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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찌여, 이 모두를 너는 칭찬하지만”낚싯줄에 걸려든 이교도의 스승들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0. 15. 18:11

 

나무찌여, 이 모두를 너는 칭찬하지만낚싯줄에 걸려든 이교도의 스승들

 

 

 

여러 이교도 제자들이

 

상윳따니까야에 여러 이교도 제자들의 경(S2.30)’이 있다. 이교도라 함은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를 지칭한다. 경에 따르면 육사외도의 제자들이 등장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때 많은 여러 이교도의 제자들로 하늘아들 아싸마, 싸할리, 님카, 아코따까, 베땀바리와 마나바가미야가 깊은 밤중에 아름다운 빛으로 벨루 숲을 밝히며 세존께 계신 곳으로 찾아 왔다.

 

(여러 이교도 제자들의 경, 상윳따니까야 S2.30, 전재성님역)

 

 

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하늘사람들이다. 죽어서 천상에 태어난 것이다. 천상에 태어난 이전의 육사외도들이 부처님 면전에 나타나 자신의 스승에 대하여 칭찬한다.

 

이교도들도 천상에 태어나는가?

 

육사외도는 삿된 견해로 알려져 있다. 삿된 견해를 가지면 악처에 태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육사외도의 스승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천상에 태어난 것이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 ‘여러 외도들의 신도인 많은 신의 아들들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업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보시를 베푸는 등의 공덕을 지어서 천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는 우리들의 스승에 대한 청정한 믿음 때문에 [천상에] 태어났다.’라는 인식을 가졌기 때문에 십력을 가진 [부처님]의 곁에 가서 우리스승들을 칭송하리라.’라고 하면서 세존을 뵈러 와서 각자의 게송을 읊은 것이다.”(SA.I.126)

 

(상윳따니까야 1 340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의 각주에 따르면 외도가 하늘나라에 태어 난 것은 보시공덕이 가장 컷다고 하였다. 또 청정한 믿음(pasada)를 가졌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Spk:

1) "These young devas were proponents of kamma; therefore they performed meritorious deeds and were reborn in heaven. Thinking that they had been reborn there on account of their confidence in their respective teachers, they came to the Buddha in order to recite verses in praise of those teachers."

 

2) Both Puranaa Kassapa and Makkhali Gosala advocated doctrines that were opposed to the Buddhist teaching on kamma; their teachings are classified among the views that normally lead to a bad rebirth.

 

(CDB1 190번 각주, 빅쿠보디)

 

 

대체로 초불연의 각주와 유사하다. 다만 초불연에서 언급 되지 않은 내용이 있다. 그것은 두 번째 문단의 뿌라나 깟사빠와 막칼리 고살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이 두 외도의 스승이 부처님의 업의 가르침과 반대 되는 견해를 보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빅쿠보디는 their teachings are classified among the views that normally lead to a bad rebirth.” 라 하였다. 외도의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악처로 이끈다는 뜻이다.

 

누구나 하늘나라에 태어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천상에 태어 나기 위해서는 보시와 지계와 믿음이라 하는데, 이렇게 본다면 비록 외도라 하더라도 천상에 태어날 조건은 갖춘 것이다.

 

어느 종교이든지 천상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내세에 천상에 태어나 현세 보다 더 행복하게 산다는 등의 이야기를 말한다. 그런데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가장 먼저 민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어느 종교에서든지 강조 되는 사항이다. 다음으로 보시이다. 이는 이웃에 대한 봉사, 또는 베푸는 삶이라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지계이다. 어느 종교이든지 계행을 지킬 것을 강조한다. 대부분 살인, 거짓말, 음행 등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과 보시와 지계의 생활을 하면 보통사람들 보다 훨씬 더 도덕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에 대한 과보로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은 반드시 불교를 믿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느 종교를 믿어도 믿음, 보시, 지계를 하면 하늘나라에 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종교를 갖지 않아도 평생 착하고 건전하게 살았다면 하늘나라에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뿌라나 깟사빠에 대한 칭찬

 

여러 이교도 제자들의 경(S2.30)’에서는 네 명의 이교도 제자가 등장하여 이전생의 스승에 대하여 칭송한다. 먼저 뿌라나 깟사빠에 대하여 칭찬하는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번역비교표를 만들어 보았다.

 

 

 

아싸마의 뿌라나 깟사빠 찬탄, (S2.30))

 

빠알리

Idha chinditamārite

hatajānīsu kassapo
Pāpa
na samanupassati

puñña vā pana attano,
Sa ve vissāsamācikkhi

satthā arahati mānananti.

