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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은 저세상에서 뭇삶들의 의지처, 불교다운 릴레이후원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1. 26. 15:54

 

공덕은 저세상에서 뭇삶들의 의지처, 불교다운 릴레이후원

 

 

 

무자식상팔자라 하지만

 

무자식상팔자라는 말이 있다. 자식 때문에 근심하느니 차라리 자식이 없는 편이 걱정없이 더 편하다는 말을 뜻한다. 그러나 옛날에는 자식이 많을수록 좋았다. 특히 아들이 있어야 했다.

 

상윳따니까야에 아들 없음의 경(S3.19)’이 있다. 빠알리어명은 Pahama aputtakasutta이다. Pahama는 첫 번째 경이라는 뜻이고, aputtaka는 자식없음의 뜻이다. 초불연에서는 한자어로 무자식경이라 하였다.

 

고대인도에서 아들이 없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알 수 있다.

 

 

Idha bhante sāvatthiya seṭṭhi gahapati kālakato.  Tamaha aputtaka sāpateyya rājantepura atiharitvā āgacchāmi. Asīti bhante satasahassāni hiraññasseva, ko] Pana vādo rūpiyassa. Tassa kho pana bhante seṭṭhissa gahapatissa evarūpo bhattabhogo ahosi:kaājaka bhūñjati bilagadutiya.Evarapo vatthabhogo ahosi. Sāa dhāreti tipakkhavasana. Evarūpo yānabhogo ahosi: jajjararathakena yāti paṇṇacchattakena dhāriyamānenāti.

                  

[빠쎄나디]

세존이시여, 싸밧티에서 어떤 백만장자가 죽었습니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으므로 내가 그의 유산을 몰수하여 왕궁으로 가져다 놓고 왔습니다. 세존이시여, 그에게는 금이 팔백만냥이나 있는데 은은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그 백만장자는 쌀겨로 만든 죽을 먹었고 세 조각으로 기운 대마옷을 입었으며 나뭇잎으로 덮개를 한 낡은 수레를 타고 다녔습니다.”

 

(Pahama aputtakasutta- 아들 없음의 경1, 상윳따니까야 S3.19, 전재성님역)

 

 

부처님 당시 큰부자에 대한 묘사이다. 그런데 부자는 쌀겨로 만든 음식을 먹는 등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검소한 생활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색함을 드러내고 있다. 베풀지 않고 마치 스크루지 영감처럼 산 것을 말한다.

 

? 급고독장자가 금융업자라고?

 

경에서 어떤 백만장자라 하였다. 빠알리어로 ‘seṭṭhi gahapati’를 말한다. 그런데 초불연 각묵스님은 금융업을 하던 어떤 장자라 하여 금융업을 강조 하였다. 마치 인색한 고리대금업자를 연상케 한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금융업을 하는 [사람]’seṭṭhi를 옮긴 것이다. Singh에 의하면 (pp.249-251) 셋티는 북인도의 큰 도시에 있었던 사채업자나 금융업자를 말한다고 한다. 원래는 대상이나 동업 조합의 수장들이 개인적으로 금융업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급고독 장자도 금융업자이었다.

 

(초불연 상윳따1 412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에 따르면 ‘seṭṭhi’에 대하여 금융업자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Singh를 근거로 들고 있다. Singh가 아마 책인 것 같다. 책에서 북인도의 큰 도시에 있었던 사채업자나 금융업자라고 하였기 때문이리 한다. 더구나 부처님에게 기원정사를 보시한 대부호 아나타삔디까에 대해서도 금융업자라 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아나타삔디까는 정말 금융업자이었을까? 금융업자라 하면 사채업자가 연상되고 또 인색한 고리대금업자가 연상된다. 그렇다면 아나티삔디까가 돈놀이 해서 큰 부자가 되었다는 말인가?

 

각묵스님이 ‘seṭṭhi’에 대하여금융업을 하는 [사람]’이라 하였다. seṭṭhi에 대하여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a millionaire’라 되어 있다. 백만장자라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의 번역 백만장자가 맞는 말이다.

