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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눈과 돼지의 눈, 세상은 인식하는 자의 것이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4. 5. 26. 09:57

 

부처의 눈과 돼지의 눈, 세상은 인식하는 자의 것이다

 

 

부처의 눈과 돼지의 눈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것은 세상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라는 말이다. 왜 부처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일까?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보는 세상도 다름을 말한다.

 

사람과 개는 한공간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사람의 마음과 개의 마음이 같은 것이라 볼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과 개의 마음은 다르다. 달라도 보통 다른 것이 아니다. 한지붕아래 살고 있는 사람과 개가 다른 것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고 세상을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같은 세상일지라도 사람이 인식하는 세상이 다르고 개가 인식하는 세상이 다르다. 비록 같은 공간에 사람과 개과 함께 살고 있지만 사람과 개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인식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래서 세상은 인식하는 자의 것이라 한다.

 

유식론의 오리지널 버전인가?

 

불교인식론에 대한 게송이 있다. 마치 대승불교에서 유식론의 오리지널 버전을 보는 듯한 게송이다.

 

 

cittena nīyati loko

cittena parikassati,
Cittassa ekadhammassa

sabbeva vasamanvagūti.

 

 

[세존]

세상은 마음이 이끌고

마음에 의해서 끌려 다니며,

마음이라는 하나의 원리가

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네.”

 

(Cittasutta -마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62, 전재성님역)

 

 

[세존]

마음에 의해 세상은 인도되고

마음에 의해서 끌려다니노라.

마음이라는 하나의 법에 의해

모든 것은 지배되노라.”

 

(Cittasutta -마음 경, 상윳따니까야 S1.62, 각묵스님역)

 

 

“The world is led around by mind;

By mind it's dragged here and there.

Mind is the one thing that has

All under its control.”l22

 

(Mind, CDB S1.62, 빅쿠보디역)

 

 

이 게송은 에까담마(ekadhamma)’에 대한 것이다. ‘하나의 원리또는 하나의 법이라고 번역되는 에까담마에 의하여 세상이 지배된다는 것이다. 에카담마로서 마음(citta)’을 들고 있다. 이는 첫번째 에카담인 명칭(nama)’에 이어 두번째이다. 이전 게송에서는 명칭이란 하나의 원리가 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네.(S1.61)”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번 게송에서 에까담마는 마음에 대한 것이다.

 

마음이 이 세상을 만들고 마음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세상은 마음이 이끌고 마음에 의해서 끌려 다니며, 마음이라는 하나의 원리가  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네.(S1.62)”라 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대승불교의 유식론의 오리지널이 이 게송에서도 근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법구경 1번 게송에서

 

에카담마 두 번째 게송에서 마음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마음이 이끌고

마음에 의해서 끌려 다닌다(cittena nīyati loko cittena parikassati)”라 하였다. 이 구절만 본다면 법구경 1번 게송이 연상된다. 법구경 1번 게송에서 정신이 사실들의 선구이고 정신이 그것들의 최상이고 그것들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니(Manopubbagamā dhammā manoseṭṭhā manomayā, Dhp1)”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법구경 1번 게송에서 마음이 모든 법들을 이끈다고 하였다. 여기서 마음이라 말한 것은 마노를 말한다. 그리고 법들이라 한 것은 담마를 말한다. 그런데 찟따경(S1.62)에서는 마음이 찟따이고, 세상은 로까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마노와 찟따가 대비 되고, 또 담마와 로까가 대비 된다. 그러나 마노와 찟따는  마음이로서 같은 말이라 볼 수 있고, 또한 담마와 로까 역시 같은 말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법구경 1번 게송(Dhp1)과 찟따경(S1.62)는 사실상 같은 내용이라 볼 수 있다.

 

존재론인가? 인식론인가?