육구게

전재성님역

[아싸마]

세상에서 베이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맞거나 손해를 보아도

깟싸빠는 나쁜 마음을 품지 않으며

또한 스스로 공덕을 나타내지 않네.

참으로 믿음의 바탕을 가르치니

스승으로 존경받을만하네.”

육구게

각묵스님역

깟사빠는 자르고 죽이고 때려도 죄악이 아니라 하고

자신에게 공덕이 되는 것도 없다고 합니다.

그는 참으로 신뢰의 기반을 가르쳤나니

그는 존경 받을 만한 스승입니다.”

사구게

빅쿠보디역

"In injuring and killing here,

In beating and extortion,

Kassapa did not recognize evil

Nor see any merit for oneself.

He indeed taught what is worthy of trust:

That teacher deserves esteem."

육구게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뿌라나 깟사빠를 찬탄하는 게송이다. 그런 아싸마는 이전 생에서 뿌라나 깟사빠의 제자이었다. 그래서세상에서 베이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맞거나 손해를 보아도 깟싸빠는 나쁜 마음을 품지 않으며 또한 스스로 공덕을 나타내지 않네라고 노래 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는 무엇일까?

 

뿌라나 깟사빠의 도덕 부정론

 

초기경전에서 이교도의 가르침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뿌라나 깟사빠의 도덕 부정론은 다음과 같은 정형구 형태로 발견된다.

 

 

참으로 업을 짓거나 업을 짓도록 시켜도, 살육하거나 살육하도록 시켜도, 학대하거나 학대하도록 시켜도, 괴롭히거나 괴롭도록 시켜도, 억누르거나 억누르도록 시켜도, 협박하거나 협박하게 시켜도,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가택을 침입하고, 약탈하고, 절도하고, 노략질하고, 타인의 처를 겁탈하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면도칼처럼 예리한 바퀴로써 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조각조각 고깃덩이로 잘라도 그것으로 인한 죄악이 없으며, 또한 죄악의 과보도 받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갠지스 강의 남쪽을 다니면서 살육하거나 살육을 시키며, 절단하거나 절단하도록 시키며, 학대하거나 학대하도록 시켜도 그것으로 인한 죄악이 없으며 또한 죄악의 과보도 없다.

 

어떤 사람이 갠지스 강의 북쪽을 다니면서 보시하거나 보시하도록 시키고, 제사지내거나 제사지내도록 시켜도 그것으로 인한 공덕이 없으며 또한 공덕의 과보도 없다.

 

보시에 의해서도 수행에 의해서도 계행을 지키더라도 진실을 말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한 공덕이란 없으며 또한 그 공덕의 과보도 없다.” (M60)

 

 

뿌라나 깟사빠는 원인과 업보를 부정하는 주장을 폈다. 악한 일을 하거나 선행을 하거나 간에 둘 다 선악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와 같은 견해를 일반적으로 도덕부정론이라 한다.

 

도덕부정론자 뿌라나 깟사빠의 가르침을 추종하였던 아싸마는 악처에 떨어지지 않고 하늘나라에 태어났다. 이렇게 하늘나라에 태어난 요인으로 선업공덕(meritorious deeds)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뿌라나 깟사빠의 가르침이 도덕 부정론이긴 하지만 보시를 베푸는 등의 공덕을 쌓았고, 더구나 스승에 대한 청정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싸마는 부처님 면전에서 참으로 믿음의 바탕을 가르치니 스승으로 존경받을만하네라고 하여 자신의 스승을 찬탄하고 있다.

 

육구게와 사구게

 

번역을 비교해 보면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육구게의 번역과 사구게의 번역이다. 빠알리원문 육구게로 되어 있다. 그래서 전재성님과 빅쿠보디는 육구게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사구게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사구게로 번역되다 보니 시어라기 보다 산문처럼 보인다.

 

막칼리 고살라에 대한 칭찬

 

다음으로 하늘아들 싸할리의 게송이다. 싸할리는 막칼리 고살라의 제자이었다. 싸할리가 읊은 게송에 대한 번역비교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싸할리의 막칼리 고살라 찬탄, (S2.30))

 

빠알리

Tapojigucchāya susavutatto

vāca pahāya kalaha janena,
Sa mosavajj
ā virato saccavādī

nahanūna tādī pakaroti pāpanti.