 

seṭṭhi에 대한 또 다른 의미로 ‘Ashes; foreman of a guild; a cashier, treasurer; a wealthy merchant’라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seṭṭhi는 장사해서 큰 돈을 번 자산가를 말한다. 오늘날 백만장자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금융업자라 하여 마치 돈놀이하여 재산을 형성한 것처럼 번역하였다면 부적절하다고 보여진다. 더구나 아나타삔디까를 금융업자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본다.

 

장자(gahapati)란 누구일까?

 

전재성님은 ‘seṭṭhi gahapati’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seṭṭhi gahapati: 장자(gahapati)는 왕족(khattiya)나 바라문(brahmana) 계급에 비해서 평민계급(vessa)에 해당된다. 그는 상인들의 조합장으로서 백만장자이었다.

(상윳따1 913번 각주, 전재성님)

 

 

부처님당시 고대인도에서는 사성계급이 있었다. 가장 상층에 브라흐마나(바라문), 다음으로 깟띠야(왕족), 그리고 평민, 노예의 순서이었다. 그런데 장자는 평민계급에 속한 다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 큰 재산을 형성한 평민을 말한다.

 

빅쿠보디는 어떻게 설명하였을까? Cdb를 찾아 보니 “Here, venerable sir, a financier householder in Savatthi has died.”라 되어 있다. 빅쿠보디는 seṭṭhi gahapati에 대하여 ‘financier householder(금융업자 장자)’라 하였다. 각묵스님의 번역과 일치한다.

 

모을 줄 만 알았지

 

경에 따르면 장자는 아들이 없었다. 아들이 없다면 유산을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 요즘과는 달리 옛날에는 딸에게 재산을 물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가외인이라 상속권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 없거나 도중에 죽어 버리면 그 막대한 재산은 모두 국가소유가 된다.

 

그런데 장자는 매우 인색하였다. 돈을 모을 줄 만 알았지 쓸 줄 몰랐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비천한 사람은 막대한 부를 얻어도 스스로를 즐겁게 하지 못하고 기쁘게 하지 못하며 부모를 즐겁게 하지 못하고 기쁘게 하지 못하며 처자를 즐겁게 하지 못하고 기쁘게 하지 못하며 하인과 심부름꾼과 고용인을 즐겁게 하지 못하고 기쁘게 하지 못하며 친구를 즐겁게 하지 못하고 기쁘게 하지 못하며 수행자나 성직자에 대해서 즐겁게 하지 못하고 기쁘게 하지 못하여 위로 올라가서 하늘나라로 인도되어 좋은 과보를 받게 하고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하는 보시를 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오로지 돈 모으는 재미에 한 평생 산 자는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에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지 못하였음을 말한다. 그러다 보니 아무런 공덕도 쌓지 않게 되어서 천상에도 태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연못의 비유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비유를 들어 쉽게 설명한다.

 

 

대왕이여, 예를 들어 사람이 없는 지역에 연못이 있으면 그 물이 깨끗하고 시원하고 맛이 좋고 색깔이 투명하고 제방이 잘 갖추어져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 물을 사람이 나르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고 목욕하지 못하고 인연에 따라 사용하지 못합니다. 대왕이여, 그 물이 올바로 쓰여지지 못하면 이와 같이 두루 사용되지 못하고 없어져버리고 맙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비천한 사람은 막대한 부를 얻어도 스스로를 즐겁게 하지 못하고 기쁘게 하지 못하며 부모를 즐겁게 하지 못하고 기쁘게 하지 못하며 처자를 즐겁게 하지 못하고 기쁘게 하지 못하며 하인과 심부름꾼과 고용인을 즐겁게 하지 못하고 기쁘게 하지 못하며 친구를 즐겁게 하지 못하고 기쁘게 하지 못하며 수행자나 성직자에 대해서 즐겁게 하지 못하고 기쁘게 하지 못하여 위로 올라가서 하늘나라로 인도되어 좋은 과보를 받게 하고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하는 보시를 하지 못합니다.

 

그의 그러한 재산들이 이와 같이 올바로 사용되지 않으면 국왕에 의해서 몰수되고 도적에게 빼앗기고 불에 타고 물에 떠내려가게 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상속인에게 박탈당하게 됩니다. 대왕이여, 재산이 올바로 쓰여지지 않는다면 이와 같이 두루 사용되지 못하고 없어져버리고 맙니다.

