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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죽듯이” 어떤 꽃도 어떤 열매도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0. 23. 15:21

 

 

대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죽듯이어떤 꽃도 어떤 열매도

 

 

 

악의 꽃이 있을까? 만일 악의 꽃이 있다면 악의 열매도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이 꼬살라국의 빠세나디왕과의 대화에서 왕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어떠한 현상이 사람에게 생겨나소 불이익과 괴로움과 불안한 삶이 나타납니까?(사람의 경, S3.2)”라고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말씀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한다.

 

 

Lobho doso ca moho ca

purisa pāpacetasa,
Hi
santi attasambhåtā

tavasārava samphalanti.

 

 

[세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오로지 스스로에게 생기나니

악한 마음을 지닌 자는 스스로를 죽이네.

대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죽듯이.”(S3.2, 전재성님역)

 

 

자신에게 생긴 탐욕-성냄-어리석음

악한 마음 가진 자신 파멸시켜 버리나니

비유하여 말하자면

갈대에게 생긴 열매 갈대 자신 파멸하듯.” (S3.2, 각묵스님역)

 

 

“Greed, hatred, and delusion,

Arisen from within oneself,

Injure the person of evil mind

As its own fruit destroys the reed.”(S3.2, 빅쿠보디역)

 

 

게송에 따르면 대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죽는다고 하였다. 이는 악의 열매가 맺으면 파멸한다는 말과 같다.

 

악의 꽃다발

 

악의 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다. 이외 악의 꽃은 많이 있을 것이다. 아마 불선한 마음은 모두 악의 꽃이라 볼 수 있다. 아비담마에서 마음 분류표에 따르면 마음부수 52가지 중에 해로운 마음부수(akusala-cetasika)’ 가 이에 속할 것이다. 탐욕(lobha), 성냄(dosa), 어리석음(moha)을 비롯하여 양심없음(ahirika), 수치심없음(anottappa), 자만(mana), 질투(issa), 후회(kukucca), 의심 (vicikaccha) 등 모두 14가지 마음이 악의 꽃이라 볼 수 있다.

 

악의 꽃을 모아 놓으면 악의 꽃다발이 될 것이다. 크게 탐욕의 꽃다발, 성냄의 꽃다발로 구분 된다. 탐욕의 꽃다발에 들어 가 있는 악의 꽃은 탐욕, 사견, 자만이다. 성냄의 꽃다발에 들어 가 있는 악의 꽃은 성냄, 질투, 인색, 후회이다. 이렇게 악의 꽃이 피어 열매를 맺었을 때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꽃이 피면 열매를 맺듯이

 

탐욕의 꽃, 성냄의 꽃, 어리석음의 꽃이 피었을 때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이는 자연의 법칙이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듯이 결국 열매로 귀결된다. 이는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 것과 같다.

 

선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면 선과보를 받고,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면 악과보를 받는 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래서 씨를 뿌리는 그대로 그 열매를 거두나니 선을 행하면 선한 결과가 악을 행하면 악한 결과가 있으리. (S11.10)”라 하였다. 이렇게선인선과와 악인악과는 진리이다.

 

악한 행위를 하는 자가 잘사는 경우가 있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한 게송이 있다. 법구경에서 악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악한 자도 행운을 누린다. 악의 열매가 익으면, 그때 악인은 죄악을 받는다. (Dhp120)”라 하였다. 악한 행위를 한 자가 잘 사는 것은 이전에 선한행위에 대한 과보를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이후에는 악한 행위에 대한 과보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악행에 대한 열매가 익지 않았을 뿐이다.

 

대나무인가 갈대인가?

 

꽃이 피면 열매를 맺듯이 악의 꽃 역시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악의 열매는 파멸을 가져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 따르면 대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죽듯이 (tavasārava samphalanti, S3.2)”라 하여 대나무의 비유를 들었다.

 

주석에 따르면 대나무는 열매를 맺으면 죽는다고 한다. 이렇게 꽃이 피어 열매를 맺으면 죽는 식물로서 갈대와 대나무를 들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악의 꽃이 열매를 맺으면 악행에 대한 과보가 무르익어 파멸에 이른다

 

빠알리게송에서 tavasāravatacasāra로 설명된다. tacasāra ‘taca () +sāra(the reed)’형태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tacasāra에 대하여 갈대로 번역하였다. 초불연의 각주에 따르면 대나무(velu)나 갈대(nala)와 같은 껍질이 속재목(심재)처럼 딱딱한 식물(taca-sara)은 자신의 열매가 자기자신을 손상시키고 파멸시키듯이 자신을 손상시키고 파멸시킨다는 뜻이다.(SA.i.137)”라고 되어 있다. 껍질이 단단한 식물은 꽃이 피어 열매를 맺었을 때 죽는 다는 말이다. 주석의 견해 대로 라면 갈대 보다 대나무가 적절하다. 그럼에도 갈대로 번역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tavasāra va sampha. Spk: As its own fruit injures, destroys, the bamboo or reed, so do they injure, destroy, him. The reed family is called tacasāra because its bark is hard like heartwood. Sam here is the reflexive pronominal adjective, glossed attano. See EV I, n. to 659, EV II, n. to

136, and n. 657 below. Compare the present verse with v. 597.

