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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나도 모르게~”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의 특징 네 가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12. 12:39

 

 

내 마음 나도 모르게~”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의 특징 네 가지

 

 

 

하늘사람(devata)이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묻는다.

 

 

무엇이 사람을 태어나게 하고

무엇이 사람에게서 방황하며,

무엇이 윤회에 떨어지고

무엇이 사람의 운명인가?”(S1.57, 전재성님역)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한다.

 

 

Tahā janeti purisa

cittamassa vidhāvati,
Satto sa
sāramāpādi

kamma tassa parāyaanti.

 

[세존]

갈애가 사람을 태어나게 하고

마음이 사람에게서 방황하며

뭇삶이 윤회에 떨어지고

행위가 그의 운명이네.”

 

(Tatiyajanetisutta-태어남의 경 3, 상윳따니까야 S1.57, 전재성님역)

 

 

윤회의 직접적인 요인은?

 

첫 번째 구절에서 하늘사람의 무엇이 사람을 태어나게 하는가? (Ki su janeti purisa)라고 질문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갈애가 사람을 태어나게 한다 (Tahā janeti purisa)고 하였다.

 

왜 갈애가 태어나게 할까? 이는 십이연기 정형구를 보면 알 수 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가 하였기 때문에 바로 갈애로 인하여 태어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갈애는 접촉에서 시작 된다는 사실이다. , , 코등 감각기관의 접촉에 따라 좋고 싫음의 느낌이 일어 나는데, 이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윤회의 직접적인 요인은 다름아닌 갈애로 볼 수 있다.

 

갈애는 괴로움의 발생 원인

 

이런 갈애를 빠알리로 딴하(Tahā)’라 한다. 영어로는 문자적으로 thirst(갈증)라 하여 갈망(craving)을 뜻한다. 이런 갈망은 고통을 유발하는 뿌리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재생하게 하여 끊임 없이 윤회의 사이클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이와 같은 갈애에 대하여 마하사띠빳따나경(대념처경, D22)에 잘 설명되어 있다. 

 

 

katamañca bhikkhave dukkhasamudayo ariyasacca: yāya tahā pono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 seyyathīda: kāmatahā bhavatahā vibhavatahā.

 

Sā kho panesā bhikkhave tahā kattha uppajjamānā uppajjati: kattha nivisamānā nivisati: ya loke piyarūpa sātarūpa etthesā tahā uppajjamānā uppajjati, ettha nivisamānā nivisati kiñca loke piyarūpa sātarūpa: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향락과 탐욕을 수반하며 여기저기에서 환희 하는 갈애, 곧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갈애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세상에서 사랑스러운 것, 즐거운 것이 있다면, 갈애는 그곳에서 일어나 그곳에서 안착한다.

 

(Mahāsatipaṭṭhānasutta-새김의 토대의 큰 경, 디가니까야 S22.26, 전재성님역)

 

 

디가니까야의 마하사띠빳따나경(대념처경, D22)에서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집성제)’에 대한 설명이다. 고통의 발생원인에 대하여 갈애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갈애는 재생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존재로 하여금 세세생생 윤회하게 한다.

 

갈애의 타파에 대한 감흥어

 

부처님의 오도송에서는 이 갈애의 타파에 대한 감흥이 있다.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Gahakāraka diṭṭhosi puna geha na kāhasi, Dhp154)”라는 내용이다. ‘집짓는 자를 갈애로 본 것이다.

 

이런 집짓는 자를 알게 되었으니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꺽였다.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나,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Sabbā te phāsukā bhaggā, gahakūa visakhita, Visakhāragata citta, tahāna khayam-ajjhagā, dhp154)”라고 감흥어로 읊은 것이다.

 

Vidhāvati, ‘방황하다인가 치달린다인가?