 

(Pahama aputtakasutta- 아들 없음의 경1, 상윳따니까야 S3.1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연못의 비유를 들고 있다. 아무리 물 맛이 좋은 연못이 있어도 사람이 없는 깊은 산속에 있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을 줄 만 알았지 베풀지 모르는 비천한 자의 재산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에게도 베풀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에게도 베풀지 못한다고 하였다. 쌀겨 죽을 먹으며 모은 재산이지만 결국 써 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 있다는 말이다.

 

부동산투기가 절정에 달하였을 때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하여 인생을 돈버는 일에 올인한다. 이렇게 돈을 모으고자 하는 이유는 노후를 염려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늙어 병들어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을 때를 대비하여 젊었을 때 열심히 모아 놓자는 것이다. 그래서 노후자금에 모든 것을 다 건다.

 

부동산투기가 절정에 달하였을 때 사람들은 아파트투기에 올인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판교신도시이다. 판교신도시 건설이 발표 되고 나서 판교에 분양권이 당첨되면 로또로 보았다. 그래서 누구나 너나 할 것이 없이 분양 받기 위하여 꿈을 꾸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판교는 어떻게 되었을까? 더 이상 로또는 아니다. ‘하우스푸어라 하여 비참한 인생으로 전락되었다. 아파트 가격은 올라 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 가고, 매달 대출 받은 이자를 갚기에 허리가 휘어 질 정도이다. 그래서 아파트를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손해이다. 그러다 보니 먹을 것 제대로 못 먹고 이자 내기에 바쁜 불쌍한 하우스푸어가 되기에 이르렀다.

 

돈을 은행에 맡기면

 

오로지 모을 줄 만 알고 베풀줄 모르는 자들은 하우스푸어와 다름 없다. 하우스푸어가 몇 억 되는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이자 내는 것 때문에 보시 등 베풀고 사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수전노들은 부자인 것 같지만 장부상으로만 확인 되는 것일 뿐 실제로 가난한 자나 다름 없다.

 

인색하게 살며 가난하게 사는 자는 재산이 있어도 저 산속 깊은 곳에 연못이 있는 것과 같다. 지금 막대한 재산이 은행에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것이 아니다. 비록 장부상으로 자신의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은행에서는 그 돈을 대출하여 활용하기 때문에 사실상 은행의 것이다 다름 없다.

 

금과 은을 자신의 집에다 놓고 살수는 없을 것이다. 그 금과 은을 지키기 위한 경비를 세워야 하고 그에 따른 근심걱정이 따른 다면 차라리 돈이 있는 것이 복이 아니라 불행에 가깝다. 그런 이유로 은행에 넣어 보지만, 은행에 넣는 순간 은행의 것이 된다. 자신의 돈임에도 자신이 활용하지 못하고 은행에서 활용하는 것이다. 이런 돈을 자신의 돈이라 볼 수 있을까?

 

부자라고 해서 특별히

 

부자라고 해서 보통사람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 부자라 하여 하루 세끼 이상을 먹지 않는 것이다. 지금 천만원 가진 자가 하루 세끼 먹는데, 지금 백억 가진 자가 가진 만큼 삼천끼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는 곳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1억 가진 자가 낡고 허름한 작은 아파트에 살지만 지금 백억 가진 자가 100배나 큰 아파트에 살지 않는다. 다만 먹는 것과 입는 것, 그리고 잠 자는 곳의 에서만 차이가 날 뿐, 그 재산 규모 만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의식주를 제외 하고 남은 것은 잉여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다. 은행에 맡겨 놓았다면 은행의 것이 되고, 남을 주어서 활용하였다면 남의 것이 된다. 실제로 먹고, 입고, 자는 것에는 부자나 보통사람이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부자라 하여 하루 세 끼 먹을 것 다섯 끼 여섯 끼 먹지 않는다. 부자라 하여 몸에 걸치는 옷을 세겹 네겹 껴입지 않는다. 부자라 하여 가진 것 만큼 커다란 집에서 살지 않는다. 누구나 하루 세끼 먹는다. 그리고 춥지 않게 옷을 입고, 잠 자는 곳은 한평이면 족하다. 그래서 현재의 조건에서 만족하는 자가 가장 행복한 자라 하였다.

