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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또 버려서 열반이라는 보물을, 9선정을 위한 삼바다(차폐)와 오까사(열개)

담마다사 이병욱 2014. 8. 6. 17:04

 

버리고 또 버려서 열반이라는 보물을, 9선정을 위한 삼바다(차폐)와 오까사(열개)

 

 

왜 경전의 근거를 밝히지 않는가?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근거를 들 때는 철저하게 경전의 넘버를 밝힌다. 예를 들어 숫따니빠따의 경우 Sn으로 시작하는데 라따나경(보배의 경)’의 경우 ‘Sn2.1’이 된다. 여기서  2는 왁가()을 말하고, 1은 해당품에서 순서를 말한다. 그런데 숫따니빠따에서 게송을 소개 할 때는 ‘stn’이르는 말을 사용한다. 라따나경에서 예류자의 조건과 관련된 게송을 소개 할 때에는 stn231이라 한다. 숫따니빠따 전체게송 중에 231번째 게송을 말한다.

 

법구경의 경우 총 423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10번째 게송에 대한 것이라면 ‘dhp10’이라 한다. 상윳따니까야에서 초전법륜경은 ‘S56.11’로 표현하는데, S는 상윳따니까야를 의미하고, 56 56번째 상윳따, 11 11번째 경을 표현한다. 맛지나니까야는 M으로, 디가니까야는 D, 앙굿따라니까야는 A로 표현한다. 이렇게 오부니까야는 모두 이니셜과 숫자로 표현 된다.

 

경전의 근거를 밝혀 놓으면 매우 편리하다. 누구나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경전적 근거를 알리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마치 자신이 말한 것처럼 보인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도용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경전적 근거를 밝히지 않고 말이나 글로 표현 한다는 것은 부처님과 가르침에 불경죄를 짓는 것과 같다.

 

경전을 무시하는 사람들

 

경전적 근거를 들면 정견이 된다. 반대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하면 사견이 된다. 그런데 아예 경전을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단지 오래 되었다는 이유로 무시한다. 그리고 문명이 발달된 과학의 시대에 맞지 않다고 폄하한다. 그런 글을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래서 수천 년 전의 주장을 답습(踏襲)하는 종교인들의 마음에는 짜증이 일어난다. 그들이 궁극의 진리로 받들어 모시는 종교경전은, 수천 년 전에 쓰이어진 교과서를 단 한 번도 개정하지 않고 초판 그대로 쓰는 격이다.

 

(여하시 본래면목: 건달바, 강병균교수, 불교닷컴 2014-08-04)

 

 

이 글은 포항공대 강병균교수가 쓴 글이다. 과학자의 입장에서 불교를 재해석한 글이다. 그러다 보니 과학적 견해가 매우 강조 되어 있다. 특히 진화론을 들어 불교를 설명하고 있다.

 

강병균교수의 이전 글을 보면 불교는 진화하여 왔다고 보고 있다. 부처님이 처음 법을 펼치신 이후 불교는 끊임 없이 진화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강병균교수가 본 불교진화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놀랍게도 선종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글의 말미 육조혜능의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本來面目 中道緣起 空假中 是三無差別를 소개 하고 있다. 내용은 본래 한물건도 없는데 어디 때가 끼겠는가?”본래면목은 중도연기일 뿐이다라고 결론을 내고 있다.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진화론을 신봉하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불교라고 예외가 없는 듯 하다. 2500년 전에 만들어진 경전은 현대에 맞게 바꾸어 져야 한다는 것이다. 문명이 발달한 과학의 시대에 맞게 불교도 변화 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수천년전에 쓰여진 경전에 대하여 한번도 개정판이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한마디로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내용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예로서 건달바를 들고 있다.

 

초기경전에 건달바가 있다. 이에 대하여 강병균교수는 건달바라는 얼토당토않은 미개한 시대의 발명품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과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수태 순간에 여체(난자)에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누구나 아는 상식을 소개한다. 그러면서 그때는 어느 누구도 정자와 난자의 개념이나 존재를 몰랐다. 그래서 건달바나 중음신(中陰身)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천년 전에 만들어진 경전의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과학의 시대에 건달바와 같은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도 시대에 맞게 현대화 해야 됨을 말한다.

