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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원점에 있는 서 있는 것처럼

담마다사 이병욱 2014. 6. 12. 10:48

 

 

항상 원점에 있는 서 있는 것처럼

 

 

 

 

관심있게 보는 프로가 있다. 산에서 혼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연인등의 프로명으로 종편채널에서 경쟁적으로 방송하고 있다. 사업을 하다 부도가 나서 산에 살게 되었다는 등의 갖가지 사연을 가지고 살아 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연인에 대한 프로를 보면 대부분 혼자 살아 가는 사람들이다. 갖가지 사연으로 혼자 살다 보니 거처가 대부분 누추하다. 산에서 약초나 나물 등 산야초를 채취하여 살아 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번에 본 프로는 좀 달랐다. 부부가 사는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 부부가 아닌 것 같다. 두 부부가 모두 삭발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 하여 외딴집 평강공주와 바보온달(TV조선, 2014-06-12)’이라는 프로이다.

 

 

 

외딴집 평강공주와 바보온달(TV조선, 2014-06-12)

 

 

 

부부는 왜 삭발을 하고 있을까? 그것도 승복을 입고 있다. 고무신도 신고 있어서 두 부부를 보면 스님들 같다. 마치 비구와 비구니가 함께 살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프로에서는 부부가 스님이라는 그 어떤 증거도 보여 주지 않고 있다. 산속에서 자연을 벗 삼아 알콩달콩 살아 가는 보통 부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럼에도 삭발하고 승복을 입고 살아 가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프로에 따르면 남자는 60세라 한다. 여자는 이보다 약간 많은 것으로 나온다. 서로 의지 하며 함께 지낸지 몇 년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일체 알려 주지 않는다. 다만 온달과 평강이라 부르며 보통 부부처럼 살아 가는 모습만 보여준다. 그럼에도 삭발하고 승복입은 부부의 모습을 보면 마치 스님들이 함께 사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TV를 시청한 국민들이 볼 때

  

왜 종편채널에서는 마치 비구와 비구니처럼 보이는 부부를 출연시켰을까? 삭발하고 승복을 입고 법명까지 가지고 있는 부부를 출연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비록 부부가 머리를 깍고 산중에서 온달과 평강으로 서로 부르며 알콩달콩 산다고 할지라도 누구 보아도 비구와 비구로 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한국불교로서는 매우 타격이 클 것이다.

 

만일 신부복을 입은 남자와 수녀복을 입은 여자가 그것도 천주교식 이름으로 부르고 부부로 산다면 세상사람들은 어떻게 볼까? 한마디로 천주교망신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종편에서는 머리를 깍고 사는 부부가 마치 비구와 비구니가 함께 사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TV를 시청한 국민들은 이제 스님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될 지 모른다.

 

스님에게도 정년이 있을까?

 

스님에게도 정년이 있을까? 어떤 이는 평생 수행만 하며 살아 가는 스님들에게도 정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스님생활에서 은퇴하여 편하고 안락하게 지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종종 스님생활을 하다 속퇴하는 경우가 있다.

 

EBS에서 용서라는 프로를 보면 70이 넘은 남자가 이제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걱정하는 것을 보았다. 아내는 50대이다. 그런데 프로에 따르면 이 남자는 50줄에 스님생활을 그만 두고 30대의 여자와 결혼 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고등학생으로서 청소년에 지나지 않는다. 보통사람들 같으면 손자 볼 나이에 아들을 둔 것이다. 이렇게 늘그막에 아들을 둔 70대는 걱정이 많다. 실명위기에 처해 있어서 젊은 아내와 어린 자식 걱정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세상 것들에 대한 호기심

 

종종 스님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세속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특히 어린 나이나 젊었을 때 출가한 스님들이 그런 것 같다. 산전수전 다 겪고 세상물정을 안 다음에 출가한 사람들과 달리 젊은 나이에 출가한 스님들 중에는 결혼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스님은 다음 생에 태어나면 단물을 쪽쪽 빨아 먹겠다라는 등의 표현을 하고 있다. 또 어떤 스님은 다음 생에 태어나면 꼭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하였다. 이렇게 스님들이 세상 것들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애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은 갈애로 인하여 발생된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도 갈애에 따른 것이라 보면 틀림 없다. 이렇게 본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갈애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마셔도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인 갈애와 그에 따른 결과는 어떤 것일까?