 

재산을 쓸 줄 모르는 자

 

그럼에도 욕심많은 자들은 아흔아홉칸을 가졌을 때 백칸을 채우고자 한다. 지금 10억 가진 자는 100억 만들기 도전하고, 100억이 되면 또 다시 천억에 도전한다. 그렇다고 하여 하루 세 끼 이상 먹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자신을 위해서나 가족을 위해서나 주변에 베풀줄 모르고 사는 자의 재산은 사실상 모두에게 도움이 안된다. 그런 재산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산속에 있는 연못과도 같은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아들 없음의 경(S3.19)

  

빠알리어

Amanussaṭṭhāne udaka va sīta

tadapeyyamāna parisosameti,
Eva
dhana kāpuriso labhitvā

nevattanā bhuñjati no dadāti.

kāpuriso

전재성님역

[세존]

사람이 없는 곳에 시원한 물이 있어도

마시지 않아 말라 없어지는 것같이

비천한 자가 부를 얻으면,

스스로 사용하지 않고 남에게도 주지 않네.”

비천한 자

각묵스님역

인적이라곤 없는 곳에 차가운 물 있더라도

마시지 않은 채로 말라버리게 되리니

그와 같이 나쁜 사람은 재산을 얻더라도

스스로가 즐기지도 보시하지 못하도다.”

나쁜 사람

빅쿠보디역

“As cool water in a desolate place

Evaporates without being drunk,

So when a scoundrel acquires wealth

He neither enjoys himself nor gives.”

a scoundrel

 

 

 

이 게송은 인색한 자의 특징에 대한 것이다. 먹을 것 안먹고 입을 것 안입고 모은 재산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주변을 위하여 쓰지 않으면 사실상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으기만 하고 쓸 줄 모르는 자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비천한 자라 하였다. 천박한 부자를 뜻한다. 이는 ‘kāpuriso’에 대한 번역어이다. ‘kāpuriso’‘A bad man’의 뜻이다. 빅쿠보디는 scoundrel라 하여 ‘(비열한)악당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은 나쁜 사람으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kāpuriso’는 질이 나쁜 천박한 자를 뜻한다. 오로지 자기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을 뜻한다.

 

슬기로운 자가 부를 얻으면

 

이기주의자는 오로지 자기자신만 이롭게 할 뿐 타인에 대한 배려는 눈꼽만치도 없다. 이기주의자가 돈놀이 등을 하여 악착 같이 재산을 모았을 때 그 재산은 자신의 뼈와 살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가족은 물론 타인에게 돈이 나가는 것에 대하여 마치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까워 한다. 그러다보니 평생 남을 베풀고 사는 것은 꿈에도 꾸지 못한다.

 

미천한 자가 돈을 모으면 쓸 줄 모른다. 그러나 슬기로운 자가 돈을 모으면 베풀줄 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참사람은 막대한 부를 얻으면 스스로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며 부모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며 처자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며 하인과 심부름꾼과 고용인을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며 친구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며 수행자나 성직자에 대해서 즐겁게 한다고 하였다. 그런 과보로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재산이 올바로 쓰여지면 몰수되지 않고 두둑에게 빼앗기지 않는 다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연못의 비유를 들었다.

 

 

대왕이여, 예를 들어 촌락이나 또는 도회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연못이 있어서 그 물이 깨끗하고 시원하고 맛이 좋고 색깔이 투명하고 제방이 잘 갖추어져 아름답다면 그 물을 사람들이 나르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고 목욕하기도 하고 인연에 따라 사용하기도 합니다. 대왕이여, 그 물이 올바로 쓰여지면 이와 같이 없어져버리지 않고 두루 사용됩니다.

 

(Pahama aputtakasutta- 아들 없음의 경1, 상윳따니까야 S3.19, 전재성님역)

 

 

미천한 자가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을 때 써 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그러나 슬기로운 자는 막대한 부를 공유하는 것이다. 이를 연못의 비유로 들었다. 연못이 사람 사는 곳과 가까이 있을 때 모두 이용하듯이 자신을 포함하여 이웃에 베풀고 살았을 때 재산을 올바로 사용한다는 말이다.

