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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자로 태어날까? 모성본능과 위대한 어머니로서의 여성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1. 10. 15:14

 

왜 여자로 태어날까? 모성본능과 위대한 어머니로서의 여성

 

 

 

이다음에 태어나면

 

즐겁고 유쾌한 곳이 결혼식장이다.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이 인연 있는 사람에게 미래의 번영과 행복을 축하해 주는 자리이다. 이어서 피로연 자리로 이동하여 준비한 음식을 마음껏 즐기는 것이 요즘 결혼식장의 모습이다.

 

알고 지내는 법우님의 딸이 결혼 하였다. 두 딸을 키웠는데 모두 출가 시킨 것이다. 마치 할 일 을 다해 마친 듯 홀가분한 모습이다. 이런 자리에 여러 명의 법우님들이 모여 부페음식을 들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자리에 참석한 여성법우님들에게 물어 보았다. “이다음에 태어나면 남자로 태어나고 싶어요 다시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요?”라고 넌지시 물어 본 것이다. 대답은 의외의 결과 이었다. 세 분의 법우님 중에 두 명은 다시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한 분은 다시 태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하였다. 남자로 태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질문하였으나 의외의 결과 이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다시 태어난다고 하였을 때 당연히 남자로 태어나리라고 여긴다. 여자로 태어나리라고 생각조차 해 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일종의  남성우월주의에 기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남녀 양성 평등의 시대라고 하지만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성차별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주를 출산하였다는 소식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성차별이 있을 수 없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빅쿠니상윳따(S5)에 따르면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S5.2)”라는 게송이 있다. 여성이라도 가르침을 실천하면 궁극적 경지에 올라 갈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불교에서는 성의 차별이 없다. 하지만 부처님 당시에는 성의 차별이 있었다.

 

부처님이 사왓티에 계실 때의 일이다. 그 때 당시 빠세나디국왕과 함께 있었다. 이때 국왕의 부하가 왕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대왕이시여, 말리까왕비께서 공주를 출산하셨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경에 따르면 이렇게 말했을 때 꼬살라국의 빠세나디 왕은 기뻐하지 않았다.(S3.16)”라 하였다.

 

국왕은 왜 기뻐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하여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왕은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던 [말리까 왕비를] 나는 큰 위력을 가진 [왕비의] 지위에 올려 놓았다. 만일 그녀가 아들을 낳았더라면 그녀는 큰 영광을 얻었을 것인데 이제 그 기회를 잃어버렸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기뻐하지 않았다.”(SA.i.155)

 

(초불연 상윳따1 404번 각주, 각묵스님)

 

 

왕이 기뻐하지 않은 이유가 아들을 낳지 못한 것도 있지만  말리까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기뻐하지 않은 것이라 하였다. 미천한 출신의 말리까왕비가 아들을 낳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의 발로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주석은 이어지는 게송을 보면 동떨어진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동일한 내용의 CDB각주와 초불연의 각주

 

이 부분과 관련하여 전재성님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내용의 각주가  CDB에도 있다. 빅쿠보디는 주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Spk: He was displeased thinking, " I elevated Queen Mallika from a poor family to the rank of queen. If she had given birth to a son she would have won great honour, but now she has lost that opportunity. "

(CDB 238번 각주, 빅쿠보디)

 

 

내용은 초불연 각주와 동일하다. 이어지는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This daughter was almost certainly the Princess Vajiri (see MN II 110,10-18), who was later married to King Ajatasattu of Magadha after the two kings were reconciled. Prince Vidudabha, the heir to the throne, was begotten from another wife of Pasenadi, Vasabha-khattiya, a Sakyan lady of mixed descent who was passed off to Pasenadi as a pure-bred Sakyan princess. Vidudabha later usurped the throne and left his father to die in exile. When he learned that the Sakyans had deceived his father he massacred them and almost decimated the entire Saykan clan.