 

과학자 강병균교수의 불교관에 따르면 초기경전은 믿을 것이 못된다. 상윳따니까야를 예로 든다면 하늘사람(데와따)이나 하늘아들(데와뿟따)가 등장하고, 브르흐마(하느님)와 제석천이 등장한다. 심지어 악마(마라)도 등장한다. 이와 같은 초월적 존재들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한다면 초기경전은 모두 허구가 될 것이다. 과학적으로 밝혀 내지 못하고 있는 윤회 역시 허구가 된다.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초기경전은 모두 소설이 되어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초월적 존재가 나온다고 하여

 

불교를 이야기하는 사람중에 경전을 근거로 드는 것을 보기 힘들다.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만 할 뿐 경전적 근거를 들어 이야기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경전에 대한 무지이거나 또 하나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늘사람, 하늘아들, 제석천, 하느님, 악마가 등장한다고 하여 경전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처님 가르침을 더 부각시키고 더욱 더 풍요롭게 만든다. 초월적 존재가 나온다고 하여 내친다면 자신만 손해일 것이다.

 

하늘아들 빤짤라짠다가

 

하늘아들 빤짤라짠다가 부처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읊었다.

 

 

Sambādhe vata okāsa

avindi bhūrimedhaso,
Yo jh
ānambudhā buddho

patilīnanisabho munīti.

 

(Pañcālacaṇḍasutta, S2.7)

 

 

[빤짤라짠다]

“”널리 두루 지혜가 있는 님,

홀로 명상하는 영웅, 해탈하신 님

선정을 깨달은 부처님은

차폐 가운데 열개를 얻으리.”

 

(빤짤라짠다의 경, 상윳따니까야 S2.7,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하늘사람이 부처님을 찬탄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번역어 차폐 가운데 열개를 얻으리라는 말이 있다. ‘차폐열개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생소하다.  

 

차폐와 열개에 대하여

 

차폐와 열개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Sambādhe vata okāsa : 차폐(遮蔽)와 열개(裂開) : Srp.I.106에 따르면, 다섯 가지 장애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가 차폐(Sambādha)이고, 그 반대로 주어지는 첫 번째 선정이 열개(okāsa)가 된다. 

 

(상윳따니까야 608번 각주, 전재성님)

 

 

차폐라는 말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열개라는 말은 생소하다. 열개(裂開)에 대하여 사전을 찾아 보니 찢어서 벌림이라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사전에 등재 되어 있는 단어라 볼 수 있다.

 

차폐와 열개는 대립적이고 반대되는 말이다. 이렇게 대조해 놓은 것은 선정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선정상태에 들어가면 오장애가 극복되는데, 오장애가 가림막처럼 차폐에 해당되고, 선정상태는 열개에 해당된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각주에 따르면 차폐(Sambādha)열개(okāsa)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를 참조하라고 하였다. 게송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 되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위 게송이 그대로 실려 있다. 그런데 번역이 약간 다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빤짤라짠다]

광대한 지혜를 지닌 님은

곤궁한 것에서 출구를 찾았으니,

무리의 영웅이자 해탈하신 님,

깨달은 님께서는 선정을 깨우치셨네.”

 

(곤궁한 것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9.42, 전재성님역)

 

 

이 게송에 대한 빠알리어는 똑 같다. 그리고 번역자도 똑 같다. 그런데 번역을 보면 마치 다른 사람이 번역해 놓은 것 같다. 특히 곤궁과 출구라는 말이 그렇다. 이는 차폐와 열개와 대조 되는 말이다.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역자는 상윳따니까야 2:7경에서 곤궁한 것을 차폐라고 번역했고 출구를 열개라고 번역했다. 좀 더 쉬운 번역은 Lba.IV.233에 따른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 8-9 535번 각주, 전재성님)

 

 

번역자에 따르면 용어를 바꾼 것에 대하여 밝히고 있다. 좀 더 쉬운 말로 번역하였다는 뉘앙스이다. 그래서 차폐 대신 곤궁, 열개 대신 출구라 번역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초불연에서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번역도 시기에 따라 바뀌는 모양이다. 성전협의 경우 앙굿따라니까야가 나중에 번역 되었기 때문에 번역의 완성도가 높다고 본다. 그래서 좀더 이해 하기 쉬운 말로 바꾸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초불연에서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지혜자는 구속가운데서도

기회 얻음을 깨달으셨어도

그분은 깨달으신 부처님이시니

초연한 영웅이요 성자시도다.”

 

(빤짤라짠다 경, 상윳따니까야 S2.7, 각묵스님역)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이라는 한자어이다. 니까야 번역서를 보면 한글로 표기하는 것이 원칙임에도 이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 본다. 아직까지 한자만 단독으로 번역 된 것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이라고 표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라 번역한 것은 파격적이다.