 

재산을 쓸 줄 아는 자

 

재산을 올바로 사용하는 현명한 자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아들 없음의 경(S3.19)

  

빠알리어

Dhīro ca viññū adhigamma bhoge

yo bhuñjati kiccakaro ca hoti,
So ñ
ātisagha nisabho bharitvā

anindito saggamupeti hānanti.

Dhīro ca viññū

전재성님역

[세존]

현명하고 슬기로운 자가 부를 얻으면

스스로 쓰고 해야 할 일을 하며

훌륭한 이는 친지와 참모임을 돌보아

비난받지 않고 하늘나라에 이르네.”

현명하고 슬기로운 자

각묵스님역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가 재물을 얻으면

즐기기도 하고, 해야 할 바를 다하기도 하나니

비난받지 않으며 일가친척 부양한 뒤

그 영웅은 천상의 보금자리로 간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

빅쿠보디역

“But when the wise man obtains wealth

He enjoys himself and does his duty.

Having supported his kin, free from blame,

That noble man goes to a heavenly state.”

the wise man

 

 

 

현명하고 슬기로운 자‘Dhīro ca viññū’의 번역이다. 각묵스님은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라 하였다. 그러나 빅쿠보디는 ‘the wise’이라 하여 단지 현명한 자의 뜻으로 하였다.

 

Dhīro‘Wise; resolute, firm, brave’의 뜻이다. Viññū‘Intelligent, wise, learned, discreet’의 뜻이다. 그래서 Dhīra는 굳은 심지를 가진 용기 있는 자의 뜻이고, Viññū는 잘 배운 교양 있는 자를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Dhīro ca viññū’의 뜻은 교양있고 심지가 곧은 현명한 자의 의미가 된다.  이는 앞서 게송에서 천박한 자의 뜻을 가진 kāpuriso와 대조 된다.

 

강남졸부 이야기

 

알고 지내는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강남의 졸부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친구 중에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은 강남에 부동산투기붐이 한창 일 때 그야 말로 돈벼락을 맞았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평생일해도 천문학적 금액에 달하는 모을 수 없지만 운 좋게 땅투기가 성공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투기하여 불로소득을 챙기는 것도 능력중의 하나 일 것이다.

 

그런데 그 강남졸부는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 돈이 철철 넘쳐서 일하고 싶은 의욕이 나지 않는 것이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것만 잘 굴려도 평생 먹고 살 뿐만 아니라 자손에게도 물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관심 있는 것이라면 돈을 더 굴려서 재산을 늘리는 것이다. 그래서 부동산을 선호한다고 하였다.

 

강남졸부는 부동산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빌딩을 가지고 있으면 값어치가 올라서 좋고, 세를 놓아 임대수입을 올려서 좋은 것이다. 이렇게 부동산에 맛을 들이다 보니 새로은 사업에 흥미가 없는 것이다. 정보통신 등 신규사업을 권유해도 부동산 상승분을 감안하였을 때 훨씬 못 미치자 투자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강남 졸부에게 유일한 낙은 즐기는 것이다. 점심 때가 되면 식도락가가 되어 차를 타고 먼 곳 까지 맛집을 찾아 다닌다. 또 애인이 있어서 마음껏 쾌락을 즐기면 산다. 그러나 동창 등 주변 사람에게는 매우 인색하다고 한다. 자신은 마음껏 즐기면서 주변에는 인색하는 것이 특징이라 한다.

 

이런 강남졸부가 즐기면 얼마나 즐길까? 하루 세 끼 먹는 밥 네 끼 다섯 끼 먹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애인이 많아 감각적 쾌락을 즐긴다고 하더라도 육체적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오로지 자기자신 만을 위해서 사는 자들이 천박한 졸부들이다.

 

소유로 불행해진 자

 

천박한 졸부 못지 않게 비천하게 사는 자들이 하우스푸어이다. 불로소득으로 한 몫 잡기 위하여 은행에서 돈을 빌려 부동산 투기를 한 자들을 말한다. 물론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서 희생자가 나온 것에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집이 있는 거지들은 자신은 물론 가족과 주변을 위해서도 베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매달 꼬박꼬박 지급 되는 이자로 인하여 먹고 싶은 것이나 입고 싶은 것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다. 다만 고대광실과도 같은 거주지는 있으나 날이 갈수록 가시방석이다. 그런 형편이니 베풀고 사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하는 것이다. 소유함으로 인하여여 오히려 불행해진 케이스라 볼 수 있다.