 

게송에 따르면 마음이 이 세상을 이끈다고 하였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엄연하게 이 세상이 존재하고 있고, 이 세상에서 태어나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마음이 이 세상을 이끌고 지배한다고 하였다. 이는 세상을 인식론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이미 있어서 그 속에서 태어나고 죽는 것으로 보는 것이 존재론적 세계관이다. 대표적으로 유일신교를 들 수 있다. 유일신교에서는 창조주가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세상을 떠나도 세상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이렇게 부모로부터 태어나 이 세상을 살다가 떠나는 것이 존재론적 세계관이다.

 

그런데 존재론적 세계관의 특징은 부모로부터 내가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다. 그 부모는 또 부모로부터 태어나고, 이런 식으로 한없이 무한소급하다 보면 결국 창조주에 이를 것이다. 그래서 존재론적 세계관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원인이 되는 존재의 근원내지 궁국적 실재또는 창조주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나타난 모든 종교가 바로 이 존재론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다원주의자들이 한결 같이 주장하는 것은 모든 종교는 다 똑같다라는 말이다. 산에 올라 갈 때 길은 여럿 있지만 결국 정상에서 만나듯, 그리스도, 브라흐마, 참나, 불성 등 은 모두 같은 것이라 한다. 같은 것을 두고 종교와 문화와 역사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을 뿐이라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존재론적 세계관을 연기법으로 부수었다. 그리고 연기적으로 이 세상을 바라 보았을 때 세상은 인식하는 자의 것이라 하였다.

 

불교인식론은 무엇일까? 그것은 감각능력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인식함에 따라 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식론적 세계관을 말한다. 이런 인식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이 세상은 인식하는 자의 세상이 된다. 개에게는 개의 세상이 있듯이, 부처에게는 부처의 세상이 있는 것도 인식의 차이이다. 그래서 개와 인간이 한공간에 함께 살고 있지만 인식하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것과 다름 없다. 개에는 개의 세상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세상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식의 확장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졸지에 외도로 몰리고

 

지난 번 글에서 인식론에 대하여 글을 올렸다. 불교는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이라는 취지의 글이다. 이런 글에 대하여 반론도 만만치 않다. 어떤 이는 불교는 존재론이 아니고 인식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삿된견해에 불과하다라고 하였다. 불교는 인식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들며 초기불교의 존재론의 근거로 삼고 있다. 

 

초기경전에 근거하여 글을 쓰고 있다. 부처님의 말씀 처럼 다른 것에 의지 하지 않고 가르침에 의지하여 글을 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교인식론에 대하여 삿된견해라 한다. 더구나 외도라고 하였다. 철저하게 경전에 근거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글을쓰고 있는데 졸지에 외도로 몰린 것이다.

 

부정적 언표를 사용해야 하는 이유

 

불교에 대하여 불교는 ~(무엇)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차라리 불교는 ~(무엇)이 아니다라고 부정적 언표로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할 것이다. 긍정적 언표로 말하면 한정되어 버리지만 부정적 언표로 말하면 포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불교는 행복의 종교이다라고 긍정적 언표로 말하면 행복이라는 한 단어에 한정되고 만다. 그러나 불교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종교이다라고 부정적 언표로 말하면 특정 단어에 한정 되지 않고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된다.

 

