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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멸론자들은 왜 ‘공덕’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2. 17. 18:07

 

단멸론자들은 왜 공덕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사람들마다 인생관이 다르다. 그러다 보니 가치관이 다르다. 사람들마다 종교가 다르다 보니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 자신이 처한 지역에서 역사와 문화와 종교의 영향으로 삶의 방식이 다르다. 그렇다면 불교적 인생관과 가치관은 어떤 것일까? 부처님과 빠세나디왕의 대화에서 빠세나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Yāni tāni bhante rañña khattiyāna muddhāvasittāna issariyamadamattāna kāmagedhapariyuṭṭhitāna janapadatthācariyappattāna mahanta pahavimaṇḍala abhivijiya ajjhāvasantāna rājakaraīyāni santi4, tesvāha5 etarahi ussukka āpannoti.

 

[빠세나디]

세존이시여, 권력의 도취에 몰두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전념하고, 나라에 안정된 지배를 확보하고,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여 통치하는 왕족 출신의 왕에게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지금 나는 그 해야 할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Pabbatūpamasutta-산에 대한 비유의 경, 상윳따니까야 S3.25, 전재성님역)

 

 

이 구절과 관련하여 초불연 번역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세존이시여, 권력의 취기에 중독되고 감각적 욕망에 집착에 사로잡혀 있으며 백성의 이익과 안전을 도모하고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여 통치하는 관정의 대관식을 거행한 끄샤뜨리아 왕에게는 왕으로서의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저는 요즘 그 일에 성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Pabbatūpamasutta-산의 비유 경, 상윳따니까야 S3.25, 각묵스님역)

 

 

가장 크게 번역의 차이가 나는 부분이 관정의 대관식이다. 각묵스님은 관정의 대관식을 거행한 끄샤뜨리아 왕이라 하였다. 전재성님은 왕족 출신의 왕이라 하였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관정의 대관식

 

빠알리원문을 보면 “rañña khattiyāna muddhāvasittāna라 되어 있다.  이 말은 rañña king의 의미이고, khattiyā는 왕족(끄샤뜨리야)을 의미하고, muddhāvasittaproperly anointed (king)의 뜻이다. 여기서  muddhāvasitta적절하게 기름을 바른 왕(properly anointed (king))’의 뜻이다. 그래서일까 초불연에서는 “rañña khattiyāna muddhāvasittāna에 대하여 관정의 대관식을 거행한 끄샤뜨리아 왕이라 번역하였다. 전재성님은 왕족 출신의 왕이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CDB를 보니 “kingship typical for head-anointed khattiya kings”라 되어 있다. 이를 번역하면 머리에 기름이 뿌려진 끄샤뜨리왕을 위한 전형적인 왕권이 된다. 머리에 관정을 하여 왕으로서 권위가 부여된 왕을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각묵스님이 번역한 관정의 대관식을 거행한 끄샤뜨리아 왕이라는 번역과 일치 한다.

 

힌두교에서 삶의 세 가지 목표

 

경에서 지금 나는 그 해야 할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전재성님역)”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하였다.

 

 

이 말에는 이러한 생활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어떤 비난이나 반성도 발견할 수 없다. 힌두교에서 삶의 세 가지 목표가 현세이익적 의무[sk. Dhamal], 사랑[감각적 쾌락의 욕망 sk. Kamal], 이익[sk. Artha]인 것을 고려한다면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은 부처님이 왕에게도 늙고 죽음이 닥쳐오므로 영토를 정복하고 감각적 쾌락에 몰두하는 삶의 허망함을 일깨우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Srp.I.167에서 붓다고싸는 이러한 이야기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빠쎄나디 왕이 부처님을 방문하는 중에 반란군들에게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왕은 그들을 사로잡아 잔인하게 살해 했다. 부처님은 간접적으로 왕의 잔인함이 잘못된 것임을 꾸짖었다.’

 

그렇지만 붓다고싸의 말은 Krs.I.127에서도 지적하듯이 경의 내용과는 들어맞지 않는다.

 

(상윳따1 974번 각주, 전재성님)

 

 

경에서 빠세나디왕이 한 말 중에 권력의 도취에 몰두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전념하고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세속적인 욕망에 해당된다. 흔히 오욕락이라 불리우는 말이다. 세속인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식욕, 성욕, 수면욕, 재욕, 명예욕을 말한다. 그런데 힌두교에서는 현세이익적 의무, 사랑[감각적 쾌락의 욕망], 이익이라 하여 삶의 세 가지 목표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힌두교에서 추구하는 가치관과 불교에서 말하는 가치관은 다른 것이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오로지 여법하게 살고 올바로 살고 착한 일을 하고 공덕을 쌓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힌두교와 불교의 가치관은 다른 것이다.

