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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는 어디서 머무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2. 25. 18:06

 

 

집에서 집없는 출가한 자는 어디서 머무는가?

 

 

 

그대는 인간입니까?”

 

요즘 TV를 보면 케이블 채널에서 괴기한 모습의 외계인을 종종 볼 수 있다. ‘맨인블랙류의 영화에서 외계인은 변신에 매우 능하다. 때로는 사람모습으로 때로는 파츙류의 모습으로 자유자재로 몸을 바꾼다. 중국영화 이연걸의 백사대전에서도 요괴가 커다란 백색의 뱀의 모습으로 바꾼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요괴도 몸을 자유자재로 바꾼다. 초기경전에서도 몸을 바꾸는 이야기가 종종 있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용왕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구족계를 받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곧바로 탄로 나고 만다. 경에 따르면 그 용은 수행승이 나가면 안심하고 잠들었다. 그러자 온통 승원이 한 마리의 뱀으로 가득 찼다. 칭문으로 똬리가 불쑥 튀어 나왔다. (Vin.I.86-87)”라고 되어 있다. 마치 이연걸의 백사대전 모티브가 된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인간 아닌 것이 출가하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금하였다. 그 사건을 계기로 이후 출가자의 조건을 엄격하게 정하였다. 그래서 구족계를 받고자 원하는 자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은 필수적이었다.

 

 

1) 그대에게 나병, 종기, 습진, 폐병, 간질과 같은 질병이 있습니까?

2) 그대는 인간입니까?

3) 그대는 남자입니까?

4) 그대는 자유민입니까?

5) 부채가 없는 자입니까?

6) 왕의 신하가 아닙니까?

7) 부모의 허용을 받았습니까?

8) 이십 세가 되었습니까?

9) 발우와 옷을 갖추었습니까?

10) 이름이 무엇입니까?

11) 친교사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구족계 갈마, 율장대품 Vin76)

 

 

위와 같은 열 한가지 조건은 초기 승단에서 구족계를 받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다. 모두 필요에 따라 그때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중 두 번째 그대는 인간입니까?”라는 구절은 용왕사건에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구족계를 받으려면 자신이 인간임을 선언하여야 했다.

 

귀신이 나타날 때

 

요괴들은 변신에 능하다. 그런데 초기경전에서 마라 역시 변신에 능하다. 때로는 매혹적인 모습으로 때로는 추한 모습으로 나타나 시험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가 코끼리왕 모습의 경(S4.2)’아름다움의 경(S4.3)’에 있다.

 

부처님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직후 네란자라 강가에 있는 아자빨라보수리수 아래에 계실 때이다. 이때의 악마가 나타난다. 악마가 나타나기 전의 상황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 때 세존께서는 밤의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바깥에 앉아 계셨는데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S4.2)”라고 표현 되어 있다.

 

귀신이 나타날 때 어둑한 공동묘지에 그것도 비가 부슬부슬 내릴 때 나타난다고 하듯이, 경에서도 악마가 나타날 때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비가 내릴 때 나타나는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계속내리는 비인가 부슬비인가?

 

이부분과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그때 세존께서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노지에 앉아 계셨고 비가 가끔 부슬부슬 내리기도 하였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전재성님은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라 하였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Devo ekameka phusāyati.: Krs.I.129에서는 ‘ekamekask. eka eka를 상기시켜 ‘drop by drop’의 뜻으로 해석했다. ‘phusita’물방울을 의미한다. Cdb.196에서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상윳따1 996번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Krs.I.129에 실려 있는 견해를 따른 것으로 되어 있다.그래서 ‘ekameka에 대하여 ‘drop by drop’의 뜻으로 보아 우리말로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cdb에서 빅쿠보디는 “it was drizzling”이라 하였다. drizzle의 뜻은 이슬비, 보슬비의 의미이다. 그래서 drizzling이라 하면 비같지 않은 보슬비가 부슬부슬 내린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Devo ca ekameka phusāyati. I  understand  this  idiom (which  recurs  at 6:13 and  7:22)  to mean that  rain was falling drop by drop, not that it was falling  continuously (the meaning ascribed to it by CPD). It would hardly seem sensible for the Buddha to  sit out in the open if rain was falling heavily.