Tapojigucchāya

전재성님역

[싸할리]

싫어하여 떠남과 고행으로 잘 길들여

사람들과의 논쟁과 다툼을 버리고

비난 받을 말을 떠나 평등하게 진실을 말하네.

참으로 이처럼 악을 짓지 않는다네.”

싫어하여 떠남과 고행

각묵스님역

고행 통한 금욕으로 자신을 잘 단속하고

사람들과 다투는 그런 말을 버렸으며

거짓말을 금하고 곧고 바른 말 하는 분

참으로 그런 분은 악을 짓지 않습니다.”

고행 통한 금욕

빅쿠보디역

"By austerity and scrupulousness

He attained complete self-restraint.

He abandoned contentious talk with people,

Refrained from falsehood, a speaker of truth.

Surely such a one does no evil.”

austerity and scrupulousness

 

 

 

이 게송에서 키워드는 고행과 금욕이다. 이는 고행과 금욕의 가르침을 펼친 막칼리 고살라에 대한 찬탄이다.

 

막칼리 고살라의 숙명론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막칼리 고살라의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정형구로 표현된다.

 

 

뭇 삶이 오염되는 데는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뭇 삶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오염된다. 뭇 삶이 청정해지는데도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뭇 삶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청정해진다. 거기에는 힘도 없고 애씀도 없고 사람의 노력도 없고 사람의 열성도 없다. 모든 뭇 삶, 모든 생명, 모든 존재, 모든 영혼은 자유가 없이 힘도 없이 노력도 없이 결정과 종과 자연의 본성에 의하여 서로 변이하며 여섯 가지 종에 따라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받는다.”(M76)

 

 

이와 같은 막칼리 고살라의 주장에 대하여 숙명론이라고 한다. 이는 결정론을 말한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결정과 종과 자연의 본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는 것이다.

 

막칼리 고살라는 모든 사건의 원인과 결과들이 강하게 결정 되어 있는 것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모든 사건들이 미리 결정 되어 있으며 운명지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막칼리 고살라의 주장을 따르는 무리에 대하여 아위지까(Ājīvika)라 하며 한자어로 사명외도(邪命外道)라 한다.

 

고행을 통한 금욕?

 

게송에서는 막칼리 고살라의 이론이 요약 되어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고행과 금욕 등으로 스승을 찬탄하고 있다. 이 부분과 관련된 말이 ‘Tapojigucchāya’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이 단어에 대하여 고행을 통한 금욕이라 번역하였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고행을 통한 금욕으로 옮긴 원어는 Tapo-jigucchā이다. 디가니까야 우둠바리까사자후 경(D25) 등에서도 그곳에 해당되는 주석서를 참조하여 고행을 통한 금욕으로 옮겼다.

 

(초불연 상윳따1 343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은 빠알리어 ‘Tapojigucchāya’에 대하여 고행을 통한 금욕으로 번역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석서와 복주석서를 참고 하여 그렇게 번역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주석적 번역을 말한다.

 

이렇게 주석적 번역을 한 또 하나의 이유로서 주석서와 복주석서의 설명에서 병렬접속사 ‘ca’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고행과 금욕으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라고 코멘트 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각묵스님은‘Tapojigucchāya’에 대하여 고행과 금욕으로 번역하지 않고 고행을 통한 금욕으로 번역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빅쿠보디는 ‘Tapojigucchāya’에 대하여 ‘austerity and scrupulousness(내핍과 면밀함)’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고행과 금욕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초불연 번욕은 빅쿠 보디와 달리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재성님은 싫어하여 떠남과 고행으로 번역하였다.

 

‘Tapojigucchāya’‘Tapo (Religious austerity, 苦行) +jigucchā(Disgust, 厭離)’ 형태이다. 특히 jigucchā라는 단어는 ‘disgust for; dislike; detestation’로 설명 되어 있는데, 이는 한자어로 염리(厭離)’의 뜻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싫어하여 떠남과 고행으로 번역한 것이다. 빅쿠 보디 역시 같은 뜻으로 고행과 금욕이라는 의미로서 ‘austerity and scrupulousness’라 번역하였다.

 

빅쿠 보디는 각주에서 주석의 견해가 ‘scrupulousness by austerity(내핍에 따른 용의 주도함)’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고행과 금욕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의 경우 주석과 복주석의 견해를 중시하여 고행 통한 금욕이라 하였다. 이렇게 번역한 이유로서 병렬접속사 ca가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금욕과 고행은 어떻게 다른가? 