 

갈애(tahā), 늙음(jarā), 죽음(Maccu), 괴로움(dukkha)

 

상윳따니까야에 갈애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먼저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무엇으로 세상이 걸려들고 무엇 때문에 포위되고 무엇에 의해서 세상이 갇히며 무엇 위에 세상이 서 있는가?(S1.57)”라며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한다.

 

 

tahāya uḍḍito loko

jarāya parivārito,
Maccun
ā pihito loko

dukkhe loko patiṭṭhitoti.

 

(Uḍḍitasutta, S1.67)

 

 

[세존]

갈애로 세상이 걸려들고

늙음 때문에 포위되며

죽음에 의해서 세상이 갇히고

괴로움에 의해 세상이 서 있네.”

 

(걸려듦의 경, 상윳따니까야 S1.67, 전재성님역)

 

 

[세존]

갈애에 의해서 세상은 올가미에 걸려 있고

늙음에 의해 에워싸여 있느니라.

죽음에 의해 세상은 닫혀 있으며

괴로움 속에 세상은 확립되어 있느니라.”

 

(올가미에 걸림 경, 상윳따니까야 S1.67, 각묵스님역)

 

 

“The world is ensnared by craving;

It is enveloped by old age;

The world is shut in by death;

The world is established on suffering.”

 

(Ensnared, CDB S.167, 빅쿠보디역)

 

 

네 구절로 된 사구게에서 키워드는 갈애(tahā), 늙음(jarā), 죽음(Maccu), 괴로움(dukkha)이다. 이와 같은 네 개의 키워드는 초기경전에서 항상 볼 수 있다. 이네 개의 키워드는 우리 생활과 관련이 밀접한 관련이 있고 또한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걸려 들었다는데

 

첫번째 구절에서 “tahāya uḍḍito loko”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갈애로 세상이 걸려들고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갈애에 의해서 세상은 올가미에 걸려 있고라 번역하였다. ‘걸려들다올가미에 걸려 있다의 차이이다. 그렇다면 걸려들다의 의미인 uḍḍito는 구체적으로 어떤 뜻일까? 빠알리사전 PCED194를 찾아 보았다.

 

uḍḍitauḍḍeti의 과거분사형으로서 ‘ensnared (…을 덫으로 잡힌), bound(묶인), tied up(묶인)’의 뜻이다. 제일의 뜻이 덫으로 잡는다뜻의 ‘ensnare’임을 알 수 있다. 빅쿠보디는 이 단어를 이용하여 The world is ensnared by craving(세상은 욕망에 의해서 덫으로 잡혀 있다)”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덫이라는 말은 짐승을 꾀어 잡는 도구의 일종이다. 이를 올가미(trap)라고도 한다. 그래서일까 각묵스님은 세상은 올가미에 걸려 있고라 하여 올가미를 강조 하였다. 그러나 uḍḍit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이어지다 또는 묶이다의 뜻 보다는 걸려들다가 의미상 맞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세상이 걸려들고라고 번역하였다.

 

갈애의 밧줄에 묶이어

 

첫 번째 게송은 세상이 걸려 들었다(uḍḍito loko)”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란 무엇일까?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세상은 산천초목산하대지의 세상이 아니다. 또 이미 형성되어 있는 기세간이 아니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다. 나의 몸과 마음에서 인식가능한 세상을 말한다. 그런 세상이 걸려 들었다고 하였다. 무엇에 의해? 갈애 때문이다. 그래서 첫번째 게송에서는 갈애로 세상이 걸려들고(tahāya uḍḍito loko, S1.57)”라 한 것이다.

