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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밭갈이와 수행자의 마음갈이

담마다사 이병욱 2014. 7. 21. 13:46

 

농부의 밭갈이와 수행자의 마음갈이

 

 

 

혼자 일하다 보면

 

혼자 일하다 보면 무척 바쁘다. 일을 혼자 처리해야 함은 계산서처리나 세금관련 업무도 역시 혼자 처리해야 한다. 커피나 차도 혼자 타먹어야 하고 사무실 바닥청소도 혼자 해야 하고 쓰레기통도 혼자 비워야 한다. 더구나 매일 올리다시피 하는 글도 써야 하니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빠르게 지나간다. 이렇게 바쁜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혼자 하기 때문이다. 남이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다 보니 초와 분을 다투는 삶을 살아간다 

 

농번기 때 농부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바쁘다. 이렇게 바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남이 대신 농사를 지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혼자 힘으로 농사를 짓기 때문에 바쁜 것이다. 수행자도 바쁘기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수행자가 바쁠까? 남이 대신 농사를 지어 주지 않듯이 마찬가지로 남이 대신 내 번뇌를 없애 주지 않기 때문이다.

 

빳조따경(S1.80)에서

 

초기경전에는 농사짓는 농부와 수행하는 수행자를 비교한 가르침이 종종 보인다. 상윳따니까야 빳조따경(S1.80)에서도 볼 수 있다. 먼저 하늘사람이 묻는다.

 

 

[하늘사람]

 

무엇이 세상의 불빛이고

무엇이 깨어있음이며

무엇이 일하는 데 함께 하는 것이고

또한 무엇이 그의 삶의 길인가?

 

무엇이 어머니가 아들을 키우듯

게으르거나 게으르지 않은 자 모두를 키우고

도대체 무엇이

이 지상에 사는 생명들을 키우는가?”(S1.80, 전재성님역)

 

 

하늘사람이 질문한 것은 모두 여섯 가지이다. 두 개의 게송으로 나누어 질문 하였는데, 특히 두 번째 게송을 보면 두 개의 질문처럼 보이지만 부처님은 하나의 답을 말한다.

 

부처님이 답송하시기를

 

부처님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한다.

 

 

Paññā lokasmi  pajjoto

sati lokasmi jāgaro,
G
āvo kamme sajīvāna

sītassa iriyāpatho.


Vu
ṭṭhi alasa analasañca

mātā puttava posati,
Vu
ṭṭhi bhūtūpajīvanti

ye pāā pahavisitāti.

 

(Pajjotasutta, S1.80)

 

 

[세존]

지혜가 세상의 불빛이고

새김을 확립하는 것이 세상에서 깨어있음이며,

소가 일하는 데 함께 하는 것이고,

밭이랑이 그의 삶의 길이네.

 

어머니가 아들을 키우듯,

비가 게으르거나 게으르지 않은 자 모두를 키우니,

비의 존재가 참으로

이 지상에 사는 생명들을 키우네.”

 

(Pajjotasutta -불빛의 경, 상윳따니까야 S1.80, 전재성님역)

 

 

[세존]

통찰지가 세상에서 광채가 되고

마음챙김이 세상에서 깨어 있는 자로다.

일하는 자들에겐 소가 동료요

밭고랑이 그의 생계수단이니라.

 

마치 어머니가 자식 부양하듯이

[]가 게으른 자나 게으르지 않은 자를 부양하노라.

땅에 의지해 사는 생명들

바로 그들 삶을 영위하도다.”

 

(Pajjotasutta -광채 경, 상윳따니까야 S1.80, 각묵스님역)

 

 

“Wisdom is the source of light in the world;

Mindfulness, in the world, is the wakeful one;

Cattle are [the colleagues] of those living by work;

One's course of movement is the furrow.

 

“Rain nurtures both the slack and active

Just as a mother nurtures her child.

Those creatures who dwell on the earth

Sustain their life by rain.”

 

(Source of Light, CDB S1.80, 빅쿠보디역)

 

 

plow a field

 

 

첫 번째 게송에서 지혜가 세상의 불빛(Paññā lokasmi  pajjoto)”이라는 말은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마치 깜깜한 방안에서 촛불을 켜기 위하여 성냥불을 당겼을 때 일시에 환해 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두 번째 구절에서 새김을 확립하는 것이 세상에서 깨어있음(sati lokasmi jāgaro)”이라는 것도 쉽게 이해 된다.

 

마음챙김이 세상에서 깨어 있는 자로다?