 

금욕은 반드시 고행을 통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금욕과 고행은 어떻게 다를까? 사전에 따르면 금욕은 욕구나 욕망을 억제하고 금함이라 설명 되어 있고, 고행은 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들을 통하여 수행을 쌓는 일아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고행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고행 통한 금욕이라 하였다. 금욕하는 것을 더 힘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고행을 통한 금욕이라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Tapojigucchāya’라는 단어가 비록 병렬접속사 ca가 보이지는 않지만 고행과 염리또는 고행과 로 해석해도 무방할 듯 하다. 구역질 나는 고행의 뜻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적절한 번역이 될 수 없다. 외도의 제자들이 자신의 스승을 찬탄하는데 있어서 구역질 나는 고행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전재성님은 싫어하여 떠남과 고행으로라 하였고, 빅쿠보디는 ‘austerity and scrupulousness’라 번역한 것이라 본다. 그러나 각묵스님의 고행 통한 금욕이라는 말은 어법에 맞지 않는다고 본다.

 

확연하게 차이 나는 번역

 

게송에서 세 번째 구절은 ‘Sa mosavajjā virato saccavādī이다. 이에 대한 번역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전재성님은 비난 받을 말을 떠나 평등하게 진실을 말하네.”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거짓말을 금하고 곧고 바른 말 하는 분이라 하였다. 여기서 비난 받을 말거짓말이 대비 된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Mosavajjā‘untruth’의 뜻이다. ‘진실이 아님이라는 말이다. Viratoviramati의 과거형이다. Viramati‘abstains; refrains; desists; ceases’의 뜻으로 자제(自制)의 의미이다. 따라서 ‘mosavajjā virato’진실이 아닌 것을 자제한의 뜻이 된다. 그래서 전재성님의 비난 받을 말을 떠나라 번역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거짓말을 금하고라 하였다. 거짓말이라 번역하였을까?

 

‘Sa mosavajjā virato saccavādī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Refrained from falsehood, a speaker of truth”라 하였다. 이는 거짓을 억제하고 진실을 말하는 자라 번역된다. 이런 번역은 각묵스님의 번역과 일치한다.

 

니간타 나타뿟따에 대한 칭찬

 

다음으로 하늘아들 님카의 게송이다. 이는 자이나교의 교주인 니간타 나타뿟따의 공덕을 찬탄하는 내용이다.

 

 

님카의 니간타 나타뿟따 찬탄, (S2.30))

 

빠알리

Jegucchi nipako bhikkhu

cātuyāmasusavuto,
Di
ṭṭha sutañca ācikkha

nahanūna kibbisī siyāti.

bhikkhu

전재성님역

[님카]

싫어하여 떠남의 슬기로운 수행승

네 가지 계행으로 몸을 길들여

보고 들은 것을 구현하는 님

참으로 어떠한 허물도 없네.”

수행승

각묵스님역

고행을 행하고 분별력 있는 비구는

네 가지 제어로써 단속을 실천하고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바르게 설명하나니

분명 그는 악덕을 짓는 자가 아닙니다.”

비구

빅쿠보디역

" A scrupulous discerning bhikkhu,

Well restrained by the four controls,

Explaining what is seen and heard:

Surely, he could not be a sinner."

bhikkhu

 

 

자이나교 수행자도 빅쿠라 하는가?

 

첫번째 구절을 보면 ‘Jegucchi nipako bhikkhu’라 하여 빅쿠라는 말이 나온다. 빅쿠라는 말은 불교수행자에게 해당되는 말로 알고 있는데 자이나교도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말일까?

 

Bhikkhu에 대한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m.] a Buddhist monk’라 설명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붙여 주는 호칭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빅쿠가 ‘A beggar(걸식자); a mendicant friar(탁발하는 수사)’의 뜻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탁발에 의존하는 수행자를 빅쿠라 볼 수도 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빅쿠를 제외한 나머지에 대하여 수행자라는 뜻으로 사만냐라 한다. 그래서 빅쿠와 사만냐를 구별하여 사용한다. 그럼에도 니간타 나타뿟따의 제자들에 대하여 빅쿠라 붙여 준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에 대한 각주가 없어서 알 수 없다.

 

자이나교의 네 가지 계행

 

게송에서 자이나교의 네 가지 계행으로 몸을 길들여(cātuyāmasusavuto)”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네 가지 계행이란 무엇을 말할까?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MN.I.377에 의하면 네 가지의 금기에 의한 제어(cātuyāmasusavara)이다. 네 가지 금기에 의한 제어는

 

1) 모든 물을 사용하지 않고

2) 모든 악을 떠나는 것에 따르고

3) 모든 악을 떠나는 것을 책임으로 하고

4) 모든 악을 떠나는 것에 도달한다.