 

두번째 구절에서 하늘사람이 무엇이 사람에게서 방황하는가? (ki su tassa vidhāvati)”라고 질문하였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무엇이 사람을 치달리게 합니까?”라고 번역하였다. ‘방황하다치달리다의 차이이다. 이는 vidhāvati에 대한 번역차이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치달린다(vidhāvati)는 것은 여러가지 형태로 달린다는 말이다. 즉 하고 싶은 대로 일어난다는 마음(citta)을 두고 한 말이다.”라고 주석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Vidhāvati에 대하여 빠알리 사전 PCED194를 찾아 보았다. Vidhāvati‘[vi + dhāv + a]’로 분해 되며 ‘runs about; roams, , 彷徨, 의 뜻이다. ‘이리저리 방황하다의 뜻이다.

 

그런데 초불연의 번역어 치달린다에 대한 국어사전의 의미는 이와 다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치달리다의 뜻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여 달리다라고 정의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아래에서 위로 치솟듯이 또는 솟구치듯이 올라가며 달리는 행위를 말한다.

 

하지만 초불연의 Vidhāvati에 대하여 치달리다라고 한 것은 정확한 번역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답송이 “cittamassa vidhāvati”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마음이 사람에게서 방황한다(전재성님역)”으로 번역된다. 각묵스님도 마음이 사람에게서 방황하며라고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무엇이 방황합니까라는 질문에 마음이 방황합니다  올바른 번역이 된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무엇이 치달립니까?” 에 대하여 마음이 방황합니다라고 하여, vidhāvati에 대하여 치딜린다방황한다로 달리 번역하였다.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치달리고?

 

치달리다방황하다는 말은 다른 말이다. 그런데 초불연에서치달리다라는 말을 사용한 예가 또 있다. 초불연의 15상윳따인 시작을 알지 못함 상윳따에 다음과 같은 번역이 있다.

 

 

Anamataggoya bhikkhave, sasāro, pubbā koi na paññāyati avijjānīvaraāna sattāna tahāsayojanāna sandhāvata sasarata

 

비구들이여,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윤회이다.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치달리고 윤회하는 중생들에게 [윤회의] 처음 시작점은 결코 드러나지 않았다. (S15.1)

 

 

이 문구는 아나마딱가상윳따(S16)’에서 볼 수 있는 정형구이다. 그런데 번역에서 각묵스님은 치달리고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여기서 치달리고에 해당되는 말이 sandhāvata이다.

 

Sandhāvati‘runs through; transmigrates. , , 輪廻의 뜻이다. 앞서 게송에서 언급된 Vidhāvati와 비슷한 말이다. 그래서 Sandhāvati는 마치 바퀴가 앞으로 굴로 가듯이 나아가는 것을 말하고 또 배회하듯이 도는 행위를 말한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아래에서 위로 치고 올라가는 행위인 치달리다라 번역하였다. 이 구문에 대하여 성전협에서는 유전하고 윤회하므로라 하여, Sandhāvati 에 대하여 유전(流轉)하다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빅쿠 보디는 vidhāvati에 대하여 runs around’로 번역하여 이리저리 돌아 다니다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마음이 왜 방황하는 것일까?

 

종잡을 수 없는 마음

 

마음은 좀처럼 가만 있지 않는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것(dhp33)”이 마음이라 하였다. 또 마음이라는 것이 마치 물고기가 물에서 잡혀 나와 땅바닥에 던져진 것과 같다(dhp34)”고 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마음에 대한 법구경 게송을 보면 dhp33에서 부터 dhp37까지 5개의 게송으로 설명되어 있다. 한마디로 마음은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종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제멋대로의 마음에 대하여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한 것이 원숭이 비유이다.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Seyyathāpi bhikkhave, makkao araññe pavane caramāno sākha gahāti. Ta muñcitvā añña gahāti: ta muñcitvā añña gahāti: evameva kho bhikkhave yadida vuccati citta itipi mano itipi viññāa itipi. Ta rattiyā ca divasassa ca aññadeva uppajjati, añña nirujjha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원숭이가 삼림의 숲속으로 다니면서 한 가지를 붙잡았다가 그것을 놓아버리고 다른 가지를 붙잡는 것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마음이나 정신 내지 의식이라고 불리는 것은 밤낮으로 바뀌면서 다른 것이 생겨나고 다른 것은 소멸한다.