 

그런데 두 번째 구절에 대하여 초불연 각묵스님은 마음챙김이 세상에서 깨어 있는 자로다.”라고 번역하였다. 마음챙김이 깨어 있는 자라는 뜻이다. 어떻게 마음챙김이 깨어 있는 자가 될 수 있을까? 마음챙김을 뜻하는 사띠(sati)는 알아차림을 뜻하는 술어인데 이를 사람이라는 뜻의 깨어 있는 자로 볼 수 있을까?

 

이런 번역이 나온 것에 대하여 빅쿠보디의 영역 Mindfulness, in the world, is the wakeful one”에 주목한다. 이를 직역하면 세상에서 알아차림은 깨어 있는 자이다라는 뜻이 된다. ‘the wakeful one’이 사람을 뜻하여 깨어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영향이어서일까 각묵스님 역시 깨어 있는 자로다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원문에는 ‘sati lokasmi jāgaro’로 되어 있다. 여기서 jāgaro‘Waking, vigil’의 뜻이다. 우리말로 깨어 있는또는 철야의 뜻이 된다. 그런데 어떻게 jāgaro가 사람을 뜻하는 the wakeful one(빅쿠보디)” 또는 깨어 있는 자로다라고 번역될 수 있을까? 성전협에서는 새김을 확립하는 것이 세상에서 깨어있음이며라고 번역하였다.

 

서로 매칭이 되지 않는 듯한데

 

첫 번째 게송의 세 번째와 네 번째 게송은 “Gāvo kamme sajīvāna sītassa iriyāpatho”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소가 일하는 데 함께 하는 것이고, 밭이랑이 그의 삶의 길이네.”라 하였다. 부처님이 지혜(paññā)’알아차림(sati)’을 말씀 하시다가 갑자기 소(Gāvo)와 밭이랑(sītā)에 대하여 말씀 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일하는 자들에겐 소가 동료요 밭고랑이 그의 생계수단이니라.”라 하였다. 마치 이전 구절과 단절된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앞뒤가 서로 연결이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먼저 일하는 자들에겐 소가 동료요구절에 대하여 초불연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일하는 자들에게 소가 동료라는 것은 일을 해서 삶을 영위하는 자들에게는 소가 일을 하는 데에 동료이자 친구가 된다는 뜻이다. 소들과 함께 농사일을 하기 때문이다. (SA.i.10)

 

(초불연 264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은 주석 ‘SA.i.10’을 근거로 하여 각주로 설명하여 놓았다. 이는 자신의 견해가 아니라 주석을 근거로 한 설명이라는 뜻이다.

 

다음으로 밭고랑이 그의 생계수단이니라에 대한 각주를 보면, “생계수단은 iriyā-patha를 옮긴 것인데, 이것은 주로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등의 자세를 말한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여기서 강조 되고 있는 것은 생계수단이다. 이 생계수단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행주좌와라고 설명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밭고랑이 그의 행주좌와이니라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잘 이해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복주석에서는  밭고랑이란 쟁기로 밭을 가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쟁기로 밭을 가는 것은 음식에 의존하는 중생들에게 생계수단이라는 뜻이다(초불연 265번 각주)”라고 각주 하였다. 여기서 쟁기가 등장한다. 주석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다. 주석에서는 생계수단에 대하여 행주좌와라 하였으나 복주석에서는 “밭고랑이란 쟁기로 밭을 가는 것이라 하여 음식에 의존하는 중생들의 생계수단이라 하였다. 그러나 주석과 복주석의 설명을 보아도 게송의 의미가 잘 파악 되지 않는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의미 파악이 힘든 첫 번째 게송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 CDB각주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In pada d, sitassa (Ee2: sita 'ssa) should be resolved sitam assa. Spk takes assa to refer to "the mass of beings" (or of people: sattakayassa)  and explains iriyāpatha, "the course of movement" (or "mode of deportment"), as the means of livelihood (jivitavutti); it glosses sita (furrow) with nangala(plough). The purport is that the activity of ploughing is the essential means for sustaining human life.

 

(CDB 139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의 네 번째 구절(d pada)에 대한 설명이다. 네 번째 구절에서 sītassa가 있는데 이는 sīta + assa로 분리 될 수 있다. 여기서 sīta는 이랑을 의미한다.  그런데 assa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the mass of beings"라 하였다. 존재의 덩어리 즉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sītassa는 밭이랑을 매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된다.