 

이 네 가지 금계가운데 첫 번째 모든 물을 사용하지 않는 다는 것만은 이해할 수 없다. 붓다고싸에 의하면 이 단어는 생명이 있을지 모르는 차가운 물을 마시는 것에 대한 금지를 뜻한다.

 

(상윳따1 768번 각주, 전재성님)

 

 

 

Jain Flag

 

 

네 가지 금계 가운데 물을 마시지 않는 것에 대한 이유가 불분명하다고 하였다. 특히 차가운 물을 마시지 않는다 하는데, 차가운 물 안에 생명체가 살고 있을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뜨거운 물만 마시는가? 물을 끓였을 때 살생하는 것이 아닐까?

 

찬물이라 하였는데

 

자이나교도의 네 가지 금계에 대한 이야기는 디가니까야 사만냐팔라경(D2)에서 볼 수 있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대왕이여, 여기 니간타는 모든 찬물을 금하고..”라고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이 찬물이라고 번역한 것은 주석적 번역이다. 원문에는 ‘sabbavarīvarīto’라 되어 있다. Varīwater의 뜻이다. 따라서 모든 물을 사용하지 않고라고 번역된다. 그럼에도 찬물이라 한 것은 주석적 설명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빅쿠보디는 He is curbed by all curbs,(모든 억제에 의하여 억제 되고)”라 하였다.

 

외도 스승에 대한 비판

 

아싸마의 뿌라나 깟사빠 찬탄, 싸할리의 막칼리 고살라 찬탄, 그리고 님카의 니간타 나타뿟따 찬탄이 소개 되었다. 이와 같은 외도 스승에 대한 찬탄에 대하여 하늘아들 아코따까는 빠꾸다 까띠야나와 니간타, 또한 막칼리와 뿌라나는 무리의 스승으로 수행자가 된 사람 실로 참사람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네.(S2.30)”라고 역시 찬탄한다.

 

하지만 모두 찬탄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아들 베땀바리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비판하였다.

 

 

 

베땀바리의 외도스승 비판(S2.30))

 

빠알리

Sahācaritena chavo sigālo
Na kotthuko sīhasamo kadāci,
Naggo musāvādī ga
assa satthā
Sa
kassarācāro na sata sarikkhoti.

 

전재성님역

무엇을 해도 승냥이는 가련하니,

울부짓지만 결코 사자와 같지 않네.

벌거벗은 고행승과 거짓말쟁이의 군중의 선동자는

믿을 수 없는 생활로 참사람이라 결코 볼 수 없네.”

 

각묵스님역

자칼은 아무리 짖어도 비천한 동물일 뿐

결코 그가 사자 같을 수는 없다네.

벌거벗고 거짓말하는 무리의 지도자가

의심스런 행동을 하니

참된 사람 닮은 점은 어디에도 없다네.”

 

빅쿠보디역

"Even by howling along the wretched jackal

Remains a vile beast, never the lion's peer.

So though he be the teacher of a group,

The naked ascetic, speaker of falsehood,

Arousing suspicion by his conduct,

Bears no resemblance to superior men.”

 

 

 

 

 

게송은 사구게로 되어 있다. 전재성님은 사구게로 번역하였지만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은 오구게이다.

 

승냥이와 자칼

 

하늘사람 베땀바리는 육사외도의 스승에 대하여 ‘sigālo’라 하였다. 이는 jackal을 말한다. 그래서 빅쿠보디도 자칼이라 하였고 각묵스님도 자칼이라 하였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승냥이라 하였다.

 

승냥이는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인도들개라 한다. 승냥이에 대한 영어표현은  dhole(인도 지방의 사나운 들개), cuon alpinus’ 이다. 일본어로는 ヤマイヌ(山犬)’라 하여 산개라 하였다.

 

Jackal은 어떤 동물일까? 영영사전에 따르면 자칼은 개처럼 생긴 거친 야생동물로서 아프리카나는 남부아시아에 산다고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승냥이나 자칼은 모두 같은 말이라 볼 수 있다. 승냥이 또는 자칼을 뜻하는 Sigāla‘[m.] a jackal, 野干, ジャッカル, 豺狼이라 되어 있다.