 

갈애로 세상이 걸려 들었다면, 갈애로 인하여 세상이 생겨 났다는 말과 같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tahāya uḍḍito loko : Srp.I.96에 따르면, 시각은 갈애의 밧줄에 묶이어 형상의 쐐기에 걸려들고, 청각은 갈애의 밧줄에 묶이어 소리의 쐐기에 걸려들고, 후각은 갈애의 밧줄에 묶이어 냄새의 쐐기에 걸려들고, 미각은 갈애의 밧줄에 묶이어 맛의 쐐기에 걸려들고, 촉각은 갈애의 밧줄에 묶이어 감촉의 쐐기에 걸려든다.

 

(성전협 496번 각주, 전재성님)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은 갈애에 걸려든 세상이라 하였다. 구체적으로 오욕락에 묶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것은 시각 등 다섯 가지 감각능력에 대한 것이다. 이처럼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 갈애에 묶이고 걸려 들게 되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될까?

 

늙음이라는 덫에 걸려

 

모든 존재는 갈애의 산물이다. 갈애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갈애는 태어남을 유발한다. 태어나면 어떻게 될까? 선정수행을 하여 천상에 태어나 천년 만년 살지라도 언젠가 죽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구절을 보면 “jarāya parivārito”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늙음 때문에 포위되며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It is enveloped by old age”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늙음에 의해 에워싸여 있느니라라 하였다. 마셔도 마셔도 채워 지지 않는 근원적인 욕망인 갈애라는 덫에 걸려 태어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늙음이라는 덫에 걸린 것이다.

 

이 젊음, 이 청춘이 천년 만년 갈 것처럼 자신만만 하였건만 세월은 인정사정 없이 흘러가 늙고 병든 몸이 되었다. 그래서 생각지도 않게 늙음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되었음을 말한다.

 

 

늙고 병들게 되면 어떻게 될까?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신호일 것이다. 누구나 바라지 않는 것이지만 결국 찾아 오고야 마는 것이 죽음이다. 그런 죽음 앞에 초연할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죽는 순간의 강력한 고통 때문에

 

세 번째 구절은 죽음에 대한 것이다. 죽음에 대하여 “Maccunā pihito loko”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죽음에 의해서 세상이 갇히고라 하였고, 빅쿠보디는 The world is shut in by death”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죽음에 의해 세상은 닫혀 있으며라고 번역하였다. 공통적으로 갇혀 있다라고 번역 하였다. 갇혀 있다라고 번역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세 번역자의 각주를 보고 표를 만들었다.

 

 

  

       

 

성전협

497번각주

Srp.I.96에 의하면, 전생의 업이 마음의 한 순간 지속되더라도 죽는 순간의 강력한 고통 때문에, 산들에 갇히면 아무 전망도 볼 수 없듯이, 중생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뜻이다.(전재성님)

죽는 순간의 강력한 고통

CDB

125번 각주

The world is shut in by death (maccunā pihito): Even though the kamma done in the last life is only one mind-moment away, beings do not know it because they are shut off from it, as if by a mountain, by the strong pains occurring at the time of death.(빅쿠보디)

strong pains

초불연

248번 각주

죽음에 의해 세상은 닫혀 있다(maccunā pihito).’고 했다. 바로 앞의 전생(anantara)에서 자신이 지은 업은 하나의 마음[순간](eka-cittantara)보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죽음의 고통스런 느낌이 강해서 마치 산에 가려진 것처럼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죽음에 의해 세상은 닫혀 있다고 하신 것이다.(SA.i.96) (각묵스님)

죽음의 고통

 

 

 

죽음에 의해서 세상이 갇혔다라는 구절에 대한 주석이다.   주석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러 번 읽어 보아도 알 듯 말 듯 하다. 그러나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해 할 수 있다.

