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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미래를 의하여, 보험과 노잣돈

담마다사 이병욱 2014. 7. 13. 11:00

 

알 수 없는 미래를 의하여, 보험과 노잣돈 

 

 

보험계약을 하고

 

마침내 계약을 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보험이다. 친구가 찾아 와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친구는 일년 여 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었다. 특별한 대책이 없어서 약 10개월간 실업급여로 지냈다고 하였다. 10개월 안에 직장을 다시 잡으면 괜찮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경우 수입이 뚝 끊어져 경제적 압박을 받게 된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직장을 잃게 되었을 때 10개월이 대책 없이 흘러 가는 것이 보통이다. 실업급여라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친구는 10개월이 지나자 선택한 것이 보험이었다. 투자비가 들지 않아서 좋고 자신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수입창출이 가능하다는 것이 큰 매력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럴 경우 지연, 학연, 인맥, 학맥이 총동원 되기 마련이다. 친구도 그렇게 하였다. 그래서 방문 한 적이 있었다.

 

친구에 따르면 자신이 보험을 한다고 하니까 몇 가지 반응을 보았다고 하였다. 평소 친하다고 생각하여 찾아 갔으나 보험한다고 하니 반응이 달라졌다고 하였다. 대부분 보험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번은 학교시절 서클 선배를 찾아 갔었다고 한다. 그 선배는 이럴 때 도와 주어야지 언제 도와주나라며 그 자리에서 흔쾌히 들어 주었다고 한다. 또 한번은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열심히 노력하여 자수성가형으로 돈을 많이 번 친구이다. 그러나 너무 바빴던 모양이다. 전화 걸 때 마다 바쁘다라며 만남 자체가 성사 되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털린듯한 기분이지만

 

보험계약을 하고 나니 은근하게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 보험금이 통장에서 빠져 나가자 마치 털린듯한기분이 든 것이다. 그리고 그 친구가 약간은 원망스러웠다. 가뜩이나 빡빡하게 자금을 운영하고 있는 마당에 지출항목이 하나 더 생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보험에 대한 불신일 것이다. 지금 문제 없이 잘 살고 있는 미래에 일어날 지도 모를 일에 대비하여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빠져나가는 돈이 마치 보험회사에 털린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보험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우발적 사고나 병 따위의 장차 발생할 수 있는 일에 대비하여 미리 일정한 돈을 내게 하고, 약정된 조건이 성립될 경우 그에 맞는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제도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매월 일정액이 지불 되는 것이 결코 헛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질병이나 사고 등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을 내는 것도 일종의 보험

 

보험은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비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험들었다라는 말을 하는데 미래의 벌어질 일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초기경에서도 보험에 대한 이야기도 꽤 보인다. 그것은 주로 믿음이나 공덕지음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제석천경에서는 목갈라나가 신들의 제왕이여,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신들의 제왕이여, 부천님께 귀의함으로서 이 세상에 뭇삶들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납니다.(S40.10)”라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고 실천하면 반드시 천상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을 내는 것도 일종의 보험을 드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믿음이 노잣돈이고

 

여행을 갈 때는 여행준비물이 필요하다. 가방이나 베낭에 옷가지나 생활용품 등을 준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노잣돈일 것이다. 돈이 있어야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잣돈은 든든한 동반자와 같은 것이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해결 해 주기 때문에 보험과도 같은 것이다.

 

초기경에서도 노잣돈과 관련된 게송이 있다. 하늘사람이 무엇이 노잣돈이고 무엇이 보물창고이며 무엇이 사람을 괴롭히고 무엇이 세상에 버리기 어려운 것이고 줄에 묶인 새와 같이 뭇삶들은 묶여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한다.

 

 

Saddhā bandhati pātheyya

siri bhogānamāsayo,
Icch
ā nara parikassati

icchā lokasmi dujjahā,
Icch
ābaddhā puthu

sattā pāsena sakuī yathāti.

 

(Pātheyyasutta, S1.79)

 

 

믿음이 노잣돈이고

행운이 보물창고이며

욕망이 사람을 괴롭히고

욕망이 세상에서 버리기 어려운 것이니

줄에 묶인 새와 같이

뭇삶들은 자신의 욕망에 묶이네.”