현상을 설명 할 때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면 걸림이 없다. 그래서 초기경에서는 대부분 부정적 언표를 사용한다. 이에 대하여 열반이란 무엇인가, 버스웰교수의 강의를 듣고(2011-10-20)’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불교TV사이트에서 버스웰 교수의 강의를 듣고 이를 녹취하여 올린 글이다열반에 대하여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여 설명한 것을 정리하였다. 글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열반을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라 한다. 굳이 언어를 사용한다면 열반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열반은 ~이다”와 같은 ‘긍정적’ 표현과 그와 반대로 “열반은~가 아니다”라는 ‘부정적’ 표현이 다 쓰일 수 있지만 열반을 개념화 하여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라 한다. 열반에 대하여 부처님이 언어와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열반을 ‘부정문’으로 묘사한 예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첫째, 부처님은“지수화풍도 없고, 공간, 시간이나 개념, 비개념, 해나 달로 한정되지 않고, 이승이나 저승도 아닌 차원, 영역이 있다” 고 하셨다. 여기서“있다”고 하셨으니 이런 상태가 있기는 하나, 이는 우리의 일반적 감각적 경험이나 명상을 통한 경험을 완전히 뛰어넘는 상태라고 한다. 4선이나 4무색선으로 경험되는 것도 마찬가지라 한다.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열반은 “가는 것도, 오는 것도, 머무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없고, 발생하지도 않는다”고 말씀 하셨다고 한다. 가지도 오지도, 그렇다고 머물지도 않는 이 상태는 무엇일까. 부처님은 “고정되지도, 움직이지도, 기반을 두지도 않는다. 열반은 고의 소멸이다”라고 하셨다. 열반은 바로 고가 사라지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열반은 어디 있는가””라는 질문자체에 오류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버스웰교수는 “열반은 어디도 아닙니다. 열반은 어디도 아닌 것이 아닌 어디입니다”라고 표현하였다.

 

둘째, 부처님은 “열반은 태어나지도, 만들어지지도, 조합되지도 않은 것이다.”라 하셨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왜 부정문을 사용하였을까? “열반은 이러한 것이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안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집착할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열반은 어떤 지식이나 개념도 뛰어넘는 것, 열반이 무엇이다 생각하는 순간 이미 열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열반이 태어나지도, 만들어지지도, 조합되지도 않은 것이 아니라면,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조합된 이 세상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고 한다. , 열반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어떤 것이라는 의미이다.

 

(진흙속의연꽃, 열반이란 무엇인가, 버스웰교수의 강의를 듣고(2011-10-20))

 

 

버스웰 교수는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여 열반을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면 열반에 대하여 훨씬 더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열반에 대하여 말이나 문자로서 설명하는데 있어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열반에 대하여 설명하기 힘든 것이라면 “열반은~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차라리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는 것이 긍정적 언표를 사용하는 것 보다 휠씬 더 낫다는 것이다.

 

또 버스웰교수에 따르면 체험하지 못한 열반에 대하여 긍정문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만일 열반에 대하여 긍정문으로 하여 한 단어로 한정하여 버린다면 그 한단어에 집착하게 될 것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불교는 행복의 종교이다라고 하여 한단어로 한정한다면 역시 행복이라는 말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이다라고 한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열반에 대한 부정적 언표와 긍정적 언표

 

물론 부처님이 부정적 언표만 사용한 것이 아니다. 초기경에서는 긍정적 언표로 표현한 것도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열반에 대하여 부정적 언표와 긍정적 언표로 표현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부정적 언표로 묘사된 열반

No

 

         

1

무위

(無爲 asankhata)

이것은 모든 조건지워진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2

무루

(無漏 anasavam)

세가지의 번뇌 즉 감각적 쾌락의 번뇌, 존재의 번뇌, 무명의 번뇌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3

불로(不老 ajaram)

열반은 늙음의 조건이 소멸된 상태이다. 그에게는 자아에 의해 집착되지 않은 존재의 다발의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4

무견

(無見 anidassana)

‘볼 수 없는’의 뜻이 아니라 ‘지시하지 않은’의 뜻으로, 나의 소유는 조건적인 세계를 지시하므로 아라한은 그러한 세계를 지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5

무희론

(無戱論 nippapanca)

열반은 일체의 희론, 사견희론(邪見戱論)이나 정견희론(正見戱論)을 모두 떠나 있다.

6

무재난

(無災 anitika)

열반 속에는 해침을 당할만한 자아의 세계가 없다.

7

무재난의 상태

(無災法 anitikadhamma)

열반의 무위법에는 조건지어지는 재앙이 존재할 만한 유위법적인 상태가 없다.

