. ‘건널 것이고의 뜻은 부처님이 아직 가르침을 펼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사념처수행으로 괴로움을 소멸하여 열반에 도달할 수행승이 생겨 날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념처 수행은 열반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에까야나(ekāyana)’라 하였을 것이다.

 

빠빠만이 부처님의 면전에서

 

초기경전을 보면 초월적 존재들은 마음을 알아 본다. 마라 역시 마음을 알아 본다. 그래서 경에서는 마침 악마 빠삐만이 세존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마음으로 채고는 세존께 계신 곳으로 왔다.(S4.1)”라고 표현 되어 있다.

 

악마 빠삐만은 부처님이 깨달은 것을 알자 부처님 면전에 나타난다. 그리고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한다.

 

 

 

   역(S4.1)

 

빠알리어

Tapokammā apakkamma

yena sujjhanti mānavā,
Asuddho maññasi suddho

suddhimaggamaparaddhoti.

Tapokammā

전재성님역

[빠삐만]

젊은 학인들은 청정함으로 이끄는

고행의 실천을 버리고

청정한 삶의 길에서 빗나가

부정한 것을 청정하다 여기네.”

젊은 학인들

각묵스님역

바라문 학도들이 청정해지는

그런 고행으로부터 일탈하여

청정하지 못하면서도 청정하다 생각하니

그대 이제 청정한 도를 범하였도다.”

바라문 학도들

빅쿠보디역

“Having deviated from the austere practice

By which men purify themselves,

Being impure, you think you're pure:

You have missed the path to purity."

the austere practice

 

 

 

 

빠삐만(Pāpimān)에 대하여

 

빠알리어 마라에 대하여 악마라 하였다. 그런데 마라의 또다른 이름이 빠삐만이다. 이 빠삐만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Pāpimān : 악마 마라의 별명이 빠삐만이다. 악마는 모든 경우에 부처님과는 다른입장에 선다. 악마는 일반적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유혹하는 자의 입장에 있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엄격한 고행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두 가지 극단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가깝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편 악마는 다른 종교에서의 악마와는 달리 대조적인 견해를 드러내서 깨달음의 길을 분명히 하는 데 이용된다. 철학적으로 악마는 번뇌, 업의 형성력, 존재의 다발 등을 상징한다.

 

Prj.I.44에 따르면, 악마 마라는 자재천(Vasavatthi)으로 하늘아들 다마리까(Damarika)라고 불리며,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하늘나라에서 그 최고천인 남이 만든 것을 지배하는 신들의 하늘나라(타화자재천)에 살면서 수행자들이 감각적 쾌락의 욕계를 벗어나는 것을 방해하는 자이다.

 

(상윳따1 987번 각주, 전재성님)

 

 

각주를 보면 악마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초기경에 등장하는 악마는 항상 부처님의 견해와 반대로 나타난다. 게송에서 악마가 고행을 강조하는 것은 것 부처님의 중도사상과 반대의 경우에 해당된다.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S56.11)”라 하였다. 극단적 쾌락의 추구나 극단적 고행이 무익하고 무의미하다고 분명히 선언한 것이다. 그럼에도 빠삐만은 고행을 통하여 청정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두 극단은 서로 통한다

 

게송에서 각묵스님은 그대 이제 청정한 도를 범하였도다라고 번역 하였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마라는 대부분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부처님이나 비구들을 꼬드기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고행을 버렸다고 부처님을 비난하고 있다. (초불연 상윳따1 442번 각주)”라고 각주 하였다. 주석을 참고함 없이 각묵스님의 개인적인 견해이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There is a delicate irony here in Mara the Tempter, usually the suave proponent of sensual indulgence, now recommending strict asceticism. This confirms the old maxim that the extremes are actually closer to each other than either is to the mean. I read pada d with Se and Eel as suddhimaggam

aparaddho as against Be and Ee2 suddhimagga aparaddho.

 

(CDB 262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 역시 주석의 인용 없이 개인적 견해를 말하였다. 괘락과 고행이라는 양극단은 수단으로서 보았을 때 서로 닮았다. 이렇게 본다면 쾌락을 유혹하는 마라가 고행을 운운하는 것이 모순 같아 보이지않는다. 수단이 같기 때문이다. 

 

악마 빠삐만임을 알아 보고

 

초기경을 보면 악마 빠삐만은 수행자에게 접근하여 타락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존자들은 젊은 나이로 아주 검은 머리를 하고 있고 꽃다운 청춘을 갖춘 인생의 초년에 감각적 쾌락의 맛을 모르고 출가했습니다. 존자들은 먼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S4.21)”라고 유혹한다.

 

이렇게 감각적 쾌락으로 대표되는 악마가 고행을 말한다. 그러나 양극단은 모두 저열하고 천박한 것이기 때문에 쾌락과 극단은 서로 통한다. 이렇게 본다면 악마 빠삐만은 저열하고 천박하고 비속함의 대명사와 같다. 그런 악마를 부처님은 알아 보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물리쳤다.

 

 

 

   역(S4.1)

 

빠알리어

Anatthasahita ñatvā

ya kiñci amara tapa,
Sabba
natthāvaha hoti

piyāritta va dhammani.
Sīla
samādhi paññañca 5

magga bodhāya bhāvaya,
Pattosmi parama
suddhi

nihato tvamasi antakāti.

 

antakā

전재성님역

[세존]

불사(不死)를 위한

어떠한 고행도 소용이 없고

마른 땅 위에 배의 노나 키처럼

모든 고행이 쓸모없음을 아니,

 

계행과 삼매와 지혜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닦아서

나는 위없는 청정한 삶에 이르렀으니,

악마여, 그대가 패했네.”

악마

각묵스님역

불사(不死) 위해 행한 고행이 그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아무 이익 주지 못함 이노라.

맨땅 위의 노와 키처럼

그 모두는 참으로 무익한 것이라.

 

깨달음을 위해 계행과 삼매와

통찰지로 이루어진 도를 닦아서

나는 이제 궁극적인 청정을 증득했노라.

끝장을 내는 자여, 그대가 패했도다.”

끝장을 내는 자

빅쿠보디역

“Having known as useless any austerity

Aimed at the immortal state,

That all such penances are futile

Like oars and rudder on dry land

 

By developing the path to enlightenment

Virtue, concentration, and wisdom-

I have attained supreme purity:

You're defeated, End-maker!”

End-maker

 

 

 

 

 

2014-12-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