 

(CDB 238번 각주, 빅쿠보디)

 

 

이 각주는 빅쿠보디의 개인적인 견해이다. 말리까부인이 낳은 딸이 맛지마니까야에 등장하는 와지리임이 분명하고 말하면서 경의 내용과 관계가 없는위두다바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 하고 있다. 이 각주에 대한 해석은 초불연 각묵스님의 각주와 똑 같다. 초불연의 각주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딸은 와지리 공주임에 분명하다. (M87/ii.110. 24참조) 와지리공주는 빠세나디왕이 아자따삿뚜왕과 화해를 한 뒤에 아자따삿뚜 왕의 아내가 되었다. 왕의 아들 위두다바(Vidudabha)는 말리까왕비에서 난 아들이 아니다. 빠세나디왕은 부처님과 인척관계를 맺고 싶어 하였으며 그래서 사꺄족의 딸과 결혼하고자 하였다. 자부심이 강한 사꺄족은 마하나와와 하녀사이에 난 딸인 와사바캇띠야를 보냈으며, 이들 사이에서 난 아들이 바로 위두다바 왕자이다. 위두다바 왕자가 커서 까삘라투를 방문하였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격분하였고, 그래서 후에 위두다바는 사꺄를 정복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참한 살육을 하였다고 한다.

 

(초불연 상윳따1 404번 각주, 각묵스님)

 

 

빅쿠보디의 각주와 같은 내용이다. 다만 마지막 문구에 하였다고 한다라는 구절만 다를 뿐 형태와 사용단어는 동일하다.

 

부처님의 평등의 가르침

 

빠세나디왕은 사랑하는 왕비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에 기뻐하지 않았다. 내심 아들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신다.

 

 

  

딸의 경(S3.16) 게송1

  

빠알리어

Itthī pi hi ekacciyā

seyyā posa janādhipa,
Medh
āvinī sīlavatī

sassudevā patibbatā.

seyyā posa

전재성님역

[세존]

백성의 왕이여, 여인이라도

어떤 이는 실로 남자보다 훌륭하니

총명하고 계행을 지키며

시부모를 공경하고 지아비를 섬기네.”

남자보다 훌륭하니

각묵스님역

만백성의 왕이여, 여인이라 할지라도

어떤 자는 남자보다 훨씬 뛰어나니

그녀는 현명하고 계를 잘 지키며

시부모를 공경하고 지아비를 섬기노라.”

남자보다 훨씬 뛰어나니

빅쿠보디역

“A woman, 0 lord of the people,

May tum out better than a man:

She may be wise and virtuous,

A devoted wife, revering her mother-in-law”

better than a man

 

 

부처님의 양성평등사상이 담겨 있는 게송이다. 부처님 당시 사성계급에 의하여 차별 받듯이 여성도 차별 받았다. 이는 태생에 따른 차별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태생에 의한 차별을 부정하였다. 그래서 태어나면서 바라문인 것도 아니오 .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행위에 의해서 바라문도 되는 것이오(stn136)”라 하여 태생에 의한 차별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행위에 의하여 차별이 있을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서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고귀하네. (S7:9)”라 하였다.

 

부처님의 평등의 원칙은 여성에게도 적용된다. 게송에서 백성의 왕이여, 여인이라도 어떤 이는 실로 남자보다 훌륭하니(Itthī pi hi ekacciyā seyyā posa janādhipa, S3.16)”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왕보다 훌륭한 여자

 

부처님은 여성도 남자 보다 훌륭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어지는 문구에서 총명하고 계행을 지키며 시부모를 공경하고 지아비를 섬기네라고 하였다. 남자와 여자가 근본적으로 평등하긴 하지만 성의 차이에 따라 역할이 분명하게 있음을 말씀 하신 것이다. 이 게송과 관련하여 전재성님과 각묵스님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빅쿠보디는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In pada b, I follow Eel & 2 in reading posa, “than a man," though Be and Se, as well as Spk, read posa, which Spk glosses as the imperative posehi, "nourish (her)."

 

Spk sees the comparison with a son implicit in seyya: "Even a woman may be better than a dull, stupid son." In pada d, sassudeva literally means "having (her) mother-in-law as a deva"; Spk adds father-in-law in the gloss.

