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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다 보면 다 드러난다, 사람을 아는 네 가지 원리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1. 1. 21:44

 

함께 살다 보면 다 드러난다, 사람을 아는 네 가지 원리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마음은 짐작하여 알기 어렵다는 말이다. 보기에 상냥하고 예의바른 사람도 겪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일까 알고 지내는 분의 이야기에 따르면 사람은 육개월을 같이 살아 봐야 알 수 있습니다라 하였다. 또 어느 분은 미얀마에서 수행이야기를 하면서 수행공동체에서 살아 보면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라 하였다. 아무리 좋은 사람도 어느 수행자라도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외도에게도 아라한 칭호를 붙여도 되나?

 

사람은 겪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경이 있다. 빠세나디왕이 다섯 그룹의 외도 수행자와 대화를 나누고 난 다음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저들은 세상에서 거룩한 님과 거룩한 길을 성취한 님 가운데 어떤 쪽입니까? (S3.11)”라고 물었다. 여기서 거룩한 님은 ‘arahatta(아라한)’를 말한다. 그러나 외도수행자들에게 아라한이라고 칭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거룩한 님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과 관련된 빠알리어는 “ye te bhante loke arahanto vā arahattamagga vā samāpannā ete tesa aññatarāti. (S3.11)”이다. 여기서 bhante라 한 것은 부처님을 지칭한 것이다. arahatta라 한 것은 외도수행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렇게 빠세나디왕은 자신을 찾아온 외도수행자 5그룹과 부처님에 대하여 존칭을 사용하였다.

 

파세나디왕이 아라한이라 한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아라한이 아니다. 다만 외도 수행자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최고의 존칭을 불러 준 것이라 볼 수 있다. 만일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들이 외도 수행자를 지칭할 때 아라한이라 절대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왕이기 때문에 존중하는 의미에서 붙여 준 것으로 본다.

 

그러나 초불연의 경우 세존이시여, 세상에는 아라한들이나 아라한의 길을 증득한 자들이 있는데 저 분들은 그들 가운데 일부입니다.(S3.11)”라 번역하였다. Arahatta에 대하여 아라한이라고 직역한 것이다. 빅쿠보디 역시 아라한이라 번역하여 "Those, venerable sir, are to be included among the men in the world who are arahants or who have entered upon the path to arahantship.(S3.11)"라 하였다.

 

외도수행자에 대하여 아라한이라 부르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아라한은 부처님의 열 가지 별칭 중의 하나로서 가르침을 실천하여 깨달은 자에게만 붙여 주는 칭호이다. 그럼에도 외도 수행자에게 아라한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는 것은 그들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붙여 준 것이라 본다. 이렇게 본다면 번역에서 아라한이라는 말 대신 거룩한 님이라 번역한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계행을 지키는지는 함께 살아 보아야

 

빠세나디왕이 부처님에게 거룩한 님의 구별방법이 있는지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세속인으로서는 모를 것이라 하였다. 이유는 감각적 쾌락을 즐기며 사는 세속인들은 누가 거룩한 님인지 구별하기 힘들 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Savāsena kho maharāja sīla veditabba. Tañca kho dīghena addhunā na ittara.

 

대왕이여, 그들이 계행을 지키는지는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같이 살아보아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Sattajailasutta-일곱명의 결발 수행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3.1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가 정말로 존경받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함께 살아야 알 수 있는데 그것도 오랫동안 살아야 알 수 있음을 말한다. 오랫동안 함께 살게 되면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히 계행이 그렇다. 그래서 외도들이 계행을 지키는지는 살아 보아야 알 수 있음을 말한다.

 

낮에 한 말 다르고 밤에 행동 다르다면

 

그사람에 대하여 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언행이 일치 되는가를 보는 것이다. 낮에 한 말 다르고 밤에 행동하는 것이 다르다면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사람이다. 최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승려도박사건 같은 것이다.

 

승려도박사건이 다시 한번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것은 팟캐스트방송에서 보도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문자로 표현 된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시대에 누구나 다운 받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그 파급력은 매우 크다. 이미 정봉주의 전국구장윤선의 팟짱에서 보도 된 바 있다. 한번 방송 되면 백만번이상 다운로드 된다는데 알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종단의 지도자들의 더러운 행태에 대한 것이다.