 

경의 상황과 전혀 맞지 않은 붓다고사의 주석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이 경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왕에게도 늙고 죽음이 닥쳐오므로 영토를 정복하고 감각적 쾌락에 몰두하는 삶의 허망함을 일깨우는 내용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붓다고사는 경의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 주석을 하였다고 밝혔다. 그런데 초불연 각주를 보면 붓다고사의 주석이 그대로 인용되어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왕은 매일 세 번을 세존을 친견하러 갔다고 한다. 그가 갈 때 군대는 많을 때도 있었고 적을 때도 있었다. 어느 날 500명의 도적들이 이 왕은 때가 아닌 때에 적은 군대를 데리고 사문 고따마를 친견하러 간다. 우리는 도중에 그를 잡아서 왕국을 빼앗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장님들의 숲에 숨어 있었다. 왕에게는 많은 공덕이 있었는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빠져나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왕은 그들을 모두 잡아서 극형에 처했다. 왕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SA.i.167)

 

 

(초불연 상윳따1 433번 각주, 각묵스님)

 

 

초불연 각주를 보면 붓다고사의 주석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Krs.I.127’를 근거를 들어 붓다고사가 전혀 상황에 맞지 않는 주석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붓다고사의 말은 경의 내용과는 들어맞지 않는다.” 라 하였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 붓다고사의 주석을 인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빅쿠보디는 어떻게 각주 하였을까? 찾아 보니 다음과 같다.

 

 

Spk says that Pasenadi arrived after he had just finished impaling a band of criminals that he had arrested when they tried to ambush him and usurp the kingdom. The Buddha thought, "If I reprimand him for such a terrible

deed, he will feel too dismayed to associate closely with me. Instead I will instruct him by an indirect method."

 

I agree with C.Rh.D that the story does not fit well, and I would add that it even detracts from the solemn dignity of the Buddha's discourse.

(cdb 257번 각주, 빅쿠보디)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주석에따르면 빠세나디가 왕권을 찬탈하기 위하여 매복해 있는 범죄자무리를 격퇴한 후에 곧바로 도착해서 한 말로 되어 있다. 부처님은 내가 그러한 끔찍한 행위를 꾸짓는다면 그는 너무 낙담하여 나와 긴밀하게 교제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대신 나는 그에게 간접적 방식으로 교훈을 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C.Rh.D 에서와 같이 그 이야기가 상황에 잘 맞지 않는다고 본다.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가 부처님의 진지하고 엄숙한 교설과 거리가 먼 것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cdb257번 각주 번역)

 

 

빅쿠보디의 각주에 따르면 주석에 실려 있는 설명은 경의 내용과 동떨어진 것이라 하였다. 이는 전재성님이 붓다고싸의 말은 Krs.I.127에서도 지적하듯이 경의 내용과는 들어맞지 않는다.”라고 각주 한 것과 일치 한다. 그래서 빅쿠보디는 주석에 대하여 the story does not fit well(그 이야기가 상황에 잘 맞지 않는다고 본다)”라 하였다. 그럼에도 초불연 각묵스님은 붓다고사의 주석을 그대로 인용하여 500명의 도적떼 이야기를 하였다.

 

참고문헌의 차이인가?

 

그렇다면 각묵스님의 각주와 전재성님의 각주가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번역을 하는데 있어서 참고문헌의 차이라 본다. 전재성님의 경우 ‘Krs.I.127’의 근거를 들어 붓다고사가 주석한 것이 경의 상황과 전혀 맞지 않음을 지적하였지만, 각묵스님은 붓다고사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른 것이 이를 증명한다. 더구나 빅쿠보디가 C.Rh.D의 예를 들어 역시 붓다고사가 상황판단을 잘못한 것을 지적하였음에도 각묵스님은 붓다고사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 들인 것은 미스터리다. 아마 초불연의 번역방침 때문일 것이다.