8

무에

( avyapajjha)

열반은 분노가 소멸한 상태이다.

9

사라짐

(離貪 viraja)

열반은 탐욕이 소멸한 상태이다.

10

불사

(不死 amata)

아라한의 일상적인 죽음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는 불사이며 다만 목숨이 다할 때에는 존재의 다발의 짐을 내려놓을 뿐이다.

11

갈애의 소멸

(愛盡 tanhakkhaya)

열반에는 모든 종류의 갈애, 즉 감각적 쾌락에의 갈애, 존재, 비존재의 갈애가 소멸되어 있다.

12

무착

(無着 analayo)

갈애나 집착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를 말한다.

 

 

 

긍정적 언표로 묘사된 열반

No

 

         

1

(終極 antam)

아라한에게 해야 할 것은 모두 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의 상태가 아닌 것을 말한다.

2

진리

(眞諦 saccam)

아라한의 인격 속에 지혜에 의해서 파악되는 최상의 궁극적 진리를 의미한다.

3

피안

(彼岸 para)

피안은 윤회의 고통스런 세상을 건넜다는 의미를 지닌다.

4

극묘

(極妙 nipuna)

성취된, 세련된의 의미로, 열반은 다듬어지지 않은 개념적 사유로 파악될 수 없고 오로지 현자의 지혜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이다.

5

지극히 보기 어려운 것

(極難見 sududdasa)

조건지워진 사유의 근본구조를 초월하여 무지와 갈애가 소멸된 열반은 지혜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6

견고함

(堅固 dhuva)

열반을 체험한 아라한에게는 조건지워진 세계로의 환원은 있을 수 없다.

7

비추어봄

(照見 apalokita)

열반을 체험한 아라한에게는 자아를 위한 세계는 있을 수 없으며 세계를 떠나서 조견한다.

8

적정

(寂淨 santa)

조건지어진 것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세계를 주장하는 적정은 있을 수 없다.

9

탁월함

(勝妙 panita)

열반의 체험은 조건지워진 삶의 세계를 초월함으로써 성취되는 가장 탁월한 체험이다.

10

지복

(至福 siva)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괴로움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는 최상의 지복을 체험한다.

11

안온

(安穩 khema)

나의 세계는 언제나 불안정한 상상과 변화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가 소멸된 열반은 안온한 세계이다.

12

아주 놀라운 것

(希有 acchariya)

시작도 끝도 없는 윤회의 세계에서 열반의 체험은 윤회하는 존재들 사이에 매우 드문 일이다.

13

예전에 없던 것

(未曾有 abbhuta)

열반은 생성과 소멸이 끝없는 윤회의 과정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미증유의 체험이다.

14

청정

(淸淨 suddhi)

모든 염오의 소멸을 의미한다.

15

해탈

(解脫 mutti)

열반은 완전한 해탈을 의미한다.

16

( dipa)

윤회의 바다의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안전함을 뜻하는 열반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너 자신을 섬으로 하라’ 는 부처님의 유교는 결국 열반을 성취하라는 말로 귀결된다.

17

동굴

(洞窟 lena)

열반의 상태는 모든 유해한 숲으로부터 안전하게 피신한 상태와 같다.

18

피난처

(避難處 tana)

열반의 체험은 번뇌의 폭류나 마군으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를 발견한 것과 같다.

19

귀의처

(歸依處 sarana)

열반은 곧 윤회의 고통 속에 헤매는 모든 중생들의 귀의처가 된다.

20

구경

(究竟 parayana)

열반의 체험은 열반을 구경으로 하게끔, 아라한을 운명짓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표는 성전협 전재성님의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을 보고 작성한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제43상윳따인 무위상윳따에 열반에 대하여 부정적언표와 긍정적언표로 짤막하게 나열된 것을 정리한 것이다.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초기경전에서 열반에 대하여 무위(無爲, asankhata) 부정적언표로 표현된 것이 12개 항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열반은 ~가 아니다로 표현하면 모든 것을 포괄 할 수 있다. 이는 열반에 대한 설명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열반에 대하여 어떤 언표로 설명하였을까? 무위의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너희들을 위해 무위와 무위로 이끄는 길을 설할 것이니 잘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수행승들이여, 무위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무위라 한다.