 

조건에 따른 마음이 윤회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일생윤회순간윤회로 나눌 수 있다. 일생윤회는 죽음과 탄생으로서 한 존재가 몸과 성향이 일생동안 유지되는 것을 말한다. 순간윤회는 매 순간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죽음 이후는 왜 무간(無間)인가?

 

그런데 초기불교에 따르면 일생윤회 역시 순간윤회의 연장선상으로 본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하지 못하고,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임종순간에 이르러 마지막 죽음의식(cuticitta)’이 일어나 일생동안 지은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났다면 마음이 순간적으로 바뀐 것으로 본다. 그래서 일생윤회 역시 순간윤회의 연장선상으로 본다. 이렇게 이해 하면 삶과 죽음은 마음이 한번 일어났다고 바뀌듯이 자연스런 것이다.

 

이렇게 죽음의 마음에서 재생연결식으로 바뀌는 순간에는 틈이 없기 때문에 티벳불교의 사자의 서에 나오는 이야기나 우리나라 ‘49와 같은 것은 설자리를 잃는다. 벽에 문이 하나 있어서 벽안쪽에서 바라 보았을 때 열고 나가면 죽음이고, 벽 바깥쪽에서 바라 보았을 때는 탄생이기 때문에 무간(無間)’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에 중음신개념의 사십구재천도재가 있을 수 없다.

 

죽음에 의해서 세상이 갇힌 것처럼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죽는 순간의 강력한 고통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삼켜 버리고 잊어 버린다. 오로지 죽을 것 같은 고통 때문에 이어지는 재생연결의 마음이나 벽의 문을 열고 다른 방에 들어 가는 것 같은 죽음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오로지 지금 죽음에 이를 정도로 괴롭기 때문에 죽음에 의해서 세상이 갇혔다. (Maccunā pihito loko, S1.57)”라 한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의해 세상이 갇힌 것은 아니다. 다만 갇힌 것처럼 보여 지는 것일  뿐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산들에 갇히면 아무 전망도 볼 수 없듯이라 하여 산의 비유를 들고 있다. 사방이 산으로 꽉 막혀 있으면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없듯이 죽음이라는 두려움에 덜미가 잡혀 있다면 마치 어두운 방에 갇혀 있는 것처럼 진리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에게 있어서 죽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고, 하나의 벽에 문이 있어서 나가고 동시에 들어 오는 것과도 같다.

 

왜 나는 항상 괴로움에 서 있을까?

 

갈애, 늙음, 죽음은 어떤 것일까? 한마디로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네 번째 구절에서는 “dukkhe loko patiṭṭhitoti”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괴로움에 의해 세상이 서 있네라 하였고, 빅쿠보디는 “The world is established on suffering”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괴로움 속에 세상은 확립되어 있느니라라고 번역하였다. 이 말 역시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한 말이다. 그렇다면 왜 괴로움에 대하여 세상이 서 있다고 하였을까?

 

참으로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6월도 중순에 이르렀으니 올해 절반이 다 간 셈이다. 이때 세상이 변한 것일까? 세월이 흐른 것일까?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은 산천초목산하대지의 기세간이 아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인식할 수 있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세상이다. 따라서 세상이 변한다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의 인식작용에 따른다.

 

눈과 귀 등 여섯가지 감각능력에 따른 접촉에 따라 이 세상을 인지 할 수 있어서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인정사정 없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세월속에서 어느 순간 멈추어 섰을 때 항상 더울 때 와 추울 때 있음을 알게 된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과 가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 더워서 괴롭고 또 너무 추워서 고통스러운 겨울에 자신이 서 있음을 알게 된다.