 

팟캐스트에 출연한 장주스님은 모든 것을 폭로 하였다. 자신을 포함하여 열 여섯명의 상습도박승이 있다고 하였다. 충격적인 것은 현재 총무원장을 비롯하여 문화재관람료의 징수 대상이 되는 유명 전통사찰들이 이들 상습도박승들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도박을 즐기는데 이에 대하여 장주 스님은 도박의 중독의 무서움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왜 도박을 끊기 힘들까?

 

도박이 왜 무서운 것일까? 도박에 중독되면 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술이나 담배, 여자에 중독 되면 육체의 한계를 느껴 끊을 수 있지만 도박의 경우 육체의 한계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 맛들이면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진 것을 다 털어 먹기 전에는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 도박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한번 도박에 빠지면 패가망신한다고 한다.

 

승려들이 도박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종단을 책임지고 있는 고위직의 승려들이 도박으로 날을 샌다면 어떻게 될까? 도박을 하면 집도 팔아 먹고 심지어 아내도 딸도 팔아 먹는다고 하는데, 종단 고위층이 도박에 중독되면 불교재산이 남아 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표충사의 땅이 도박승에 의하여 팔렸다. 상습도박을 일삼는 주지스님이 도박빚을 갚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상습도박승이 종단에 고위직을 맡고 목 좋은 전통사찰을 장악하고 있는 한 불교의 미래는 없다.

 

보시 안한다고 호통치는 스님

 

불자들이 알고 있는 스님의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아마 이슬만 먹고 사는 사람들로 여길 것이다. 그래서 화장실도 가지 않는 사람으로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 함께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박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상습도박승들은 겉으로 보기에 수행자의 모습이다. 삭발을 하고 회색승복을 입었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이슬만 먹고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렇게 보았다.

 

16인의 상습도박승 중의 한 승려를 10여년전에 보았다.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하기 이전인 2004년 이전의 일이다. 아마 2000년에서 2003년 사이의 일이라 본다. 그 때 당시 의왕시에 있는 청계사를 갔었다. 그날은 부처님오신날이었다. 불자는 아니었지만 항상 정서적으로 불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에서 가까운 전통사찰을 찾아 간 것이다.

 

그날 오전에 청계사주지스님의 법문이 있었다. 그야말로 순수한 마음으로 법회에 참석하였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이 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가람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신도들을 대상으로 부처님오신날 특별법문을 주지스님이 하였다. 그 스님이 16명의 상승도박승 중의 하나인 J스님이었다. 그러나 그 때 당시에는 덕망 높은 스님으로만 알았다.

 

그때 당시 청계사 주지스님은 풍채가 좋아 보였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풍채가 좋아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게 보였다. 그런데 법문을 들어 보니 부처님 말씀에 대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보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그것도 호통치듯이 말하였다. 왜 보시를 열심히 하지 않느냐라고 들렸다.

 

이렇게 J스님을 기억하는 것은 첫경험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처음 경험한 것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데, 그날 J스님의 법문은 스님의 법문으로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래서 J스님의 풍채와 인상과 보시 하지 않는다고 호통치는 법문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다.

 

그 풍채 좋은 스님이 오늘날 상습도박승 혐의를 받고 있는 J스님이다. 이전에 불국사 주지를 하였다. 그래서 아직도 그 영향력이 막강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불국사에서 멀리 떨어진 경기도 의왕에 있는 청계사가 그 스님의 영향권에 들어 갔는지 알 수 없다.

 

언행일치가 안된 사람

 

사람은 겉으로 보아서 알 수 없다. 외모만 보아서는 행실이 바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10여년전 청계사에서 본 풍채좋은 주지스님 역시 훌륭한 스님으로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상습도박승 혐의를 받고 있다. 그래서일까 경에서는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것도 오랫동안 살아 보아야 계행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언행일치를 말한다. 낮에 한 말 다르고 밤에 하는 행동이 다르다면 언행일치가 안된 사람이라 볼 수 있다.

 

생경한 말 잡도리하다

 

그 사람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려면 같이 살아 보아야 한다. 그런데 경에서는 한가지 더 강조한다. 같이 오랫동안 살아 보아서 알 수도 있지만 무엇 보다 유심히 관찰해야 된다는 것이다. 예의 주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알지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Manasikarotā no amanasikarotā, S3.11)”라 하였다. 여기서 정신활동을 기울인다는 말이  ‘Manasikara’이다.

