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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음식절제를 강조하신 부처님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1. 4. 12:03

 

 

먹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음식절제를 강조하신 부처님

 

 

 

마치 먹기 위해서 사는 것 같다. HD화면으로 제공되는 요즘 방송을 보면 그야말로 먹거리프로로 넘쳐 난다. 어느 방송을 보도 먹거리가 빠지지 않는데 특히 저녁시간에 집중적이다. 저녁밥을 먹을 때쯤 방송되는 먹거리프로를 보면 식욕을 자극한다. 선명한 화질의 TV로 보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보는 것 만으로도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한다. 만일 냄새까지 나는 TV가 개발된다면 그 강도는 더할 것이다.

 

빠세나디왕의 식사

 

먹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꼬살라국의 빠세나디왕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처님이 사왓티에 있을 때 빠세나디왕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됫박 분량의 많은 밥을 먹곤 했다(S3.13)”라고 표현되어 있다. 대식가임을 알 수 있다. 왕처럼 높은 지위에 있으면 이렇게 많이 먹는 것일까?

 

됫박분량이라는 말은 ‘doapāka의 번역어이다. 각주에 따르면 , 되의 분량이라 한다. PCED194에 따르면 doapākadoa+pāka의 형태이다. doa ‘a measure of capacity; 1/8th of a bushel’라 설명된다. 측정의 단위로서 1/8부셀이라 한다. 사전에 따르면 1부셀은 a United States dry measure equal to 4 pecks or 2152.42 cubic inches’라 설명된다. 를 보니 1부셀은 7내지 8리터에 해당된다. 빠세나디왕이 1/8부셀에 해당되는 양의 밥을 먹었다고 하니 약 1리터 분량의 밥을 먹었다고 볼 수 있다. 밥 세 공기 정도의 분량이라 본다.

 

? 양동이분량이라고?

 

전재성님은 됫박분량이라 하였다. 도량형표에 따르면 1됫박은 1.8리터에 해당된다. 엄청난양의 밥이다. 그런데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양동이분량의 음식을 먹었다.(S3.13)”라 하였다. 양동이의 양은 얼마나 될까? 검색하여도 나오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하였다.

 

 

주석서는 양동이분량의 쌀밥과 그만큼의 국과 반찬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양동이 분량으로 옮긴 원어는 doa인데 이것은 도량단위이다. BDD에 의하면 1도나는 1/8부셸(1부셸은 약36리터=2) 이라 한다. 그러므로 1도나는 대략 4.5리터 혹은 2.5되 정도의 분량이다. 같은 분량의 국과 반찬까지 합하면 왕은 한끼에 13리터 혹은 8되 가까이 되는 엄청난 음식을 먹은 셈이다.

 

(초불연 상윳따1 393번 각주, 각묵스님)

 

 

 

Bucket

 

 

각묵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1양동이의 양은 무려 4.5리터에 해당된다. 큰 식수용 패트병 하나가 2리터이니 패트병 2.5개에 해당된다. 그러나 양동이의 크기는 정해져 있다.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 까지 다양하다.

 

양동이, 바께쓰, 버킷

 

바닥 청소할 때 사용하는 양동이가 사용된다. 흔히 바께쓰라 한다. 바께쓰라는 말은 양동이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일본어로는 バケツ(바케쓰)’라 하는데 흔히 말하는 바께쓰라는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 볼 수 있다.

 

바께쓰라는 말의 원어는 영어 버킷(bucket)이다. Bucket은 양동이라 번역된다. 그런데 빅쿠보디의 번역을 보면 “a bucket measure of rice and curries(S3.13)”라 되어 있다. ‘버킷분량의 쌀과 커리라고 번역하였다. 그래서 경의 제목도 ‘A Bucket Measure of Food(한버킷분량의 음식)’으로 되어 있다.

 

한버킷 분량의 음식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The doa is a measure of volume, perhaps a "bucket," obviously far more than the capacity of an ordinary person's stomach.”라 각주 하였다. 도나에 대하여 한버킷정도의 분량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보통사람들의 양 보다 훨씬 더 많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구체적인 용량을 표현 하였다. 그래서 한양동이 분량의 음식에 대하여 무려 4.5리터가 된다고 하였다. 정말 그렇게 많은 양의 밥을 먹었을까?

