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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와 내세의 이익을 위하여, 코끼리발자국의 비유와 불방일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1. 14. 11:52

 

현세와 내세의 이익을 위하여, 코끼리발자국의 비유와 불방일

 

 

 

부지런함은 미덕이다. 어떤 현자들도 부지런함을 찬양한다. 부지런함의 반대말은 게으름이다. 어떤 사람들도 게으름을 부정한다. 부지런함에 대하여 한자어로 불방일이라 하고, 게으름에 대하여 방일이라 하다. 빠알리어로는 불방일은 압빠마다(Appamāda)’라 하고 방일을 빠마다(pamāda)’라 한다.

 

딱딱한 문장과 유려한 문장

 

불방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이 사왓티에 계실 때 빠세나디왕과 나눈 대화에서이다. 먼저 빠세나디왕이 세존이시여, 현세의 이익과 내세의 이익, 양자의 이익이 되는 하나의 원리가 있습니까?(S3.17)”라고 묻는다. 현재의 삶과 내생의 삶에 도움이 되는 어떤 법칙이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원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빠세나디왕의 질문에 부처님은 하나의 원리가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여기서 하나의 원리란 빠알리어로 ‘eko dhamma’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묵스님은 하나의 법이라 번역하였다. 담마에 대하여 원리라 번역한 전재성님과 대조적이다.

 

초불연에서는 담마에 대하여 초지일관 한자어 으로 번역한다. 그러다 보니 번역이 경직된다. 경직된다는 말은 딱딱하다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반면 전재성님은 담마라는 용어에 대하여 진리, 가르침, 원리, 법칙, , 등 문맥에 맞게 다양하게 번역한다. 이렇게 다양하게 번역하다 보니 문장이 유려하다.

 

오타인가 오역인가?

 

빅쿠보디는 ‘eko dhamma’에 대하여 ‘one thing’으로 번역하였다. 이런 번역방식은 의외이다. 왜 그런가? 빅쿠보디의 CDB해제 글에 따르면 Dhamma는 가급적 원어 의미 그대로 전달하기 위하여 Dhamma로 번역한다는 방침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Dhamma에 대하여 teaching(가르침)의 의미가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Dhamma’로 하였음을 밝혔다. 이런 방식을 초불연에서 받아 들여 담마에 대하여 법으로만 번역하였다. 그러다 보니 여기서도 법, 저기서도 법이 되어 그 법이 어떤 법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이번 번역 역시 담마를 법으로 번역하여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 둘 다를 성취하여 확고하게 하는 하나의 업이 있습니까?”라 하였다. 그런데 하나의 업이라 하였다. 이는 오타일까 오역일까?

 

‘eko dhamma’는 하나의 업이 아니라 하나의 법이라고 번역해야 맞다. 그러나 오타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힘들다. 초불연 상윳따1권이 2009 11월 초판 인쇄된 이래 2013년판 현재 초판2쇄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 둘 다를 성취하여 확고하게 하는 하나의 업이 있습니까?”

 

대왕이여, 참으로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 둘 다를 성취하여 확고하게 하는 하나의 업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떤 하나의 법이 참으로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 둘 다를 성취하여 확고하게 합니까?”

 

(초불연 상윳따, 불방일의 경 S3.17, 각묵스님역)

 

 

빠세나디왕이 물어보고 부처님이 답하는 문답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eko dhamma’에 대하여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업이라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법이라 하였다. (kamma)과 법(dhamma)은 분명히 다른 말이다. 그럼에도 담마에 대하여 업과 법으로 번역한 것은 오타인지 오역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코끼리발자국의 비유1

 

빠세나디왕의 질문에 부처님은 현생과 내세의 이익을 가져 오게 하는 하나의 원리(eko dhammo)’ 가 있다고 하였다. 그 원리란 무엇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코끼리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세존]

대왕이여, 현세의 이익과 내세의 이익, 양자의 이익이 되는 하나의 원리는 방일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왕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걸어 다니는 뭇삶의 발자국이든지 그 모든 것들은 꼬끼리의 발자국안에 들어가므로 그들 가운데 그 크기에 관한 한 코끼리의 발자국을 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는 것도 현세의 이익과 내세의 이익, 양자의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Appamādasutta -방일하지 않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3.17, 전재성님역)

 

 

 

elephant’s footprint

 

 

부처님은 불방일에 대하여 코끼리발자국의 비유를 들었다. 이 세상 살아 있는 것 중에서 코끼리발자국이 가장 크므로 그 발자국안에 모두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현세와 내세의 이익이 되는 것은 모두 불방일에서 비롯된다. 코끼리 발자국이 모든 뭇삶의 발자국을 포섭하는 것처럼, 불방일은 모든 이익이 되는 것의 근본이 된다.