 

없어도 베푸는 삶

 

반드시 부자가 아니어도 베풀고 살 수 있다. 그것은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변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천박한 자들이 돈을 모았을 때 쓸 줄 몰라 그 막대한 돈이 사실상 자신의 돈이 아님과 같다. 그러나 비록 가진 것은 별로 없어도 이웃을 위하여 작은 돈이라도 베푼다면 매우 값진 것이다. 이에 대한 실천으로 거리에서 노점을 하는 할머니들을 도와 드리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요즘 경기가 나빠서인지 버스 정류장 입구나 아파트, 또는 주택 입구에는 노점상을 많이 볼 수 있다. 주로 농산물 등을 파는 행상이다. 그 중에는 보기에도 초라한 할머니들도 많다. 이런 노점상에서 물건을 사 주는 것도 일종의 베푸는 삶이라 볼 수 있다. 대형마트에서만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가까이에 있는노점 할머니들에게 물건을 사주는 것도 커다란 보시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베푸는 삶을 살 수 있다.

 

거리에서 좌판을 벌여 놓고 채소 등 농산물을 파는 할머니들은 불쌍해 보인다. 특히 춥고 바람이 부는 겨울 날씨에 행상을 하는 것을 보면 삶 자체가 형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할머니의 물건을 사 주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거리에는 트럭에 과일을 싣고 다니면서 파는 트럭행상도 있다. 또 작은 포장마차에서 붕어빵을 파는 사람들도 있다. 이 뿐만 아니다. 종종 주택가 사람이 많이 몰리는 입구에 반짝 반찬을 파는 좌판을 볼 수 있다. 이들 모두 살고 있는 거주민을 대상으로 한다. 물론 불법이기는 하지만 이들의 물건을 사주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동차를 타고 먼 거리에 있는 대형마트로 장보러 간다. 그러나 멀리 가기 보다 이왕이면 가까운 곳에서 물간을 사주는 것이 좋다.  사는 곳 주변의 노점이나 가게, 마트 등을 활용하는 것이 서로 돕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베푸는 삶이다.

 

앵벌이하는가? 유니세프와 유네스코 광고

 

베푸는 삶을 제대로  살려면 보시해야 한다. 이를 다른 말로 기부, 나눔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나누는 삶을 살고 있을까?

 

저녁시간에는 EBS에 채널이 고정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잠들 때 까지 보게 된다. 그런 EBS에도 광고가 있다. 그런데 광고 중에서도 공익광고를 종종 볼 수 있다. 주로 후원광고이다. 그 중에 유니세프광고가 있다.

 

유니세프광고를 보면 아프리카나 인도의 비참한 모습의 아이들이 등장한다. 끼니를 제대로 먹지 못하여 말라 비틀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후원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한다. 한달에 3만원만을 후원하면 몇 십명의 아이들이 굶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 하였다. 정도가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저녁에 EBS를 보면 유니세프 광고가 무려 6번 이상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일 여섯 차례 이상 후원광고를 접하였을 때 마치 앵벌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유니세프광고는 불쌍한 아이들의 영상을 연속으로 보여준다. 마치 후원을 강요하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EBS공익광고를 보면 유니세프광고 뿐만이 아니다. 유니세프 광고에 이어 바로 다음에 이번에는 유네스코’광고가 나온다. 유네스코 광고 역시 제3세계의 어린아이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 주면서 후원에 동참해 줄 것을 후원한다. 후원 동참비는 매월 2만원이다. 이만원이면 역시 굶는 아이 수십명을 살릴 수 있다는 광고이다.

 

승가원의 릴레이 후원하기

 

가진 것을 나누고 기부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방송에서 마치 앵벌이 하듯이 마치 상업광고 하듯이 광고 하였을 때 식상하게 한다. 오히려 역효과를 주어 그 진의를 의심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후원광고는 요란하게 하는 것 보다 알음알이로 하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릴레이후원이다.

 

승가원에 매월 일정액을 보시하고 있다. 통장에서 자동으로 빠져 나갈 수 있도록 자동이체 하여 놓았다. 이렇게 승가원의 후원자가 된 동기는 알고 지내는 법우님의 권유를 받고 나서부터이다. 이는 다름 아닌 릴레이후원이다. 신문이나 방송 등 광고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을 통하여 후원하는 방식을 말한다.