 

Manasikara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주의를 기울이는이라 번역하였다. 하지만 이런 번역어는 일관성이 없다. 초불연의 경우 ‘manasikara’에 대하여 잡도리하다라고 주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에서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과 지혜없이 마음에 잡도리함이다.(M2)”라 하였다. 여기서 잡도리하다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잡도리하다는 말은 매우 생소하고 생경한 말이다. 네이버사전을 찾아 보면 “1. 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우다.  2. 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단속하다. 3. 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 족치다.”의 뜻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말을 처음 들어 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선가(禪家)’에서는 통용되고 있는 말이라 보여진다.

 

불교방송 불교강좌 시간에 송담스님은 법문에서 잡도리라는 말을 하였다. 스님은 법문에서 “이렇게 다구치고 잡도리를 해 나갈 때 모든 번뇌와 망상이 발 붙일 것이 없어.(송담스님, 알기쉬운 불교이야기 2012-06-03)”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선가에서는 쓰는 특별한 말이 번역에 실렸음을 알 수 있다.

 

초불연에서 잡도리하다라는 말은 도처에서 사용되고 있다. 초불연에서 최초로 번역된 청정도론에서는 그가 허공을 대상으로 하는 알음알이를 전적으로 마음에 잡도리할 때 ‘끝없다’고 마음에 잡도리하기 때문이다.(Vism.10.29)”라 되어 있다. 알음알이라는 말도 생소하고 잡도리하다는 말도 생경하다. 디가니까야에서는 여래가 모든 표상들60)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D16)”라 하였다. 앙굿따라니까야 마음에 잡도리함 경에서는 마음으로 고찰한 것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지만, 그러나 마음에 잡도리함이 있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다.(A11.9)”라 하였다. 이렇게 빠알리어 마나시까라(manasikara)’에 대하여 잡도리하다라고 번역하였다.

 

초불연에서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과 지혜없이 마음에 잡도리함이다.(M2)”라고 번역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과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 것(M2)”라 번역하였다. 마나시까라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이는뜻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런 번역은 잡도리하다라는 말 보다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일까 최근 초불연 번역을 보면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상윳따니까야 일곱명의 결발 수행자의 경에서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에 의해서 알 수 있고라 하였다. 이전의 번역대로라면 잡도리하는 사람에 의해서 알 수 있고라 되었을 것이다.

 

아라한을 알아 보는 네 가지 방법

 

부처님은 그 사람이 거룩한 님인지 아닌 지 알아 보는 방법이 있다고 하였다. 모두 네가지 방법이다. 앞서 언급된 것은 계행이 어떤지 알려면 함께 살아 보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주의 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어 관찰하여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나머지 세 가지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No

구 분

아는 방법

1

계행

sīla

함께 살아 보아야

Savāsena

2

정직

soceyya

서로 대화를 통해 왕래를 해 보아야

Savohārena

3

견고

thāma

재난을 만났을 때

Āpadāsu

4

지혜

paññā

논의를 통해서

Sākacachāya

 

 

그 사람의 계행이 바른 지는 함께 살아 보면 알 수 있다. 수행처에서 함께 몇 달 살다 보면 그 사람의 단점이나 허물이 드러날 것이다.

 

Soceyya, 정직인가 깨끗함인가?

 

두 번째 항에서 정직과 관련된 항목이 있다. 빠알리어는 ‘soceyya’이다.  이는 ‘purity’의 뜻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깨끗함이라 번역하였다. 그래서 깨끗함은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S3.11)”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It is by dealing with someone, great king, that his honesty is to be known”라 하여, honesty(정직함)으로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soceyya’는 정직함과 깨끗함 어느 번역이 더 맞을까?

 

상윳따니까야 일곱명의 결발 수행자의 경(S3.11)’과 같은 내용의 경이 앙굿따라니까야에도 있다. ‘경우의 경(A4.192)’가 그것이다. 이 경에 따르면 상윳따니까야의 경에서 표현 되어 있지 않은 내용이 있다. 일종의 보충설명이라 볼 수 있다.