 

Spk: He was sitting there reviewing his practice of striving in order to provide a model for clansmen in the future, who would strive in emulation of the Teacher.

 

(cdb 266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에 따르면 비가 계속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그 이유로서 비가 계속 내리면 노지(the open)에서 앉아 있기 힘들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오픈되어 있는 노지에 있지 않았다. 경에 따르면 분명히 아자빨라보리수 나무아래에 있었다고 하였다.

 

노지에 앉아 계셨다고?

 

아자빨라보리수는 매우 큰 나무 이었을 것이다. 비가 왔을 때 나무 아래로 가면 비가 덜 맞듯이 커다란 나무아래에 있으면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안심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자빨라나무 아래에 있는 부처님은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비를 거의 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그 때 세존께서는 밤의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바깥에 앉아 계셨는데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S4.2)”라고 번역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반면 각묵스님은 그때 세존께서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노지에 앉아 계셨고 비가 가끔 부슬부슬 내리기도 하였다라 하여 빅쿠보디와 유사하게 번역하였다. 더구나 각묵스님는 노지에 앉아 계셨고라 하였는데 이는 빅쿠보디가 “was  sitting out in the open air”라 표현과 같은 내용이다.

 

노지와 바깥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한 빠알리어를 보면 “Tena kho pana samayena bhagavā rattandhakāratimisāya ajjhokāse1 nisinno hoti. Devo ca ekameka phusāyati.”로 되어 있. 왜 이렇게 번역차이가 나는 것일까? 표로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어

Tena kho pana samayena bhagavā rattandhakāratimisāya ajjhokāse1 nisinno hoti. Devo ca ekameka phusāyati.

ajjhokāsa

전재성님역

그 때 세존께서는 밤의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바깥에 앉아 계셨는데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바깥에 앉아

각묵스님역

그때 세존께서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노지에 앉아 계셨고 비가 가끔 부슬부슬 내리기도 하였다.

노지에 앉아 계셨고

빅쿠보디역

Now on that occasion the Blessed

One  was  sitting out in the open air in the thick darkness of the

night while it was drizzling.

was  sitting out in the open air

 

 

 

가장 큰 차이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부처님이 비를 맞으며 노지에 앉아 있었느냐는 것이고, 또 하나는 비가 계속 내리는 비인지 부슬비인지에 대한 것이다. 먼저 노지에 앉아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출가자는 어디서 머무는가?

 

부처님은 출가 하였다. 출가한 것에 대하여 초기경에 따르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라고 정형화 되어 있다. 그렇다면 출가하게 되면 어디서 머물까? 이에 대하여 숫따니빠따 출가의 경(Sn3.1)에 따르면 대왕이시여, 그 수행자는 판다바산 앞쪽에 있는 굴속에 호랑이나 황소처럼, 그리고 사자처럼 앉아 있습니다.(stn416)”라는 표현이 있다. 부처님은 동굴에 머물렀음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초기경에 따르면 별도의 거처가 없는 한 에서 머문다고 되어 있다.

 

부처님이 출가하여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초기경에 따르면 알랄라 깔라마로부터 아무것도 없는 세계(무소유처)’를 배웠고, 웃따까 라마뿟따로부터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비상비비상처)’에 대하여 배웠다. 그러나 두 스승으로부터 떠났다. 이유는 그런 세계에 머무는 한 그의 가르침은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소멸, 적정, 지혜,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지 못한다.(M26)”라고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승으로부터 떠나 홀로 수행을 하였다. 그 장소가 우루벨라 세나니가마이다.

