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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초월하는 부처님의 가르침 아깔리까(Akalika)

담마다사 이병욱 2014. 9. 18. 11:25

 

 

시간을 초월하는 부처님의 가르침 아깔리까(Akalika)

 

 

 

담마공덕

 

흔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에히빠시까라고 말한다. 이는 와서 보라!”는 뜻이다. 오라는 것은 초대를 말하고, 보라는 것은 자신이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와서 보라고 한 것은 초대하여 보여 줄만하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에히빠시까(와서 보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초대할만하다. 이에 잘 묘사된 정형구가 있다. 법수념으로도 사용되기도 하는 담마공덕이 그것이다.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스왁캇또 바가와따 담모

sandiṭṭhiko                       산딧티꼬

akāliko                          아깔리꼬

ehipassiko                       에히빳시꼬

opanayiko                        오빠나이꼬

paccatta veditabbo viññūhī    빳짯땅 왜디땁보 윈뉴히

 

 

 

Dharma Wheel

 

 

이 정형구는  담마공덕에 대한 것이다. 특히 깃발의 경(Dhajaggasutta, S11.3)에서는 부처님공덕과 상가공덕과 함께 예찬되고 있다. 깃발의 경은 테라와다불교전통에서 예불문과 수호경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이 삼보공덕예찬문은 사마타 명상주제로도 활용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불수념, 법수념, 승수념 이렇게 세 가지는 40가지 사마타명상 주제에 속한다.

 

번역비교를 해보면

 

담마공덕문은 예불문이자 보호주이자 사마타명상주제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Dhamma)의 성격을 잘 규정하고 있다. 이 빠알리 구문에 대한 번역자들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S11.3)

 

빠알리 구문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1)sandiṭṭhiko

2)akāliko

3)ehipassiko

4)opanayiko

5)paccatta veditabbo viññūhī

sandiṭṭhiko

전재성님역

세존께서 잘 설하신 이 가르침은

1)현세의 삶에 유익한 가르침이며,

2)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3)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4)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5)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다.

현세의 삶에 유익한 가르침이며

각묵스님역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1)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2)시간이 걸리지 않고,

3)와서 보라는 것이고,

4)향상으로 인도하고,

5)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빅쿠보디역

The Dhamma is well expounded by the Blessed one,

1)directly visible,

2)immediate,

3)inviting one to come and see,

4)applicable,

5)to be personally experienced by the wise.

directly visible

 

 

삼보공덕문 중에서 담마공덕에 대한 것이다. 표를 보면 담마공덕이 모두 다섯 가지로 표현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인가, 현세의 삶에 유익한 가르침인가

 

번역에서 눈에 띄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다. 첫 번째 공덕인 sandiṭṭhiko’에 대한 번역어이다. 전재성님은 현세의 삶에 유익한 가르침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directly visible(즉시 보여지는)’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빠일리어 sandiṭṭhiko‘Visible, actual, belonging to this life’의 뜻이다. 한자어로는 ;世的;现证이라 한다. ‘보여지는, 실질적인, 이번 생에 속하는등의 뜻이다. 한자어로는 현세적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sandiṭṭhiko의 뜻은 현세적의 의미가 강하다. 이는 sandiṭṭhika에 대한 뜻풀이가 PCED194에 따르면 ‘visible; belonging to, of advantage to, this life, actual’라고 설명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법은 현세에 이익을 준다는 뜻이다.

 

숫따니빠따(stn567)에서

 

현세의 이익을 준다는 뜻의 sandiṭṭhiko가 사용된 게송이 숫따니빠따에 있다

 

 

Svākkhāta brahmacariya

 (selāti bhagavā) sandiṭṭhikamakalika,
Yatthu amogh
ā pabbajjā appamattassa sikkhatoti.

 

[세존]

“셀라여, 지금 여기에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삶은 잘 설해져 있고,

그것을 위해 출가하여 방일하지 않고 배우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닙니다.

 

(stn567,전재성님역)

 

 

숫따니빠따 셀라의 경(Sn3.7)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게송에서 지금 여기에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는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복합어 ‘sandiṭṭhikamakalika에 대한 번역이다. sandiṭṭhikamakalika ‘sandiṭṭhika akalika의 형태이다. 이는 담마공덕에서 sandiṭṭhikaakalika에 해당된다.