 

초불연 니까야 해제글에 따르면 초불연에서는 청정도론과 아비담마, 그리고 주석을 중시하여 번역하겠다고 천명하였다. 그러나 5세기에 주석한 붓다고사의 견해가 모두 맞을 수는 없는 것이다. 잘못된 것은 바로 잡고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빅쿠보디와 전재성님은 붓다고사의 잘못을 지적하고 나름대로 견해를 제시하였다고 본다. 특히 전재성님의 경우 경의 상황에 대하여 힌두교의 현세이익적 개념과 관련하여 빠세나디의 행위를 설명하였는데 이는 매우 설득력 있다. 이는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산의 비유

 

고대인도에서 불교가 출현하기 전 상위카스트에서는 현세이익적 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끄샤트리아 계급이 그랬던 것 같다.  빠세나디왕 권력의 도취에 몰두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전념하고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때 당시 지배계층에서는 오욕락을 당연시 하고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현세이익적 개념에 대하여 부처님은 잘못된 견해라 하였다. 이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산의 비유로서 알 수 있다.

 

 

[세존]

대왕이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에 믿을 만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동쪽으로부터 당신을 찾아와서 이와 같이 말했다고 합시다. ‘대왕이시여, 잘 아셔야 합니다. 저는 동쪽에서 왔습니다만, 거기에서 구름과 같은 큰 산이 모든 뭇삶들을 부수면서 이곳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왕이여,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해 주십시오.’

.

.

대왕이여, 이와 같은 커다란 재난이 일어나 모든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가 다가오고 사람으로 존재하기 어려울 때 무엇을 해야 합니까?"

 

(Pabbatūpamasutta-산의 비유 경, 상윳따니까야 S3.25, 각묵스님역)

 

 

 

tsunami

 

 

부처님은 동쪽과 서쪽, 북쪽, 남쪽에서 거대한 산이 밀고 들어 올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지금 태평해 보여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마치 쓰나미가 밀려와 모든 것을 휩쓸어 갈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오욕락을 추구할 것인지에 대한 경고의 말이라 볼 수 있다.

 

경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렇게 부처님이 말하자 빠세나디왕은 잔뜩 겁먹은 듯 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Evarūpe me bhante mahati mahabbhaye samuppanne dārue manussakkhaye dullabhe manussatte kimassa karaīya aññatra dhammacariyāya samacariyāya kusalakiriyāya puññakiriyāyāti.

 

[빠쎄나디]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커다란 재난이 일어나 모든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가 다가오고 사람으로 존재하기 어려울 때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오로지 여법하게 살고 올바로 살고 착한 일을 하고 공덕을 쌓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

 

(Pabbatūpamasutta-산의 비유 경, 상윳따니까야 S3.25, 각묵스님역)

 

 

왕족으로서 현세적 이익과 쾌락을 누리며 사는 것을 당연하고 마땅히 여기던 빠세나디왕은 부처님의 산의 비유를 듣고 곧바로 알아 차렸다. 그래서 여법하게 살고 올바로 살고 착한 일을 하고 공덕을 쌓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바로 이 말이 이 경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현세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

 

사람들은 오로지 오욕락만을 추구한다. 지금 살아 있을 때 마음껏 즐기자는 생각이 이를 말한다. 죽으면 썩을 것인데 살아 있는 지금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욕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다.

 

오욕락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오욕락이다.이는 눈과 귀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즐기는 것을 말한다. 또 하나는 세속적 오욕락이다. 이는 식욕, 성욕, 수면욕, 재물욕, 명예욕을 추구하는 삶을 말한다.

 

세속에 사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욕락을 위하여 살아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여유 있는 계층이 그렇다. 부처님당시에도 왕족과 같은 카스트의 상층에 있는 계층은 오욕락추구의 삶이었다. 그런데 부처님은 오욕락추구의 삶에 제동을 걸었다. 그것이 산의 비유이다.

 

산의 비유는 재난이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평온하여도 앞으로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지금 행복하다고 하여 이 행복이 천년 만년 가지 않음을 말한다. 어느 날 닥친 지진이나 쓰나미 등 자연재해, 그리고 인간들의 다툼에서 비롯되는 전쟁 등 인간재해 등 어느 누구도 수명이 보장 되지 않는다. 이렇게 알 수 없는 미래를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작 현세의 오욕락을 즐기기 위한 삶을 살아 가는 것은 매우 근시안적 관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빠세나디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아채고 현세의 이익추구 보다 여법하게 살고 올바로 살고 착한 일을 하고 공덕을 쌓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군으로도 못 막는 늙음과 죽음

 

경에서는 산의 비유와 함께 또 하나의 비유를 들고 있다. 그것은 사군과 책략과 재보이다. 이는 빠세나디가 왕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빠세나디의 말을 빌어 코끼리 부대가 싸우더라도 늙음과 죽음이 덥쳐오는 데는 아무 방도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에 대하여 어떠한 강력한 군대로도 이를 저지 할 수 없음을 말한다.