 

(CDB 407P 239번 각주, 빅쿠보디)

 

 

빠알리게송 두 번째 구절에 “seyyā posa janādhipa”가 있다. 여기서 posa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하는 남자(man)’의 뜻이고, 또 하나는 양육(nourished)’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남자라는 존재는 어머니로부터 나와서 양육되고 보호받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는 남자 보다 더 훌륭할 수 있음을 말한다.

 

네 번째 구절의 ‘sassudevā는 문자적으로 "having (her) mother-in-law as a

Deva(시어머니를 갖는)의 뜻이다. 그래서일까 빅쿠보디는 직역하여 revering her mother-in-law(시어머니를 존경하는)”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주석서의 견해는 시어머니뿐만 아니라 시아버지(father-in-law)’도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과 각묵스님은 모두 시부모를 섬긴다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여인은 남자 보다 훌륭할 수 있음을 말하였다. 이는 seyyā posa janādhipa”에서 은유적으로 나타난다. ‘janādhipa’의 뜻이 “a king (of men)”이기 때문에 이 구절은 만백성의 왕, 그 왕의 아들 보다 훌륭하다는 뜻이 된다.

 

여인이 위대한 이유는?

 

그렇다면 어떻게 여자가 남자 보다 더 뛰어날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은 게송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딸의 경(S3.16) 게송2

  

빠알리어

Tassā yo jāyatī poso

sūro hoti disampati,
T
ādisā subhagiyā putto

rajjampi anusāsatīti.

disampati 

전재성님역

[세존]

그런 여인에게서 태어난 남자는

세계의 영웅이 되니

그러한 훌륭한 여인의 아들이야말로

왕국을 지배할 수 있네.”

세계의 영웅이 되니

 

각묵스님역

그런 그녀에게서 태어난 남자는

마땅히 영웅이 되리니, 사방의 주인이여

그런 훌륭한 여인의 아들이

왕국을 제대로 통치할 것이로다.”

사방의 주인이여 

빅쿠보디역

“The son to whom she gives birth

May become a hero, 0 lord of the land.

The son of such a blessed woman

May even rule the realm.”

0 lord of the land 

 

 

Motherhood

 

 

빠알리게송 두 번째 구절에 disampati’가 있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사방의 주인이여라 번역하였다. 별도의 호격으로 처리한 것이다. 이는 빅쿠보디 역시 0 lord of the land(, 이땅의 주인이여)”라며 호격으로 처리하였다. 이에 각묵스님과 전재성님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빅쿠보디는 In pada b, it is uncertain from the text whether disampati is nominative or vocative, but I follow Spk, which glosses it with the vocative disājeṭṭhaka.(204번 각주)”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주석의 견해대로 윤문된 ‘disājeṭṭhaka’라는 문구를 따른다고 하였다.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disampati‘king’의 뜻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또 다른 설명으로 ‘A king of long ago’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His son was Renu and his chief stewards were firstly Govinda and later Jotipāla (D.ii.230f; Mtu.i.197ff)”라 되어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오래 전의 왕의 이름이 디삼빠띠인데 세계적인 영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디삼빠띠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sūro hoti disampati”에 대하여 세계의 영웅이 되니라 하여 별도의 호격 없이 번역하였다. 그러나 빅쿠보디는 disampati를 따로 떼어내어서 0 lord of the land (, 이땅의 주인이여)”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빅쿠보디의 견해를 중시하여 사방의 주인이여라 번역한 듯 하다.

 

여인에게 다섯 가지 고통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모태에서 태어났다. 세상을 호령하는 영웅호걸도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고 부처도 어머니배에서 나았다. 이렇게 보았을 때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다. 그래서일까 예로부터 여인은 아이를 출산해야만 대우를 받고 그것도 남자아이를 낳아야 떳떳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출산은 여인에게만 있는 고통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인에게는 다섯 가지 고통이 있다고 하였다. 

 

 

1) 세상에 여인들은 나이가 어릴 때에 시집가서 친족과 떨어져 지낸다.