 

청정도론에서

 

깃발의 경에서는 sandiṭṭhika가 단독으로 사용 되었다. 그래서 현세의 삶에 유익한 가르침(of advantage to, this life)’의 뜻으로 번역 되었다. 그러나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라 하였다. 하지만 이런 번역은 뒤이어 나오는 3번항 와서 보라는 것이고와 구별이 잘 되지 않는다. 빅쿠보디는 ‘directly visible’라 하였는데, 이것 역시 뒤이어 나오는 2번항 ‘immediate’잘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초불연에서는 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라고 번역하였을까? 이는 청정도론의 번역방침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sandiṭṭhika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성스러운 도는 우선 자기의 상속에서 탐욕 등을 없애는

성인에 의해 스스로 보아 알만하기 때문에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탐욕에 물들었고, 압도되었고, 전도된 마음을 가진 이는 자기를 괴롭히는 것을 생각하고, 타인을 괴롭히는 것을 생각하고, 둘 다를 괴롭히는 것을 생각한다. 그는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슬픔을 겪는다. 탐욕을 버렸을 때 자기를 괴롭히는 것도 생각지 않고 타인을 괴롭히는 것도 생각지 않고 둘 다를 괴롭히는 것도 생각지 않는다. 이와 같이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A.i.156-157)”

 

다시 아홉 가지 출세간법을 얻게 되면 누구나 타인을 믿는 것에 의존함을 버리고

반조하는 지혜로 스스로 보기 때문에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청정도론 7 76-77, 대림스님역)

 

 

청정도론에서는 sandiṭṭhika에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스스로 보아 알만하기 때문에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설명하였다. 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만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에 실려 있는 경을 근거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아홉 가지 출세간법(구차제정)을 얻게 되면 지혜로 스스로 보기 때문에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스스로 아는 것이라고 하였을 때 뜻이 확연하게 다가 오지 않는다.

 

사만냐팔라경(D2)에서

 

sandiṭṭhika에 대한 빠알리사전을 보면 ‘of advantage to, this life’ 또는 られたる, 現証의 뜻이다. 이는 현세에서 이익을 주는또는 현재 보여지는또는 현재 증명된의 의미가 된다. 이는 디가니까야 사만냐팔라경에서 아자따삿뚜가 부처님에게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아자따삿뚜]

Sakkā nu kho bhante evameva diṭṭheva dhamme sandiṭṭhika sāmaññaphala paññāpetunti"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현세에서 현세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결실을 보여 줄 수 있습니까?”(D2, 전재성님역)

 

 

번역문에서 현세의 눈으로 볼 수 있는이라는 말은 ‘sandiṭṭhika’에 대한 번역어이다. 이 말은 담마공덕에서 사용된 말과 동일하다.

 

 

청정도론을 중시하는 초불연

 

위 빠알리 구문에 대하여 초불연 각묵스님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도 이와 같이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출가의 결실을 천명할 수 있습니까?”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전재성님의 번역과 다르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번역이 나오게 되었을까?

 

초불연에서 ‘sandiṭṭhika’에 대하여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이라 번역한 것은 철저하게 청정도론에 따르고 있다. 이는 청정도론과 아비담마, 그리고 주석을 중시하는 초불연의 방침이다. 그래서 초불연에서는 다음과 같이 천명한 바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은 경을 옮김에 있어서 항상 몇 가지 원칙을 중시하고 있다. 이들 원칙에 대해서는 이미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역출한 다른 책들의 역자 서문 등에서 밝혔다. 번역의 원칙에 대한 제목만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주석서를 중시하였다. 둘째,『청정도론』을 중시하였다. 셋째,『아비담마 길라잡이』를 중시하였다. 넷째, 술어를 한글화하려 노력하였다.

 

(『니까야 강독I』들어가는 말 3. 4 니까야와『니까야 강독』 )

 

 

이처럼 초불연에서는 주석서와 청정도론을 중시하여 번역하였다.

 

주석서를 최소한 반영하여

 

그러나 전재성님의 번역방침은 이와 다르다. 전재성님은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서문에서 까루나라뜨네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견해를 밝혔다.

 

 

“…빠알리경장에 나타난 가능한 초기불교적 인과론을 연구하면서 주석서의 해석을 될 수 있는 대로 최소한으로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라고 언급한 것은 필자를 고무시키는 일이었다.”