 

세나니가마 마을에 대하여 경에서는 거기서 나는 고요한 우거진 숲이 있고 아름다운 둑에 싸여 맑게 흐르는 강물이 있고, 주변에 탁발할 수 있는 마을이 있는, 마음에 드는 지역을 발견했다.(M26)”라고 기록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이 출가하여 깨달음을 이룰 때 까지는 숲에서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매우 우거진 숲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비를 맞아 가며 노천에 앉아 있었을 리가 없다.

 

하늘을 이불삼아?

 

노천과 관련된 단어가 ‘ajjhokāsa’이다.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the open air. 露地, 野天라 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빅쿠보디는 ‘in the open air’라 하였다. 각묵스님도 노지에라 하였다. 이는 ‘ajjhokāsa’에 대하여 직역한 것이다.

 

부처님이 노지에 있었던 것은 틀림 없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가 노지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아무 가림막도 없는 들판에서 머물렀다고 볼 수 있을까?

 

요즘 노숙자 또는 노숙인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길거리에서 자는 사람을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하늘을 이불 삼아길거리에서 자는 것일까? 대부분의 노숙자들은 지하철 역에서 잔다. 공원에서 자더라도 나무 아래 의자 등을 의지한다. 이렇게 본다면 노숙자는 길거리에 자는 자라기 보다 뚜렷한 거처가 없는 자를 뜻한다.

 

부처님당시 출가자들은 특별한 거처가 없었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들이 거처를 가지고 있다면 입가(入家)’가 될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에 따르면 출가자들은 유행을 하였는데 머무는 장소는 주로 이었다. 그것도 마을과 가까운 숲이었다. 탁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이었다. 출가를 한 후에 홀로 수행장소로서 선택한 곳이 네란자라 강가에 있는 세나니가마 마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곳은 황무지와 같은 노지가 아니라 숲이 우거진 곳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비가 왔을 때 나무 아래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우기에 비가 내리면

 

아열대지방은 우기와 건기가 명확하다. 그래서 비가 오면 계속 내리는 비이다. 북유럽과 같이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경에서 언급한 비는 계속 내리는 비(ekameka phusāyati: falling drop by drop)’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빅쿠보디는 ‘drizzling’이라 하여 이슬비또는 부슬비개념으로 보았다. 빅쿠보디의 견해를 중시하는 초불연에도 부슬부슬 내리기도라 하여 역시 부슬비 개념으로 보았다.

 

하지만 우기와 건기가 뚜렷한 나라에서 부슬비 개념은 맞지 않는다. 더구나 부처님이 노지에서 부슬비를 맞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런 해석 역시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우기에 비가 내리면 계속 내리는 비일 것이다. 비가 내리면 비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어느 누가 내리는 비를 계속 맞고 있을까? 아무리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라도 내리는 비는 피하고 볼 것이다. 그래서 숲이 우거진 곳으로 갔을 것이다.

 

커다란 나무는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밖으로 보내기 때문에 나무 아래에 있으면 비를 맞지 않을 것이다. 비를 맞더라도 덜 맞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이 바깥에 앉아 계셨는데라는 번역은 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는 뜻이 된다.

 

 

 

 

아자빨라보리수(ajapālanigrodhamūle: Banyan Tree)

 

 

 

그럼에도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은 마치 노지에서 비를 다 맞고 있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그것도 계속 내리는 비가 아니라 마치 북유럽에서 보는 것처럼 비가 내리는지 마는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약한 이슬비 또는 부슬비 개념으로 본 것이다.

 

비가 내리는 칠흑 같은 밤에 악마가

 

비가 내리는 칠흑 같은 밤에 악마가 나타난다. 그런데 악마는 변신에 능해서 때로는 매우 추한 모습으로 때로는 매우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경에서는 코끼리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마침 악마 빠삐만이 머리털이 치솟을 정도의 두려움을 일으키려고 큰 코끼리왕의 모습을 하고…”라 되어 있다. 그런 코끼리왕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묘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Seyyathāpi nāma mahāariṭṭhako mai, evamassa sīsa hoti. Seyyathāpi nāma suddha rūpiya, evamassa dantā honti. Seyyathāpi nāma nagalīsā2, evamassa soṇḍo hoti.