 

도돌이표 인생

 

즐겁고 행복한 일생을 산 사람이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십년이 하루 같다라는 말이다. 십년이 하루같다면 80을 살았을 때 8일 산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괴롭고 불행하다면 일각이 여삼추(一刻如三秋)’이다. 여기서 일각이라는 말은 백분의 일초도 되지 않는 매우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 삼추는 가을이 세 번이므로 삼년에 해당된다. 이처럼 일각이 여삼추 같다면 역으로 매우 오래 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십년이 하루 같다면 84천겁을 사는 비상비비상처정의 존재가 체감하는 수명은 얼마나될까?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우주가 84천 번이나 성주괴공할 정도로 오래 산다고 할지라도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덧 임종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천상에서 오래 산다고 하여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결국 남는 것은 어디에 태어날 것인지 걱정해야 할 임종순간만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건강할 때는 건강의 고마움을 모른다. 그러나 병에 걸려 몸져 누워 있을 때 비로소 괴로움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것이라면 결국 이 자리에 있기 위하여 이제까지 몯든 과정이 있었던 것처럼 여겨 지게 된다. 이처럼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 서 있는 곳은 항상 참을 수 없는 무더위와 살을 애는 듯한 추위, 잠시도 쉴 틈을 두지 않고 밀어 닥치는 고통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무언가 궁리하고 도모 하지만 결국 제자리로 복귀하고 마는 것처럼 도돌이표인생이다바로 이런 상태를 노래한 것이 괴로움에 의해 세상이 서 있네라는 구절일 것이다.

 

항상 원점에 있는 서 있는 것처럼

 

부처님은 세상에 대하여 괴로움으로 보았다. 그래서 세상은 괴로움을 바탕을 한 것이라 하였다. 이는 갈애에 따른 탄생과 늙음, 죽음 등이 결국 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하여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갈애에 따라 탄생, 늙음, 병듦,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괴로움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고득락식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고작 즐거운시간과 즐거운 순간을 추구하는 것으로 오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이고득락에서 이고(離苦)’ 까지만 해도 큰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고득락이라 하였을 때 마치 즐거움 또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인 것처럼 착각하게 할 때가 있다. 그래서일까 TV프로에서 비구와 비구니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보 당신 하며 살아 가는 것 같다. 또 스님들이 종종 세상 것들에 대하여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면서 심지어는 다음 생에 태어나면 단물을 쪽쪽 빨아 먹겠다든가, “다음생에는 꼭 한번 결혼을 하고 싶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라 본다.

 

그래 보아야 결국 괴로움만 남는다. 게송에서 네 번째 구절 “dukkhe loko patiṭṭhitoti”처럼 우리가 서 있는 곳은 항상 괴로움이다. 너무 더워서 괴롭고, 너무 추워서 괴롭고, 너무 아파서 괴로워서 마치 괴로움만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결국 항상 원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도돌이표 세상이다. 또 박수갈채로 요란 하지만 항상 텅빈 객석에 혼자 남아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 세상이다. 그래서 괴로움에 의해 세상이 서 있네라 하였을 것이다.

 

초기경전을 접하면서 종종 깜짝 놀랄 때가

 

초기경전을 접하면서 종종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그것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초기경전에 고스란히 표현 되어 있을 때이다. 언젠가 글을 올린 것 중에 항상 더울 때와 추울 때, 그리고 몸이 아파 누워 있을 때 원점에 회귀 하는 듯한 느낌에 대한 것이 있다. 이런 느낌은 초기경전에 그대로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숫따니빠따에 있는 “내세에 자신 안에서 그 괴로움을 발견한다. (Attani passati kibbisakāri,stn655)”라는 문구이다. 두 번째로 발견한 문구가 바로 괴로움에 의해 세상이 서 있네(dukkhe loko patiṭṭhitoti, S1.67)”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괴로워 하는 것에 대한 해법, 삶의 지혜는 초기경전 속에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갈애로 세상이 걸려들고

늙음 때문에 포위되며

죽음에 의해서 세상이 갇히고

괴로움에 의해 세상이 서 있네. (S1.67)

 

 

 

2014-06-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