 

경에 따르면 정직한지 어떤 지는 대화를 해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Savohārena bhikkhave soceyya veditabba. Tañca kho dīghena addhunā na ittara. Manasikarotā no amanasikārā, paññavatā no duppaññenāti iti kho paneta vutta, kiñceta paicca vutta?

Idha bhikkhave puggalo puggalena saddhi savohāramāno eva jānāti: aññathā kho ayamāyasmā ekena eko voharati, aññathā dvīhi, aññathā tīhi, aññathā sambahulehi. Vokkamati ayamāyasmā purimavohārā pacchimavohāra. Aparisuddhavohāro ayamāyasmā, nāyamāyasmā parisuddhavohāroti.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정직한지는 서로 대화를 통해 왕래 해 보아야 알 수 있다. 그것도 오랫동안 같이 살아보아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다.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알 수 있지,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지혜로워야 알 수 있지, 우둔하면 알 수 없다. 이와 같이 말했는데, 무엇과 관련하여 이와 같이 말할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사람은 사람과 함께 대화를 통해 왕래하면서 이와 같이 이 존자는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가 다르고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가 다르고 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가 다르고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가 다르다. 이 존자와 예전에 나눈 대화는 나중에 나눈 대화와 일치 하지 않는다. 이 존자의 대화는 청정하지 못하고, 이 존자는 청정하지 못한 대화를 나눈다.’라고 안다.”

 

(hānasutta -경우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192,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거짓말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같은 내용에 대하여 사람마다 달리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대화에 대하여 청정하지 못한 거래라는 뜻으로 ‘Aparisuddhavohāro라 하였다.

 

경의 내용에 따르면 정직에 대한 이야기이다. 비록 ‘soceyya’‘purity, 의 뜻이 있긴 하지만 내용상 정직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soceyya’에 대하여 정직이라 번역하였고, 빅쿠보디는 honesty’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깨끗함이라 번역하였다. 그래서 깨끗함은 함께 대화를 나눔으로써 알 수 있다. 그것도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알 수 있고, 그렇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S3.11)”라 하였다.  하지만 문맥상 정직함은 함께 대화를 나눔으로써 알 수 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Thāma, 견고함인가 [지혜의] 힘인가?

 

표에서 세 번째 항을 보면 견고가 있다. 이는 ‘thāmo’로서 ‘Strength’의 뜻이다. 그래서 견고한 자는 재난을 만났을 때 알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된다. 위기에 닥쳤을 때 그 사람의 본 모습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재성님은  ‘thāmo’에 대하여 견고한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대괄호를 이용하여 ‘[지혜의] 힘은이라 번역하였다. 왜 이런 번역이 나오게 되었을까? 빅쿠보디의 번역을 보면 “that a person's fortitude is to be known(s3.11)”라 되어 있어서 fortitude(꿋꿋함)’이라 번역하였다.

 

‘thāmo’‘thāma’의 형태로서 ‘strength; power; vigour’의 뜻이다. 왜 이와 같은 용어가 사용되었는지는 앙굿따라니까야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단어와 관련된 설명은 다음과 같다.

 

 

Āpadāsu bhikkhave thāmo veditabbo, so ca kho dīghena addhunā na ittara, manasikarotā no amanasikārā paññavatā no duppaññenāti iti kho paneta vutta, kiñceta paicca vutta?

 

Idha bhikkhave ekacco ñātivyasanena vā phuṭṭho samāno bhogavyasanena vā phuṭṭho samāno rogavyasanena vā phuṭṭho samāno na iti paisañcikkhati: tathābhūto kho aya lokasannivāso tathābhūto attabhāvapailābho, yathābhūte lokasannivāse yathābhūte attabhāvapailābhe aṭṭha lokadhammā loka anuparivattanti, loko ca aṭṭha lokadhamme anuparivattati: lābho ca alābho ca ayaso ca yaso ca nindā ca pasasā ca sukhañca dukkhañcāti.

 

대왕이여, 견고한 자는 재난을 만났을 때 알 수 있다. 그것도 오랫동안 같이 살아보아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다.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알 수 있지,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알 수 있지,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지혜로워야 알 수 있지, 우둔하면 알 수 없다. 이와 같이 말했는데, 무엇과 관련하여 이와 같이 말할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사람은 친지의 상실을 겪고 재물의 상실을 겪고 건강의 상실을 겪으면서 , 이와 같이 세상의 삶은 이러하고 존재의 획득은 이러하다. 이러한 삶을 취하고 이러한 존재를 획득하여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돌게 만들고 세상의 여덟 가지 원리를 돌게 만든다. 그것은 곧 획득과 손실, 명성과 악명, 칭송과 비난, 즐거움과 괴로움이다.’라고 성찰하지 못한다.”