 

코끼리발자국의 비유2

 

법구경 두 번째 품이 방일하지 않음의 품(Appamānavagga)’이다. 이 품에서는 불방일에 대한 게송이 열 두개 등장한다. 이 밖에도 초기경전 도처에서 불방일에 대한 가르침이 매우 많다. 그런데 불방일에 대하여 코끼리 발자국에 비유한 경이 하나 더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걸어 다니는 뭇삶의 발자국이든지 그 모든 것들은 코끼리의 발자국에 들어가므로 그들 가운데 그 크기에 관한 한 코끼리의 발자국을 최상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 있든지 그 모든 것들은 방일하지 않음을 근본으로 하고 방일하지 않음을 귀결로 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 가운데 방일하지 않음을 최상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방일하지 않으면,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닦고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익히라는 것은 자명하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방일하지 않으면, 어떻게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닦고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익히는가?

 

(Padasuttā-발자국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140, 전재성님역)

 

 

elephant’s footprint

 

 

 

발자국의 경에서도 불방일을 코끼리발자국으로 비유하였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불방일하는 것에 대하여 팔정도를 닦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래서 수행승이 방일하지 않으면,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닦고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익히라는 것은 자명하다.”라 하였다.

 

새벽의 비유와 불방일 

 

불방일에 대하여 또 하나의 비유를 든다면 새벽의 비유를 들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태양이 떠 오를 때 그 선구이자 전조가 되는 것은 바로 새벽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생겨날 때 그 선구이자 전조가 되는 것은 방일하지 않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계행을 지키면,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닦고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익히라는 것은 자명하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방일하지 않으면, 어떻게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닦고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익히는가?

 

(Appamādasutta- 방일하지 않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54, 전재성님역)

 

 

 

dawn

 

 

아침에 해가 떠 오르기 전에 전조가 있다. 그것은 새벽이다. 해가 떠 오르기 전에 동쪽 하늘이 밝게 빛나는 것이 새벽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해가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이익의 전제 조건으로 새벽과 같은 불방일을 들 수 있다. 그래서 모든 불방일은 착하고 건전한 행위나 모든 이익의 되는 행위의 전제조건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가르침의 입장에서 새벽과도 같은 것이 팔정도이다. 왜 그럴까? 팔정도를 닦는 것이야말로 모든 가르침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코끼리발자국의 비유3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성제이다. 사성제의 진리는 팔정도로 실천된다. 사성제의 도성제가 팔정도이고, 팔정도의 정견이 사성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성제와 팔정도는 서로 맞물려 있다. 그런데 종종 사성제를 코끼리 발자국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싸리뿟따]

벗들이여, 움직이는 생물의 발자취는 어떠한 것이든 모두 코끼리의 발자취에 포섭되고 그 크기에서 그들 가운데 최상이듯, 벗들이여, 이와 같이 착하고 건전한 원리라면 어떠한 것이든 모두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포섭됩니다. 네 가지는 어떠한 것입니까?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입니다.

 

(Mahāhatthipadopama Sutta-코끼리 발자취에 비유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28,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인 사성제에 대하여 코끼리발자국과도 같은 것이라 한다. 코끼리발자국에 어떤 생물의 발자취도 모두 들어 가듯이,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은 모두 사성제 안에 포섭됨을 말한다. 사성제가 최상의 가르침임을 말한다.

 

번역비교를 해 보면

 

부처님은 빠세나디왕에게 방일하지 않음이 현세의 삶과 내세에도 모두 이익이 됨을 말씀 하셨다. 그리고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방일하지 않음의 경(S3.17)

 

빠알리어

Āyu ārogiya vaṇṇa

sagga uccākulīnata,
Ratiyo patthayantena

uārā aparāparā,
Appam
āda pasasanti

puññakiriyāsu paṇḍitā

Ratiyo patthayantena

전재성님역

[세존]

장수와 건강과 미모와

하늘나라와 높은 가문과

고매하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원하는 자를 위하여,

공덕을 짓는데 방일하지 않음을

지혜로운 님은 찬양하네.”

즐거움을 원하는 자를 위하여

각묵스님역

“수명과 건강, 아름다움과 명성

명망과 천상, 높은 가문과 고상한 즐거움

이런 것을 계속해서 소망하는 현자들은

공덕을 지으면서 불방일 찬탄하네.”

소망하는 현자들은

빅쿠보디역

“For one who desires long life and health,

Beauty, heaven, and noble birth,

[A variety of] lofty delights

Following in succession,

The wise praise diligence

In doing deeds of merit.”

