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있는 자에게 기쁨도 있고, 기쁨이 있는 자에게 슬픔도 있네
사람 사는 곳에 기쁨과 슬픔이
사람 사는 곳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네 가지 감정, 즉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을 말한다.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묶고, 또 노여움과 슬픔을 함께 묶는다면 ‘기쁨(喜)’과 ‘슬픔(哀)’이 될 것이다.
기쁨은 즐거움과 동의어고, 슬픔은 괴로움과 동의어이다. 그래서 누구나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을 갖는다. 하나 더하면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느낌에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S36.22)”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이런 느낌은 접촉이 일어날 때 마다 발생된다.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느낌에 대한 갈애가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기쁨이 일어나고,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슬픔이 일어 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이 사는 곳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일어나는 것은 느낌에 대한 갈애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을 때
하늘아들 까꾸다가 “수행자여, 당신은 기쁩니까? ( Nandasi samaṇāti?, S2.18)”라고 부처님에 묻는다. 그러자 부처님은 “벗이여, 그대는 내가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합니까? (Kiṃ laddhā āvusoti?”라고 되묻는다.
이어서 까꾸다는 부처님에게 ‘수행자여, 그렇다면 슬픕니까?”라고 물어 본다. 이에 부처님은 “벗이여, 그대는 내가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합니까? (Kiṃ jīyittha āvusoti?)”라고 역시 되묻는다.
이렇게 부처님이 되묻자 까꾸다는 “수행자여, 그렇다면 즐겁지도 슬프지도 않습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벗이여, 그렇습니다(Evamāvusoti)”라고 긍정문으로 말한다.
부처님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다고 하였다. 그렇게 말씀 하신 것은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사람들은 얻은 것이 있을 때 기뻐하고, 잃은 것이 있을 때 슬퍼하지만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집착이 없기 때문에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어서 기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슬퍼하지도 않는 것이다.
“수행자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
이번에는 까꾸다가 ‘불만’에 대하여 물어 본다.
[까꾸다]
“수행자여, 그대가 정말로 근심이 없고
어떤 기쁨도 그대에게 없고,
그대가 홀로 앉아 있을 때
불만이 그를 사로잡지 않습니까?” (S2.18, 전재성님역)
수행자는 주로 홀로 앉아 수행을 한다. 이런 수행자를 누군가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어떤 근심도 기쁨도 없는 수행자가 홀로앉아 있을 때 “수행자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라는 의문이 들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초불연 번역을 보면 “따분함에 뒤덮히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근심도 기쁨도 없는 숲속의 수행자에게 따분한지에 대하여 묻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송으로 말한다.
[세존]
“진실로, 야차여, 나는 근심하지 않으며,
어떤 기쁨도 나에게 없으니.
홀로 앉아 있을 때도
나는 불만에 사로잡히지 않네.” (S2.18, 전재성님역)
하늘아들 까꾸다의 거듭된 질문에 부처님은 홀로 있어도 불만이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만족한다고 볼 수 있을까?
까꾸다의 유도성 질문에
이어지는 까꾸다의 질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까꾸다]
“수행자여, 어떻게 그대는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고,
어떻게 그대는 홀로 앉아 있을 때도
불만에 사로잡히지 않습니까?” (S2.18, 전재성님역)
까꾸다는 불만에 사로 잡히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알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불만에 사로잡히지 않습니까?”라고 물어 본 것은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당신은 만족합니까?”라고 유도하는 질문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나는 만족합니다”라고 말하였을까? 까꾸다의 물음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송으로 말한다.
[세존]
“슬픔이 있는 자에게 기쁨도 있고,
기쁨이 있는 자에게 슬픔도 있는 것,
수행자는 기쁨도 여의었고 슬픔도 여의었네.
벗이여, 그대는 그렇게 알아야 하리.” (S2.1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까꾸다의 유도성 질문에 넘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만족한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불만에 사로 잡히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수행자는 기쁨도 여의었고 슬픔도 여의었네(Anandi anagho bhikkhu)”라고 말하였다.
부정적 언표로 답하신 부처님
세상사람들은 살아 가면서 희로애락을 겪는다. 그래서 기쁠때는 웃고, 슬플 때는 눈물을 흘린다. 이렇게 본다면 기쁨이나 슬픔은 늘 함께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슬픔이 있는 자에게 기쁨도 있고, 기쁨이 있는 자에게 슬픔도 있는 것 (Aghajātassa ve nandi nandijātassa ve aghaṃ)”이라 하였다.
그러나 수행자는 기쁨도 슬픔도 여의었기 때문에 기뻐할 일도 슬퍼 할 일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수행자에게 불만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자의 삶에 대하여 “만족하네”라고 긍정적 언표 대신 “나는 불만에 사로잡히지 않네”라고 부정적 언표로 답하신 것이다.
질문에 부정적 언표로 답하는 것이 포괄적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이 사성제를 설하였을 때 이는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괴로움에 대하여 말씀 하시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 그리고 소멸과 소멸의 방법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어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결국 이고득락(離苦得樂)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지 모른다. 실제로 대승불교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이고득락이라는 긍정적 언표로 말하면 열반을 설명할 수가 없다.
숫따빠따에서 아지따가 “존자여, 지혜, 새김과 더불어 명색은 어떠한 경우에 소멸하는 것입니까? (Sn5.2)” 라고 물었을 때, 부처님은 “의식이 없어짐으로써, 그 때에 그것이 소멸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이 소멸을 강조함으로서 부정적 언표로 말씀 하신 것이다.