 

일반적으로 한양동이의 양은 2리터 짜리 큰 패트병이 네 개 내지 다섯 개 들어가는 양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양동이의 크기는 모두 달라서 도량형 단위로 사용하기에 부적합하다. 그럼에도 한양동이 분량의 식사를 하였다고 하는 것은 과장 된 것이다.

 

차라리 양푼이라고 하는 것이 더

 

계산에 따르면 빠세나디왕의 밥량은 1리터가 채 안되는 양이다. 큰 생수 패트병이 2리터이니 쉽게 짐작이 간다. 보통사람 보다 세 배 가량 더 먹었다고 보여진다. 그럼에도 전재성님은 됫박분량이라 하여 1.8리터 가량의 밥을 먹었다고 번역하였고, 각묵스님은 한양동이분량이라 하여 무려 4.5리터 분량의 밥을 먹었다고 번역하였다.

 

 

 

 

 

되박

 

 

됫박분량이나 양동이분량은 밥의 양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러나 양동이분량이라는 표현은 부적절해 보인다. 양동이는 도량형단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빅쿠보디의 버킷과 같은 개념이다. 차라리 요즘 식으로 양푼으로 표현 하는 것이 더 이해가 빠를 듯 하다.

 

 

 

 

양푼

 

 

 

 

배불러 죽겠다는데

 

경에 따르면 빠세나디왕은 대식가이었다. 보통 사람들 보다 몇 배 더 되는 밥을 먹었던 것이다. 이렇게 밥을 많이 먹으면 어떻게 될까? 몸이 불편할 것이다.

 

사람들은 양보다 더 많이 먹었을 때 배불러 죽겠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면서 소화제를 먹는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어느 스님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과식하고 난 다음 이제는 소화를 시키기 위하여 약을 먹는 것이다. 만일 소화를 못 시킬 정도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먹은 것을 토해 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고대로마에서 귀족들이 연회를 즐길 때 먹고 토하고를 반복하였다고 한다.

 

빠세나디왕은 잔뜩 먹었다.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되는 양의 음식을 먹었으니 편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많이 먹고는 숨을 몰아쉬고라고 표현 되어 있다. 너무 많이 먹어서 힘들어 하는 모습이다. 이에 각묵스님은 음식을 잔뜩 먹고 숨을 헐떡거리며라고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왕은 이 세상이 자신의 것이므로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하루에 세 끼 먹을 것을 다섯 끼 먹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끼에 한공기분량이 적합함에도 세 공기 분량의 밥을 먹었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하루에 세 끼 먹어야 함에도 여섯 끼를 먹는 것과 같다. 빠세나디왕이 바로 그런 케이스이다.

 

빠세나디왕이 과식을 한 이유는 먹을 만한 것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TV에서 먹거리프로를 보면 양껏 배불리 먹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데, 옛날 왕들의 식탁은 황제식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온갖 진귀한 음식으로 가득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매일 과식하였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 빠세나디왕도 엄청난 과식을 한 것이라 보여진다.

 

식사에 분량을 아는 사람은

 

빠세나디왕은 과식을 한 후 괴로워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부처님은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도나빠까경(S3.13)

  

빠알리어

Manujassa sadā satīmato

matta jānato laddhabhojane,
Tanu tassa bhavanti vedan
ā

sanika jīrati āyupālayanti.

satīmato

전재성님역

[세존]

언제나 새김을 확립하고

식사에 분량을 아는 사람은

괴로운 느낌이 적어지고

목숨을 보존하며 더디 늙어가리.”

새김을 확립하고

각묵스님역

사람이 항상 마음챙기면서

음식을 대하여 적당량을 알면

괴로운 느낌은 줄어들고

목숨보족하여 천천히 늙어가리.”