 

서로 다른 번역

 

게송 첫번째 구절에 ‘Sahācaritena’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아무리 짖어도라 번역하였다. 각주에 따르면 주석에 따른 것이라 하였다. ‘Sahācaritena’가 원래 행실로 더불어라고 해야 Ee2에서는 saharavena 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짖어도라도 번역한 것이라 한다.

 

빅쿠보디의 경우 Even by howling along’이라 하여 짖을지라도의 뜻으로 번역하여 초불연 번역과 일치한다. 이와 관련 하여 In pada a, Be and Se read s Sahācaritena; Eel reads saharavena, corrected in Ee2 to saharavena, along with (his) howling."라 되어 있다. 초불연 각주와 내용이 일치한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무엇을 해도라 번역하여 ‘Sahācaritena’의 원뜻대로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승냥이와 사자

 

게송에서 자칼은 사자와 대비된다. 자칼은 외도의 스승으로 묘사 되어 있고, 사자는 부처님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자칼은 매우 야비하고 비천한 동물이라는 것이다. 위풍당당하게 사자후를 토하는 사자와는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베땀바리는 외도 스승에 대하여 승냥이로 비유하였다. 그리고 거짓말쟁이에다 믿을 수 없는 선동자들이라 하였다. 이렇게 혹평을 하면서 믿을 수 없는 생활을 하는 자들이라 하였다. 그런자들은 결코 참사람(sataṃ) 아니라 하였다.

 

빠삐만이 말하기를

 

베땀바리가 외도의 스승에 대하여 혹평하자 이번에는 빠삐만이 등장한다. 빠삐만은 항상 부처님과 반대 되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빠삐만은 외도의 스승들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였을까?

 

 

 

빠삐만의 외도스승 찬탄(S2.30))

 

빠알리

Tapo jigucchāya āyuttā

pālaya pavivekiya,
Rūpe ca ye nivi
ṭṭhāse

devalokābhinandino,
Te ve sammānusāsanti

paralokāya mātiyāti.

Rūpa

전재성님역

[빠삐만]

싫어하여 떠남과 고행에 열중하고

금기의 삶을 실천하며

하늘사람이 사는 나라에서 즐기고자

미세한 물질계에 마음을 둔 사람들,

이 죽음을 피하지 못하는 님들이

저 세상을 위한 올바른 스승이라네.”

미세한 물질계

각묵스님역

고행-금욕에 몰두하고 한거(閑居)를 보호하며

형색에 안주하고 신의 세상 기뻐하며

죽기마련인 이 분들은 저 세상을 위해

바르게 가르침을 세상에 펴십니다.”

형색

빅쿠보디역

"Those engaged in austerity and scrupulousness,

Those protecting their solitude,

And those who have settled on form,

Delighting in the world of devas:

Indeed, these mortals instruct rightly

In regard to the other world.”

form

 

 

 

 

죽을 수밖에 없는 외도 스승들

 

악마 빠삐만의 입을 빌어 읊은 이 게송은 외도 스승의 한계를 보여 준다. 이에 대하여 ‘mātiyāti’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Mātiyā‘mortal, ぬベき의 뜻이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임을 말한다. 마치 화살의 경(Sn3.8)’에서 처럼 태어나 죽지 않고자 하나, 그 방도가 없습니다. 늙으면 반드시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뭇삶의 운명은 이러한 것입니다.(stn575)”라고 표현 되어 있듯이 외도의 스승들 역시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외도의 스승들이 고행과 금욕, 그리고 금계에 몰두하지만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런데 게송에 따르면 하늘사람이 사는 나라에서 즐기고자 미세한 물질계에 마음을 둔 사람들이라 하였는데, 이는 고작 천상에 태어남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천상이란 어떤 천상일까?

 

Rūpa의 의미는?

 

외도들도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삿된 견해를 가지면 악처에 떨어진다고 하지만 그 중에는 보시공덕을 쌓는 이도 있을 것이고, 스승에 대한 청정한 믿음을 내는 자도 있을 것이고, 계를 잘 지키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천상에 태어나게 되는데, 게송에 따르면 미세한 물질계에 마음을 둔다(Rūpe ca ye niviṭṭhāse)’거나, ‘하늘사람이 사는 나라에서 즐긴다(devalokābhinandino)’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색계천상임이 틀림 없다.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마음의 장애가 있다. 이를 열 가지로 표현한다. 그 중에 색계에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이를 색계에 대한 집착이라 한다. 빠알리어로 ‘rūpa-rāga’ 라 한다. 여기서 Rūp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미세한 물질계라 번역하였다. 이는 색계세상을 뜻한다. 왜 색계세상이라 보는가? 게송에서 네 번째 구절을 보면 ‘paralokā(저세상)’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rūpa에 대하여 형색(形色)’이라 번역하였다.

