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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는 원한을 부르고, 마가다와 꼬살라의 전쟁이야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1. 6. 14:46

 

 

승리는 원한을 부르고, 마가다와 꼬살라의 전쟁이야기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한다. 발생한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사자성어는 초전법륜경에서 꼰단냐가 진리의 눈이 생겨 났을 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 S56.11)”라고 외친 말과 같다. 무상함을 자각하였을 때 감흥으로 나오는 말이다. 생자필멸과 함께 영고성쇠(榮枯盛衰)라는 말도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전하는 번영과 쇠락의 뜻이다.

 

또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도 있다. 사전에 따르면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 말 역시 무상함을 뜻한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는 앞날을 이야기할 때 많이 회자된다. 특히 행복과 불행과 관련해서이다.

 

마가다와 꼬살라의 전쟁이야기

 

새옹지마의 교훈과 유사한 내용의 경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전쟁의 경(S3.14-3.15)’이 그것이다. 부처님당시 고대 인도에서 십육대국이 있었는데 가장 강성하였던 마가다와 꼬살라국의 전쟁이야기이다.

 

전쟁의 경을 보면 스펙터클한 영화를 보는 듯 하다. 코끼리부대 등 사군이 등장하고 두 강대국의 왕이 패권을 겨루면서 승자와 패자가 바뀌면서 엎치락뒤치락 하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로 따진다면 꼬살라국의 빠세나디왕이 주연이다. 그리고 상대역으로 마가다국의 아자따삿뚜가 조연이다. 그런데 이 둘과의 관계는 인척관계이다. 빠세나디왕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아자따삿뚜왕이 조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의 초입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Atha kho rājā māgadho ajātasattu vedehiputto caturagini sena sannayhitvā rājāna pasenadi kosala abbhūyyāsi yena kāsi.

 

한 때 마가다국의 왕이며 베데히 왕비의 아들인 아자따쌋뚜가 네 종류의 군대를 무장시켜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을 공격하기 위해서 까씨국으로 쳐들어왔다.

 

(Pahamasagāmasutta-전쟁의 경1, 상윳따니까야 S3.14, 전재성님역)

 

 

아자따삿뚜는 꼬살라 국의 빠세나디왕의 조카이자 마가가국의 빔비사라왕의 아들이다. 아자따삿뚜의 어머니는 꼬살라국의 공주 베데히이다. 빠세나디왕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카 아자따삿뚜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온 것이다.

 

아자따삿뚜의 업보

 

아자따삿뚜는 삼촌의 나라로 쳐들어 갔다. 이에 대한 이유는 경에 설명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각주에 따르면 아자땃삿뚜는 패륜아이다. 자신의 부왕을 유폐하여 굶어 죽게 하고 왕위를 찬탈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패륜행위를 저지른 아자따삿뚜는 자신의 아들을 두려워 하였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날에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아들이 자신을 시해할 까봐 늘 두려워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 출가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들은 출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려가 현실로 되었다. 아자따삿뚜는 32년간 재위한 뒤에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업보로 자신의 아들에게 시해당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당시 십육대국

 

부처님당시 고대인도는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다. 열 여섯 나라로 분열되어 약육강식의 전국시대와 같았다. 당시의 지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고대 인도의 십육대국

 

 

마가다는 동남쪽에 있고 꼬살라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십육대국의 이름은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볼 수 있다. 바쎗타의 포살에 대한 경에서 바쎗타여,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이와 같이 많은 칠보가 있는 십육대국 즉, 앙가, 마가다, 까씨, 꼬쌀라, 밧지, 말라, 쩨띠, 방가, 꾸루, 빤짤라, 맛차, 쑤라쎄나, 앗싸까, 아반띠, 간다라, 깜보자의 지배자로 왕권을 누리는 것이 이와 같이..(A8.43)”라는 경전적 근거를 갖는다.

 

꼬살라국과 까시국의 관계는?

 

전쟁의 경에 따르면 아자따삿뚜는 꼬살라 본토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까시국을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꼬살라의 빠세나디는 왜 아자따삿뚜가 까시국을 쳐 들어 온 것에 대하여 마치 자신의 나라에 쳐들어 온 것처럼 반응을 보인 것일까? 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생겨난 것에 대한 경(M87)’을 보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보인다.

 

 

[말리까]

“대왕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까씨 국과 꼬쌀라 국을 사랑합니까?