For one who desires

 

 

 

한글 번역을 보면 큰 차이가

 

두 한글 번역을 보면 큰 차이가 난다. 장수와 미모, 천상, 높은 가문 등은 세속적인 것이다. 그러나 현자들은 세속적인 쾌락을 추구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Ratiyo patthayantena: Ggs.I.157에 따르면, 구격(ins.)‘patthayantena’는 수반구격(com ins.)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공덕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현자가 외적인 즐거움과 향락을 추구하는 자들과 맞닥뜨리는 것이 이 시의 주제이다.

 

(상윳따1 899번 각주, 전재성님)

 

 

게송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진다. 전반부에서는 세속적인 쾌락에 대한 것이고, 후반부는 현자의 처신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현자는 세속적인 즐거움을 멀리고 하고 항상 방일하지 않아야 함을 강조 하고 있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이와 다르다.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명백히 현자들이 세속적인 즐거움을 소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수명과 건강, 아름다움과 명성 명망과 천상, 높은 가문과 고상한 즐거움이런 것을 계속해서 소망하는 현자들은이라 하여 마치 현자들이 세속적 쾌락을 바라는 것처럼 번역하였다. 물론 뒤에 공덕을 지으면서 불방일 찬탄하네라는 구절이 붙어 있긴 하지만 이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오해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는 각주로 설명이 되어야 하나 보이지 않는다.

 

빅쿠보디의 cdb에서도 이 구절에 대한 각주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전재성님의 경우 각주로서 보충설명하였다. 누구나 수명이나 용모, 명예, 행복 등을 추구하지만 이는 보시와 지계 등을 실천함에 따라 가능함을 주석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그 주석의 내용이 ‘Ggs.I.157’로 되어 있다. 이는 기존 주석서와 다른 것이다. 그래서일까 빅쿠보디도 언급이 없었던 것 같다.

 

각묵스님의 번역은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각주에서도 설명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빅쿠보디는 장수와 건강과 미모 등 고매하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바라는 자들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For one who desires long life and health, Beauty, heaven, and noble birth”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현명한 자는 이익이 되는 행위를 가져 오게 하는 근면함을 따른다고 하였다. 이는 “The wise praise diligence In doing deeds of merit.”라는 문구로 알 수 있다. 이렇게 게송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전반부는 세속에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범부와 후반부는 항상 알아차리며 방일하지 않는 현자들을 대비 시켰다. 그럼에도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마치 현자가 세속적인 즐거움의 추구는 물론 불방일도 함께 추구하는 것으로 하였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는 맞을지 모르지만 각론적으로 본다면 부족한 번역으로 본다.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다섯 가지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이 게송에 대하여 이 시 408과 다음시 409 AN.III.48-49 에도 나온다.(900번 각주)”라 하였다. AN.III.48-49의 뜻은 PTS본 앙굿따라니까야 3 48-49페이지에 실려 있는 경을 말한다.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장자여,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지만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이와 같은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다섯 가지란 무엇입니까?

 

1) 장자여, 수명은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지만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 용모는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지만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 행복은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지만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 명성은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지만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 천상은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지만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 장자여,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지만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이와 같은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Pañcaiṭṭhadhammasutta -다섯 가지 원하는 것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43, 전재성님역)

 

 

여기서 장자는 아나타삔디까를 말한다. 부처님 당시 대부호로서 부처님의 큰 후원자이었다. 그리고 신심있는 재가신자이었다.

 

부처님은 아나타삔디까에게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지만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다섯 가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수명, 용모, 행복, 명성, 천상 이렇게 다섯 가지를 말한다.

 

어떻게 해야 얻어지는가?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다섯 가지가 수명, 용모, 행복, 명성, 천상이다.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방일하지 않음의 경에서 장수와 건강과 미모와 하늘나라와 높은 가문과 고매하고 지속적인 즐거움라 하였다. 장수와 용모, 행복, 천상 등이 일치 한다. 이런 것들은 세속사람들이나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수명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장자여, 고귀한 제자가 수명을 원하거나 수명을 청원하거나 수명을 환희 하거나 수명을 선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장자여, 고귀한 제자가 수명을 원한다면, 수명으로 이끄는 길을 실천해야 합니다. 수명으로 이끄는 길을 실천하면, 수명을 획득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는 천상의 수명이나 인간의 수명을 얻습니다.”

 

(Pañcaiṭṭhadhammasutta -다섯 가지 원하는 것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43,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단지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옳지 않음을 말한다. 오래 살기를 원한다면 수명으로 이끄는 길을 실천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 길은 어떤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보시와 지계 등을 통한 공덕의 길을 말한다.(Mrp.III.252)”라고 되어 있다. 이하 용모, 행복, 명성, 천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방일하지 않은 것을 청원한다

 

부처님은 아나타삔디까에게 다섯 가지 원하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런데 대부호이자 보시와 지계를 실천하고 신심있는 재가신자인 아나타삔디까는 사실상 수명, 용모, 행복, 명성, 천상 이렇게 다섯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사람들은 보시와 지계 등의 실천 없이 단지 수명, 용모, 행복, 명성, 천상 이렇게 다섯 가지를 원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신다.

