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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라? “자신을 위해 남을 해쳐서는 안되리”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0. 27. 15:41

 

원수를 사랑하라? “자신을 위해 남을 해쳐서는 안되리

 

 

 

참으로 아름다운 말, 사랑

 

우리말에 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사랑,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다. 언제 들어도 사랑스런 말이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말은 남녀간의 사랑을 떠 올리게 한다. 이는 사전에서도 확인 된다. 인터넷국어사전에 따르면 어떤 상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이라 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이라는 말은 남녀관계에서나 통용되는 말이라 볼 수 있다.

 

사랑이라는 말이 종교적으로도 사용된다. 주로 유일신교에서 사용된다. 요즘 방송광고에 나오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라는 찬송가의 한 구절 역시 종교적 사랑을 뜻한다. 오원소라는 영화에서 다섯 번째 원소가 사랑이라 풀이 된다. 이처럼 유일신교에서는 사랑을 강조한다. 이 때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그들만의 사랑일 것이다.

 

불교에서도 사랑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삐야(piya)라는 말이 그것이다. 대게 남녀간의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보편적인 사랑을 뜻할 때는 멧따(metta)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래서 삐야와 멧따는 다른 것이다. 어떻게 다를까?

 

현명한 왕비와 현명한 왕

 

상윳따니까야에 말리까의 경(S3.8)’이 있다. 이 경의 주제어는 사랑이다. 그것도 남녀 간의 사랑이다. 이는 경에서 빠세나디왕이 말리까왕비에게 말리까여 그대에게는 그대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사람이 있소? (atthi nu kho te mallike ko cañño attanā piyataroti?)”라고 물어 보는 데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말이 삐야(piya)이다. 이에 현명한 왕비는 대왕이시여,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Tuyha pana mahārāja atthañño koci attanā piyataroti?)”라고 당돌하게 말한다.

 

왕비의 대답은 왕의 예상을 빗나간 말이다. 당연히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왕이 되어야 함에도 왕비는 자기자신을 더 사랑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현명한 왕도 말리까여, 나에게도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은 없소(Natthi kho me mahārāja ko cañño attanā piyataro)”라고 말함으로써 왕비의 말을 추인한다. 이렇게 본다면 현명한 왕비와 현명한 왕이라 볼 수 있다.

 

삐야(piya)와 멧따(metta)

 

왕과 왕비의 대화에서 삐야(piya)라는 말이 주제어이다. 이는 남녀간의 사랑을 뜻한다. 삐야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도 사랑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빅쿠보디는 “Is there, Mallika, anyone more dear to you than yourself?”라 번역함으로서 사랑을 뜻하는 ‘love’라는 말 대신에 ‘dear’를 사용하였다. 이는 말리까여, 그대는 자신보다 누구를 더 소중히 여깁니까?”라고 번역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dear소중한’, 또는 친애하는’, 또는 귀여운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두 사랑이라는 말의 범주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사랑을 뜻하는 삐야라는 말은 초기경전에서 사랑, 애정 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이는 멧따(metta)와는 다른 것이다. 멧따의 뜻이 우정 또는 우호의 뜻이 있기 때문에 사남녀간의 사랑을 뜻하는 삐야와는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삐야가 멧따의 뜻과 유사하게 사용 될 때도 있다. 상윳따니까야 사랑스런 이의 경(Piyasutta, S3.4)’이 그렇다.

 

자기자신을 적으로 여기는 자

 

사랑스런 이의 경에서는 부처님과 빠세나디왕의 대화이다. 사랑을 주제로 하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빠세나디왕이 자문자답하고 나중에 부처님이 추인하는 형식의 대화이다. 빠세나디왕이 사랑에 대하여 생각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빠세나디]

세존이시여, 저는 그것에 대하여 이와 같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신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고 언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고 정신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면, 그들은 자기자신을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Piyasutta- 사랑스런 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4, 전재성님역)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정의라 볼 수 있다. 자기자신을 적으로 여기는 케이스에 해당된다. 자신을 적으로 여기면 어떻게 될까? 마치 적에게 대하듯 할 것이다. 적에게 어떤 악행도 서슴없이 하듯 자신에게 악행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구에서 만약 그들이 자기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다. (S3.4)”라고 하였다.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기자신을 미워 하는 것과 같다. 자기자신을 미워 하는 자는 자신을 원수처럼 대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미워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기자신에게 행하기 때문이다. (S3.4)”라 하였다.