 

(무위의 경, 상윳따니까야 S43.12, 전재성님역)

 

 

무위는 열반과 동의어이다. 그런데 무위에 대하여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라 하였다. 이처럼 “~소멸하고의 형태로 되어 있으면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된다. 그리고 비록 언어의 한계가 있지만 현상에 대하여 잘 설명할 수 있고 또한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불교가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이처럼 초기경전에서는 부정적 언표로 표현된 것이 많다. 부정적 언표로 표현되어 있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을 들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 아마 담마의 세 가지 특징에 대한 것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것은 무상(aniccā), (dukkhā), 무아(anattā) 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모든 현상에 대하여 긍정적 언표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무상(aniccā), (dukkhā), 무아(anattā)라는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Sabbe sakhārā aniccā, Dhp277)”라 하여 무상이라는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였고,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Sabbe sakhārā dukkhā, Dhp278)”라 하여 괴로움이라는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였다. 일체의 사실은 실체가 없다.(Sabbe dhammā anattā, Dhp279)”라고 하여 역시 부정적 언표인 무아로 가르침을 설하였다.

 

이렇게 부처님은 무상(aniccā), (dukkhā), 무아(anattā)라는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여 현상을 설명하였다. 그런데 만일 부처님이 모든 현상에 대하여 무상, , 무아와 반대되는 개념인 긍정적 언표로 현상을 설명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 (), ()와 같은 긍정적 언표를 말한다. 예를 들어 부처님이 일체의 형성된 것은 항상하다든가, “일체의 형성된 것은 즐겁다라든가, “일체의 사실은 실체가 있다라고 하였을 때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였다고 볼 수 있을까?

 

긍정적 언표로 현상을 설명하면 해당 단어에 집착하게 된다. 누군가 불교에 대하여 상(), (), ()로 하였다면 상(), (), ()라는 말에 걸려서 이 말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행복의 종교이다라거나 불교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이다라고 하였을 때 락(樂, sukha)이라는 말에 걸려 락이라는 말에 집착할 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즐거움 또는 행복에 대해서만 말할 것이다. 

 

부처님은 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부정적 언표를 주로 사용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면 언어에 걸리지 않고 언어에 집착하지도 않게 된다. 그래서 불교는 행복의 종교이다라고 말하는 대신에불교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종교이다라고 말함으로서 행복이라는 말에 걸리지도 않고 또한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Ya pare sukhato āhu

tadariyā āhu dukkhato

Ya pare dukkhato āhu

tadariyā sukhato vidū.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 (S35:136)

 

 

 세상은 인식하는 자의 것이다

 

불교에 대하여 존재론이 아닌 인식론이 하였을 때 어떤 이는 삿된견해라 하였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예를 들면서 존재론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고 인식론을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외도의 견해라 한다.

 

불교에 대하여 불교는 인식론이다라고 긍정적 언표로 말하는 것에 모순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정확하게 말한다면 불교는 존재론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아 불교는 인식론임에 틀림 없다. 그것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두삔디까경(M17)에서 다음과 같은 인식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해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

 

(Madhupiṇḍikasutta-꿀과자의 경, 맛지마니까야 M17, 성전협 전재성님역)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접촉에 따라 세상이 생겨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에 따라 세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법에 의해서 세상이 발생되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S35.107).”라고 세상의 발생원리를 설명하였다.

 

또 괴로움에 대해서도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해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이것이 괴로움의 생겨남이다. (S35.106)”이라 하여 괴로움의 발생원리를 연기법적으로 설명하였다세상도 접촉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고, 괴로움 역시 접촉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지각 또는 인식이다. 이렇게 본다면 세상은 인식하는 자의 것이 된다.