 

예를 들면 그의 머리는 커다란 검은 돌덩어리와 같았고 그의 이빨은 깨끗한 은과 같았으며 그의 코는 커다란 쟁기의 손잡이와 같았다.

 

(Nāgasutta-코끼리왕의 모습, 상윳따니까야 S4.2, 전재성님역)

 

 

머리와 이빨과 코에 대한 묘사이다. 글로 표현된 것만 가지고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동석(凍石)에 대하여

 

커다란 검은 돌덩어리 같다(mahāariṭṭhako mai)’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주석을 인용하여 검은 돌(kalako panaso)’이라 하였다. 머리통이 검은 바위처럼 크다는 뜻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동석(凍石)덩어리 같았고라 하였다. 동석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자로 凍石이라 하는데 어떤 뜻일까? 사전을 찾아 보았다.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광업용어로서 질이 좋고 모양이 고운 활석(滑石)의 하나라 설명 되어 있다. 또 부연설명에는 흔히 잿빛 또는 엷은 녹색이며, 사문석이나 운모 편암 속에서 발견된다. 도장이나 조각의 재료, 내화 재료, 절연 재료 따위로 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동석에 대하여 일본사이트에서 일본어 사전을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凍石
とうせき
steatite

 

滑石一種俗名石 soap stoneったような青緑色彩をもつらかい美玉ステアタイト磁器原料織物目地填剤使用する。メソポタミア円筒形印章エジプトスカラベ彫像素材としても使われていた。

本文出典元記述一部しています

 

(凍石)

 

 

 

 

steatite

 

 

 

동석은 활석의 일종으로서 비누돌(soap stone)’이라고도 한다. 얼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청록색의 색채를 가지고 있고 연한 재질이라 한다. 그래서 자기의 원료나 제품의 내구성 강화를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조각상을 만들 때 소재로도 활용된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괴물은 청록색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동석을 영어로 스테아타이트(steatite)’라 한다. 동석과 steatite에 대하여 이미지 검색해 보면 주로 작은 예술조각품으로 만드는데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번역에서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코끼리에 대하여 동석덩어리라 하였을까?

 

각묵스님이 큰 동석 덩어리라 번역한 것은 ‘mahāariṭṭhako mai’를 말한다.

ariṭṭhaka에 대하여 사전을 찾아 보면 ‘A class of devas who were present at the preaching of the Mahāsamaya Sutta.’라 되어 있다. 악마의 일종을 일컫는 말이다.

 

ariṭṭhaka에 대한 다른 의미로 ‘soap-berry plant’라 되어 있다. S.I,104 에 나오는 빠알리문구 ‘mahā ariṭṭhako mai’ 를 인용하여 “a great mass of soap stone” (cp. Rh. D. in J. R. A. S. 1895, 893 sq.), “a shaped block of steatite” (Mrs. Rh. D. in K. S 130). (Page 77) 라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mahāariṭṭhako mai’스테아타이트의 형상의 큰 덩어리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빅쿠보디는 “like a huge block of steatite”라 하였다. ‘큰 스테아타이트 덩어리라는 뜻이다. 이는 각묵스님이 번역한 큰 동석 덩어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주석을 인용하여 검은 돌(kalako panaso)’이라 하였다.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은 동석이라 하여 청록색이 나는 돌이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색깔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괴물의 형상은 검은 모습일까 청록색의 모습일까? 주석의 견해를 중시하면 검은 색이다. 그러나 빠알리원어 그대로 적용하면 청록색이 나는 동석 같은 것이다.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의 번역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단따(dantā), 이빨인가 상아인가?