 

 

Āyu vaṇṇa yasa kitti

sagga uccākulīnata,
Ratiyo patthay
ānena

uārā aparāpara,

 

Appamāda pasasanti

puññakiriyāsu paṇḍitā,
appamatto ubho atthe

adhigahāti paṇḍito.

 

[세존]

수명과 용모와 성공,

명성과 천상과 귀족,

점점 더 광대한 쾌락을

청원하는 자가 있네.

 

현명한 자는 공덕을 짓는데

방일하지 않은 것을 청원한다.

현명한자는 방일하지 않아서

두 가지 이익을 얻네.”

 

(Pañcaiṭṭhadhammasutta -다섯 가지 원하는 것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43, 전재성님역)

 

 

게송을 보면 두 개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 게송은 세속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바라기만 할 뿐 보시와 지계등을 실천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게송을 보면 방일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보시와 지계를 실천하기 때문에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다섯 가지 이익을 얻을 것이라 한다.

 

게송을 비교해 보면

 

그런데 빠알리 게송을 보면 상윳따니까야 방일하지 않음의 경(S3.17)’에 실려 있는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이를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다섯 가지 원하는 것의 경

(A5.43)

방일하지 않음의 경

(S3.17)

빠알리어

Āyu vaṇṇa yasa kitti

sagga uccākulīnata,
Ratiyo patthay
ānena

uārā aparāpara,

 

Appamāda pasasanti

puññakiriyāsu paṇḍitā,
appamatto ubho atthe

adhigahāti paṇḍito.

Āyu ārogiya vaṇṇa

sagga uccākulīnata,
Ratiyo patthayantena

uārā aparāparā,

Appamāda pasasanti

puññakiriyāsu paṇḍitā

 

전재성님역

수명과 용모와 성공,

명성과 천상과 귀족,

점점 더 광대한 쾌락을

청원하는 자가 있네.

 

현명한 자는 공덕을 짓는데

방일하지 않은 것을 청원한다.

현명한자는 방일하지 않아서

두 가지 이익을 얻네.”

장수와 건강과 미모와

하늘나라와 높은 가문과

고매하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원하는 자를 위하여,

공덕을 짓는데 방일하지 않음을

지혜로운 님은 찬양하네.”

초불연

“수명과 아름다움과 명성과 명망과 천상과 높은 가문과

고상한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원하는 자는

[방일하지 말지어다].

 

현자들은 공덕을 짓는 행을 찬탄하나니

현자는 방일하지 않아 두 가지 이익을 성취하누나.

그것은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이라.

슬기로운 자는 이러한 이익과 함께하기 때문에

현자라 한다네.

(대림스님역)

“수명과 건강, 아름다움과 명성

명망과 천상, 높은 가문과 고상한 즐거움

이런 것을 계속해서 소망하는 현자들은

공덕을 지으면서 불방일 찬탄하네.”

(각묵스님역)

 

 

 

두 개의 경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번역과 초불연의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의 번역을 비교해 보았다.

 

수명, 용모, 행복, 명성, 천상을 성취하려면

 

앙굿따라니까에서는 두 개의 게송이 비교 되고 있다. 그레서 외적인 즐거움과 향락을 추구하는 자와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지혜로운 자가 구분되어 있다. 초불연의 대림스님 역시 구분하여 번역하였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야의 게송을 보면 한 게송으로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잘 구분이 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같은 게송에서 전반부와 후반부의 내용은 다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즐거움을 원하는 자를 위하여라는 문구에 대하여 각주에서 외적인 즐거움과 향락을 추구하는 자라고 설명해 놓았다. 그러나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각주에서 설명 없이 마치 외적인 즐거움과 향락을 추구하는 자들이 마치 현자인 것처럼 번역하였다. 이는 오해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장수, 외모 등 외적인 즐거움과 행복 명성 등 향락을 추구하는 자들이 불방일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는 매우 힘들다. 혹시 아나타삔디까와 같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대부분 범부들은 아름다움 용모나 오래 살고 행복하고 천상에 나기를 청원 할 뿐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니 현세는 물론 내세에서도 다섯 가지를 가지기 힘들다. 그러나 현명한 자들은 보시하고 지계 하는 등 불방일하기 하기 때문에 현세는 물론 내세에서도 이익을 가져 올 수 있다. 그래서  수명, 용모, 행복, 명성, 천상 이렇게 다섯 가지를 성취하려면 방일하지 않고 지계와 보시 등을 실천하여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부처님이 말씀 하셨다.

 

 

 

2014-11-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