마음챙기면서

빅쿠보디역

"When a man is always mindful,

Knowing moderation in the food he eats,

His ailments then diminish:

He ages slowly, guarding his life.

mindful

 

 

 

알아차림이 없어서

 

황제식단에서 과식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알아차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언제나 새김을 확립하고(sadā satīmato)”라 하였다. 여기서 satīma라는 말은 ‘Of retentive memory or active mind, thoughtful, reflecting’의 뜻으로 항상 사유하고 반조하는 적극적인 마음과 기억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어느 곳에서든지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이다.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그것은 가르침을 사유하고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무아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의 의미는 반드시 기억의 기능이 있어야 한다. 그런 기억은 이전의 기억이기도 하지만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라고도 볼 수 있는다. 이는 사띠에 대하여 초기경에서 수행승들이여, 그는 이와 같이 멀리 떠나서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 때 새김의 깨달음 고리가 시작된다. 수행승이 새김의 깨달음 고리를 닦으면, 그 때  수행승의 새김의 깨달음 고리는 닦임으로 원만해진다. 이와 같이 새김을 닦으면서 그는 그 가르침을 지혜로 고찰하고 조사하고 탐구한다. (S46:3)”라고 표현 되어 있는 정형구에서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사띠(sati) 가장 올바른 표현(2013-01-04)’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빠세나디왕이 과식을 하게 된 것은 알아차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알아차림은 사띠마의 번역이다. 전재성님은 새김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마음챙김이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mindful’이라 하였다.

 

음식절제를 강조하신 부처님

 

빠세나디왕이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몰랐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초기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늘 음식절제를 강조하였다. 이는 초기경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몇 가지 가르침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배를 가득 채우지 말고 음식을 절제하고,

욕심을 적게 하고 탐욕을 일으키지 마십시요.

욕망이 없어지고 버려져서, 

욕망이 여윈 것이 적멸입니다.(stn707)

 

아름다움에 탐닉하여

감관을 수호하지 않고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모르고

게을러 정진이 없으면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꺽어 버리듯,

악마가 그를 쓰러뜨리리. (dhp7)

 

 

숫따니빠따에서는 음식절제를 함에 있어서 배를 가득 채우지 말라고 하였다. 수행자가 배불리 양껏 먹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법구경에서는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모르는 것에 대하여 감각기관의 문을 지키지 못함으로 표현하였다.

 

병고 없이 오래 살고 싶으면

 

배불리 양껏 먹고자 하는 것은 본능이다. 더구나 음식 먹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를 식도락가라 한다. 그래서 맛집을 순례하며 다니며 먹는 것을 즐긴다. 이렇게 맛만 추구하다 보면 어떻게 될까? 음식절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과식으로 이어져 각종 질병에 걸리고 수명이 단축 되는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게송에서는 목숨을 보존하며 더디 늙어가리(sanika jīrati āyupālayanti, S3.13)”라 하였다. 병고 없이 오래 살고 싶으면 음식절제를 하라는 말이다.

 

불교의 공양게

 

음식절제는 잘 되지 않는다. 맛있는 것에 손이 가고 맛있는 것만 찾아 다니다 보면 음식을 즐기게 되어 식탐만 늘어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르침을 상기 해야 한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항상 기억하고 있다가 경계에 부딪쳤을 때 활용하는 것이다. 아마 이것이 사띠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언제나 새김을 확립하고(sadā satīmato, S3.13)”라 하셨다. 그렇다면 음식절제에 대한 부처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씀 하셨을까? 이에 대하여 초기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아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 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불편했던 경험을 제거하고

새로운 고통을 초래하지 않겠다.

이것으로 나는 허물없이 안온하게 살리라.’

 

라고 이치에 맞게 성찰해서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S35.239, 전재성님역)

 

 

위 가르침은 사실상 불교의 공양게와 같다. 이렇게 부처님이 음식절제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살기 위해서 먹기 위해서이다.  이 몸이 유지 되기 위하여 먹을 뿐이지 먹는 것 자체를 즐기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치료가 될 때까지 상처에 연고를 바르듯, 또한 예를 들어 짐을 옮길 수 있도록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듯,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S35:239)”라고 말씀 하셨다. 기계에 기름을 칠해야 돌아 가듯이 음식은 이 육신을 지탱할 정도면 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 가르침은 공

 

꼬살라 국왕 빠세나디와 관련된 이야기(Pasenadikosalavatthu)

 

음식절제와 관련하여 빠세나디왕이 나온다. 이 이야기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DhpA.III.264에도 나온다라고 하였다. 법구경 주석서 3 264페이지에 빠세나디와 관련된 음식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찾아 보았다.