 

(hānasutta -경우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192, 전재성님역)

 

 

사람은 재난을 당해 보아야 진면목을 알 수 있다. 그가 비겁한 자인지 용기있는자인지는 위기가 닥쳤을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세월호사건이 일어 났을 때 배가 침몰한 상황에서 승무원들이 자신만 살겠다고 승객을 버려 둔 채 탈출한 것은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견고하지 못한가? 이에 대하여 친지나 재산, 건강 상실등의 이유를 들고 있다. 더 확장한다면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획득과 손실, 명성과 악명, 칭송과 비난, 즐거움과 괴로움으로 설명 된다. 이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는 앙굿따라니까야 세상의 원리의 경(A8.6)’에도 나온다. 이에 대하여 여덟 가지 세간의 법과 여덟 가지 출세간의 (2013-10-07)’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여덟 가지 세간의 원리

 

여덟 가지 세간의 원리는 세간에서 늘 벌어지는 일이다. 사랑이 있으면 미움이 있고, 충성이 있으면 배신이 있듯이 세상은 항상‘이익과 손실,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 이렇게 여덟 가지 원리로 돌아 감을 말한다.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경에 따르면 저 높은 산의 바위처럼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

이러한 인간의 원리들은

항상하지 않고 변화하고야 마는 것이네.

 

이러한 것들을 알고 새김있고 현명한 님은

변화하고야 마는 것들을 관찰한다.

원하는 것이라도 그의 마음을 교란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것도 혐오를 일으키지 못하네.

 

그것에 대하여 매혹이나 혐오는

파괴되고 사라져서 존재하지 않으니

경지를 알고 티끌의 여읨과 슬픔의 여읨을 올바로 알아

님은 존재의 피안에 이르네.

 

(세상 원리의 경2, 앙굿따라니까야 A8.6, 성전협 전재성님역)

 

 

이득과 불익 등 여덟 가지가 다반사로 일어나는 세상에서 이러한 원리는 항상 변하고야 만다고 알았을 때 흔들림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도 아주 단단한 바위덩이가 비람에 움직이지 않듯 , 이와 같이 현명한 님은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 .(Dhp81)’라 하였다.

 

현자는 저 높은 산의 바위산처럼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thāma’의 번역어는 견고함이 적절하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지혜의] 힘은이라 하였는데 지혜의 힘이라고 번역한 것은 부적절하다. 이는 다음에 나오는 지혜(paññā)와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빅쿠보디는 ‘fortitude’라 하여 꿋꿋함, 인내, 용기의 뜻으로 번역하였는데 적절한 번역이라 본다.

 

표로 정리해 보면

 

거룩한 님과 거룩한 길을 성취한 자인지 알아 보려면 네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에 설명 되어 있다. 더 상세한 내용은 앙굿따라니까에 실려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실려 있는 경우의 경(A4.192)’을 참고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No

구 분

아는 방법

설 명(A4.192)

1

계행

sīla

함께 살아 보아야

Savāsena

이 존자는 오랜 세월 계행에 대하여 훼손을 하고 천공을 뚫고 오점을 찍고 얼룩을 칠했고, 행위가 일관되지 못하고 삶이 일관되지 못하다. 이 존자는 계행을 파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는다.’라고 안다.

2

정직

soceyya

서로 대화를 통해 왕래를 해 보아야

Savohārena

이 존자는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가 다르고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가 다르고 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가 다르고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가 다르다. 이 존자와 예전에 나눈 대화는 나중에 나눈 대화와 일치 하지 않는다. 이 존자의 대화는 청정하지 못하고, 이 존자는 청정하지 못한 대화를 나눈다.’라고 안다.

3

견고

thāma

재난을 만났을 때

Āpadāsu

세상의 삶은 이러하고 존재의 획득은 이러하다. 이러한 삶을 취하고 이러한 존재를 획득하여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돌게 만들고 세상의 여덟 가지 원리를 돌게 만든다. 그것은 곧 획득과 손실, 명성과 악명, 칭송과 비난, 즐거움과 괴로움이다.’라고 성찰하지 못한다.