 

릴레이후원제도는 불교적 방식

 

릴레이로 인하여 후원자로 등록하게 되면 반드시 물어 보는 말이 있다. 그것은 누구의 권유로 후원하게 되었습니까?”라는 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후원하도록 권유한 사람의 공덕에 대한 것이다.

 

사무량심에서 기뻐함(무디따)  있는데 이를 다른 말로 수희공덕이라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보시를 하였을 때 칭찬하면 함께 그 보시금액만큼 공덕을 지음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권유하여 릴레이 후원을 하여 새로운 후원자를 만들었을 때, 후원자 뿐만 아니라 권유한 자도 동등한 공덕을 짓게 된다. 후원자와 권유자가 동시에 공덕을 짓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릴레이후원제도는 사무량심에 따른 매우 불교적 방식이라 볼 수 있다.

 

호국연무사 불사에 동참한 이유

 

보시는 능력껏 하라고 하였다. 보통 자신의 수입에서 2-3% 정도로 본다. 좀더 적극적이라면 5%이고, 10% 가량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십일조라 하여 헌금하는데 10%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그렇다고 아무 곳에나 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잘못 쓰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타락한 승려들에게 보시하는 것은 보시 효과가 없다. 그래서 공덕도 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투명하게 관리 하는 곳에 보시해야 한다. 그런 곳이 군법당과 장애단체일 것이다.

 

한때 불교계의 숙원사업이 있었다. 그것은 논산훈련소의 호국연무사이었다. 5천명이 입장가능한 대형 군법당을 건립 하는데 있어서 전불교적 후원운동이 있었다. 2011년의 일이다. 그 때 당시 한국불교의 사활이 걸려 있는 호국연무사와 군심(軍心)잡기(2011-11-0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리고 매달 일정액을 후원하였다. 그 결과이서일까 현재는 교회 못지 않은 수용시설을 갖춘 대형 군법당을 갖게 되었다.

 

호국연무사불사에 동참하게 된 것은 군대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일반사찰과 달리 군법당에서는 수입이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외부에서 후원으로만 유지가 가능한 것이다. 더구나 수입 내역이 투명하게 공개 되어 안심하고 후원에 동참한 것이다.

 

2억원을 후원한 익명의 70

 

이어서 후원하게 된 곳이 승가원이다. 승가원 역시 외부에서 도움을 주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곳이다. 장애인 등 혼자의 힘으로는 살아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수용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원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다.

 

승가원에서는 매 번 우편물을 보내 오고 있다. 최근 우편물에서 어느 익명의 후원가족이 2억원을 쾌척하였다는 보도를 보았다. 기사중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2억원의 나눔이 정해진 날은 지난 10 29일 수요일, 지로를 통해 2억원의 후원금이 승가원에 입금 된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승가원 근무가족은 큰 나눔에 놀라며 뛸 듯이 기뻐하였다. 2억원이라는 크나큰 나눔을 보내주신 후원가족님이 누구신지 찾아 보았으나 승가원에 남겨진 정보는 그 분의 성함과 주소뿐이었다.

 

익명의 후원가족님께서는 70대 어르신으로 2002년에 처음으로 나눔을 전해주시고 올해 봄에도 1백만원의 큰 나눔을 전해 주셨다.

 

 

(승가원, 2014 11 20일자, 익명의 후원가족, 2억원 쾌척)

 

 

 

 

 

2억원 후원의 주인공은 70대의 노인이라 하였다. 기사에 따르면 어떤 연유로 후후원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알고자 하였다.  그러나 후원자를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익명의 후원자라 한 것이다.

 

승가원에서는 익명의 후원자를 위하여 승가원이 앞으로 장애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며 보답하는 것이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죽어서 무엇을 가져가는가? 

 

자신의 힘으로는 살아 갈 수 없는 자를 도와 주는 것은 정상적인 신체와 정신을 가진 자의 당연한 의무이다. 그러나 돈이 들어 간다. 70대의 익명의 노인처럼 2억원을 보시하였다면 엄청난 금액이 수중에서 나간 것이다. 인색한 자는 자신의 통장에서 돈이 나가는 것에 대하여 자신의 살점 떨어져 나가는 것처람 아깝게 생각하지만 사무량심으로 살아 가는 자에게는 기쁨이다. 