 

형색(形色)이라 번역한 각묵스님

 

각묵스님은 rūpa에 대하여 왜 형색이라 번역하였을까?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형색 rūpa를 옮긴 것이다. 본 게송과 다음 게송에 나타나는 rūpa는 물질로도 옮길 수 있고 형색(형상 혹은 색깔)으로도 옮길 수 있다. 역자는 갈애와 사견으로 인해 눈과 형색의 법들에 집착하는 것(SAT.i.147)이라는 복주석서의 설명을 참조하여 형색(形色)으로 옮겼다.

 

(초불연 상윳따1 351번 각주, 각묵스님)

 

 

형색이라는 말은 초불연에서 만들어낸 신조어이다. 아직까지 한글사전에는 등재 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물질을 뜻하는 rūpa에 대하여 형색으로 번역한 것에 대하여 복주석서를 참고 하였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rūpa의 번역어 형색은 주석적 번역이라 볼 수 있다. 빅쿠보디는 ‘form’이라 번역하였다.

 

전재성님의 의역

 

전재성님과 각묵스님의 번역에서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구절이 있다. ‘pālaya pavivekiy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금기의 삶을 실천하며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한거(閑居)를 보호하며라 하였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Tapo jigucchāya āyuttā pālaya pavivekiya : Srp.I.127-128에서는 고행자들의 여러 가지 금기, 즉 이발을 금하여 머리를 기르는 것, 옷을 금하여 벌거벗고 다니는 것, 발우공양을 금하여 개가 땅바닥에서 먹듯이 먹는 것, 침상을 금하여 가시 위에서 잠자는 것 등이 나열 되어 있다.

 

(상윳따1 777번 각주, 전재성님)

 

 

‘pālaya pavivekiya에서 pavivekiya의 뜻은 ‘(즐거운) 고독으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앞구절 고행과 관련하여 보았을 때 금기의 삶, 금계의 삶을 뜻한다. 그래서 주석에 따르면 여러 가지 금기를 나열하고 있다.

 

각묵스님의 경우 한거(閑居)를 보호하며라 하였다. 이는 직역한 것이다. 그러나 문맥과는 맞지 않는다. 빅쿠 보디는 ‘protecting their solitude’라 하여 ‘(즐거운) 고독을 보호하며라 하였다. 이는 pavivekiya의 뜻인 ‘springing from solitude(즐거운 고독으로부터 벗어남)’와 일치한다. 즐거운 고독을 즐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금계를 지키는 고행을 말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직역함으로 인하여 뜻이 통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은 금기의 삶을 실천하며라고 의역하였다고 본다.

 

나무찌여, 이 모두를 너는 칭찬하지만

 

악마 빠삐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외도 스승들을 찬탄하였다. 이를 안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서 답 하였다.

 

 

 

부처님의 게송(S2.30))

 

빠알리

Ye keci rūpā idha vā hura
Ye antalikkhasmi
pabhāsavaṇṇā,
Sabbeva te te namucippasatthā
Āmisa
va macchāna vadhāya khittāti.

 

전재성님역

[세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어떠한 형상도,

공중에 있으면서 빛나는 아름다움도,

나무찌여, 이 모두를 너는 칭찬하지만

물고기를 죽이려고 던진 미끼에 불과하네.”

 

각묵스님역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어떤 형색도

허공에서 빛 발하는 아름다움조차도

나무찌여, 이 모두를 그대 칭송하지만

물고기를 잡기 위해 던진 미끼에 불과할 뿐이라.”

 

빅쿠보디역

"Whatever forms exist here or beyond,

And those of luminous beauty in the sky,

All these, indeed, you praise, Namuci,

Like bait thrown out for catching fish."

 

 

 

 

부처님은 악마 빠삐만에 대하여 나무찌(namuci)라 하였다. 여기서 namuci라는 말은 해탈하지 못한 자란 뜻을 지난 악마의 이름이다. 빅쿠보디의 각주에 따르면 주석을 인용하여 “he does not free (na muci)”라 하였다.

 

 

부처님의 성도과정에서

 

나무치찌는 악마의 이름은 숫따니빠따에서도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성도과정에서 있어서 악마 나무치와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나무찌여, 이것들은 그대의 군대,

검은 악마의 공격군인 것이다.