 

[빠쎄나디]

“말리까여, 그렇습니다. 나는 까씨 국과 꼬쌀라 국을 사랑합니다.

 

[말리까]

“대왕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까씨 국과 꼬쌀라 국에 변고가 생기고 이변이 생기면, 당신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이 생겨납니까?

 

[빠쎄나디]

“말리까여, 그렇습니다. 만약에 까씨 국과 꼬쌀라 국에 변고가 생기고 이변이 생기면, 당신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이 생겨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생겨난 것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87, 전재성님역)

 

 

빠세나디왕과 말리까왕비의 대화이다. 대화 내용을 보면 까시국 이야기가 나온다. 까시국에 전쟁 등의 변고가 생기는 것을 염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빠세나디는 나는 까씨 국과 꼬쌀라 국을 사랑합니다라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각주를 보면 까씨국은 꼬쌀라국의 속국으로 모두 꼬쌀라 국의 왕 빠세나디가 통치했다.(성전협 991p, 1545번 각주)”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까시는 꼬살라의 통치를 받고 있는 속국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자따삿뚜가 대군을 이끌고 까시로 쳐 들어 왔을 때 빠세나디가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네 종류의 군대(四軍, caturagini sena)

 

빠세나디왕은 조카 아자따삿뚜왕의 도전을 받고 이에 응했다. 경에서는 아자따삿뚜가 네 종류의 군대를 무장시켜 쳐들어 왔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네 종류의 군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각주에 따르면 네 종류의 군대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caturagini sena : 고대 인도군대는 코끼리부대(象軍, hatthikaya), 기마부대(馬軍, assakaya), 전차부대(車軍, ra-thakaya), 보병부대(步兵, pattikaya)의 이렇게 네 종류의 군대(四軍, caturagini sena)로 형성되어 있다.

 

(상윳따1 291, 880번 각주, 전재성님)

 

 

경에 등장하는 네 종류군대(四軍, caturagini sena)에서 당시 군대의 모습을 알 수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코끼리부대이다. 기마부대나 전차부대, 보병부대는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코끼리로 이루어진 코끼리부대는 생소한 것이다.

 

코끼리부대는 어떤 모습일까?

 

코끼리부대는 어떤 모습일까? 검색하여 보니 기원전 202년의 카르타고군의 코끼리부대를 묘사한 미니어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또 태국의 아유타야왕조 시대의 기상전(騎象戰)도 볼 수 있었다. 고대인도에서 코끼리부대는 아마도 다음 사진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카르타고군의 코끼리부대를 묘사한 미니어쳐(カルタゴ象部隊)

 

 

 

 

1592  코끼리부대(象部隊)

 

 

 

출가의 경(Sn3.1)’에서

 

코끼리부대와 관련된 이야기는 숫따니빠따에서도 보인다. 숫따니빠따 출가의 경(Sn3.1)’에 따르면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하는 장면이다.

 

 

Sohayanto aīkagga

nāgasaghapurakkhato,

Dadāmi bhoge bhuñjassu

jāti vakkhāhi pucchito.

 

[빔비싸라]

코끼리의 무리가 시중드는

위풍당당한 군대를 정렬하여

당신께 선물을 드리니 받으십시오.

 묻건대, 당신의 태생을 말해주십시오.”(stn421)

 

 

빔비사라왕은 마가다국왕이다. 아자따삿뚜의 부왕이다. 이 장면은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기 이전 젊은 시절 이야기이다. 부처님이 출가하여 유행하던 시절이다.

 

상군(象軍)의 장군을 맡아 달라 하였지만

 

경에 따르면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에게 당신은 어리고 젊습니다. 첫 싹이 트고 있는 청년입니다. 용모가 수려하니 고귀한 왕족 태생인 것 같습니다.(stn420)”라고 물어 보는 장면이 나온다. 같은 왕족으로서 호감을 느끼고 있는 장면이다. 여기서 왕족은 그 때 당시 전사계급을 말한다.

 

빔비사라왕은 이제 갓 출가한 부처님을 한눈에 알아 보았다. 아마 장군감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코끼리의 무리가 시중드는 위풍당당한 군대를 정렬하여 당신께 선물을 드리니 받으십시오.(stn421)”라고 말하였다. 코끼리부대를 맡아 달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빔비사라는 자신의 휘하에 강력한 전사들이 있는 장군의 지위를 부여 하려 했던 것이다.