4

지혜

paññā

논의를 통해서

Sākacachāya

이 존자는 탐구하는 자세와 말솜씨와 질문하는 것에 따르면, 이 존자는 지혜가 열악하고 이 존자는 지혜가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존자는 심오하고 승묘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미묘하여 오직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말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존자는 가르침을 설할 때에 간략하고 혹은 상세하게 설명하고, 교시하고, 시설하고, 확립하고, 개현하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밝힐 힘이 없다.’라고 안다.

 

 

이 네 가지는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그것도 깨달은 자인지 아닌지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특히 네 번째 항목 지혜에 대하여 길게 설명되어 있다.

 

네 번째 항목 지혜에 대한 것을 보면 탐구 하는 자세, 말솜씨, 질문하는 것 이렇게 세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지혜 있는 자는 단지 공부만 열심히 하는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혜가 성숙되면 말솜씨도 능숙하고 질문하는 것도 예리함을 말한다. 그래서 지혜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를 해보면 금방 드러남을 말한다.

 

도인인가 돌인인가?

 

말이 없는 자가 있다. 토론에서 말이 없다면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우스개 소리로 하나는 도인이고 또 하나는 돌인이라 한다. 그래서 침묵만 지키고 있다면 도인 아니면 또라이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혜 있는 자는 가르침을 설할 때에 간략하고 혹은 상세하게 설명하고, 교시하고, 시설하고, 확립하고, 개현하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밝힐 힘이 있다고 하였다. 이 것이 지혜의 힘일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물고기의 비유를 들어 예를 들어 눈을 가진 사람이 호수의 언덕에 서서 큰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것을 보면, 이와 같이 이 물고기가 위로 솟는 것과 물결을 일으키는 것과 헤엄치는 속도로 보아 이 물고기는 큰 물고기이지 작은 물고기는 아니다.’라고 생각한다.(A4.192)”라 하였다.

 

사람을 아는 방법

 

사람의 속은 알 수 없다. 그래서 열길 물속은 알 수 있어도 한길 사람의 속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같이 살아 보아야 한다. 같이 살다 보면 모든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지금 마음씨 좋고 상냥한 것 같이 보여도 함께 육개월만 생활해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미얀마의 수행처에서도 수행승들간에도 긴장과 갈등이 있다고 한다. 이처럼 수행자들도 함께 살다 보면 단점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깨달은 자는 달라도 무언가 다르다. 계행과 관련하여 같이 살다 보면 알게 될 것이라 한다. 그것도 예의주시 하며 보면 보인다고 하였다. 그래서 낮에 한 말 다르고 밤에 하는 행동이 다르다면 언행일치가 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예를 오늘날 종단 지도층의 상습도박승혐의자에게서 볼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은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사람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왕래를 통해서 알 수 있고, 재난이 닥쳤을 때 알 수 있다. 서로 왕래하여 말하다 보면 그가 정직한지 아닌지 드러난다. 또 재난이 닥쳤을 때 더욱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목숨을 부지 하기 위하여 비겁한 행동을 하였을 때가 대표적이다.

 

그 사람에 대하여 아는 또 하나의 방법은 논의를 통해서이다. 한가지 주제를 놓고 토론 하다 보면 그 사람이 지혜가 있는지 금방 드러난다. 지혜 있는 자는 침묵만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대하여 알기 쉽게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을 아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하여 가장 알기 쉬운 것은 말과 행동이다. 낮에 한 말 다르고 밤에 하는 행동이 다르다면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자라 말할 수 있다. 언행일치가 되는지 이 것 한가지만 파악해도 그 사람을 안다고 볼 수 있다.

 

 

[세존]

사람은 색깔과 형상으로 알 수 없고

잠시 보아서는 믿을 수 없다네.

몸을 잘 삼가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삼가지 않는 자들이 세상을 돌아다니네.

 

흙으로 빚은 가짜 귀걸이처럼

금박을 입힌 반달 모양의 동전처럼

어떤 이들은 화려히 치장하고 돌아다니니

안으로는 더럽고 밖으로만 아름답네.”(S3.11, 전재성님역)

 

 

2014-11-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