 

인식할 때만 실체를 드러내는 양자론

 

인식론은 이미 현대과학에서도 증명 된 바 있다. 이는 양자론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모두 전생에 지은 업보때문이라고? 느낌이 발생하는 여덟 가지 요인과 접촉(phassa)(2013-10-02)’라는 글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 내용 중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EBS에서 다큐에서 빛의 물리학을 보았다. 4부에서 ‘빛과 원자’를 보았는데 놀랍게도 불교적 사유와 유사하였다. 특히 전자에 대한 설명에서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에 대한 설명이 그렇다. 이에 대하여 대승론자들은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유사하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확률로 설명되는 양자론을 보면 부처님의 인식론과 매우 유사하였다.

 

원자 핵 주위를 돌고 있다는 전자는 관찰할 때만 보여진다. 인식할 때만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관찰하지 않으면 실재할 가능성만 있다. 그래서 관찰할 때는 실체를 드러내기 때문에 입자로 보이는 것이고, 관찰하지 않을 때는 실재할 가능성만 있기 때문에 파동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자에 대하여 때로는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런 전자에 대하여 ‘있다’거나 ‘없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관찰하면 실재하는 것을 볼 수 있고, 관찰하지 않으면 실재할 가능성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관찰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다른 말로 ‘인식한다’고 표현 할 수 있다. 관찰함으로서 실재하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관찰에 의해서만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가능성 중에 한 가지만 선택 되는 것이다. 선택되지 않은 것들은 실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인식되는 순간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꿀과자의 경(M17)’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진흙속의연꽃, 모두 전생에 지은 업보때문이라고? 느낌이 발생하는 여덟 가지 요인과 접촉(phassa)(2013-10-02))

 

 

 

 

Quantm Theory

 

 

글에서 양자론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고전물리학에서는 모든 것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하였으나 현대물리학에서는 현상에 대하여 양자론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결국 인식론에 대한 설명이 된다. 이런 양자론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딱 들어 맞기 때문에 양자론에 대하여 인식론적으로 본 것이다.

 

불교가 인식론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교는 인식론이다라고 긍정적 언표로 말하였을 때 이에 대하여 삿된견해라 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면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 마치 존재론에 기반을 둔 고전물리학만 알지 양자론으로 대표되는 현대물리학을 모르는 것과 같다.

 

오늘날 존재론에 기반을 둔 고전물리학은 더 이상 물리학의 본류가 아니다. 고전역학에서 뉴턴역학이 진리일지 모르지만, 미시적 세계에서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은 거시적세계와 미시적세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거시적 세계는 상대성이론으로 설명되고, 미시적 세계는 양자론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특히 미시적 세계의 양자론은 철저하게 인식론적이다.

 

마음이라는 하나의 원리가

 

부처님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분별하고 나누어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설명하였다. 이렇게 분별한 것은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이다. 마찬가지로  현대물리학에서도 미시적세계는 양자론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미시적 세계 역시 실체가 없다. 다만 관찰해야만 실체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 역시 나누고 또 나누어 관찰하면 실체가 없다. 오직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적 현상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실체가 없다는 것은 오로지 관찰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관찰하여 아는 것에 대하여 지각 또는 인식이라 한다. 그래서 불교에 대하여 인식론이라 하는 것이다.

 

불교의 인식론에 대한 게송이 앞서 언급되 찟따경(S1.62)라 보여 진다. 대승 유식론의 오리지널 버전이라 볼 수 있고 또한 불교인식론의 근거로 보이는 게송을 다시 한 번 써 보면 다음과 같다.

 

 

세상은 마음이 이끌고

마음에 의해서 끌려 다니며,

마음이라는 하나의 원리가

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네.”(S1.62)

 

 

 

2014-05-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