 

(Pathamaassutavantusutta-배움이 없는 자의 경 1, 상윳따니까야 S12:61, 전재성님역)

 

 

원숭이는 잠시도 가만 있지 않다. 눈을 두리번 거리며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수시로 옮겨 다닌다. 마음도 원숭이와 같아서 도무지 종잡을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이 마음이나 정신 내지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으로 바뀌면서 다른 것이 생겨나고 다른 것이 다른 것은 소멸한다.( vuccati citta itipi mano itipi viññāa itipi. Ta rattiyā ca divasassa ca aññadeva uppajjati añña nirujjhati. S12.67)”라 하신 것이다. 여기서 citta(마음)mano(정신)viññāa(의식)에 대하여 모두 마음으로 취급하여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게~”

 

마음이 제멋대로라는 것은 좌선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앉아서 눈을 감고 호흡 등 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다 보면 온갖 잡생각이 일어난다. 몸은 서울에 있지만 마음은 부산에 가 있기도 하고 어느새 다른 나라에 가 있기도 하다. 또 경전외우기를 하다 보면 마음이 역시 제멋대로 임을 알 수 있다. 게송을 외우다 보면 마음이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이 있듯이 엉뚱한 곳에 가 있다.

 

이렇게 나도 모르는 것이 마음이다. 그래서일까 내마음 나도 몰라라는 말이 있고, “내 마음 나도 모르게 꿈 같은 구름 타고 천사가 미소를 짓는 수평선을 날으네~”라는 노래 가사가 있을 정도이다.

 

제멋대로인 마음의 특징 네 가지

 

이처럼 제멋대로이고 통제가 되지 않는 마음에 대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마음은 길들이기 어렵다.

 

마음을 길들이고 다스리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마음은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여서 원하는 곳은 어디라도 가며, 자유롭게 떠돌아 다닌다. 마음으로 갈 수 없는 나라가 있는가? 상상만으로도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막을 수 있는가? 아무도 자신의 나라로 들어 오는 마음을 막을 수 없다. 마음에는 장벽이 없다.

 

2. 마음은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진다.

 

마음은 빠르게 일어났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 한 순간 행복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슬퍼진다.  이 순간에 행복 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화를 낸다.  이순간에는 공손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그렇지 않다.

 

3. 마음은 제멋대로이다.

 

마음은 자기가 선택한 마음의 대상에 스스로의 의지로 다가간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불 법 승 삼보와 정신, 물질이라는 특정한 마음의 대상에 마음을 두는 것은 쉽지 않다.  위빠사나를 처음 시작한 수행자는 정신적대상과 물질적 대상에 집중을 하려고해도 마음이 여기 저기로 돌아 다닌다. 그 마음은 시장으로, 사무실로, 학교로 어디든 돌아다닌다.

 

4. 마음은 원래 선하지 않은 것을 좋아한다.

 

마음은 여간해서는 선한 생각에 머물지 않는다. 마음은 선하지 않은 생각과 선하지 않은 대상에 빠져 드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수행자 개인의 성품이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다. 원래 마음의 성품이 선하지 않은 행위를 좋아 한다.  마음은 좋지 않은 것을 즐긴다. 마음을 내버려 두면, 마음은 대부분 선하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하고 있다.

 

(우 쿤달라 비왐사,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행복한 숲)

 

 

 

 

mind

 

 

위 네 가지 마음의 속성에서 세 번째인 ‘마음은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진다’가 생멸에 대한 것이다. 책에 따르면 “부처님의 지혜에 의하면, 번개가 번쩍 하는 동안, 또는 눈이 한 번 깜박거리는 동안에 몇 조에 달하는 의식이 일어나서 변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고 사라지는 것이 마음이다. 그래서 이 마음이나 정신 내지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으로 바뀌면서 다른 것이 생겨나고 다른 것이 다른 것은 소멸한다.(S12.61)”라고 하였을 것이다. 마음이 사람에게서 방황하며(cittamassa vidhāvati, S1.57)”라 한 것이다.