 

부처님은 강력한 군대로서 사군의 예를 들었다. 여기서 사군은 코끼리 전투부대, 기마 전투부대, 전차 전투부대, 보병 전투부대를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군을 지휘하여 적을 격파할 수 있는 책략과 사군을 보급하기 위한 재보가 등장한다. 그래서 사군을 비롯하여 어떤 책략이나 재보로도 늙음과 죽음을 막아 낼 수 없음을 말한다.

 

핵심 메시지에 대한 번역비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이 경의 가장 핵심 메시지에 대하여 각 번역자의 번역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구 분

   

  

빠알리어

aññatra dhammacariyāya samacariyāya kusalakiriyāya puññakiriyāyāti.

dhammacariyā

전재성님역

여법하게 살고 올바로 살고 착한 일을 하고 공덕을 쌓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법하게 살고

각묵스님역

법답게 살고 올곧게 살고 유익함을 행하고 공덕을 짓는 것 외에 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법답게 살고

빅쿠보디역

“what else should be done but to live by the Dhamma, to live righteously, and to do wholesome and meritorious deeds?”

to live by the Dhamma

 

 

 

경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구절이다. 이는 dhammacariyā, samacariyā, kusalakiriyā, puññakiriyā 이렇게 네 가지로 설명된다.

 

담마짜리야(dhammacariyā)에 대하여

 

담마짜리야(dhammacariyā)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여법하게라고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은 법답게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by the Dhamma’라 하였다.

 

여기서 법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법답게 살고 올 곳게 산다는 것은 열가지 유익한 업의 길[십선업도]을 말한다.(434번 각주)”라고 설명하여 놓았다. 십선행을 말한다. 빅쿠보디는 주석을 인용하여 담마짜리야에 대하여 Spk explains dhammacariya as the ten wholesome courses of kamma(cdb 258번 각주)”라 하였다. 각묵스님이 각주 해 놓은 것과 같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담마짜리야에 대하여 숫따니빠따에 별도의 경이 있다. 그것은 ‘Dhammacariyasutta’라 하여 전재성님은 정의로운 삶의 경(Sn2.6)’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였다.

 

Dhammacariya에 대하여 빠알리사전 PCED194를 보면 ‘[f.] observance of righteousness’라 되어 있다. ‘고결한 삶의 준수라는 뜻이다. ‘Religious life(종교적 삶), piety(경건)’이라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담마짜리야는 세속에서 오욕락을 추구하는 삶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매우 종교적 삶이라 볼 수 있다.

 

바라문의 인생사주기

 

숫따니빠따 Sn2.6) 첫 구절을 보면 “Dhammacieya brahmacieya etadāhu vasuttama라 되어 있어서 담마짜리야가 브라흐마짜리야와 함께 쓰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은 정의로운 삶, 순결한 삶, 이것을 위없는 재보라 한다.(stn274)”라고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 순결한 삶이라 번역된 브라흐마짜리야의 의미는 무엇일까?

 

브라흐마짜리야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청정한 삶으로 번역하다. 초불연에서는 청정범행으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청정하게 사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는 숫따니빠따에서 이어지는 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어지는 경에서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Brāhmaadhammikasutta, Sn2.7)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담마짜리야와 브라흐마짜리야는 바라문의 인생사주기와 관련이 있다. 

 

고대인도에서 정통바라문교도들은 인생을 네 주기로 나누어 생활 하였다. 1)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시기[梵行期: Brahmacariya], 2) 가정에서 결혼하여 생활하는 시기[家住期: Gārhasthya], 3) 숲에서 수행하는 시기[林棲期: Vānaprastha], 4) 유행하며 돌아다니는 시기[遊行期: Sanyāsin]를 말한다. 여기서 첫 번째 시기인 범행기에 대하여 브라흐마짜리야라 하는데 이는 주석에 따르면 성적교섭을 삼가는 삶’이라 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은 출가자의 삶에 대하여 청정한 삶을 살아야 된다고 하였다. 이때 청정한 삶이라는 말이 바라문들의 범행기에 해당된다. 범행기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출가자의 삶일 것이다.

 

궁극적으로 열반을 지향하는 삶

 

담마짜리야에 대하여 숫따니빠따에서는 별도의 경이 있다. 그것이 Dhammacariyasutta(Sn2.6)이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세존]

정의로운 삶, 순결한 삶,

이것을 위없는 재보라고 한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였더라도 마찬가지이다.