 

자기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자

 

남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왜 그런가?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세존]
어떤 사람이든 신체적으로 착한 행위를 하고 언어적으로 착한 행위를 하고 정신적으로 착한 행위를 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Piyasutta- 사랑스런 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4,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빠세나디왕의 자문자답에 추인하며 한 말씀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착한 행위를 하는 자라는 말이다. 설령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자신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하는 것과 같다.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자이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하여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S3.4)”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

 

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이블에서 아직까지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 ‘원수를 사랑하라자신을 사랑하라는 구절을 키워드로 검색해 보았다. 마태복음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8)

 

 

요지는 원수를 사랑하라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자신을 사랑하라는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어느 변호사의 칼럼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말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자는 미워하라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예수는 ’원수를 미워하라‘는 가르침 대신에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가르쳤다. 예수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할 일이라고 가르쳤다.

 

(이상권 변호사 칼럼- 원수를 사랑하라. 2014-03-23, 뉴스와이어)

 

 

마태복음에 따르면 원래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이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로 바뀌었음을 말한다. 그러나 크리스천 변호사는  이 구절에 대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하지만 바이블에서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원수를 사랑하라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에 또 다른 해석이 있다. 어느 교회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문구를 보면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에 대하여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육신적으로 반갑게 맞아 주고 안아 주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미워하지 말고 예수믿어 구원받도록 전도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에 대하여 예수믿고 구원받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에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불교에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을까?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은 바이블에만 나오는 말로서 기독교의 전매특허와 같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불교에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Yasmi bhikkhave, puggale āghāto jāyetha, mettā tasmi puggale bhāvetabbā. Eva tasmi puggale āghāto paivinetabbo.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된다.

 

(Pahama āghātapaivinayasutta-원한의 제거에 대한 경, 앙굿따라니까야 A5.161, 전재성님역)

 

 

 

 

candle

 

 

원수는 원한 맺힌 자를 말한다.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해를 끼친 자이다. 그런 원수를 떠 올릴 때 마다 분노의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 사람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mettā tasmi puggale bhāvetabbā)”라고 말씀 하셨다. 이 말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더 진일보한 말이다. 아니 타종교에서는 전혀 볼 수도 없는 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보다 더 수승한 가르침이다.

 

사랑 보다 자애(慈愛)

 

부처님은 원한 맺힌 자에게 자애의 마음을 낼 것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자애는 빠알리어 멧따(metta)의 번역어이다. 사랑이라뜻의 삐야를 쓰지 않고 우정을 뜻하는 멧따를 사용하였을까? 이는 삐야(사랑)과 멧따(자애)의 사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다른가?

 

테라와다불교에서 예불문에 자애의 경(mettasutta, Sn1.8)’이 있다. ‘사랑의 경이라 하지 않고 자애의 경이라 한 것이다. 이는 사랑과 자애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녀간의 사랑의 의미가 강한 삐야대신 우정 또는 우호, 자비를 을 뜻하는 ‘metta’를 사용한 것은 metta가 보편적인 사랑을 뜻하기 때문이다.

 

Metta는 남녀간의 특수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자애의 경에 따르면 모든 뭇삶들이 진실로 행복하기를!(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 stn145)”라고 하였다. 모든 삶(sabbe sattā)’에는 당연히 원수도 포함된다.

 

원한의 여윔으로

 

원수를 사랑하려면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원수의 마음을 돌려 놓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청정해졌을 때 더 이상 증오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윔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dhp5)”라 하였다.