 

어머니의 모태에 탁태하는 존재

 

세 번째 구문에서 하늘사람의 세 번째 질문은 무엇이 윤회에 떨어지는가?( Ki su sasāramāpādi)”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뭇삶이 윤회에 떨어진다(Satto sasāramāpādi)”라 하였다. 초불연에서는 중생이 윤회에 들어간다라고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A being enters upon samsara”라 하여 존재가 윤회에 들어 간다라고 하였다.

 

빠알리어 삿따(Satta)’에 대하여 뭇삶, 중생, A being’으로 각각 번역하였다. 이런 삿따에 대하여 성전협 각주에 따르면 존재를 뜻하지만 어머니의 모태에 탁태하는 존재를 의미한다.”라 하였다. Satta에 대한 초불연과 CDB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모태에 탁태한다는 것은 화생을 제외하고 인간축생을 의미한다고 보여진다. 태생을 말한다. 이런 태생이 윤회에 떨어지는 것또는 들어 가는 것이라 하였다. 왜 이런 표현을 사용하였을까? 이는 sasāramāpādi에 있다.

 

sasāramāpādisasara+ āpādi이다. sasarasasarati ppr. sg. Nom’이다. sasarati‘moves about continuously; transmigrates.輪廻, 의 뜻으로 윤회하다로 번역된다. 어떻게 윤회하는가? 뒤이어 붙는 말이 āpādi인데, 이는 ‘got into; underwent; met with.’의 뜻이다. 따라서 sasāramāpādi윤회로 들어간다, 윤회에 떨어진다로 번역된다. 어디로 떨어지고 어디로 들어가는가? 각주에서와 같이 모태에 탁태되는 것을 말한다.

 

게송에서 윤회에 떨어지는 존재에 대하여 탁태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사람이나 축생을 뜻한다. 왜 그럴까? 이는 앞 게송을 보면 알 수 있다. “무엇이 사람을 태어나게 하였는가? (Ki su janeti purisa)라고 물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을 뜻하는 말이 purisa이다.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purisa‘a male; a man, , , 男子의 뜻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갈애가 사람을 태어나게 하고(Tahā janeti purisa)”라 하여 사람이 태어남을 분명하게 말씀 하셨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이 게송에서 윤회하는 존재는 사람과 같은 태생임을 알 수 있다.

 

parāyaanti, 운명인가 귀결점인가?

 

네 번째 구절에서 하늘사람이 무엇이 사람의 운명인가? (ki su tassa parāyaanti)”라고 묻든다. 이에 부처님은 행위가 그의 운명이네.(kamma tassa parāyaanti)”라고 답하였다. 이 구절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업이 그 귀결점이니라라 하여, 초불연에서는 깜마(kamma)에 대하여 ()’으로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Kamma determines his destiny.”라 하여 깜마가 그의 운명을 결정한다의 뜻으로 영역하였다. 이렇게 깜마에 대하여 행위, , 그리고 원어 그대로 각각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전협과 CDB에서 운명이라고 번역한 parāyaanti가 있다. 이 말은 parāyaa + anti로서, parāyaa‘support; rest; relief; the final end (in cpds.) aiming at; ending in; destined to; finding one's support in.’로 여러 뜻이 있다. ‘최종목적 (the final end)’ 또는 운명(destined to)’이라는 뜻이 보인다.