 

2.

만약 거친 말씨를 쓰고

남을 괴롭히기를 좋아하는 짐승과 같다면

그 사람의 생활은 더욱 악해지고

자신을 더러운 먼지로 오염시킬 것이다.

 

3.

논쟁을 즐기는 수행승은

우매한 성품으로 덮여있어

깨달은 님께서 친히 설한

설법조차 알아듣지 못한다.

 

4.

그는 무명에 이끌려

수행을 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지옥으로 가는 길인

번뇌를 알지 못한다.

 

5.

참으로 이러한 수행승은

타락한 곳에 태어난다.

모태에서 모태로 암흑에서 암흑으로

죽은 후에도 고통을 받게 된다.

 

6.

마치 똥구덩이가 세월이 지나면,

똥으로 가득차듯,

부정한 사람은 참으로 깨끗해지기 어렵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없는 짐승을 말한다.

 

7.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자들은,

사실은 집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이고,

악을 원하고 악한 의도를 갖고,

그의 수행의 초원에서 악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라.

 

8. 그대들은 모두 화합해서

그러한 사람을 물리치고

쌀겨처럼 그를 키질하여

쓰레기처럼 날려버려라.

 

9. 그리하여 수행자가 아니면서

수행자인체하는 악한 욕망에 사로잡혀있고,

수행의 초원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

그 쌀겨들을 날려버려라.

 

10.

청정한 자들이라면 서로 새김을

가지고 청정한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하라.

그리하면 서로 화합하여 사려 깊게

그대들은 괴로움의 종식을 이룰 것이다.

 

(Dhammacariyasutta-정의로운 삶의 경, 숫따니빠따 Sn2.6, 전재성님역)

 

 

담마짜리야경의 내용을 보면 십선행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은 주석에서 설명된 십선행에 대하여 각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담마짜리야경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정의로운 삶의 경(Dhammacariyasutta)은 궁극적으로 열반을 지향하므로 진리에 입각한 삶의 경또는 여법한 삶의 경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숫따니빠따, 802번 각주)”라고 설명해 놓았다. 궁극적으로 열반을 지향하는 것이 법다운 삶, 여법한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오로지 오욕락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지배한다. 특히 인터넷 시대에 단멸론자들이 그렇다.

 

단멸론자들이 늘 주장하는 것

 

시간이 돈인 시대임에도 불자들은 법문을 듣기 위하여 먼 곳까지 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요즘은 인터넷시대이다. 네트워크만 연결 되어 있으면 가정이나 직장, 일터에서 누구나 쉽게 부처님 말씀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부작용도 있다. 인터넷에서는 온갖 쓰레기 정보도 넘쳐 나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다. 그런 것 중에 단멸론이 있다.

 

단멸론자들이 늘 주장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이 현세적인 가르침만 이야기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의 소멸과 관련된 사성제와 팔정도실천만을 강조한다. 또 내세나 윤회와 같은 이야기가 나오면 죽음 이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자신의 감각으로 인지 되지 않은 것이나 과학적 증명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말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현세의 이익에 대한 것만 있게 된다. 그래서 나온 말이 부처님은 사성제와 팔정도 등 현세적인 가르침만 펼치셨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인터넷 시대에 독버서처럼 생겨나고 있다.

 

단멸론자들은 왜 공덕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부처님은 현세의 이익에 대한 법문도 하셨지만 내세를 위한 법문도 하셨다. 만일 불교가 오욕락 등 오로지 현세의 이익이 되는 것만 추구하는 종교라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현세적 이익이 되는 것만 추구하면 어떻게 될까힌두교처럼 될 것이다전재성님이 힌두교에 대하여 각주한 것을 보면 현세이익적 의무[sk. Dhamal], 사랑[감각적 쾌락의 욕망 sk. Kamal], 이익[sk. Artha]”라 하였다.  이렇게 세 가지가 힌두교의 삶의 목표라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가 오로지 현세적 이익이 되는 삶과 오욕락만을 추구 한다면 힌두교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경에 따르면 빠세나디는 왕족으로서 오욕락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 빠세나디는 세속적 오욕락을 추구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부처님의 산의 비유를 들어 오욕락을 추구하는 것이 매우 어리석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래서 지혜로운 왕이 오로지 여법하게 살고 올바로 살고 착한 일을 하고 공덕을 쌓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라고 깨우치게끔 만들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세의 이익 보다 궁극적으로 열반을 지향하는 삶이다. 그러나 현세에서 성취하지 못하였다면 다음생에서 성취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여법하게 살고 올바로 살고 착한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공덕을 강조 하였다.