 

원수를 사랑한다고 하여 원한 맺힌 마음이 풀리는 것이 아니다. 원한 맺힌 마음을 놓아 버렸을 때 비로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수행으로서 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할 수 있을까?

 

원한이 생겨나면

 

원한 맺힌 자에게 증오가 일어 날 때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그 방법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섯 가지로 제시 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2)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3)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평정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4)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새김을 놓아 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

 

5)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행위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이와 같이

 

‘이 사람에게 행위가 주인이고,

행위가 상속자이고,

 행위가 모태이고,

행위가 친족이고,

행위가 의지처이다.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하면,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라고 인식해야 한다.(A5.161)

 

 

원한 맺힌 자에 대하여 증오심을 내려 놓기 위한 다섯 가지 방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구체적으로 증오심을 내려 놓는 방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자심해탈(慈心解脫, mettācetovimutti)

 

불교의 가르침에서 원한을 내려 놓는 방식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다. 막연하게 원수를 사랑하라 한다거나 또는 원수가 마음을 바꾸어 먹을 수 있도록 기도를 한다거나, 아니면 원수가 자신의 종교를 믿어 참회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변화 시킴으로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변하게 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변하는 것이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이 바로 자애의 마음을 닦는 것이다. 이처럼 수행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였을 때 증오의 감정이 여의게 된다.

 

자애수행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자심해탈(慈心解脫, mettācetovimutti)’이다. 이는 “존자여, 분노를 여의는 것이 곧,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입니다.(āvuso vyāpādassa yadida mettācetovimutti) (A6.13)라는 문구에 근거한다.

 

왜 악행을 하는가?

 

불교는 해탈과 열반을 추구 하는 종교이다. 그래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복수를 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원수를  갚는 것과 똑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무엇 보다 자신의 문제부터 해결 하는 것이다.

 

자신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타종교의 경전에서는 볼 수 없다. 오로지 불교경전에서만 보인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랑스런 이의 경(Piyasutta, S3.4)’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ttāna ce piya jaññā

na na pāpena sayuje,
Na hi ta
sulabha hoti

sukha dukkata1 kārinā.

 

[세존]

자신이 사랑스럽게 여긴다면

자신을 악행에 묶지 말라.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행복을 얻기가 어렵네.” (S3.4, 전재성님역)

 

만일 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긴다면

자기를 악에 질매매어서는 안되나니

나쁜 짓을 거듭거듭 많이 짓는 자는

행복을 얻기가 쉽지 않다네.” (S3.4, 각묵스님역)

 

“If one regards oneself as dear

One should not yoke oneself to evil,

For happiness is not easily gained

By one who does a wrongful deed.” (S3.4, 빅쿠보디역)

 

 

세 번역자의 번역을 실었다. 게송에 따르면 자신을 원수로 여기는 자는 기본적으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에 그 어떤 악행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멍에의 방언 질매

 

각묵스님의 번역에서 두 번째 구절을 보면 질매매어서는 안되나니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질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매우 생소한 말이다. 이럴 경우 사전을 찾아 보아야 한다. 사전을 찾아 보니 바로잡기 위하여 몹시 꾸짖음, ‘멍에’의 방언라 되어 있다. 후자의 뜻으로 본다면 멍에의 방언이라 볼 수 있다.

 

각묵스님이 질매라 번역한 것은 ‘sayuje’에 대한 것이다. sayujesayujjati의 형태로서 ‘to be combined or connected. ばれる의 뜻이다. 묶어 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빅쿠보디는 “One should not yoke oneself to evil(악으로 스스로를 묶어 매지 말아야)”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질매매이다라 하였는데, 이는 사전에 없는 말이다. 다만 질매라는 말이 멍에의 방언이라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각묵스님은 특정지역의 방언을 번역어로 사용한 것이다.