 

(노잣돈의 경, 상윳따니까야 S1.79, 전재성님역)

 

 

믿음이 여행 준비물이고

행운이 재물의 창고이니라.

욕구가 사람을 끌어당기고

욕구가 세상에서 버리기 어려운 것이로다.

욕구에 중생들은 걸려 있나니

마치 새가 올가미에 걸려 있듯이.”

 

(여행 준비물 경, 상윳따니까야 S1.79, 각묵스님역)

 

 

 “Faith secures provisions for a journey;

Fortune is the abode of wealth;

Desire drags a person around;

Desire is hard to discard in the world.

By desire many beings are bound

Like birds caught in a snare.”

 

(Provisions for a Journey, CDB S1.79, 빅쿠보디역)

 

 

빠알리 게송에서 pātheyya PCED194에 따르면 ‘provisions for a journey’로 되어 있다. Provision조항, 규정, 대비, 지원의 뜻이다. pātheyy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노잣돈으로 번역하였다. 각주에 따르면 여행에 필요한 식량이나 비용등을 말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초불연에서는 여행준비물이라 번역하였다. 이는 빠알리사전 ‘provisions for a journey’의 뜻을 번역한 것이라 보여진다. 빅쿠보디는 ‘provisions for a journey’라 하여 역시 빠알리사전의 내용대로 번역하였다.

 

믿음(Saddhā)과 행운(siri)

 

이 게송에 대한 주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성전협에서 짧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두번 째 구절에서 행운이 보물창고이며 하였을 때, 여기서 행운은 권력(issariya)’을 뜻한다고 하였다. 행운이 왜 권력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다만 행운을 뜻하는 빠알리어 siri‘luck; glory; wealth; splendour; the goddess of luck.’의 뜻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행운만을 뜻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Siri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도 행운이라 번역하였고, CDB에서도 ‘Fortune’이라 하였기 때문에 siri의 뜻은 행운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또 다른 빠알리어 ‘sirī에 따르면 ‘Fortune, prosperity; a name of Lakshmi; majesty, royalty; magnificence, glory라고 되어 있어서 권력의 뜻과도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siri는 믿음을 뜻하는 Saddhā와 함께 긍정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구절에서 믿음이 노잣돈이고 행운이 보물창고이며라 하였는데, 이는 믿음(Saddhā)과 행운(siri)이 누구나 가져도 좋을 긍정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믿음이 따르면 행운이 생긴다

 

믿음과 행운을 좋은 뜻으로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늘가는데 실 가듯이항상 붙어 다님을 알 수 있다. ‘믿음이 따르면 행운이 생긴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삼보에 대한 믿음을 내면 반드시 행운이 따르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느 것 하나 올바르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가르침 대로만 산다면 누구에게나 행운이 닥칠 것이다.

 

믿음을 내면 행운은 필연적으로 따라 다닐 것이다.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게 불행보다 행운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먼저 믿음을 내야 한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믿는 맹신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와서 보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믿음이다. 이런 믿음을 삿다(Saddhā)’라 한다.

 

불교인들의 믿음은 맹신이 아니라 합리에 바탕을 둔 믿음이다. 이는 다름 아닌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을 내는 것 자체가 미래의 행운을 불러 오는 것이기 때문에 노잣돈(pātheyya)’과 같은 것이라 하였을 것이다.

 

저승갈 때 여비하라고

 

사람이 죽으면 매장을 한다. 화장 하는 경우가 많지만 매장을 할 때 노잣돈을 넣어 주는 경우도 있다. 입관할 때 돈을 넣는 것이다. 이는 저승갈 때 여비하라고 넣는 것이다. 일종의 노잣돈인 셈이다. 그러나 평소 많은 공덕을 쌓았다면 별도로 노잣돈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절에서는 천도재를 한다. 49재가 대표적이다. 천도재를 하는 경우 비용이 많이 발생된다. 이런 천도재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더 좋은 곳에서 태어나기를 바라는 염원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천도재비용 역시 노잣돈 개념에 들어 간다.