 

(초기불교의 연기사상 서문, 전재성님)

 

 

전재성님은 까루나라뜨네가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주석서를 최소한 활용하는 것에 대하여 동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방식은 초불연 방식과 매우 대조적이다.

 

초불연의 경우 철저하게 주석서의 견해를 중시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초불연 번역을 보면 주석적 번역이 눈에 띈다. 각주에서나 설명되어야 것들이 본문에 실려 있는 경우를 말한다. 하지만 전재성님의 경우 주석서를 최소한 반영하였다. 그러다 보니 각주에서 개인적 견해도 종종 보인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처럼 주석적 견해를 모두 수용하느냐 부분적으로 수용하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진다. ‘sandiṭṭhika’에 대한 번역어도 마찬가지이다. 초불연의 경우 청정도론의 법수념에 대한 설명대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이라 하였으나, 전재성님의 경우 주석에 구애 받지 않고 현세의 삶에 유익한 가르침이며라 번역하였다. 그래서‘sandiṭṭhika’에 대하여 비교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sandiṭṭhika번역비교

 

전재성님

각묵스님

깃발의 경

(S11.3)

현세의 삶에 유익한 가르침이며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사만냐팔라경

(D2)

현세에서 현세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결실을 보여 줄 수 있습니까?”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출가의 결실을 천명할 수 있습니까?”

Ehipassiko

와 관계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라는 말과 확연하게 구분됨.

 와서 보라는 것이고라는 말과 구분이 모호함.

 

 

 

이익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익을 추구한다. 그래서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종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종교를 믿는 것이다. 불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불교를 믿으면 이익이 되기 때문에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담마공덕에서 첫 번째 항인 산딧티코(sandiṭṭhiko)’에 대하여 현세의 삶에 유익한 가르침이며라 번역한 것은 타당해 보인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행위가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가르침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특히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왔을 때이다. 누군가 나는 누구인가?”라며 나를 찾는 수행을 하였는데 10, 20, 30, 평생을 수행해도 나를 찾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실망해서 자포자기할지 모른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였을 때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이다. 숫따니빠따에서청정한 삼매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삼매입니다. (suci     Samādhi mānantarikaññamāhu, Sn2.1)” 라는 문구에서도 알 수 있다. 선정삼매에 들면 그에 대한 과보로서 즉각적인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마공덕 두 번째 항에서 아깔리꼬(akāliko)’에 대하여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akālika에 대하여 ‘immediate’라 번역하였다. 이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 “the fruit (phala) arises in immediate succession to its respective path (magga)”라 표현 하였다. ‘고귀한 길을 실천하면 그 결과가 즉시에 나타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깔리까는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즉시 효과적인 것의 뜻이 된다.

 

왜 시간을 초월한다고 하였을까?

 

전재성님은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에 따르면 Akālika에 대하여 무시간적인 것또는 무시간성이라 하였다. 이는 ‘immediate’라 번역한 빅쿠보디와 시간이 걸리지 않고라 번역한 각묵스님과 대조 된다. 그렇다면 Akālika에 대하여 왜 무시간성이라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경을 근거로 하고 있다.

 

 

[세존]

그는 앎과 봄을 갖추어 시간을 뛰어넘어 관통하여 깊이 이해한 이 가르침을 통해서 과거와 미래에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낸다.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라도 과거에 형성을 파악했고 형성의 원인을 파악했고 형성의 소멸을 파악했고 형성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파악했다면, 그들 모두는 내가 지금 이러하듯이 같은 방법으로 이와 같이 파악했을 것이다.”

 

(앎의 토대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12.33, 전재성님역)

 

 

경에서 시간을 뛰어넘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Akālika에 대한 번역이다. 이는 무시간성을 말한다. 단순하게 ‘immediate’시간이 걸리지 않고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시간의 초월성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Akālika에 대하여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라고 번역하였다.

 

절대적 의미에서 시간은 존재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Akālika가 왜 무시간성일까? 이에 대한 설명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연기법은 감각적 지각이나 초감각적 지각에 의해 보여진 것이고 알려진 것에 바탕을 두고 있는 만큼 경험적인 사실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보여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에 의해 보여지거나 알려진 것을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방법을 취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보여지거나 알려진 것은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변의 유나 무를 인정하지 않는 차원에서 중도적이고, 인과원리와 관계된다는 측면에서 연생적 존재론을 뜻한다.