 

법구경 204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에 음식과 관련된 빠세나디왕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DhpA.III.264-267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계실 때, 꼬살라 국왕 빠세나디와 관련된 이야기(Pasenadikosalavatthu)이다.

 

한 때 꼬살라 국왕 빠세나디 왕은 됫박 분량의 많은 밥을 스프와 양념과 함께 먹곤 했다. 어느날 아침 그는 아침을 너무 많이 먹고 식후의 졸음을 쫒아 내지 못하고 부처님께 찾아와서 피곤한 기색으로 이리저리 졸았다. 졸음이 왔지만 똑바로 눕지 못하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빠세나디 왕에게 대왕이여, 쉬시지 않고 오셨습니다.’라고 말하자, 왕은 세존이시여, 식후에 저는 항상 괴롭습니다.’라고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대왕이여, 과식은 언제나 고통을 가져 옵니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시로써 나태하고 너무 많이 먹고 잠자며 시간을 보내면서 누워서 뒹굴면, 돼지가 사료를 먹는 것과 같아 그 어리석은 자는 거듭해서 모태에 든다.’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대왕이여, 알맞게 드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이와 같은 시를 읊었다.

 

언제나 새김을 확립하고

식사에 분량을 아는 사람은

괴로운 느낌이 적어지고

목숨을 보존하며 더디 늙어가리.”(SN.I.81)

 

왕은 그 시를 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은 조카인 쑤닷싸나(Sudassana)에게 이 시를 외우라.’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쑤닷싸나에게 말했다. ‘쑤닷싸나여, 너는 왕이 식사하면, 마지막 밥 한 덩어리를 들려 할 때 이 시를 읊도록 해라. 그러면 왕은 그 마지막 한 덩어리의 밥을 버릴 것이다. 왕의 다음 식사를 요리 할 때에 그 한 덩어리 만큼의 쌀알을 새 쌀에서 덜어내라.’ ‘세존이시여, 알겠습니다.’ 이렇게 아침 저녁으로 왕이 식사할 때 마다 조카 쑤닷싸나는 지시대로 행했다. 왕은 차츰 한 홉 분량의 밥으로 만족하고 날씬한 몸매를 갖기에 이르렀다.

 

어느날 왕은 부처님을 찾아가 경의를 표하고 인사를 하고 세존이시여, 저는 행복합니다. 야생의 짐승들과 말들을 추적하여 붙잡을 수 있습니다. 조카와는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조카에게 공주 바지라(Vajira)를 아내로 주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목욕할 수 있는 연못이 있는 마을을 하사했습니다. 그리고 조카와의 싸움도 끝나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다른 날 왕궁의 귀중한 보석이 없어졌는데, 최근에 다시 찾아서 행복합니다. 당신의 제자들과의 우정을 위해, 당신의 친지의 가문의 딸을 비로 맞이하여 행복합니다.’라고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왕에게 대왕이여, 건강이 최상의 이익이고, 이익에 만족하는 것이 최상의 부이고, 신뢰가 최상의 친척입니다. 그리고 열반과 견줄 행복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시로써

 

건강이 최상의 이익이고

만족이 최상의 재보이고

신뢰가 최상의 친구이고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Dhp204)

 

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흐름에 든 경지 등을 성취했다.

 

(법구경 204번 게송 인연담, 꼬살라 국왕 빠세나디와 관련된 이야기(Pasenadikosalavatthu), 전재성님역)

 

 

인연담을 보면 상윳따니까야 도나빠나경(S3.13)의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법구경 204번 인연담  모티브는 상윳따니까에서 근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만족이 최상의 재보

 

인연담에서는 빠세나디왕과 부처님의 대화가 매우 사실적으로 실려 있다. 말미에서는 법구경 게송 204번이 소개 되어 있는데 이는 부처님이 파세나디왕을 위하여 가르침을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다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Ārogyaparamā lābhā,

santuṭṭhiparama dhana,
Viss
āsaparamā ñātī,

nibbāaparama sukha.

 

건강이 최상의 이익이고

만족이 최상의 재보이고

신뢰가 최상의 친구이고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 (Dhp204, 전재성님역)

 

 

네 구절의 게송을 보면 댓구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건강과 이익, 만족과 재보, 신뢰와 친구, 열반과 행복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두 번째 구절에서 만족이 최상의 재보(santuṭṭhiparama dhana)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각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santuṭṭhiparama dhana: DhpA.III.267에 따르면, 재가자나 출가자나 자신이 소유한 것에 흡족해 하면, 그것이 만족이다. 그 만족은 다른 재보보다 높은 것이다.