 

빅쿠보디의 번역을 보면

 

게송번역에서 sambādha에 대하여 구속이라 하였고, okāsa에 대하여 기회라 하였다. 이는 전재성님의 차폐와 열개’, 또는 곤궁과 출구와 다른 번역어이다. 그렇다면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CDB를 찾아 보면 다음과 같다.

 

 

"The one of broad wisdom has indeed found

The opening in the midst of confinement,

The Buddha who discovered jhana,

The withdrawn chief bull, the sage.

 

(Pañcālacaṇḍa, CDB S2.7, 빅쿠보디역)

 

 

빅쿠보디역에 따르면 sambādhaconfinement(감금)이고, okāsaopening(개막)이다. 이는 오염원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성냄이라는 오염원은 선정에서 극복 된다. 이렇게 본다면 성냄은 우리를 감금하는 것이 되고 선정에 들면 성냄이 사라지기 때문에 개막으로 보는 것이다. 각묵스님은 이를 구속기회라 하였다.

 

빠알리사전 PCED194를 찾아보니

 

Sambādha에 대하여 빠알리사전 PCED194를 찾아 보았다. ‘[m.] pressure(압력); crowding(붐빔); inconvenience(불편)’의 뜻이다. 한자어로는 障碍, 繁多, , ; 密所, 陰部라 되어 있다. 특히 한자어 중에 음부(陰部)’ 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숫따니빠따에서 성적교섭의 방식에도 없습니다.(stn609)”라 하여, Sambādha가 성적교섭의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Okāsa ‘[m.] room(); open space(열린공간); chance(기회); permission(허가의 의미이다. 한자어로는 空間, 場所, 機會, 聽許. -loka 空間世間, 器世間.’의 뜻이다. 특히 Okāsa-loka는 기세간(器世間)이라 한다.

 

SambādhaOkāsa에 대한 아홉가지 방식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SambādhaOkāsa에 대하여 아홉가지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No

곤궁한 것(Sambādha)

출구(Okāsa)

 

1

5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첫 번째 선정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희열과 행복을 갖춤)

오욕락

2

사유와 숙고

두 번째 선정

(사유와 숙고를 여의고

희열과 행복을 갖춤)

 

3

희열

세 번째 선정

(행복을 갖춤)

 

4

행복

네 번째 선정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함)

 

5

물질에 대한 지각

무한공간의 세계

 

6

무한공간의 세계

무한의식의 세계

 

7

무한의식의 세계

아무 것도 없는 세계

 

8

아무 것도 없는 세계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

 

9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

지각과 느낌과 소멸

상수멸

 

출처: 곤궁한 것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9.42

 

 

표를 보면 아홉 가지 선정의 단계임을 알 수 있다. 한 단계씩 올라 갈 때 마다 이전에 성취하였던 것이 곤궁한 것(Sambādha)’이 된다. 이를 차폐, 구속, confinement(감금) 등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성취한 것에 대하여 출구(Okāsa)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열개, 기회, opening(개막)으로 표현 하였다. 마치 구층탑이 있는데 결투를 하여 한단계씩 올라가는 것 같다.

 

이소룡의 사망유희(死亡遊戱, Game of Death)

 

이소룡영화 중에 사망유희(死亡遊戱, Game of Death, 1978)’가 있다. ‘죽음의 시합이라는 제목의 영화이다. 영화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소룡과 무술고수들과의 목숨을 건 격투이다. 영화에서는 탑을 한층씩 올라가면서 대결을 펼친다. 그래서 탑의 꼭대기 층에 숨겨져 있는 보물을 차지한다는 줄거리이다. 그런데 영화사망유희의 촬영지가 법주사 팔상전이 될 뻔 하였다. 이는 지난해 법주사 순례법회 당시 안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팔상전과 사망유희, 법주사 단풍놀이(2013-11-05)’라는 제목으로 올려 놓은 바 있다.

 

이소룡이 사망하기 전에 메모해 놓은 것을 보면 법주사 팔상전에서 결투장면이 있다. 팔상전의 경우 모두 5층으로 되어 있는데 5명의 무술고수들를 물리쳐야 한다. 그러나 이소룡은 사망유희촬영 도중 사망하였다. 그래서 대본이 대폭 수정 되어 법주사 팔상전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촬영 되었다. 만일 이소룡이 죽지 않았다면 법주사는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을 것이라 한다.

