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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삶과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

담마다사 이병욱 2014. 5. 1. 12:45

 

 

순결한 삶과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

 

 

 

낯선 곳을 운전하다 보면

 

낯선 곳을 운전하다 보면 종종 잘못 된 길로 접어 드는 경우가 있다. 지리를 잘 모르거나 판단착오 등으로 엉뚱한 길로 들어 갔을 때이다. 이럴 경우 다시 되돌아 가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때로 그대로 직진하여 가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가다 보면 본래 가고자 하는 목적지와 전혀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 때에 따라 잘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후회하게 된다. 수행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잘못 된 길에 들어 섰을 때

 

초기경전에 길을 잘못 된 길에 대한 경이 있다.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무엇이 잘못된 길이라 불리고 무엇이 밤낮으로 사라지며, 무엇이 순결한 삶의 띠끌이고 무엇이 물이 필요 없는 목욕인가?(S1.58)”라고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한다.

 

 

rāgo uppatho akkhāto

vayo rattindivakkhayo,

Itthimala brahmacariyassa

etthāya sajjate pajā,
Tapo ca brahmacariya
ñca

ta sinānamanodakanti.

 

[세존]

“탐욕이 잘못된 길이라 불리고

젊음은 밤낮으로 사라지네.

사람들이 애착하는 이성(異性)은

순결한 삶의 티끌이고,

고행과 청정한 삶은

물이 필요 없는 목욕이네.”

 

(Uppathasutta-잘못된 길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8, 전재성님역)

 

 

 

 

Two Paths

 

 

여섯구절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육구게라 볼 수 있다. 하늘사람의 네 가지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탐욕(raga), 젊음(vaya), 이성(Itthi), 고행(Tapo)과 청정한 삶(brahmacariya)이라고 이렇게 네 가지로 답한다.

 

Vayo, 젊음인가 수명인가?

 

두번째 구절에 대한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두번째 구절에서 “젊음은 밤낮으로 사라지네(vayo rattindivakkhayo)”라 하였다. Vayo는 ‘Youth, prime of life; any period of life, age。의 뜻으로 제일의 뜻이 젊음(Youth)’이다. 그리고 나이(age)’라는 뜻도 있다.

 

이 구절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수명이 밤낮으로 소멸해가도다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Vayo에 대하여 수명으로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Life undergoes destruction night and day(삶은 밤낮으로 파괴되어 간다)”라 하여 Vayo에 대하여 Life로 번역 하였다.  성전협에서는 Vayo에 대하여 젊음으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Vayo에 대하여 수명(초불연), Life(CDB), 젊음(성전협)으로 달리 번역하였다. 어느 번역이 옳은 것일까? 

 

두번째 구절 “젊음은 밤낮으로 사라지네(vayo rattindivakkhayo, S1.58)”와 유사한 구절이 '스쳐감의 경(S1.4)'에 있다.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 Accenti kālā tarayanti rattiyo vayoguā anupubba jahanti. S1.4)”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 청춘에 해당되는 빠알리어가 vayo이다. “젊음은 밤낮으로 사라지네(vayo rattindivakkhayo, S1.58)”에서 젊음으로 번역한 vayo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렇게 성전협 번역은 번역에 일관성이 있다.

 

그러나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시간은 사라지고 밤은 또한 흘러가서 젊음의 매력 서서히 [우리를] 버립니다.”이라 번역하여 vayo에 대하여 ‘젊음’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웁빠타경(Uppathasutta, S1.58)에서는 “수명이 밤낮으로 소멸해가도다”라 하여 vayo에 대하여 ‘수명’으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vayo에 대하여 젊음과 수명으로 달리 번역한 것이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청춘 또한 지나간다. 그래서 한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청춘 역시 마찬가지 이다. 왜 이런 게송이 나왔을까? 그것은 젊었을 때 열심히 공부하고 공덕을 쌓자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라 하였는데, 이는 지금 젊다고 하여 공부를 소홀히 하고 마음껏 즐기다가 늙어서 공부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을 바꾸어 주기 위한 가르침이다.

 

지금 젊다고 하여 기대수명까지 산다는 보장이 있을까? 기대수명은 단지 기대하는 수명일 뿐이다. 누구도 기대수명까지 사는 것을 보장 해 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항상 죽음을 맞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머리가 칠흑같이 검은 청춘이 모든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고 수행하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S1.4,성전협)”라 하였을 것이다.

 

‘vayoguā anupubba jahanti(S1.4)’구절에서 성전협은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라 번역하였고, 초불연은   “젊음의 매력 서서히 [우리를] 버리도다”라 번역히였다. 빅쿠 보디는 “The stages of life successively desert us”라 하여  “삶의 무대는 점차적으로 우리를 버린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과 빅쿠 보디는 vayo에 대하여 일관성 있는 번역역을 하고 있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때로는 젊음으로, 때로는 수명으로 달리 번역하였다.