 

부처님은 빔비사라왕의 요청을 거절 하였다. 장군이 되기 위해서 출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군 중에서 가장 강력함을 상징하는 코끼리부대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씨족은 ‘아딧짜’라고 하고, 종족은 ‘싸끼야’라 합니다. 그런 가문에서 감각적 욕망을 구하지 않고, 왕이여, 나는 출가한 것입니다. (Stn423)”라고 말씀 하심으로서 출가의 목적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어서 감각적 욕망에서 재난을 살피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안온으로 보고, 나는 정진하고자 합니다. 내 마음은 이것에 기뻐하고 있습니다(Stn424)”라고 말씀 하심으로서 또한 출가의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승리는 원한을 부르고

 

아자따삿뚜는 코끼리부대 등 사군을 동원하여 빠세나디의 속국인 까시국으로 쳐들어 갔다. 이에 빠세나디는 조카 아자따삿뚜를 맞이 하여 전쟁을 하였다. 그러나 패배 하였다. 부처님은 쓰라린 패배를 당한 빠세나디왕이 잠못 이룰 것이라 하며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수행승들에게 말씀 하셨다.

 

 

구 분

전쟁의 경1(S3.14)

 

빠알리어

Jaya vera pasavati

dukkha seti parājito,
Upasanto sukha
seti

hitvā jayaparājayanti.

Jaya

전재성님역

[세존]

승리는 원망을 낳고

패한 자는 잠을 못 이루네.

이기고 지는 것을 버리면,

마음 편히 잠을 이루네.”

 

각묵스님역

이긴 자는 원한을 부르고

패한 자는 고통스럽게 잠드네.

승리와 패배를 버려버리면

편안히 숙면 취하리.”

 

빅쿠보디역

“Victory breeds enmity,

The defeated one sleeps badly.

The peaceful one sleeps at ease,

Having abandoned victory and defeat.”

 

 

 

 

위 게송은 법구경 201번과 같다. 201번 게송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인연담이 전해져 온다.

 

 

꼬쌀라의 국왕은 그의 조카 아자따쌋뚜와 까씨까 마을에서 세 번에 걸쳐 싸웠으나 모두 패배했다. 세 번째 패배에서 돌아왔을 때, ‘이 유치한 애숭이를 굴복시키지 못하다니, 더 오래 살아서 무슨 소용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식음을 전폐하고 침대에 누웠다. 이 소식이 온 나라에 퍼져 승원에 까지 들렸다. 수행승들이 자초지종을 알고 부처님께 알리자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수행승들이여, 승리를 얻음으로써 증오를 낳는다. 패배한 자는 고통으로 괴로워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시로써 승리는 원한을 낳고 패한 자는 고통속에서 잠든다. 적멸에 든 님은 승리와 패배를 버리고 행복하게 잠잔다.’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흐름에 든 경지 등을 성취했다.

 

(법구경 201번 인연담, 꼬쌀라왕의 패배와 관련된 이야기(Kosalaraññoparājayavatthu, 전재성님역)

 

 

이 게송과 관련하여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본 게송은 법구경(Dhp) 201과 같다. 본 게송에 대한 문법적 고찰은 보디 스님 406 235번 주해를 참조할 것.(초불연 상윳따1 363p 400번 각주)”라 되어 있다. 이렇게 빅쿠보디가 번역한 영역본 CDB의 각주를 참조하라는 이유는 무엇일까? 빅쿠보디의 영역본을 많이 참조 하였다는 간접적 메시지라 볼 수 있다.

 

빅쿠보디의 영역본 각주

 

빅쿠보디의 영역본 각주를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Spk: Jaya vera pasavati dukkha seti parājito, Upasanto sukha seti hitvā jayaparājayanti.; “The victorious one breeds enmity: one conquering breeds enmity, begets an inimical person.”

 

 Spk thus interprets Jaya in pada a as a nominative present participle functioning as subject. At EV II, n. to 26, Norman suggests it might be a amul absolutive, i.e., a rare type of absolutive formed from the -a termination(see too EV I, n. to 22).

 

While at v. 407 we do find Jaya as a participle, the word also occurs as a neuter nominative at v. 619c, and thus there should be no reason not to interpret it in the same way here. See the discussion in Brough, Gandhari Dharmapada, pp. 238-39, n. to 180.