비겁한 자는 그를 이겨낼 수가 없으나

영웅은 그를 이겨내어 즐거움을 얻는다.

 

차라리 나는 문자 풀을 걸치겠다.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 (Sn3.2)

 

 

이 경은 부처님의 고행정진에 대한 것이다. 각주에 따르면 부처님이 향실에서 출가의 경(Sn3.1)을 설하고 난 뒤에 “나는 육년간이나 정진하며 고행을 했는데, 오늘 수행승들에게 이야기를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설한 것이라 한다. 이를 나중에 아난다가 기억을 되살려 수행승들에게 들려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경을 보면 악마와 싸우는 장면이다. 부처님이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기 이전에 ‘나무치’라 불리는 악마와 싸우는 장면인데 장소는 네란자라강(니련선하)이다.

 

경을 보면 악마의 군대에 대한 묘사가 보인다. 흔히 마군(魔軍)이라 불리운다. 우리말로 ‘마구니’라고도 한다. 빠알리어로는 ‘마라세나(māra-senā)’ 라 한다. 이와 같은 마라세나에 대하여 부처님은 “코끼리 위에 올라탄 악마와 더불어, 주변에 깃발을 든 군대(stn442)”라 하였다. 악마의 대장이 코끼를 타고 수 많은 깃발을 든 악마의 군대가 부처님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는 장면이다.

 

부처님은 성도를 방해하는 악마의 군대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라고 하며 문자풀을 걸치겠다고 하였다. 여기서 문자풀을 걸친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다. 결연한 의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머리둘레나 깃발이나 무기에 문자풀을 묶은 것이다.

 

물질에 대한 칭송은

 

부처님은 외도 스승들을 칭찬하는 자가 나무찌임을 알았다. 이처럼 물질을 칭송하는 나무찌에 대하여 물고기를 죽이려고 던진 미끼에 불과하네(Āmisava macchāna vadhāya khittāti)”라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Just as a fisherman throws out bait at the end of a hook for the purpose of catching fish, so, by praising these forms, you throw them out in order to catch living beings."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던진 미끼란 마치 물고기를 잡기 위해 낚싯바늘 끝에 꿴 미끼를 던지는 것처럼 그대는 이러한 물질들을 칭송하면서 중생들을 잡기 위해 이들을 던져놓았다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SA.i.128)

 

(초불연 상윳따1 353번 각주, 각묵스님)

 

 

나무찌가 물질들을 칭송하는 것은 살아 있는 중생들을 잡기 위해서라고 한다. 빅쿠보디의 표현에 따르면 living beings’라 하였으므로 살아 있는 존재를 말한다. 하지만 이는 던진 미끼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물질에 대한 칭송은 물질에 대한 집착을 의미 하기 때문이다.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면 윤회 하게 된다. 나무찌는 물질이라는 미끼로 살아 있는 존재를 잡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물고기를 죽이려고 던진 미끼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See 35:230’라 하였다. 상윳따니까야 S35.230을 참고하라는 것이다. 어부의 비유에 대한 경을 보면 그 수행승은 악마의 낚싯바늘에 걸려 불행에 빠지고 재난에 빠져 악마 빠삐만이 하자는 대로 할 것이다.(S35.230)”라 표현 되어 있다.

 

악마 빠삐만이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은 여섯 종류의 낚싯바늘에 묶였기 때문이다. 게송에서는 물질 하나만 표현 되어 있으나 경에서는 형상(물질)을 포함하여, 소리, 냄새, , 감촉, 사실 등 여섯 가지로 표현 되어 있다.

 

마나바가미야의  부처님찬탄

 

여섯 종류의 낚싯바늘에 꿰이면 악마의 수중에 들어 갔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끊임 없이 삶과 죽음을 반복해야 한다. 외도의 스승들과 그 제자들 역시 낚싯 바늘에 꿰인 것과 같다. 외도의 가르침으로는 결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처님이 게송으로 답하자 하늘아들 마나바가미야가 다음과 같이 부처님을 찬탄한다.

 

 

[마나바가미야]

 

라자가하 시의 산들 가운데

비뿔라 산이 가장 훌륭하고

히말라야에서는 흰 산이 가장 훌륭하며

하늘을 도는  것 가운데 태양이 가장 훌륭하고

 

물 가운데 바다가 가장 훌륭하며

별자리 가운데 달이 가장 휼륭하고

하늘사람의 세계와 이 세상에서는

깨달은 님이 가장 훌륭한 님이라 불리네.”(S2.30)

 

 

 

2014-10-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