 

그런데 노잣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든든하듯이 천도재를 하는 것이 도리라고 여기는 경향이 많다. 죽은 자를 위하여 산자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보기 때문일 것이다.

 

기도의 힘으로

 

천도재 하는 것이 저승갈 때 노잣돈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돈이 일이 닥쳣을 때 큰 도움이 되듯 천도재는 일종의 보험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가르침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에서 알 수 있다.

 

 

[세존]

“촌장이여,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커다란 큰 돌을 깊은 호수에 던져 넣었다고 합시다.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그것을 두고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 라고 기도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순례한다면 촌장이여,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커다란 큰 돌이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합장하고 찬탄하고 순례한 까닭에 물 속에서 떠오르거나 땅 위로 올라올 것입니까?

 

(Asibaddhakaputtasutta-아씨빤다까뿟다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6, 전재성님역)

 

 

커다란 돌을 호수에 던지면 떠 오르지 않고 가라앉고 만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기도의 힘으로 이를 떠 오르게 하려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래서 부처님은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라고 기도하였을 때 과연 돌이 떠 오를 수 있는지 촌장에게 묻는다. 그러자 촌장은 세존이시여,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지극히 상식적으로 답을 한다.

 

인과의 냉혹함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세존]

 

촌장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뭄에 잘못을 범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탐욕스럽고, 성내는 마음을 가지고, 삿된 견해에 사로잡혔다면, 그에게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기도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순례하더라도 그 때 그 사람은 몸이 파괴 되어 죽은 뒤에, ;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입니다.”

 

(Asibaddhakaputtasutta-아씨빤다까뿟다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인과의 냉혹함을 말씀 하시고 있다. 중죄를 저지른 자가 죽었을 때 아무리 천도재를 열 번 백 번 해 주어도 허사라는 말이다. 이는 마치 호수에 던진 돌이 떠 오르기를 바라는 것처럼 아무 소용이 없음을 말한다. 천도재를 열 번 백 번 해 주어도 십악죄를 저지른 자는 결국 악처에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무서운 인과를 말씀 하신다.

 

행위에 따라 내세가

 

경에서는 돌과 기름의 비유를 들고 있다. 기름의 비유의 경우 돌의 비유와 정 반대이다. 누군가 십선업을 쌓았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 누군가 악처에 떨어져라고 저주의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저주의 기도를 백 번 천 번 해도 통하지 않는다. 기름은 가벼워서 물에 떠 있는데 누군가 기름이여, 가라앉아라라고 기도한다고 가라 앉을까? 미찬가지로 신선업을 지은 자가 죽었을 때 저주의 기도를 해서 악처로 떨어 뜨리려 하지만 그런 기대와는 정 반대로 선처에 태어나고 말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경에서 돌은 십악업을 지은 자로, 기름은 십선업을 지은 자로 비유 되고 있다. 십악업을 지은 자는 업이 무거워서 돌처럼 가라 앉을 것이고, 십선업을 지은 자는 업이 깃털처럼 가벼워서 기름처럼 물에 뜰 것이다. 호수 아래 가라 앉는 것은 악처를 뜻하고, 호수에 뜨는 것은 선처에를 뜻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과 상관 없이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내세가 결정됨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내세에 좋은 곳에 태어나려면 사후에 천도재를 지내 주는 것 보다 이 몸과 마음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십선업을 짓게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 십선업은 결국 죽어서 저승길에 갈 때 든든한 노잣돈이 될 것이다.

 

이 손으로 돈 많이 벌었어요. 그러나 통장에 돈이 없어요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좋은 글귀를 보았을 때 메모장에 옮겨 놓는다. 요즘은 컴퓨터시대이기 때문에 별도의 메모파일을 활용한다. 그래서 기사의 내용이나 경전의 문구를 옮겨 놓는다. 나중에 글을 쓸 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에서 TV를 보다가 좋은 이야기나 문구를 발견하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럴 때는 스마트폰을 활용한다. 스마트폰의 메모기능을 활용하는 것이다.

 

TV를 보다가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를 스마트폰에 기록하여 놓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손으로 돈 많이 벌었어요.