 

sītassa iriyāpatho 구절에서 iriyāpatha‘deportment; four postures’로 설명된다. 네 가지 자세의 뜻도 있는데 이는 ‘walking, standing, sitting, and lying down.’로서 한자어로 행주좌와를 뜻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sītassa iriyāpatho의 의미는 밭이랑을 터전으로 하여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땅에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움직임 자체가 생계와 관련 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sītassa iriyāpatho 구절에 대하여 밭이랑이 그의 삶의 길이네.”라고 번역하였을 것이다.

 

쟁기라는 연결고리로

 

그런데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쟁기(plough)’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밭이랑은 쟁기가 있어야 형성될 수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쟁기로 간 밭이나 논에서 사람들은 부지런히 움직여서 생계를 유지한다. 그래서 빅쿠보디는 쟁기질을 하는 것에 대하여 인간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수단(the essential means for sustaining human life)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소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다. 쟁기질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가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가 일하는 데 함께 하는 것이고(Gāvo kamme sajīvāna)”라 하였을 것이다.

 

첫 번째 게송을 보면 전반부와 후반부가 전혀 매칭이 되지 않는 듯 보인다. 지혜와 알아차림이 소와 밭이랑이 연결되지 않은 것처럼 보여 마치 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빅쿠보디의 각주에 따르면 쟁기로서 세 번째와 네 번째 구절이 매칭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게송에서는 급격한 도약으로 인하여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각주를 참고하면 왜 도약이 이루어졌는지 대한 답이 보인다.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쟁기라는 힌트를 주었고 성전협에서는 stn77과 그 주석을 보라고 하였다.

 

숫따니빠따 77번 게송

 

stn77을 찾아 보았다. 숫따니빠따 77번 게송이다. 찾아 보니 까씨 바라드자와의 경(Sn1.4)에 실려 있다. 77번 게송은 다음과 같다.

 

 

Saddhā bīja tapo vuṭṭhi

paññā me yuganagala,
Hiri
īsā mano yotta

sati me phālapācana.

 

믿음이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자가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부끄러움이 자루이고 정신이 끈입니다.

그리고 새김이 나의 쟁깃날과 몰이막대입니다.(stn77, 전재성님역)

 

 

이 게송을 보면 상윳따니까야 빳조따경(Pajjotasutta, S1.80)을 보충 설명하고 있는 듯 하다. 빅쿠보디가 각주에서 말한대로 쟁기가 등장한다.

 

불교에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게송에서 믿음이 씨앗(saddhā bījaṃ)’ 이라 하였다. 여기서 믿음이라 번역된 빠알리어가 삿다(saddhā)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말씀 하신 믿음은 맹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무조건 믿어라가 아니라 와서 보라는 것이다. 이런 믿음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진리에 대한 완전하고 확고한 확신

둘째, 확신에 대한 희열

셋째, 목표를 성취하고자 하는 열망

 

 

이렇게 세 가지 요소를 갖춘 것이 삿다(saddhā)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불교의 믿음은 보고 듣고 알고 깨닫는데 바탕을 두고 있음을 말한다. 거의 모든 종교는 맹목적인 신앙으로 보이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불교에서의 믿음은 합리와 이성에 바탕을 둔 확신에 찬 믿음임을 뜻한다.

 

세간적 지혜와 출세간적 지혜

 

두 번째 구절을 보면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paññā me yuganagalaṃ)라 하였다. 여기서 지혜라는 것은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사유를 뜻한다.

 

팔정도에서 정견과 정사유에 해당된다. 그런데 지혜는 멍에와 쟁기라 하였다. 멍에와 쟁기를 지혜로 비유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세간적 지혜와 출세간적 지혜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멍에는 세간적 지혜에 대한 비유이고, 쟁기는 출세간적 지혜에 대한 비유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지혜는 팔정도에서 정견과 정사유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혜 삼학으로 정리 된다. 팔정도 역시 계--혜 삼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순서를 보면 혜온에 해당되는 정견과 정사유가 앞에 나온다. 왜 그럴까? 이는 다름 아닌 방향을 잡아 주기 위한 것이다. 바른 견해가 서야 바른 길로 갈 수 있다는 말이다. 만일 정견이 제대로 서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그 목적지는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정견과 정사유는 팔정도의 출발점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팔정도의 정견과 정사유는 세간적 지혜에 해당된다.