  

 

 

이소룡의 팔상전 사망유희 스케치

 

 

 

9선정과 9층탑

 

이소룡의 사망유희에서는 한층씩 올라가며 최상층으로 진입한다. 만일 9층탑이라면 9가지 장애가 있을 것이다. 경에 따르면 그런 장애 또는 차폐, 곤궁 등으로 불리우는 말이 Sambādha이다. 그런데 층을 올라가면 갈수록 더 강력하고 센 상대가 나타나는데 경에서의 아홉 가지 선정단계도 마찬가지이다.

 

 

 

 

 

사9 미지

 

 

처음에는 오욕락이라는 거친 번뇌를 첫 번째 선정으로 제압하지만, 다음 단계에서는 발판이 되었던 것을 제거 하는 식으로 올라 간다. 그래서 오욕락, 사유와 숙고, 희열, 행복 까지 물리쳤을 때 4층에 이른 것이다. 이어서 5-6-7-8 단계를 거처 마침내 아홉 번째 단계에 이른다. 최종단계는 지각과 느낌과 소멸이 된다 하여 상수멸이라 한다. 사망유희에서 꼭대기 층에 이르렀을 때 숨겨진 보물을 찾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아홉 번째의 상수멸단계가 숨겨진 보물과도 같은 것이다.

 

모든 장애를 극복하였을 때

 

아홉 가지 선정단계는 마치 9층탑을 보는 것과 같다. 한층 올라 갈 때 마다 이전것을 극복해야 하는데 마치 사망유희에서처럼 한층 올라 갈 때 마다 목숨을 건 격투를 하는 것 같다. 마침내 꼭대기층에 까지 올라 갔을 때 목표는 달성된다. 모든 장애를 제거하여 아홉번째에 이르렀을 때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Sambādhe vāpi vindanti

(pañcālacaṇḍāti bhagavā) dhamma nibbāapattiyā,
Ye sati
paccalatthu su

sammā te susamāhitāti.

 

[세존]

빤짤라짠다여, 새김을 확립한 이들은

올바른 삼매를 얻어

차폐 가운데

열반에 이르는 길을 안다네.”

 

(빤짤라짠다의 경, 상윳따니까야 S2.7, 전재성님역)

 

 

하늘아들 빤짤라짠다가 선정을 깨달은 부처님을 찬탄하자 게송으로 말씀 하신 것이다. 이 게송과 앙굿따라니까야 곤궁한 것의 경(A9.42)를 비교해 보면, 아홉 가지 선정에 이르는 것이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 하였다.

 

아홉 가지 선정 중에 최상층이 지각과 느낌과 소멸 즉, 상수멸정이다. 게송에서는 열반에 이르는 길(dhamma nibbāapattiyā)’이라 하였다. 여기서 담마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이라 번역하였다. 이유는 담마가 마음의 상태라기 보다 길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는 게송에서 올바른 새김(정념)이나 올바른 집중(정정)은 열반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라 한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The Dhamma for the attainment of Nibban”라 하여 역시 열반을 증득하기 위한 법이라 하였고, 초불연에서도 역시 열반을 증득하기 위한 법이라 하였다.

 

끊임 없이 버리고 버려서

 

아홉 가지 선정에서 최종단계는 상수멸이다. 이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올바른 삼매 뿐만 아니라 올바른 사띠도 함께 닦아야 함을 알 수 있다. 선정수행이라 하여 오로지 삼매만 닦는 것이 아니라 사띠수행도 함께 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개송에서 sati(사띠)samāhitā(삼매)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아홉 가지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멈춤과 통찰수행을 함께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하여 아홉단계에 이르렀을 때 열반이라는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는데, 마치 사망유희에서 한층 올라갈 때 마다 적을 물리치는 것과 같다.

 

 

Bruce Lee in G_O_D 死亡的遊 主題歌

 

 

그런데 적은 바로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 선정에서 오욕락과 오장애를 물리쳐서 희열과 행복을 얻었지만, 이 희열과 행복마저도 버려야 다음 단계로 올라 갈 수 있다. 이렇게 되었을 때 희열과 행복은 장애가 된다. 그런데 희열과 행복을 버렸을 때 또 다른 세계가 펼쳐 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 없이 버리고 버려서 마침내 아홉 번째 최종단계에 이르러 열반이라는 보물을 손에 넣는다.  

 

 

2014-08-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