이렇게 진리는 긍정적 언표 보다 부정적 언표로 표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홀로 사는 수행자에 대하여 소욕지족으로 말씀 하시지 않고 “수행자는 기쁨도 여의었고 슬픔도 여의었네. 벗이여, 그대는 그렇게 알아야 하리.”라 하여 부정적 언표인 소멸을 사용하여 설명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정적 언표로 표현하는 것이 포괄적이다. 반대로 긍정적 언표로 표현하면 한정적으로 된다.
거룩한 님으로 번역한 브라흐마나
이와 같은 부처님의 답송을 듣자 하늘아들 까꾸다는 다음과 같은 감흥어를 읊는다.
Cirassaṃ vata passāmi
brāhmaṇaṃ parinibbutaṃ,
Anandiṃ anaghaṃ bhikkhuṃ
tiṇṇaṃ loke visattikanti.
[까꾸다]
“세상의 애착을 뛰어넘어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없는 수행자
참 열반을 성취한 거룩한 님을
내가 참으로 오랜만에 친견하네.” (S2.18, 전재성님역)
번역에서 “참 열반을 성취한 거룩한 님(brāhmaṇaṃ parinibbutaṃ)”이라 하였다. 여기서 브라흐마나(brāhmaṇa)는 ‘아라한’을 뜻한다. 전재성님의 번역에서 아라한을 ‘거룩한님’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불연 번역을 보면 ‘바라문’이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브라흐마나의 영문표기법에 따라 ‘브리흐민(brahmin)’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런 표기법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하늘아들 까꾸다가 부처님을 친견하고 감흥어로 읊은 게송에서 “brāhmaṇaṃ parinibbutaṃ”라 하였을 때 이는 부처님에 대한 찬탄이기 때문이다.
여래십호에 따르면 부처님은 아라한이다. 그래서 아라한을 뜻하는 ‘거룩한 님’이라고 번역한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렇지 않고 브라만이라 번역한 것은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는 브라만이나 사제계급으로서 브라만으로 오해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라문으로 번역한 브라흐마나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참으로 오랜만에 완전한 평화 얻은
[진정한]바라문을 저는 친견했나이다.
비구는 기뻣하지도 근심하지도 않으니
세상에 대한 애착도 모두 건넜습니다.” (S2.18, 각묵스님역)
각묵스님은 ‘brāhmaṇaṃ’에 대하여 대괄호를 이용하여 ‘[진정한]바라문’이라 하였다. 사성계급이나 사제로서의 바라문과 구분하기 위하여 대괄호안에 ‘진정한’ 이라는 말을 넣은 것이다.
브라흐민으로 번역한 브라흐마나
빅쿠보디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After a long time at last I see
A brahmin who is fully quenched,
A bhikkhu undelighted, untroubled,
Who has crossed over attachment to the world." (S2.18, 빅쿠보디역)
빅쿠보디는 ‘brāhmaṇaṃ’에 대하여 ‘brahmin’이라 하였다. Brahmin에 대한 영어사전을 보면 ‘고고한 지식인, Brahman, 인텔리’라 설명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brāhmaṇa의 영문표기법인 ‘brahmin’은 부처님이나 아라한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성계급으로서 브라만 또는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으로서 브라만을 지칭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전재성님은 거룩한 님으로 번역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초불연의 경우 brāhmaṇa라는 말을 그대로 직역하여 ‘[진정한]바라문’이라 번역하였지만 그 번역어가 아라한을 뜻하는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를 거룩한 님이라 부른다”
법구경에서 ‘바라문의 품(Brāhmaṇavaggo)’이 있다. 그래서 게송의 말미에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tam-ahaṃ brūmi brāhmaṇaṃ)”라는 정형구가 마치 후렴처럼 등장한다. 이 때 바라문이라 번역한 brāhmaṇa는 부처님이 재해석한 바라문을 뜻한다. 부처님 당시 타락한 바라문이 아니라 이전의 청정한 삶을 살았던 바라문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라 하였을 때 그 바라문은 ‘아라한’을 뜻한다. 청정한 삶의 바라문과 아라한을 동일시한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초기경전에서 바라문이라 하였을 때 사성계급으로서 또는 제관으로서 바라문을 뜻하는 것인지, 부처님이 재해석한 바라문을 뜻하는 것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이 부처님이 재해석한 brāhmaṇa에 대하여 거룩한 님이라 번역한 것은 매우 탁월하다. 그러나 법구경에서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라고 번역한 것은 혼란을 줄 수 있다.
영문번역에서 붓다라키타는 “him do I call a holy man”라 하였다. holy man은 brāhmaṇa의 번역어로서 성스런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tam-ahaṃ brūmi brāhmaṇaṃ”에 대하여 “나는 그를 거룩한 님이라 부른다”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다.
2014-09-02
진흙속의연꽃
'니까야번역비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왼쪽 길과 오른쪽 길 어느 길로 갈 것인가? 풍요로운 초원에 도달하려면 (0) | 2014.10.07 |
---|---|
시간을 초월하는 부처님의 가르침 아깔리까(Akalika) (0) | 2014.09.18 |
버리고 또 버려서 열반이라는 보물을, 9선정을 위한 삼바다(차폐)와 오까사(열개) (0) | 2014.08.06 |
머리부터 꺽이어 넘어지노라? 까마다의 경(S2.6)에서 번역비교를 해보니 (0) | 2014.08.02 |
정법이 살아 있는 현세에서 수다원이라는 발판을 (0) | 2014.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