 

부처님 앞에 있는 괴물은 머리가 커다란 동석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빨에 대한 묘사를 보면 이빨은 깨끗한 은과 같다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상아는 희디흰 은과 같다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tusks were like pure silver(엄니는 순수한 은과 같다)’라 하였다. 여기서 이빨로 묘사된 빠알리어는 무엇일까? 그것은 dantā이다. 이는 ‘a tooth; tusk, , , 象牙의 뜻으로 이빨의 뜻이다.

 

지금 부처님 앞에 무서운 형상이 있다. 그것은 전에 보지 못하던 흉측스런 것이다. 그것은 은색으로 빛난다고 하였다. 그런데  dantā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tusk’라 하여 엄니, 상아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괴물이 코끼리 처럼 보이지만 코끼리 상아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빨의 뜻을 가진 dantā에 대하여 상아의 뜻으로 번역한 것이다. 각묵스님은 빅쿠보디와 같이 상아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이빨로 번역하였다. 다음으로 에 대한 것이다.

 

용같기도 코끼리 같기도 한 기괴한 괴물

 

괴물의 코에 대한 묘사를 보면 코는 커다란 쟁기의 손잡이와 같았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각묵스님 역시 쟁기 손잡이라 하였고, 빅쿠보디도 ‘a huge plough pole’이라 하였다.

 

쟁기의 손잡이로 번역한 것은 빠알리어 ‘soṇḍo’에 대한 것이다. 이는 ‘An elephant's trunk(코끼리의 코)’라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부처님 앞에 있는 무서운 형상은 마치 코끼리처럼 보이는 거대하고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는 괴물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가숫따(Nāgasutta)라 하여 코끼리의 경이라 번역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가(Nāga)라는 말은 코끼리를 뜻하기도 하지만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은 ‘a cobra’이다. 한자어로는 , 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면전에 있는 무시무시한 것은 용같기도 하고 코끼리 같기도 한 기괴한 괴물을 말한다. 그런데 수시로 모양을 바꾼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흉측하게 때로는 매혹적으로 아름답게 자유자재로 변신을 하는 것이다.

 

 

 

Naga dragon

 

 

지금 부처님 면전에 마치 코끼리 같기도 하고 용같기도 한 괴물이 갑자기 출현하였다. 그 형상은 전에 보지 못하던 추하고 무서운 형상이었을 것이다. 마치 영화에서 보는 외계생명체나 좀비, 파충류형상을 한 괴물과도 같은 보기에도 흉측한 모양이었을 것이다.

 

악마 빠삐만임을 알아채고

 

부처님은 비내리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갑자기 나타난 괴물을 한눈에 알아 보았다. 경에 따르면 이것은 악마 빠삐만이다.(iti  māra pāpimanta)라고 표현 되어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나가경(Nāgasutta, S4.2)

  

빠알리어

Sasara dīghamaddhāna

vaṇṇa katvā subhāsubha,
Ala
te tena pāpima

nihato tvamasi antakāti.

 

전재성님역

[세존]

아름답거나 추한 모습으로 변하며

오랜 세월 동안 윤회하는구나.

악마여, 그것으로 족하니

죽음의 신이여, 그대가 패했네.”

 

각묵스님역

긴 세월 배회하면서 그대

아름답거나 흉한 모습 보여 왔나니

빠삐만이여, 그것으로 충분하도다.

끝장을 내는 자여, 그대가 패했도다.”

 

빅쿠보디역

“You've wandered through the long course

Creating beautiful and hideous shapes.

Enough, Evil one, with that trick of yours:

You're defeated, End-maker!”

 

 

 

 

 

전재성님과 각묵스님의 번역에 서로 다른 용어가 있다. 그것은 삼사라(Sasara)’에 대한 번역이다. 삼사라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윤회로 번역하였지만, 각묵스님은 배회로 번역하였다. 윤회와 배회는 다른 말이다.

 

삼사라, 윤회인가 배회인가?

 

삼사라에 대하여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면 제1의 뜻이 ‘round of rebirth’이다. 이를 우리말로 윤회라 하다. 또 다른 뜻으로 ‘faring on(여행하는 것); transmigration(윤회, 환생, 이주)’의 뜻이 있다. 한자어로는 輪廻, 이라 한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삼사라에 대하여 배회로 번역한 것이다. 그것도 긴 세월 배회라 하였다.