 

정견이 서 있다면 수행은 바른 길로 들어 선 것이다.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계행을 확립하고 선정을 닦는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지혜를 닦아야 한다. 이런 과정이 팔정도에서 계온과 정온과 혜온이다. 그래서 혜온을 한번 더 닦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계--혜 순서 대로 되는 것이다. 이 때 나중의 혜온을 닦으면 사성제가 완성된다. 따라서 나중의 혜온에 대하여 출세간적 지혜라 한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팔정도수행의 단계

 

    

수행

  

혜온(慧蘊)

paññā-kkhandha

-올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

-올바른 사유(正思惟)

sammā-sakappa

수행의 시작

세간적 지혜

-팔정도의 출발점

-사성제의 이해

-수행의 방향설정

계온(戒蘊)

sīla-kkhandha

-올바른 언어(正語)

sammā-vācā

-올바른 행위(正業)

sammā-kammanta

-올바른 생활(正命)

sammā-ajiva

수행의 과정

 

정온(定蘊)

samādhi-kkhandha

-올바른 정진(正精進)

sammā-vãyama

-올바른 새김(正念)

sammā-sati

-올바른 집중(正定)

sammā-samãdhi

수행의 과정

 

혜온(慧蘊)

paññā-kkhandha

-올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

-올바른 사유(正思惟)

sammā-sakappa

수행의 완성

출세간적 지혜

- 팔정도의 완성

-사성제진리를 꿰뚫음

-지혜의 완성

-수행의 완성

 

 

 

마음의 밭을 가는 자

 

빳조따경에서 소가 일하는 데 함께 하는 것(S1.80) 이에 대응되는 구절이 숫따니빠따에서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stn77)”이다. 이 구절은 상윳따니까야 까시의 경(S7.11)’에서도 보인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 있다. 이는 경에서 바라문 까시 바라드자와가 그대는 밭을 가는 자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대가 밭을 가는 것을 보지 못했네.(stn76)”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농부는 소와 쟁기를 이용하여 밭가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지만 수행자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까시 바라드자와의 질문에 부처님도 밭을 가는 자라 하였다. 어떻게 밭을 가는가?그것은 마음의 밭을 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믿음이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자가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부끄러움이 자루이고 정신이 끈입니다. 그리고 새김이 나의 쟁깃날과 몰이먹대입니다.(stn77)”라 한 것이다.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농부는 밭을 갈고 부처님은 마음을 간다고 하였다. 농부들은 소와 쟁기를 이용하여 밭을 갈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부처님은 착하고 건전한 법으로 마음의 밭을 갈아 살고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교표를 만들어 보았다.

 

 

No

마음 밭갈기

농사 밭갈기

1

믿음(saddhā)

씨앗(bīja)

2

감관의 수호자(tapo)

(vuṭṭhi)

3

지혜(paññā)

멍에와 쟁기(yuganagala)

4

부끄러움(hiri)

자루(īsā)

5

정신(mano)

(yotta)

6

새김(sati)

쟁깃날과 몰이막대(phālapācana)

 

 

 

마음밭갈기와 농사밭갈기에 대한 도구가 다름을 알 수 있다. 마음 밭갈기는 착하고 건전한 법들로 마음속에 뿌리 박고 있는 악하고 불건전 법들을 소멸하는 것이다. 반면 농사밭갈기는 소와 쟁기 등 도구를 이용하여 잡초를 제거하고 농작물을 더 잘 자라게 하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KBS프로 중에 강연100도씨가 있다. 어느 귀촌자는 강원도에서 5년째 살고 있다고 하였다. 자신이 이렇게 나오게 된 것은 귀촌이나 귀농하려 하는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농촌은 매우 바쁘다고 하였다.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다 보니 심지어 씻을 시간도 없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귀촌이나 귀농해서 살려면 부지런해야 함을 말한다.

 

농번기때는 무척 바쁘다. 논에서 김을 메고 밭에서는 잡초를 제거하기 위하여 밭고랑을 매야 한다. 그래서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이처럼 농사짓는 것이 바쁜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이 단지 결재하는 것만으로 일하는 것도 아니고, 연금혜택자처럼 연금으로 여유있게 살아 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손으로 하지 않으면 농사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농부는 이른 아침부터 잠 잘 때까지 늘 부지런해야 살아 갈 수 있다.

 

농부의 밭갈이와 수행자의 마음갈이

 

수행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행이라는 것이 남이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농부가 밭가는 것처럼 살아 가야 한다. 농부가 소를 몰고 논이나 밭을 부지런히 갈듯이 수행자 역시 마음의 번뇌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부지런히 마음의 밭갈이를 해야함을 말한다. 그래서 뽑아도 뽑아도 올라오는 잡초를 제거 하듯이 번뇌의 풀을 제거 해야 한다. 이런 일은 남이 대신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자신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수행자는 한가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이다. 

 

 

 

2014-07-2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