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지관쌍수(止觀雙修)해야 하는 이유

담마다사 이병욱 2014. 7. 27. 09:23

 

지관쌍수(止觀雙修)해야 하는 이유

 

 

 

데와뿟따(하늘아들)상윳따

 

상윳따니까야 번역비교 하늘아들의 모음(S2)’편이다. 바로 이전의 하늘사람의 모음(S1)는 과는 어떻게 다를까?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때는 데와따(하늘사람)이라 하고, 이름이 알려져 있을 때는 데와뿟따(하늘아들)이라 한다. 2상윳따의 제목이 데와뿟따(하늘아들)이므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 첫번째 이름이 깟사빠이다.

 

깟사빠의 경에서는 이전의 경과 마찬가지로 하늘사람이 밤중에 부처님 면전에 나타난다. 그것도 아름다운 빛으로 제따와나숲을 두루 밝히며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수행승에 관하여 말씀하셨는데, 수행승이 되기 위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설해 주십시오.(S2.1)”라고 말한다.

 

여기서 깟사빠는 삼십삼천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은 후 그곳에서 법을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수행승이 되기 위한 가르침을 설해 달라고 하였다. 이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주석에 따르면 어떻게 수행승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이 인간세상 뿐만 아니라 밤에는 천상에서도 법을 설하였는데 아비담마논장 위주의 법을 설한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구족 되어 있는 천상에서는 인간세상의 빅쿠와 다르다. 그래서 어떻게 빅쿠가 될 수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이 되기 위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설해 주십시오라고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늘아들 깟사빠 읊기를

 

이와 같은 하늘아들 깟사빠의 요청에 부처님은 빅쿠가 되는 방법을 알려 주는 대신 먼저 생각나는 대로 읊어 보라고 하였다. 이에 하늘아들 깟사빠는 두 개의 게송을 읊는다. 그 중에 두 번째 게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Bhikkhu siyā jhāyī vimuttacitto

ākakhe ce hadayassānupatti,
Lokassa ñatv
ā udayabbayañca

sucetaso anissito tadānisasoti.

 

(Dutiyakassapasutta, S2.2)

 

 

[깟싸빠]

수행승이 마음의 성취를 바란다면

선정에 들어 마음에 의한 해탈을 성취해야 하리.

그것을 공덕으로 삼아 세상이 생겨나고 소멸함을 알아

고귀한 마음으로 집착 없이 지내야 하리.”

 

(Dutiyakassapasutta -깟사빠의 경2, 상윳따니까야 S2.2, 전재성님역)

 

 

마음의 증득을 바라는 비구는

참선하여 마음이 해탈해야 하고

세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서

고결한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아야 하나니

이것이 [아라한의] 이익입니다.”

 

(Dutiyakassapasutta -깟사빠 경2, 상윳따니까야 S2.2, 각묵스님역)

 

 

"A bhikkhu should be a meditator,

One who is liberated in mind,

If he desires the heart's attainment,

Bent on that as his advantage.

Having known the world's rise and fall,

Let him be lofty in mind and unattached."

 

(Kassapa (2), CDB S2.2, 빅쿠보디역)

 

 

 

meditation

 

 

서로 엇갈린 번역

 

두 개의 한글번역을 보면 차이가 있다.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이 ‘tadānisasoti’에 대한 해석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그것을 공덕으로 삼아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이것이 [아라한의] 이익입니다라 하여 서로 엇갈리게 번역하였다.

 

tadānisasoti‘tadānisaso = ( tadānisasa + o )’로 설명된다. tadānisasa는 복합어이다. 이에 대하여 PCED194에서는 오로지 미얀마로만 설명 되어 있다. 그런데 tadānisasa‘ta+ānisasa’로 분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Ta‘that’의 의미이다. ānisasa‘profit; merit; good result’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tadānisasa’그 이익이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이익이란 아라한이 되는 이익이다.(275번각주)”라 하였다. 그래서 tadānisasoti구절에 대하여 이것이 [아라한의] 이익입니다라고 하여 대괄호를 이용한 주석적 번역을 하였다.

 

그런데 이런 번역방식이 전재성님의 번역 그것을 공덕으로 삼아라고 한 것과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게송을 보면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 두 구절은 선정에 대한 것이다. 후반 두구절은 통찰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아라한이 된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선정과 지혜에 대하여 이것이 [아라한의] 이익입니다라 하여 이익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그것(선정수행을) 공덕으로 삼아라 하여 선정수행의 기반하에 지혜를 닦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빅쿠 보디는 6구게로 이루어진 영문게송에서 전번부에 “Bent on that as his advantage”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선정수행을 바탕으로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의 번역이 다르고, 오히려 빅쿠보디와 전재성님 번역이 일치한다. 빅쿠보디의 CDB 145번 각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The heart's attainment (hadayassānupatti) is arahantship, which is also the

advantage (anisamsa) on which he should be bent

 

(CDB 145번 각주)

 

 

빅쿠보디는 ‘hadayassānupatti’에 대하여 ‘The heart's attainment’라 하여 마음의 달성뜻으로 번역하였다. 전재성님은 마음의 성취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마음의 증득이라 하였다. 이는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아라한이 되려면 선정수행만 닦아서는 안된다. 통찰수행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전반부에 선정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고, 후반부에 통찰수행이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빅쿠보디의 번역을 보면 tadānisasoti에 대하여 전반부 게송에 포함 되어 있다. 그래서 “Bent on that as his advantage”라 하여 선정수행을 바탕으로 하여 통찰수행을 해야 함을 말한다. 전재성님도 그것을 공덕으로 삼아라 하여 선저수행을 바탕으로 해야 함을 말한다. 그러나 각묵스님만은 이것이 [아라한의] 이익입니다라 하여 동떨어지게 번역하였다. 더구나 사구게로 되어 있는 빠알리게송에 대하여 오구게로 번역하였다. 

 

지관쌍수(止觀雙修)해야 하는 이유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가르침은 선정과 통찰수행을 함께 닦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를 지관쌍수(止觀雙修)’라고도 하는데 법구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Natthi jhāna apaññassa,

paññā natthi ajhāyato,
Yamhi jh
ānañ-ca paññā ca

sa ve nibbāasantike.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

선정과 지혜가 있으면,

 참으로 그에게 열반이 현전한다. (Dhp372)

 

 

법구경 372번 게송에서 보는 것처럼 부처님은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열반이 실현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다름 아닌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로지 선정수행만 닦는다면 일시적 마음의 해탈만 이룰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선정과 함께 통찰(지혜)수행을 강조한 것이다.

 

 

 

2014-07-2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