 

(법구경 1195번 각주, 전재성님)

 

 

짤막한 주석에 행복에 대한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는 듯하다. 그것은 만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자신이 소유한 것에 흡족해 하면, 그것이 만족이다.”라 하였다. 그리고 그 만족은 다른 재보보다 더 높은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세상에서 천만금을 갖는 것 보다 왕의 지위를 누리는 것 보다 더 만족스럽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소유를 많이 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등식은 깨진다. 소유에 대한 욕구를 내려 놓았을 때 사실상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이는 다름아닌 소욕지족(小慾知足)이다.

 

어떠한 것에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다(Dhp331)”

 

불교에서는 소욕지족을 강조한다. 이런 소욕지족에 대하여 부정적 시각을 가진 이들도 있다. 오늘날과 같은 소비지향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욕지족의 삶의 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많이 벌어서 많이 베풀자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출가자나 재가자 모두 소욕지족의 삶의 방식이 맞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반드시 많이 가졌다고 하여 행복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우고 덜어 낼수록 역설적으로 더 행복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의 행복은 욕심을 적게 낼수록 더욱 더 행복해진다는 말이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많이 소유하거나 경제적으로 성공해야 행복하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행복은 반드시 소유에 비례하지 않는다. 소유하려는 마음을 낮추었을 때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늘에서 금비가 내려도, 진짜 행복이란?(2012-09-24)’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올린 글에 행복공식이 있다. 그것은 행복지수 = 소유/욕구라는 식으로 표현된다. 행복해지려면 분모에 해당되는 욕구를 최대한 낮추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재 가지고 있는 소유와 관계없이 행복지수가 올라 갈 것이기 때문에 점점 행복해 질 것이라 한다.

 

행복지수 공식을 보면 매우 타당하다. 분자에 해당되는 소유를 늘리는 것 없이 분모에 해당 되는 욕구를 낮추기만 해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남의 번영이나 성공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욕심을 내는 것 보다 차라리 욕구를 낮추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떠한 것에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다.(Tuṭṭhī sukhā yā itarītarena, Dhp331)”라 하셨다.

 

먹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빠세나디왕은 음식절제를 하지 못하여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들여 음식절제에 성공함으로서 날씬한 몸매를 가지게 되었고 건강도 찾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음식은 적당히 먹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배를 가득 채우지 말고(stn707)”먹는 것이다. 이렇게 초기경전에서는 구체적으로 먹는 방법까지도 세세하게 명기 되어 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였다. 무엇이든지 정도가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이다. 음식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맛있는 음식이 있다고 하여 양을 초과한다면 괴로움을 겪을 것이다. 많이 먹어서 소화가 되지 않는다 하여 소화제를 먹는 다면 어리석음의 극치라 볼 수 있다.

 

음식을 탐을 내어 먹는 것을 즐기는 자들은 수행자로서 자격이 없다. 그래서 초기경 도처에서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알라라거나 배를 가득히 채우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음식은 단지 기계에 기름칠을 하듯이 육체를 지탱하는 의미에서 먹을 것을 말씀 하셨다. 이렇게 본다면 식탐이 있어서 게걸 스럽게 먹는 자들은 매우 천박한 자들이다. 또 맛있는 맛집만을 찾아 다니며 먹는 것을 즐기는 식도락가 들 역시 천박한 자들이다.

 

오로지 먹는 것에만 관심 있다면 사실상 동물적 삶을 사는 것과 다름없다. 지혜가 없는 축생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먹는 것이다. 자연  다큐프로를 보면 축생들은 먹기 위해서 산다.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동물세계에서 먹어야만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오로지 먹는 것에만 관심을 두어 양껏 배불리 먹는 것을 낙으로 여긴다면 축생과 다름 없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초기경 도처에서 식탐을 경계하였다.

 

 

언제나 새김을 확립하고

식사에 분량을 아는 사람은

괴로운 느낌이 적어지고

목숨을 보존하며 더디 늙어가리.”(S3.13)

 

 

 

 

2013-11-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