 

(cdb 400p, 빅쿠보디)

 

 

빅쿠보디의 각주에 따르면 대나무나 갈대는 열매가 맺으면 자기자신을 해치고 파괴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껍질이 나무심재처럼 딱딱한 식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대나무와 갈대의 예를 들어 주석 되어 있음에도 굳이 갈대라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빅쿠보디는 As its own fruit destroys the reed(갈대의 열매로 갈대자가 파괴되듯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대나무라 하였다. 그렇게 한 이유는 각주에 따르면 tacasāra는 내부에 단단한 핵심이 없고 껍질만 존재하는 식물로서 주석에서 설명하듯이 대나무나 갈대 같은 것이다. 누구나 알기 쉽게 대나무로 번역한다(상윳따1 805번 각주)”라 하였다.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비록 sāra의 뜻이 갈대를 뜻하는 말이 있긴 하지만 주석에서는 대나무와 갈대 두 가지가 언급 되어 있으므로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대나무로 번역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번역어로서 대나무가 적합한가 갈대가 적합한가?

 

대나무의 꽃과 열매는?

 

대나무의 꽃과 열매는 어떻게 생겼을까? 영문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대나무에 꽃이 피어 있는 사진을 발견할 수 있다. 설명에 따르면 대나무에 꽃이 피면 기근의 징조로서 간주 되었다고 한다. 꽃이 핀 대나무를 보니 말라 죽어 가고 있다.

 

 

 

대나무꽃(Bamboo blossom, 위키백과)

 

 

위키백과에 따르면 대나무는 40년에서 80년의 수명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대나무꽃은 왜 필까? 습도와 영양등에 따른 토양의 변화로 꽃이 핀다고 한다. 꽃이 피면 열매가 나오는데 이를 중국에서는 대나무쌀(bamboo rice)’이라 한다. 대나무숲은 꽃이 피면 대나무가 모두 죽는데 넓은 지역에서 발생한다.

 

 

 

꽃이 말라죽은 대나무

 

 

 

일년에 한번 꽃이 피는 갈대

 

이번에는 갈대꽃을 검색해 보았다. 갈대는 온대와 한대에 걸쳐 널리 분포하는 여러해 살이 풀이다. 습지나 갯가, 호수 주변의 모래땅에 군락을 이루고 자란다. 줄기는 마디가 있고 속이 비었으며, 높이는 3m 정도이다. 꽃은 8-9월에 피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낙동강 하구에 피어 있는 갈대 꽃은 다음과 같다.

  

 

 

 (중앙일보)

 

 

 

검색에 따르면 갈대는 9월에 단 한번 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갈대는 매년 꽃이 핀다고 볼 수 있다. 다년생 풀이지만 어는 풀과 마찬가지로 일년 단위임을 알 수 있다. 모든 풀이 그렇듯이 때가 되면 꽃이 피듯이 갈대 역시 9월이면 꽃이 핀다. 그리고 꽃이 지면 시들어 버린다. 이렇게 일년 단위로 성장하는 것이 갈대이다.

 

갈대 보다 대나무

 

빅쿠보디는 As its own fruit destroys the reed”라 하였다. 또 각묵스님은 갈대에게 생긴 열매 갈대 자신 파멸하듯이라 번역하였다. 하지만 악행에 대한 과보로서 갈대의 비유를 들기에는 갈대가 부적합하다. 악의 열매가 익으려면 길게 보면 수십년이 걸릴 수 있으나 갈대의 경우 일년 단위로 주기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이 비유를 든 대나무가 더 적합할 듯 하다.

 

대나무에 꽃이 피는 것을 보기 힘들다고 하였다. 몇 십년만이 될 수 있고 심지어 백년만에 볼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사실 언제 볼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대나무에 꽃이 핀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년에 한번씩 꽃이 피는 갈대와 다른 것이다.

 

대나무에 꽃이 피어 열매를 맺게 되면 대나무는 모두 말라 죽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대나무의 특징은 악행과 악행에 대한 과보를 설명하는데 매우 적절하다고 본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이 악한 마음을 지닌 자는 스스로를 죽이네. 대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죽듯이.(S3.2)”라 번역하였는데, 이는 대나무가 악행에 대한 과보의 비유로서 갈대보다 더 적절한 번역이라 본다.