 

번역에 방언과 비속어가

 

번역에서 방언을 쓰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그리고 비속어를 쓰는 것도 바람직 하지 않다. 하지만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방언과 비속어가 빈번하게 보인다. 몇 가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hīno gammo pothujjaniko” S56.11)

 

초전법륜경에 실려 있는 번역이다. 촌스럽다라고 하였을 때 이는 촌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비하의 의미로 오해 될 수 있다.

 

 

2) “속상하고 열받는” (M2)

 

열받는다는 표현은 비속이다. 부처님이 “열받는다”식의 표현을 하였을까?

 

 

3) [자기 깜냥으로] 재어서 억측을 한다는 말입니까? (S6.8)

 

대체로 교양인들은 깜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4)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이러하다. 산꼭대기에 억수같이 비가 내리면…” (S12:23)

 

영남지방 방언으로 억수로가 있다. 무척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 억수같이 라는 말이 방언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억수같이는 방언이 아니지만 억수로는 방언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누군가 대단히 많다의 의미로 겁나게라는 표현을 하였다면 이를 용인할텐가?

 

 

5) “이 세상에서 인색하고 쩨쩨하기도 하고” (S1.49)

 

쩨쩨하다는 말은 인색하다는 말이다. 인색하다라는 표현이 있음에도 비속어인 째째하다라고 표현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부처님이 그렇게 말하였다고 상상하는 것은 어렵다.

 

 

이와 같은 초불연의 부적절한 번역어 지적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지는 자세로, 번역과 윤문(潤文)(2014-05-18)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지방어를 고집하지 말아야 하고 보편어를 침해해서는 안된다

 

번역에서 비속어나 지방어를 써서는 안된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를 이용하여 표준말로 번역해야 한다. 그럼에도 특정한 지역에서 사용되는 말이나, 승가에서나 통용되는 말이나, 시정잡배나 사용하는 비속어를 사용한다면 경전으로서 품격을 떨어뜨린다. 무엇 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하고 욕먹게 하는 구업을 짓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지방어 사용에 대하여 경계하였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지방어를 고집하지 말아야 하고 보편어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라고 가르친 것은 무엇을 두고 말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하면 지방어를 고집하고 보편어를 침해하는 것인가? 여러 지방에서 같은 것을 두고 접시라고 여기고, 그릇이라고 여기고, 사발이라고 여기고, 받침이라고 여기고, 팬이라고 여기고, 옹기라고 여기고, 컵이라고 여기고, 대야라고 여긴다. 여러 지방에서 각각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던지 각각 그것에 대하여 집착하여 고집하여 ‘이것만이 옳고 다른 것은 틀리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한다면 지방어를 고집하고 보편어를 침해하는 것이다.

 

(평화에 대한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분명하게 지방어, 즉 사투리를 사용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대신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말 보편어, 즉 표준어를 사용하라고 권장한 것이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가르침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 당시 지방에서 온 수행승들도 많았는데 이들이 그들의 지방어만을 고집한다면 가르침을 왜곡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서울경기지방의 표준어를 사용해야

 

부처님은 부처님당시 설법할 때 민중어로 말씀 하셨다. 산스크리트어가 있기는 하였지만 이는 소수의 특권층이 사용하는 언어 이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민중들이 사용하는 마가다어로 말씀 하셨다. 이처럼 부처님이 민중들이 사용하는 민중어로 설법하였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를 사용하였다는 말이다. 또 지방어 사용을 억제하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표준어를 사용하라는 말이다.

 

번역은 그 시대의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또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나라의 경우 서울과 수도권에서 사용되는 표준어를 사용해야 한다. 또 초등학생들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그 시대의 언어를 사용해여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지방어를 고집하지 말아야 하고 보편어를 침해해서는 안된다.(Janapadanirutti nābhiniveseyya, samañña nātidhāveyyā'ti iti)”(M139) 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그인간을 떠 올리면 분노가

 

원수를 사랑하라하지만 원수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원수를 가정하는 순간 원한 맺힌 마음이 나오기 때문에 억지로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한다. 더구나 바이블에 따르면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 하였는데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기란 여간 해서 쉽지 않아 보인다. 원수를 떠 올리는 순간 원한 맺힌 감정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나에게 해를 끼친 전남편이나 전아내를 떠 올렸을 때 분노의 감정이 앞서는 것과 같다.