 

(CDB 235p, 235번 각주, 빅쿠보디)

 

 

Jayajayati의 현재분사형이다.. Jayaticonquers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Jaya의 뜻은 이긴 자가 된다. 그래서일까 각묵스님은 이긴 자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빅쿠보디는 ‘Victory’라 하여 단지 승리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전재성님 역시 승리라 번역하였다. 그래서 승리는 원망을 낳고라 하였다.

 

이기고 지는 것을 버리면

 

승리는 원망을 낳는다(Jaya vera pasavati)’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법구경 주석을 보면 다른 자를 정복한 자는 정복된 자로부터 원한을 산다. (DhpA.III.259)”라고 설명되어 있다. 승리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패한 자는 복수의 그날을 기다리며 칼을 갈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승리는 또 다른 전쟁을 예고한다.

 

승리하였다고 하여 좋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패한 자는 고통속에 잠든다(dukkha seti parājito)”라는 구절에 함축되어 있다. 주석에 따르면 다른 사람에게 패배한 자는 나는 언젠가 적을 패배시킬 것인가?’라고 생각하며 고통스러워한다.( DhpA.III.259)”라고 설명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게송에서 네 번째 구절에 답이 있다. “이기고 지는 것을 버리면(hitvā jayaparājayanti)”이라는 구절이다. 누가 버리는가?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Upasanto에 대하여‘The peaceful one’라 하여 번역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님과 각묵스님은 주어 없이 단지 마음 편히 잠을 이루네편안히 숙면 취하리라 하였다.

 

Upasanto sukha seti에서 Upasanto는 적정의 의미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법구경 번역에서는 적멸에 든 님은이라 번역하였다. “적멸에 든 님은 승리와 패배를 버리고 행복하게 잠든다.(Dhp201)”라 한 것이다. 이처럼 법구경에서는 적멸에 든 님이라 하여 아라한개념으로 번역하였으나 같은 게송을 두고 상윳따니까야 전쟁의 경에서는 주어 없이 이기고 지는 것을 버리면, 마음 편히 잠을 이루네(S3.14)”라 하여 달리 번역하였다. 그러나 빅쿠보디는 The peaceful를 내 세워 “The peaceful one sleeps at ease, Having abandoned victory and defeat.(승리와 패배를 버림에 따라 평화로운 이는 잠을 잘 잔다)”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빅쿠보디의 번역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전쟁의 경2’에서는

 

전쟁의 경은 두 개로 되어 있다. 첫 번째의 경을 Pahamasagāmasutta라 하여 전쟁의 경1(S3.14)’이고, 두 번째의 경을 Dutiyasagāmasutta라 하여 전쟁의 경2(S3.15)’이라 한다. 그런데 전쟁의 경2’에서는 전세가 역전된다. 이번에는 빠세나디왕이 승리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그래서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은 마가다 국의 왕이며 베데히 왕비의 아들인 아자따쌋뚜의 모든 코끼리 부대를 빼앗고 모든 기마 부대를 빼앗고 모든 전차 부대를 빼앗고 모든 보병 부대를 빼앗고 나서 그들을 산 채로 풀어 주었다.

 

(Dutiyasagāmasutta-전쟁의 경2, 상윳따니까야 S3.15, 전재성님역)

 

 

빠세나디왕은 조카 아자따삿뚜의 사군을 맞아 승리 하였다. 더구나 아자따삿뚜를 산채로 생포하였다. 그러나 빠세나디는 조카를 살려 주었다. 살려 주어 돌려 보내 주는 대신 코끼리부대 등 사군을 모두 차지 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빠세나디왕은 자비로운 왕이다.

 

빠세나디는 지혜로운 왕

 

초기경전에서 빠세나디왕은 현명한 왕으로 등장한다. 디가니까야 사만냐팔라경(D2)에서도 부처님과 대화 되는 상대로 나오고, 초기경전 도처에서 지혜로운 왕으로 등장한다. 특히 상윳따니까야에서는 꼬살라상윳따(Kosalasayutta, S3)’라는 별도의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래서 꼬살라 국왕 빠세나디와 왕비 말리까는 지혜로운 왕과 지혜로운 왕비로 등장한다.

 

다른 자가 빼앗으면 빼앗긴 자는 또 남의 것을 빼앗네

 

지혜로운 왕 빠세나디가 전쟁에 승리하여 조카를 풀어 주고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사군을 빼앗았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하신다.