 

데와닷따경(S6.12)에서

 

빅쿠보디의 각주에 따르면 갈대의 열매에 대한 비유를 들면서 게송 597번과 비교해 보라고 하였다. 597번 게송은 데와닷따경(S6.12)에 실려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Phala ve kadali hanti

pheu vepha phala naa
Sakk
āro kāpurisa hanti

gabbho assatari yathāti.

 

 

[싸함빠띠]

파초와 대나무와 갈대는

자신의 열매가 자신을 죽이네.

수태가 노새를 죽이듯.

명예가 악인을 죽이네.”(S6.12, 전재성님역)

 

 

마치 그 열매가 파초를 죽게하고

그 열매가 대나무와 갈대도 죽게 하고

수태가 암 노새를 죽이는 것처럼

존경은 어리석은 사람을 죽게 합니다.”(S6.12, 각묵스님역)

 

 

“As its own fruit brings destruction

To the plantain, bamboo, and reed,

As its embryo destroys the mule,

So do honours destroy the scoundrel.(S6.12, 빅쿠보디역)

 

 

이 게송은 데와닷따의 악행에 대한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자멸의 경(S17.35)’에도 산문과 함께 동일한 게송이 실려있다. 자멸의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파초가 열매를 맺으면 자멸하고 파초가 열매를 맺으면 쇠망하듯이, 수행승들이여, 데바닷따에게 생겨난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 그 자신을 파멸시키고, 데바닷따에게 생겨난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 그 자신을 쇠망하게 할 것이다. (S17.35)”라고 표현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수행자가 이득, 명예를 탐하였을 때 마치 악의 꽃이 피어 악의 열매가 맺는 것처럼 파멸에 이를 것이라는 말이다.

 

수말과 암당나귀의 잡종 노새의 운명

 

꽃이 피어 열매를 맺으면 죽는 식물이 있다. 파초, 대나무, 갈대가 대표적이다.그런데 게송에서는 동물로서는 노새를 들었다. 노새의 경우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노새는 수말과 암당나귀의 잡종으로 생식능력이 없다. 여기서는 민속적인 세계관에 따라 새끼가 잉태하면 노새는 죽는다라고 표현한 것이다(상윳따1 1408번 각주)”라고 설명하였다. 잡종인 노새가 새끼를 배면 죽는다는 것이다.

 

데와닷따경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수행자의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대한 경계이다. 수행자의 본분에 맞지 않는 이득을 취하고나 명예를 추구하거나 칭송을 받는 것에 몰두 한다면 필연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됨을 말한다. 그래서 꽃이 피어 열매를 맺으면 죽게 되는 파초, 대나무, 갈대의 비유를 들었다. 그리고 잡종으로 태어난 노새가 임신하면 죽게 됨을 말하였다.

 

파초와 야자나무

 

파초는 대나무, 갈대와 함께 꽃이 피어 열매를 맺으면 죽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파초의 줄기에 대하여 다수의 잎집이 서로 감싸면서 겹쳐져 얼핏보면 가지처럼 보이는 위경(僞莖)이 곧게 자란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파초가 야자나무와 다른 것이다.

 

야자의 경우 심재가 있어서 마치 나무와 같은 모양이다. 이처럼 심재가 없이 속이 비어 있는 듯한 파초는 오온을 설명하는 데도 활용된다. 그래서 “형성은 파초와 같고 (S22.95, 전재성님역 )”라 한 것이다. 이는 “sakhārā kadalūpamā의 번역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파초를 뜻하는 kadali에 대하여 야자나무라 하였다. 그래서 “심리현상들은 야자나무와 같으며 S22.95)”라 하였다. 하지만 이는 오역이다. 이에 대하여 파초인가 야자수인가, 포말경(S22:95) 까달리(kadali)나무(2013-04-0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각묵스님이 kadali에 대하여 야자나무라 한 것은 명백히 오역이다. 그런데 데와닷따게송에서는 kadali에 대하여 파초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마치 그 열매가 파초를 죽게하고(Phala ve kadali hanti,S6.12)”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포말의 경(S22.95)

데와닷따의 경(S6.12)

빠알리어

sakhārā kadalūpamā

Phala ve kadali hanti

pheu vepha phala naa

전재성님역

형성은 파초와 같고

파초와 대나무와 갈대는

자신의 열매가 자신을 죽이네

각묵스님역

“심리현상들은 야자나무와 같으며

마치 그 열매가 파초를 죽게하고

그 열매가 대나무와 갈대도 죽게 하고

빅쿠보디역

“Volitions like a plantain trunk”

“As its own fruit brings destruction To the plantain, bamboo, and reed,”

 

 

 

표를 보면 포말의 경과 데와닷따의 경에 실려 있는 게송에서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식물이 까달리(kadali)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모두 파초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각묵스님의 경우 야자나무(S22.95)와 파초(S6.12)로 번역하였다. 같은 단어 kadali에 대하여 달리 번역한 것은 번역의 일관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까달리에 대하여 야자나무로 번역한 것은 오역이라고 스스로 증명하는 듯 하다.