2) 세상에 여인들은 월경을 한다.

3) 세상에 여인들은 임신을 한다.

4) 세상에 여인들은 분만을 한다.

5) 세상에 여인들은 남자에게 봉사를 한다.(S37.3)

 

 

초기경에 따르면 여인에게만 있는 다섯 가지 고통이다. 이는 오늘날이라고 하여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아마 혼자 살면 임신에 따른 출산의 고통, 그리고 남자에게 봉사하는 고통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페미니스트들은 혼자 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누구는 남자로 누구는 여자로

 

여인은 아이를 낳아야 위대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남자가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여자는 남자 보다 더 위대한 존재이다. 이 세상의 남자들이 모두 여인의 몸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여전히 남녀 차별이 존재한다. 시대가 바뀌어 아무리 남녀간의 성차별이 없다고 하지만 완전히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노골적으로 또 때로는 은연중에 성의 차별이 있다. 그렇다면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누구는 여자로 태어나고 또 누구는 남자로 태어나는 것일까?

 

앞서 언급한대로 여자들은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하였다. 남자들은 추호도 여자로 태어난다는 생각을 가져 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여자는 계속 여자로 태어나기를 바라고, 남자는 여전히 남자로 태어나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과학적 상식을 예로 들지 않는다. 다만 연기적 관점에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집착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모성본능에 따른 집착때문에

 

십이연기에 따르면 다시 태어남을 유발하는 직접적인 요인은 갈애로부터 시작된다. 대상과 접촉하면 느낌이 발생하는데 이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을 때 필연적으로 좋거나 싫은 것에 대한 갈애가 일어난다. 갈애가 더욱 강화된 것이 집착이다. 그래서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일어난다라는 정형구로 표현 된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면 루비콘강을 건넌 것이나 다름 없다. 갈애가 더욱 강화 되어 이제 뗄레야 뗄 수 없는 집착으로 발전 되기 때문이다. 그런 집착은 필연적으로 다시 태어남(業有)’을 유발하고 말것이다. 그래서 십이연기 정형구에 따르면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가 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다시 태어남의 조건은 집착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자들이 남자보다 일반적으로 집착이 더 강하다는 사실이다. 왜 더 강할까? 그것은 모성본능과 관계가 있다.

 

여성들만이 아이를 낳는다. 자신의 배에서 낳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인 것을 안다. 그러나 남성들의 경우 다르다. 여성에 배에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지 알 수 없다. 이는 물론 특수한 케이스에 해당된다. 이렇게 본다면 여성이 아이에 대한 애착이 남성 보다 훨씬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애착은 일종의 집착이라 볼 수 있다.

 

자식에 대한 집착은 일반적으로 남성 보다 여성이 더 강한 편이다. 이는 아이를 여자가 낳아 양육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물학적 조건이어서일까 여성은 자식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하다. 그런데 집착은 다시 태어남을 유발하고 만다고 하였다. 여성이 남성 보다 집착이 강하므로 다시 태어날 때 여성은 또 다시 여성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물론 검증된 것은 아니다. 다만 집착의 관점에서 살펴 본 것이다.

 

여성은 위대한 존재

 

이 세상의 반은 남자이고 이 세상의 반은 여자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모두 여인으부터 나왔다.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호걸도 알고 보면 여인의 몸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여인은 매우 위대한 존재이다. 마치 만물을 있게 한 대지의 여신처럼 여인은 어머니로서의 위대한 존재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더 훌륭한 여인이 있다. 그것은 지혜로운 여인이다. 출산을 하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시부모를 공경하고 지아비를 섬긴다는 것도 지혜로운 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백성의 왕이여, 여인이라도

어떤 이는 실로 남자보다 훌륭하니

총명하고 계행을 지키며

시부모를 공경하고 지아비를 섬기네.

 

그런 여인에게서 태어난 남자는

세계의 영웅이 되니

그러한 훌륭한 여인의 아들이야말로

왕국을 지배할 수 있네.”(S3.16)

 

 

 

2014-11-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