 

그런데 현세의 이익과 오욕락을 추구하는 자들은 공덕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인터넷시대의 단멸론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현세적 가르침을 펼치셨다고 하여 사성제와 팔정도 등 근본가르침만 언급하지만 공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공덕에 대하여 언급하는 순간 내세와 윤회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세의 이익은 물론 내세의 이익까지

 

부처님은 현세적 이익에 대한 가르침만 아니라 내세의 이익이 되는 가르침도 설하였다.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여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지만, 부처님은 여법하게 살고 올바로 살고 착한 일을 하고 공덕을 쌓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라고 함으로서 공덕을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세의 이익은 물론 내세의 이익까지 되는 가르침을 펼치신 것이다.

 

 

구 분

    1

  

빠알리어

Yathāpi selā vipulā

nabha āhacca pabbatā,

Samantā anupariyeyyu

nippohentā catuddisā.

 

전재성님역

하늘을 찌를 듯한

커다란 바위산이

사방에서 짓이기며 완전히 둘러싸듯,

늙음과 죽음은 뭇삶들을 덮치네.

 

각묵스님역

거대한 석산이 하늘을 꿰찌르고

사방 갈아 내리면서 주위를 배회하듯

그와 같이 늙음-죽음 중생들을 정복하네.

3구게

빅쿠보디역

“Just as mountains of solid rock,

Massive, reaching to the sky,

Might draw together from all sides,

Crushing all in the four quarters

So aging and death come

Rolling over living beings-“

5구게

 

 

 

구 분

    2

  

빠알리어

Eva jarā ca maccu ca

adhivattanti pāino,

Khattiye brāhmae vesse

sudde caṇḍālapukkuse,

Na kiñci parivajjeti

sabbamevābhimaddati.

 

전재성님역

왕족과 바라문과 평민과

노예와 천민과 청소부

누구도 예외로 하지 않고

그것은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리네.”

 

각묵스님역

왕족이든 바라문이든 와이샤든 수드라든

불가촉천민이든 야만인이든

그 누구도 이것을 피해 갈 수 없나니

[죽음은] 이 모두를 갈아 없애 버리누나.

 

빅쿠보디역

Khattiyas, brahmins, vessas, suddas,

Candalas and scavengers:

They spare none along the way

But come crushing everything.

 

 

 

 

구 분

    3

  

빠알리어

Na tattha hatthina bhūmi

na rathāna na pattiyā,

Na cāpi mantayuddhena

sakkā jetu dhanena vā.

 

전재성님역

거기에는 코끼리 부대도, 전차 부대도

보병 부대도 어쩔 수 없네.

또한 전략으로 싸우더라도

재력으로 싸우더라도 승리는 없으니.

 

각묵스님역

그곳은 코끼리와 전차와 보병의 영역도 아니고

책략의 전쟁이나 재물로도 이길 수 없도다.

2구게

빅쿠보디역

"There's no ground there for elephant troops,

For chariot troops and infantry.

One can't defeat them by subterfuge,

Or buy them off by means of wealth.

 

 

 

 

구 분

    4

  

빠알리어

Tasmā hi paṇḍito poso

sampassa atthamattano,

Buddhe dhamme ca saghe ca

dhīro saddha nivesaye.

 

전재성님역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은

스스로를 위한 일을 살피네.

슬기로운 사람은 부처님과

가르침과 참모임에 믿음을 심는다네.

 

각묵스님역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 자신의 이로움 보아서

지혜로운 그 사람,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믿음을 굳건하게 가져야 하노라.

3구게

빅쿠보디역

"Therefore a person of wisdom here,

Out of regard for his own good,

Steadfast, should settle faith

In the Buddha, Dhamma, and Sangha.

 

 

 

 

구 분

    5

  

빠알리어

Yo dhammacārī1 kāyena

vācāya uda cetasā,

Idheva na pasasanti

pecca sagge pamodatīti.

 

전재성님역

신체와 언어와 정신으로

여법한 삶을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칭찬하며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기쁨을 누리네.

 

각묵스님역

몸과 말과 마음으로 법을 실천하는 자를

사람들은 여기서도 그를 크게 칭송하지만

죽은 뒤 그 사람은 천상 기쁨 누리도다.

3구게

빅쿠보디역

When one conducts oneself by Dhamma

With body, speech, and mind,

They praise one here in the present life,

And after death one rejoices in heaven."

 

 

 

 

 

 

 

2014-12-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