 

 

구 분

전쟁의 경2(S3.15) 게송1

 

빠알리어

Vilumpateva puriso

yāvassa upakappati,
Yadā caññe vilumpanti

so vilutto viluppati.

vilutto viluppati

전재성님역

[세존]

자신에게 이로움이 있으면

사람은 남의 것을 빼앗네.

다른 자가 빼앗으면

빼앗긴 자는 또 남의 것을 빼앗네.”

빼앗긴 자는 또 남의 것을 빼앗네

각묵스님역

사람은 그가 할 수만 있으면

약탈을 일삼도다.

남들이 그를 약탈할 때

약탈자는 다시 약탈을 당하도다.”

약탈자는 다시 약탈을 당하도다

빅쿠보디역

“A man will go on plundering

So long as it serves his ends,

But when others plunder him,

The plunderer is plundered.”

The plunderer is plundered

 

 

빠알리게송 네 번째 구절에 ‘vilutto viluppati’가 있다. 이 구절에 대한 번역을 보면 전재성님의 번역과 각묵스님의 번역이 다르다. 가장 크게 차이 나는 부분이 마지막 구절이다. 전재성님은 다른 자가 빼앗으면 빼앗긴 자는 또 남의 것을 빼앗네라 하여 연쇄적으로 빼앗고 빼앗기고 또 빼았는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반면 각묵스님은 남들이 그를 약탈할 때 약탈자는 다시 약탈을 당하도다라 하여 난해하게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when others plunder him, The plunderer is plundered”라 하였다. 이를 번역하면 다른 사람이 그를 약탈할 때, 그 약탈자는 약탈되어진다가 된다. 번역해 놓고 보니 초불연의 각묵스님이 번역한 남들이 그를 약탈할 때 약탈자는 다시 약탈을 당하도다와 비슷한 번역이 되었다.

 

이 게송과 관련하여 아자따삿뚜를 대비 하여 설명할 수 있다. 아자따삿뚜는 부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고, 그런 패륜으로 인하여 결국 자신의 아들에게 시해 당하였다. 이렇게 삼대에 걸친 불행에 대하여 위 개송이 적용될 수 있다.

 

현세에서 우여곡절을 겪는 이유는?

 

두 번째 게송은 악행에 대한 열매이다. 이 게송 또한 아자따삿뚜에게 적용될 수 있다.

 

 

구 분

전쟁의 경2(S3.15) 게송2

 

빠알리어

hāna hi maññati bālo

yāva pāpa na paccati,
Yadā ca paccati pāpa

atha bālo dukkha nigacchati.

hāna

전재성님역

[세존]

죄악의 열매가 익지 않는 한

어리석은 자는 기회라고 생각하나

죄악의 열매를 거둘 때

어리석은 자는 괴로워하네.”

 

각묵스님역

어리석은 자 죄악이 익기 전에는

그것을 행운의 원인이라 생각하지만

죄악이 익을 때에는

어리석은 자 괴로움에 빠지도다.”

 

빅쿠보디역

“The fool thinks fortune is on his side

So long as his evil does not ripen,

But when the evil ripens

The fool incurs suffering.”

 

 

 

이 게송은 법구경 69번 게송과 유사하다. 이렇게 유사하다고 말하는 것은 단어 하나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빠알리게송 첫번째 단어 hāna(stopping)에 대한 차이이다. 법구경에서는 ‘Madhuvā로 있다. 이후 나머지는 동일하다.

 

법구경 주석에 따르면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는 어리석은 자는 그 행위가 꿀이나 단물처럼, 탐나고 매혹적이고 즐거운 것이라 여긴다. 악한 행위가 현세에서나, 미래에서나 그 결과를 낳지 않는 한, 그는 그렇게 여긴다.(DhpA.II.50)”라 하였다. 지금 악한 자가 행복을 누리는 것은 아직 악행에 대한 과보가 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악행에 대한 과보가 무르익으면 현세에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지옥과 같은 악처에서 고통을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위는 돌고 또 돌아

 

세 번째 게송은 아자따삿뚜와 빠세나디와 관련된 게송이다.