 

하지만 초불연의 번역에서 parāyaanti에 대하여 귀결점으로 번역한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단지 빠알리사전만 보고 번역한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운명이라고 번역한 예 하나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parāyaa가 들어간 경을 다음과 같이 소개 하고 있다. Sn.1114S.iv.373이다. Sn.1114는 숫따니빠따 학인 뽀살라의 질문에 대한 경(Sn5.15)’에 있다. 이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Viññāaṭṭhitiyo sabbā, (posālāti bhagavā)

abhijāna tathāgato;

Tiṭṭhantamena jānāti,

vimutta tapparāyaa.

 

[세존]

뽀살라여,모든 의식이 머무는 곳을

잘 아시는 이렇게 오신 님은,

그러한 님이 존재하는 것도 잘 알고,

해탈 된 것도, 그렇게 정해진 것도 잘 압니다. (stn1114, 전재성님역)”

 

 

정해진 것이라고 번역된 말이 ‘tapparāyaa이다. 주석에 따르면 그것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parāya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정해진 것이라 하여 운명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 길로 갈 수밖에 없을 때

 

parāyaa가 들어간 경이 있다. 상윳따니까 Parāyaasuttā(S43.44)가 그것이다. 내용을보면다음과 같다.

 

 

parāyaañca vo bhikkhave desissāmi parāyaagāmiñca magga, ta suātha.

 

수행승들이여, 나는 너희들을 위해 구경과 구경으로 이끄는 길을 설할 것이니 잘 새기도록 해라.

 

(Parāyaasuttā-구경의 경, 상윳따니까야 S43.44, 전재성님역)

 

 

구경이라 번역한 빠알리어가 Parāyaa 이다. 이 단어가 운명또는 귀결점으로 번역된바 있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구경이라 번역된 Parāyaa피안의 행로로 운명이 확립된의 뜻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수행을 하여 가르침을 실천하면 그 길로 갈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이를 운명으로 본 것이다. 마치 인간이 태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하여 운명이라 하듯이 도와 과를 이룬 성자들이 가는 곳은 피안이 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인간의 행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행위가 그의 운명이네(kamma tassa parāyaanti)”라 하였을 때, 이는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kamma)는 결국 모태에 탁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parāyaanti에 대하여 운명(destiny)’으로 번역하였을 것이다.

 

깜마(kamma)의 의미는?

 

불교에서는 숙명론을 배제한다. 그래서 인간의 운명은 자유의지에 의하여 얼마든지 바꿀 수 있음을 말한다. 이 자유의지는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를 뜻한다. 이 행위에 대하여 깜마(kamma)라 한다. Kamma‘action, , 이라 번역 된다. 그러나 깜마에 대한 빠알리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kamma

: (Sanskrit: karma): 'action', correctly speaking denotes the wholesome and unwholesome volitions (kusala- and akusala-cetanā) and their concomitant mental factors, causing rebirth and shaping the destiny of beings.

 

 

깜마는 행위를 뜻한다. 좀 더 외연을 넓혀 말하면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 (kusala)’ 악하고 불건전(akusala)’한 행위 전부를 뜻한다. 그리고 이는 정신적 요소로서 재생을 유발하고 존재의 운명을 결정 짓는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빠알리 사전에서도 운명(destiny)’ 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경직된 번역

 

이런 운명은 자신의 의지로 얼마든지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철저하게 자신의 행위에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전사가 되며…(stn652)”라 하였다. 여기서 행위라 번역한 것이 kamma를 말한다.

 

그런데 깜마에 대하여 으로 번역하면 번역이 경직되기 쉽다는 것이다. 마치 담마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이라고 적용하였을 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다. 이런 딱딱함은 초불연 번역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깜마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으로 적용하였을 때 업이 그의 귀결점이니라(S1.57)”가 되어 경직 되어 보이고, 담마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이라 적용하였을 때 세존께서는 법을 설하소서(S6.1)”로 되어 역시 번역이 딱딱하여 보인다.