그러나 통장에 돈이 없어요

 

 

산전수전 다 겪은 할머니는 자신의 두 손을 내 보이고 있다. 거친 손을 보니 험난한 인생역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이 작은 두 손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통장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수 억 벌었지만

 

사람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번다. 십년 직장생활 하였다면 수 억 벌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중에 남아 있는 돈이 없다. 이렇게 본다면 돈을 벌기 위하여 올인하지만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덧 없음을 느낀다.

 

이 세상에 태어난 누구나 할 것이 없이 돈벌기선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다 선수가 될 수 없다. 누군가는 돈 버는 능력이 있어서 여유 있게 살지만 누군가는 돈 버는 재주가 없어서 쩔쩔 매며 살아 간다.

 

모두 돈벌기 선수가 되어 돈 버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친다. 하지만 남는 것이 없다면 허무할 것이다. 두 손으로 밤낮 없이 일하고 젊음을 다 바쳐 일하였건만 통장에 남아 있지 않다면 할머니의 말대로 ““이 손으로 돈 많이 벌었어요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돈 버는 선수가 되어

 

있을 때 잘해라는 노래가 있다. 이는 돈이 있을 때 베풀며 살자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수중에 돈이 있으면 좀처럼 풀려고 하지 않는다. ‘노후대책때문이다. 일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졌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답게 살려면 어느 정도 노후자금이 있어야 된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여지 없이 무너지고 있다. 기대수명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 가는 도중에 자금이 모두 바닥 나버리기 때문에 노후대책이 무력화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뒤 물불 안가리고 오로지 돈 버는 선수가 되어 악착 같이 모았어도 결국 그러나 통장에 돈이 없어요라고 결론이 났을 때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것일까 실패한 것일까?  

 

사기꾼이 되고 싶어서 사기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업을 하다 보니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한다. 그것은 돈을 못 받는 경우이다. 거래가 이루어지면 당연히 결재가 이루어져야 하나 결재를 하지 않는 것이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기꾼이 되고 싶어서 사기꾼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이렇게 못 받는 돈이 대략 10%에 달한다. 사업하는 사람들 역시 이런 상황을 받아 들인다. 100% 회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10%는 내 돈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수입에서 10%는 나의 돈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현재 수입에서 10% 역시 나의 돈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예기치 않게 보험금으로 나가는 것도 그 10%안에 든 것이라 보고, 각종 기부금 역시 그 10%안에 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보험회사로 돈이 빠져 나갔을 때 털렸다라고 생각한다면 매우 아까운 느낌이 든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지갑에서 단돈 만원이라도 새어 나가도 마치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깝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수입에서 10%는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사업하는 사람이 계산서를 발행하지만 100% 회수를 기대하지 않고 90%만 기대하는 것과 같다.

 

나눔이어달리기

 

대부분 사람들이 베풀고 나누며 사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단돈 만원도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만원이라도 나누면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예를 들어 복지단체나 NGO등에 기부하는 것이다.

 

복지단체에는 더도 말고 만원 짜리 여러 개를 하는 것이 낫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에게 권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교복지단체인 승가원이 이런 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후원자가 또 다른 사람에게 후원을 요청하여 연쇄적으로 후원이 이루어지게 하는 제도이다. 이런 방식을 나눔이어달리기라 한다.

 

 

 

 

 

 

만원짜리가 만개가 되면 1억이 된다. 따라서 불자라면 가르침대로 베풀면 살아야 한다. 단 능력껏이다. 부처님도 보시는 능력껏 하라고 하였다.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르기 때문에

 

친구의 요청으로 보험을 들었다. 돈이 통장에서 빠져 나갔을 때 보험회사로부터 털렸다라고 생각하니 은근히 화가 나기도 했다. 그리고 친구가 약간은 야속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0%는 내돈이 아니라고 마음속으로 선언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 졌다.

 

10%가 나의 돈이 아니라면 그 돈은 복지단체 등에 기부하여 후원자가 될 수 있다. 이런 후원금은 다시 돌아 오지 않는다. 그러나 털렸다라고 생각 되는 보험금은 충분히 보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살면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친구의 요청이 고마운 것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보험은 충분히 삶에 있어서 노잣돈이 될 수 있다.

 

 

 

2014-07-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