 

 

구 분

전쟁의 경2(S3.15) 게송3

 

빠알리어

Hantā labhati hantāra

jetāra labhate jaya,
Akkosako ca akkosa

rosetārañca rosako,
Atha kammaviva
ṭṭena

so vilutto viluppatīti1.

kammavivaṭṭena

전재성님역

[세존]

죽이는 자는 죽임을 당하고

이기는 자는 패하며

욕하는 자는 욕을 먹고

화내는 자는 분노를 받네.

행위는 돌고 또 돌아

빼앗긴 사람이 다시 빼앗네.”

행위는 돌고 또 돌아

 

각묵스님역

죽이는 자는 [또 다른] 죽이는 자를 만나고

승리자는 [또 다른] 승리자를 만나며

욕하는 자 [또 다른] 욕하는 자를 만나고

격노하는 자 [또 다른] 격노하는 자를 만나노니

업은 이처럼 돌고 돌아서

약탈자는 또 다른 약탈자를 만나도다.”

업은 이처럼 돌고 돌아서

 

빅쿠보디역

“The killer begets a killer,

One who conquers, a conqueror.

The abuser begets abuse,

The reviler, one who reviles .

Thus by the unfolding of kamma

The plunderer is plundered.”

by the unfolding of kamma

 

 

육구게로서 살인자등 모두 여섯 가지 케이스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빠알리게송을 보면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빅쿠보디는 The killer begets a killer(살인자는 다른 살인자를 본다)”라 하였다. 각묵스님 역시 현재형으로 해석하여 죽이는 자는 [또 다른] 죽이는 자를 만나고라 하였는데, 다만 대괄호치기를 이용하여 ‘[또 다른]’이라는 말을 추가한 것만 다를 뿐 빅쿠보디의 문체와 같다. 하지만 전재성님은 죽이는 자는 죽임을 당하고라 하여 수동형으로 번역하였다. 이런 기조는 나머지에도 모두 적용된다.

 

영원한 윤회의 소용돌이

 

게송에서 행위는 돌고 또 돌아(kammavivaṭṭena)”라는 말이 있다. kammavivaṭṭena에 대하여 복주석서에는 "The kamma which has vanished matures when it gains an opportunity (to ripen) by meeting a condition(conducive to its ripening).(CDB 407P, 237 번 각주)이라 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각묵스님은 업이 돌고 돈다는 것은 사라진 업이 조건을 만나서 기회를 포착하면 돌고 돈다는 뜻이다.(초불연 상윳따1 365P, 403번 각주)”  하였다. 전재성님은 주석의 인용 없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Atha kammavivaṭṭena: 폭력은 영원한 윤회의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이기고 빼앗고 죽이는 자는 때가 되면 패하고 빼앗기고 죽음을 당한다. 부처님은 여기서 아자따쌋뚜 왕이 빠쎄나디 왕을 이겼다가 다시 빠쎄나디 왕에게 패한 것을 염두에 두고 노래한 것이다.

 

(상윳따1 890번 각주, 전재성님)

 

 

 돌고 도는 것에 대하여 윤회의 소용돌이라 하였다. 특히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하여는 반드시 과보를 받는 것이라 하였다. 승리자가 있으면 언젠가 패배 하게 되오 있고, 죽이는 자는 언젠가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를 아자따삿뚜와 빠세나디의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새옹지마처럼 돌고 도는 인생

 

인생은 돌고 돈다. 어제 불행하였던 사람이 오늘 행복할 수 있고, 그렇다고 그 행복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 이렇게 행복과 불행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 삶의 방식이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삶의 방식에 대하여 새옹지마(塞翁之馬)라한다.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러나 확실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악행이다. 악행을 저지르면 확실하게 과보를 받는 것이다. 게송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세존]

승리는 원망을 낳고

패한 자는 잠을 못 이루네.

이기고 지는 것을 버리면,

마음 편히 잠을 이루네.”(S3.14)

 

[세존]

자신에게 이로움이 있으면

사람은 남의 것을 빼앗네.

다른 자가 빼앗으면

빼앗긴 자는 또 남의 것을 빼앗네.”

 

죄악의 열매가 익지 않는 한

어리석은 자는 기회라고 생각하나

죄악의 열매를 거둘 때

어리석은 자는 괴로워하네.”

 

죽이는 자는 죽임을 당하고

이기는 자는 패하며

욕하는 자는 욕을 먹고

화내는 자는 분노를 받네.

행위는 돌고 또 돌아

빼앗긴 사람이 다시 빼앗네.” (S3.15)

 

 

 

2014-11-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