 

Sasara dīghamaddhāna 구절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wandered through the long course”라 하였다. ‘오랜 세월 돌아다녔다’ ‘오랜 세월 배회하였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각묵스님이 번역한 긴 세월 배회하면서라고 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 한다. 그렇다면 각묵스님은 삼사라에 대하여 윤회라 번역하지 않고 배회라 번역하였을까?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배회하면서 Ee1sasāra(윤회) 대신에 Be, Se, Ee2Sasara으로 읽었다. 주석서는 “ ‘배회하면서(sasāra)’라는 것은 흘러오면서(sasāranto), 오면서(āgacchanto)라는 뜻이다.”(S.A.i.170)로 해석하고 있다.

 

(초불연 상윳따1 448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에 따르면 Sasara에 대하여 배회로 번역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들고 있다. 하나는 판본에 따른 것이고 또 하나는 주석의 견해를 중시해서 이다.

 

그러나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면 sasāraSasara는 의미가 같다. 단지 철자가 āa의 차이라 하여 배회라 번역한 것은 쉽게 받아 들이기 힘들다.  

 

그렇다면 이 구절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어떻게 각주 하였을까? cdb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In pada  a we  should read with Be, Se, and Ee2 sasāra rather  than  Ee l  Sasara. The  "long  course"  (dīghamaddhāna) is sasāra. 

 

 (cdb 267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각묵스님이 각주 해 놓은 것과 정확하게 일치 한다. 빅쿠보디가 판본의 예를 들어 가며 자신은 Sasara가 아닌 sasāra로 읽겠다고 한 것이 각묵스님이 각주한 내용과 같다. 다만 각묵스님은 주석의 견해를 한 줄 추가 하였는데 이는 단지 문자적 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난해한 설명과 쉬운 설명

 

빅쿠보디는 각주에서 주석을 인용하여 “It is said that there is no form that Mara had not previously assumed in order to frighten the Blessed one”라 하였다. 참으로 어려운 말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세존을 놀라게 하려고 마라가 전에 만들지 않은 모습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세존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S.A.i.171)”라 하였다. 참으로 난해한 말이다. 대체 이말은 무슨 뜻일까?

 

전재성님은 주석을 인용하는 것 없이 개인적인 견해로서 악마가 자주 추하거나 매혹적인 모습으로 등장해서 부처님을 시험하는 것을 경고하는 시이다.”라고 각주 하였다.

 

주석을 인용한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의 글을 보면 부정에 부정을 거듭한 문장을 사용하여 말이 돌려져 있어서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누구나 이해 하기 쉽게 설명 되어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나가경(Nāgasutta, S4.2)

  

빠알리어

vaṇṇa katvā subhāsubha

(아름답거나 추한 모습으로 변하며)

 

원문

전재성님

각주

악마가 자주 추하거나 매혹적인 모습으로 등장해서 부처님을 시험하는 것을 경고하는 시이다.

상윳따1

999번 각주

각묵스님

세존을 놀라게 하려고 마라가 전에 만들지 않은 모습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세존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S.A.i.171)

.상윳따1

449번 각주

빅쿠보디

.  Spk: It is said that there is no form that Mara had not previously assumed in order to frighten the Blessed one

Cdb 267번 각주

 

 

 

각주를 보면 각묵스님의 세존을 놀라게 하려고 마라가 전에 만들지 않은 모습은 없다고 한다라 하여 난해하게 설명하였다. 반면 전재성님은 악마가 자주 추하거나 매혹적인 모습으로 등장해서 부처님을 시험하는 것을 경고하는 시이다.”라고 하여 쉽게설명하였다.

 

각묵스님이 어렵게 설명한 것은 주석의 견해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반면 전재성님은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한 것은 주석의 견해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2014-12-2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