 

파초가 절집에서 사랑받는 이유는

 

파초의 꽃과 열매는 어떻게 생겼을까?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다. 

 

 

 

 

 

 

 

파초꽃

 

 

 

 

 

파초열매

 

 

 백과사전에 따르면 파초는 꽃이 피고 나면 식물체가 죽고, 그대신 옆에 조그만 식물체가 새로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라 하였다. 이런 파초는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특히 절집에서 볼 수 있다. 이는 혜가대사의 신심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파초인가 야자수인가, 포말경(S22:95) 까달리(kadali)나무(2013-04-0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수종사 파초(2014 8)

 

 

 

탐진치의 종착지는 어디인가?

 

사람들은 탐진치로 살아 간다. 탐진치로 사는 것이 뭇삶들의 일반적인 행태이다. 그렇다면 탐욕의 끝은 어디인가? 또 성냄의 종착지는 어디인가?

 

어떤 이는 주식을 하다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가지고 있는 전재산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이혼까지 당하였다. 또 어떤 이는 도박에 열중하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날렸다. 이렇게 주식을 하고 도박을 하는 것은 허황된 욕심 때문이다. 다름 아닌 탐욕이다. 이렇게 탐욕의 끝은 항상 파멸로 끝난다.

 

어떤 이는 화를 잘 낸다. 그러다 보니 가까이 가려 하지 않는다. 이렇게 화를 내다 보면 인간관계가 파괴 된다. 친구에게 화를 내면 다시는 연락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거래업체에 화를 내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을의 위치에 있는 자가 갑에게 화를 내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다시는 주문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화를 내면 인간관계가 파괴된다. 더구나 격분하여 살인을 하였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돌이킬수 없는 죄업을 짓고 말 것이다. 이렇게 화를 내면 인간관계가 끝나고, 거래선이 끝어진다. 그래서서 화를 내면 파괴적으로 작용하여 결국 파멸로 이끈다.

 

사람들은 매일 탐욕과 성냄으로 살아 간다. 좋으면 거머쥐려 하고 싫으면 밀치는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탐진치로 살아가는 뭇삶의 종착지는 어디인가? 그것은 죽음이다. 탐욕의 끝은 죽음이고, 성냄의 끝도 죽음이다. 마치 죽음을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것 같다. 탐진치의 종착지는 죽음이다.

 

어떤 꽃도 어떤 열매도

 

누구나 죽는다. 탐진치로 살아 가는 사람도 죽고, 그 흐름을 거슬러 사는 사람도 죽는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는 자가 있고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자가 있다. 꽃이 피면 반드시 열매를 맺듯이 탐진치로 살아 가는 뭇삶들 역시 죽음으로 귀결된다. 그런 죽음 다름 아닌 파멸이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오로지 스스로에게 생기나니 악한 마음을 지닌 자는 스스로를 죽이네. 대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죽듯이. (S3.2)”라 하였다. 대나무에 꽃이 피어 열매가 맺으면 죽고 말듯이, 사람들에게도 탐욕의 꽃, 성냄의 꽃 등 악의 꽃이 피었을 때 악의 열매와 같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대나무에 꽃이 피어 열매를 맺으면 모두 죽어 버린다. 그러나 죽은 그 자리에 또 다시 싹이 올라 온다. 이런 현상은 단단한 껍질을 가진 식물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대나무, 갈대, 파초와 같이 심재가 없이 껍질로만 되어 있는 식물을 말한다. 이런 식물은 꽃이 피어 열매가 맺으면 죽고 만다. 그러나 그 자리에 새롭게 싹이 올라 온다. 이렇게 본다면 탐진치는 재생을 위한 연료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연기의 삶을 사는 자는 끊임 없이 유전하고 윤회하게 된다.

 

탐진치로 살아 가는 뭇삶들은 지은 행위로 인하여 끊임 없이 유전하고 윤회한다. 그래서 윤회를 뜻하는 빠알리어가 삼사라(sasāra)라 하였을 것이다. 삼사라의 뜻이 ‘round of rebirth’의 뜻이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마치 대나무에 열매가 맺히면 죽게 되고 다시 재생 하듯이 끊임없이 탄생과 죽음을 반복한다.

 

탐진치를 거슬러 가는 자에는 파멸이 있을 수 없다. 탐욕의 열매, 성냄의 열매가 맺지 않은 자에게 죽음과 재생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탐진치를 소멸한 아라한은 그 어떤 꽃도 피우지 않고 그 어떤 열매도 맺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선한 꽃, 선한 열매일지라도.

 

 

2014-10-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