 

이러한 존재론적 차원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연기의 특징은 무시간성이다. 이것은 시간적 으로 상대적인 과거, 현재, 미래를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 보편적인 시간의 무를 뜻하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연기사상 103P, 전재성님)

 

 

연기법은 형이상학적 방법을 취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실재하는 것이 대상이 됨을 말한다. 예를 들어 느낌을 들 수 있다. 접촉에 따른 느낌을 통하여 현상이 실재 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조건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연기법은 인과에 따른 연생적 존재론이라 하였다.

 

글에서 지적한 것은 연기의 무시간성이다. 이는 선형적인 시간성을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빨래줄 처럼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연속적으로 흘러 가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상대적 시간은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적 의미에서 시간은 존재 하지 않는다. 그래서 윤호진 교수의 논문에 실려 있는 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시간에 대하여 정의한다.

 

 

시간이란 그 자체로서는 없고,

연속이 다소간 잘 조절된

연속적인 업들과 불연속적인 업들이다

(윤호진, 무아윤회문제연구 214P, 민족사)

 

 

초기불교를 연구한 최근의 학자에 따르면 시간은 존재의 범주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인과적 작용은 무시간적이라 한다. 그래서 담마공덕에 대하여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Akālika)”이라 번역 하였을 것이다.

 

비밀이 없기에

 

담마공덕이 현세에서 이익이 되고 더구나 즉각적으로 결과를 가져 온다면 누구에게나 초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담마공덕 세 번째 항을 보면 에히빳시꼬(ehipassiko)’라 하여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라고 번역 하였다.

 

Ehipassika의 뜻은 ‘that which invites every man to come and see; open to all’로 풀이 된다. 오라고 모든 사람들에게 초대할 만하고, 더구나 모든 것을 개방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가르침에 비밀이 없음을 말한다. 특정인에게만 전수되는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다면 스승은 주먹을 꽉 쥔 채 죽을 때 까지 펴지 않을 것이다.

 

스승의 꽉 쥔 주먹은 빈주먹이기 쉽다. 아무 것도 들은 것이 없기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것이다. 설령 꽉 쥔 주먹에 무언가 들어 있다고 할지라도 공개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금과 은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스승의 꽉 쥔 주먹에는 전승할 비밀스런 가르침은 없는 대신 악취나는 것으로 가득할 수 있다.

 

일을 할 때 목표가 있듯이

 

이처럼 현세의 이익이되고,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 오고, 초대할 만한 가르침이라면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어떤 일을 할 때 목표가 있듯이 마찬가지로 부처님가르침 역시 목표가 있다. 바로 그것이 열반이다. 그래서 담마공덕 네 번째 항에따르면 오빠나이꼬(opanayiko)’라 하여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라 한 것이다. 이는 opanayika의 의미기 ‘leading to (Nibbāna)’로 설명된 것에서도 확인 된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다음과 같은 구문으로 알 수 있다.

 

 

[세존]

바라문이여, 이와 같이 남김없이 탐욕이 부수어진 것을 경험하고 남김없이 성냄이 부수어진 것을 경험하고 남김없이 어리석음이 부수어진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바라문이여, 이와 같은 열반은 현세의 삶에 유익한 것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열반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55, 전재성님역)

 

 

열반은 탐진치가 소멸한 상태를 말한다. 청정한 삶을 살아 탐진치가 소멸 되었을 때 열반이 실현 되는데, 이는 최상의 목표이다. 그래서 담마공덕 opanayika에 대하여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라 하였다.

 

현자만이 알 수 있는 가르침

 

담마공덕 마지막은 빳짯땅 왜디땁보 윈뉴히(paccatta veditabbo viññūhī)라 하였다. 이는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다.”라는 뜻인데 가르침은 현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탐진치로 살아 가는 사람에게 부처님가르침은 무용지물임을 말한다.

 

부처님은 브리흐마야짜나경에서도 내가 깨달은 이 진리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기 때문에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S6.1)”라 하였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슬기로운 자들, 지혜로운 자들, 현자들 에게만 알려 지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지혜를 가지면 모두 다 알 수 있는 가르침이라 하였다.

 

담마공덕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1)현세의 삶에 유익한 가르침이며(sandiṭṭhiko), 2)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akāliko), 3)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ehipassiko), 4)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opanayiko), 5)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paccatta veditabbo viññūhī)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이 담마공덕이다.

 

 

 

2014-09-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