 

모으기만 하고 쓸 줄을 모르는 천박한 부자들은 돈을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 은행에 번 만큼의 잔고가 있어야 하고, 부동산 등기부에 자신의 소유로 되어 있어야 안심한다. 그래서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 주변에 대하여 돈 나가는 것에 대하여 사시나무 떨 듯 한다. 그렇다면 나이가 들어 늙고 병들어 죽어 갈 때 그 많은 재산을 가져 다 갈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아들 없음의 경2(S3.20)’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존]

곡물도 재산도 금과 은도

또한 어떠한 소유도

노예, 하인, 일꾼 또는 그의 친인척도

모두 놓고 가야 하네.

 

신체적으로 행하는 것

언어적으로 행하는 것

정신적으로 행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것,

그는 그것을 가지고 가네.

그림자가 몸에 붙어 다니듯

그것이 그를 따라 다니네.”(S3.20, 전재성님역)

 

 

그가 가져 가는 것은 평생 피땀 흘려 일구어낸 재산이 아니다. 그리고 처와 자식도 아니다. 그가 가져 가는 것은 오로지행위(kamma)’일 뿐이다. 그가 재산을 일구는 과정에서 불법과 탈법을 자행하고, 투기 등으로 인하여 불로소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 행위만을 가져 갈 뿐 결코 재산을 가져 갈 수 없다. 그가 그 지위에 오르기 위하여 중상모략 등으로 남을 밟고 올라 갔다면 그 행위만을 가져 갈 뿐 지위를 가져 갈 수 없다.

 

천박한 부자는 죽을 때 까지 막대한 재산을 손아귀에서 놓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그 재산을 가져 가는 것이 아니다. 재산을 끝까지 움켜 쥐고 있어 보지만 아무 것도 가져 갈 수 없다. 그런 재산을 집에다 가져 놓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은행에 맡겨 놓아 보지만 사실상 그 재산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자신이 운용해야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은행에 맡겨 놓았다면 장부상으로만 자신의 것이다. 은행에 맡겨 놓은 재산은 은행의 것이다. 은행에서 활용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돈 많은 천박한 부자가 평생 먹을 것 안먹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가치있게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자신의 재산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더구나 재산 형성 과정에서 불법, 탈법, 중상모략 등 악행을 저질렀다면 그가 가져 갈 수 있는 것은 악행뿐이다. 그에 대한 과보는 악처가 되기 쉽다.

 

공덕이야말로 저 세상에서 뭇삶들의 의지처가 되리

 

현명한 자는 쓸 줄 아는 자이다. 번 만큼 자신과 가족과 주변을 위해서 베푸는 자이다. 이렇게 나누고 베풀면 돈이 많이 들어 갈 것이다. 통장에서 돈이 빠져 나가기 때문에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진짜 없어져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까? 

 

나눔 등으로 빠져 나가는 돈은 손실이 아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보시에 대한 공덕으로 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이 베풀면 베풀수록 공덕은 쌓여만 간다. 돈은 줄지만 느는 것은 공덕이다. 그래서 죽음에 이르렀을 때 돈을 가져 갈 수는 없지만 그 동안 쌓은 공덕을 가져 갈 수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정견이다. 

 

열심히 번돈을 이웃을 위하여 베푼자는 죽을 때 통장에 잔고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삶의 과정에서 베풀었으므로 그 행위에 대한 공덕을 가져 갈 수 있다. 죽어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공덕행이라는 노잣돈을 가져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인색한 자는 죽어서 빈털터리로 가지만 반대로 베풀고 산 자는 공덕이라는 든든한 노잣돈을 가지고 간다. 그래서 선처에 나기 쉽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Tasmā kareyya kalyāa

nicaya samparāyika,
Puññ
āni paralokasmi

patiṭṭhā honti pāinanti.

 

그러므로 착하고 건전한 일을 해서

미래를 위해 쌓아야 하리.

공덕이야말로 저 세상에서

뭇삶들의 의지처가 되리.”(S3.20, 전재성님역)

 

  

 

2014-11-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