 

원한 맺힌 자, 그인간을 떠 올리면 분노가 먼저 치밀어 오른다. 그런데 그인간을 사랑하라하고 그인간을 위해 기도하라고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그인간의 마음이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상대방의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내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마음을 내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내마음 역시 내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남의 마음이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내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음에도

 

사람들은 내뜻대로 되기를 바란다. 남편이나 아내도 내뜻대로 되어야 하고, 아이도 내뜻대로 되어야 한다. 돈도 내뜻대로 벌려야 하고, 심지어 대통령도 내뜻대로 움직이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내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 심지어 나 자신도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나의 것,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 여겨졌던 것이 사실 알고 보니 내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 (neta mama, neso'hamasmi, na me so attā)(S22.59)”라고 무아의 가르침을 설하였다.

 

사람들은 나의 몸과 마음이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고 집착한다. 이렇게 집착하면 할수록 괴로움만 생겨난다. 나의 몸과 나의 마음이 통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통제불능이 우리 몸과 마음, 즉 오온이다.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말이 있듯이 마음은 멋대로이다. 이처럼 변덕이 죽 끓듯이 하는 마음을 지녔을 때 어느 것 하나 고정 되어 있지 않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지만 그 때 뿐이다. 기도로서 원수의 마음을 바꿀 수도 없다. 나 자신도 콘트롤 되지 않다면 남의 마음 역시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럴 경우 차라리 내 마음을 바꾸는 것이 더 빠르다.

 

내 마음을 바꾸는 것이 더

 

원한 맺힌 그인간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래서 증오의 감정만 일어난다. 이런 상태에서 그인간을 사랑한다거나 그 인간을 기도한다거나 그인간이 종교를 믿어서 회개하기를 바라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기 전에 내가 먼저 마음을 고쳐 먹는 것이 더 낫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떤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A5.161)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기자신의 마음부터 바꾸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애, 연민, 평정, 새김, 업의 주인임을 반조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 대신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런 말이 더 효과적이다. 원수라는 대상을 정해 놓고 마치 억지춘향식으로 원수를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증오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자애, 연민, 평정 등으로 자신의 마음을 먼저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

 

원한의 감정이 일어 났을 때 자신의 마음을 먼저 닦는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였을 때 더 이상 미움도, 원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이블에서 아직까지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는 문구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불교경전에서는 원수를 사랑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고 하였다. 왜 그럴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악행을 하는 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을 원수 대하듯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원수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 이처럼 내부에 적이 있다. 그 적은 다름 아닌 나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신을 원수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 원수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을 친구로 만드는 것이다. 자신을 친구로 여긴다면 자기자신을 해치는 악행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원수를 사랑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고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 남을 해쳐서는 안되리

 

자애명상을 할 때는 순서가 있다. 가장 먼저 자기자신에 대해서이다. 그 다음에는 좋아하는 사람, 그 다음에는 나와 무관한 사람, 최종적으로는 원한 맺힌 사람이다. 왜 이런 순서인가? 이에 대하여 증오와 적개심이 일어날 때, 청정도론의 자애명상과 Imee Ooi 자비송(2019-08-1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불교에서는 처음부터 대뜸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자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였을 때 노여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여움, 분노부터 가라 앉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부터 청정하게 해야 한다.

 

자애명상 첫 단계는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다. 남에 대한 사랑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애명상의 순서는 항상 자기자신à좋아하는 사람à무관한 사람à원한 맺힌 사람순서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사람이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적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노래 하였다.

 

 

[세존]

마음이 어느 곳으로 돌아다녀도

자기보다 더 사랑스런 님을 찾지 못하듯,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사랑스러우니

자신을 위해 남을 해쳐서는 안되리.”(S3.8)

 

 

 

2014-10-2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