 

그러나 깜마와 담마를 탄력적으로 적용하면 행위가 그의 운명이네라든가, “세존께서는 가르침을 설하여 주십시요가 되어 현시대에 맞는 언어로 된다. 이는 삿따에 대하여 중생이라고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도 해당된다. 성전협에서는 삿따에 대하여 뭇삶이라고 적용하고 있다.

 

그런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렇게 두 번역서를 보면 번역어 선택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초불연에서는 한자어인 업, , 중생 과 같은 용어를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초불연의 번역방침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불교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dhamma는 ‘법’으로 한역 된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혹 드물게 문맥에 따라 현상 등으로 옮긴 경우가 있는데 이 대는 반드시 ‘()’이라 부기해 넣어서 그것이 담마(dhamma)의 역어임을 알 수 있게 했다. 

 

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내 안에서 파악하는가 하는 것은 불교의 근본이며 특히 법(dhamma)과 대면함(abhi)을 근본주제로 하는 아비담마의 생명이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현상’이니, ‘것’이니, ‘사물’이니 하는 애매한 용어로 dhamma를 옮기는 것은 피하였다.

 

그리고 viparinnama-dhamma같은 경우에는 ‘변하기 마련인 것’이라든지 ‘변하기 마련이며’라는 등으로 옮기지 않고 ‘변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법’을 살려서 옮겼다. 경에서 부처님께서 dhamma라는 술어를 채용하셨을 때는 그런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해제, 초불연 대림스님)

 

 

초불연에 따르면 담마에 대하여 한자어 ()’을 고수하는 이유에 대하여 밝히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부처님께서 dhamma라는 술어를 채용하셨을 때는 그런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래서 담마를 뜻하는 한자어 ()’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모든 번역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번역방식은 번역에 경직성을 불러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의 경우 담마에 대하여 가르침, 진리, 원리, 등 문맥에 따라 탄력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혹시 빅쿠 보디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닌지

 

그런데 초불연에서 담마나 깜마, 삿다 등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법, , 중생을 적용하는 것이 혹시 빅쿠 보디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빅쿠보디는 CDB 해제에서 용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기 때문이다. 담마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DHAMMA

 

When the word denotes the Buddha's teaching, I have retained the Pali"Dhamma," for even "teaching" fails to convey the idea that what the Buddha teaches as the Dhamma is not a system of thought original to himself but the fundamental principles of truth, virtue, and liberation discovered and taught by all Buddhas throughout beginningless time. This is the Dhamma

Venerated by the Buddhas of the past, present, and future, which they look upon as their own standard and guide (see 6:2).

 

(Bhikkhu Bodhi, CDB 해제 )

 

 

빅쿠 보디는 “I have retained the Pali Dhamma(나는 빠알리어 담마를 유지해 왔다라고 선언하였다. 이는 무슨말일까? 빅쿠 보디에 따르면 빠알리어 담마를 다른 뜻으로 번역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빅쿠보디는 “for even ‘teaching’ fails to convey the idea that what the Buddha teaches as the Dhamma” 라 하여, 담마에 대하여 ‘teaching(가르침)’이라 번역하였을 때 이 말이 담마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빅쿠 보디는 시종일관 빠알리어 담마에 대하여 원어 그대로 담마라고 번역하였다. 비록 경직적인 일률적인 적용이긴 하지만 부처님이 말씀 하신 담마에 대하여 teaching(가르침)” 등으로 의역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번역이 딱딱한 이유

 

이와 같은 빅쿠보디의 번역방침은 초불연의 번역방침과 딱 맞아 떨어진다. 다만 빅쿠보디는 담마에 대하여 빠알리 원어 그대로‘dhamma(담마)’라 하였지만, 초불연의 경우 담마에 대하여 담마라 하지 않고 예로 부터 사용 되어 오던 한자어인 ()’을 고수한 것이 다르다.

 

하지만 , , 중생등과 같은 한자 용어를 모든 번역에 일률적으로 적용하였을 때 그 정확한 뜻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번역이 경직 되어 딱딱해 보인다.

 

 

 

 

2014-04-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