 

일관성과 비일관성

 

이를 요약하여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원문

vayo rattindivakkhayo,

(S1.58)

vayoguā anupubba jahanti(S1.4)

성전협

전재성님역

젊음은 밤낮으로 사라지네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

초불연

각묵스님역

수명이 밤낮으로 소멸해가도다

젊음의 매력 서서히 [우리를] 버리도다

CDB

빅쿠보디역

Life undergoes destruction night and day

The stages of life successively desert us

키워드

Vayo, 젊음, 수명, Life

Vayo, 청춘, 젊음, life

 

 

Vayo에 대하여 성전협에서는 젊음과 청춘으로 번역하여 일관성이 있고, CDB에서는 Life로 번역하여 역시 일관성이 있다. 그러나 초불연의 경우 수명과 젊음으로 번역하여 일관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초불연에서 Vayo 에 대하여 수명이라고 번역한 것이 왜 문제일까?

 

순결한 삶과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

 

Vayo의 뜻에는 age(나이, 수명)이라는 뜻도 있지만 제일의 뜻은 Youth(젊은이 또는 젊음, 젊은 시절)이다. 그렇다면 왜 Vayo에 대하여 젊은이 또는 젊음, 젊은 시절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까? 이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탐욕이 잘못된 길이라 불리고 젊음은 밤낮으로 사라지네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은 사람들이 애착하는 이성(異性)은 순결한 삶의 티끌이고 (Itthimala brahmacariyassa etthāya sajjate pajā)(S1.58)”라 하였다.

 

여기서 이성이라 번역된 것은 Itthi이다. Itthi‘woman; female’의 뜻으로 여자를 뜻하지만 전재성님은 이성으로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은 여인으로, 빅쿠보디는 ‘Women(여자)’로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청정한 삶, 순결한 삶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왜 여자(또는 이성)을 가까이 하면 안될까?

 

게송에서 순결한 삶이라고 번역한 단어가 ‘brahmacariya’이다. 이 브라흐마짜리야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청정범행으로 번역하였고, CDB에서는 ‘holy life(성스런 삶)’로 번역하였다.

 

여인은 청정범행의 더로움일까?

 

브라흐마짜리야와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여인이 청정범행의 더로움이니라고 번역 하였다. 이는 ‘Itthimala brahmacariyassa’에 대한 번역이다. 반면 성전협에서는 이성(異性)은 순결한 삶의 티끌이고라고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Women are the stain of the holy life”라 하여 여자들은 성스런 삶의 오점이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세 번역자의 번역을 보면 순결한 삶과 여자를 대비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초불연에서는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여인이 청정범행의 더러움(Itthimala brahmacariyassa)’이라는 것은 외부적인 더러움은 잿물등으로 씻어서 깨끗하게 할 수 있지만 여인이라는 더러움에 의해 망가지면 깨끗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여인은 더러움이라고 한다.

(초불연 242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은 주석을 인용하여 청정범행에 있어서 여인을 더러움으로 보았다. 그래서 여인이 청정범행의 더러움이라고 번역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런 번역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여인 그 자체를 더러움으로 오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정한 삶에서 더러운 것인 여인이 아니라 여인과 성적교섭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한 삶 또는 청정범행이라고 번역 되는 브라흐마짜리야는 성적교섭을 갖지 않는 삶을 말한다. 그런 삶이 바로 바라문 인생사주기에 있어서 범행기에 해당된다.

 

학습기와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

 

이처럼 번역자 마다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에 대하여 순결한 삶 또는 청정한 삶, 청정범행, holy life 등으로 번역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고대 브라만의 인생사주기와 관련이 있다. 인생사주기에 대하여 성전협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Brahmacariya : 순결한 삶을 말한다. 원래는 바라문의 네 가지 수행시기에서 1)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시기[梵行期: Brahmacariya], 2) 가정에서 결혼하여 생활하는 시기[家住期: Gārhasthya], 3) 숲에서 수행하는 시기[林棲期: Vānaprastha], 4) 유행하며 돌아다니는 시기[遊行期: Sanyāsin]가 있는데, 순결한 삶은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시기에 해당된다.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주석의 브라만의 인생사주기에 대하여 범행기가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순결한 삶 또는 청정범생, holy life에 해당 되는 시기는 범행기 즉,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시기에 해당 됨을 알 수 있다.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시기인 범행기에는 성적교섭과 무관한 시기이다. 성접교섭은 범행기가 끝나고 가정에서 결혼하여 생활하는 시기인 가주기에 해당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브라흐마짜리야 즉, 범행기에서 성적교섭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청정한 삶이 된다.

 

“청정한 삶이란 성적교섭을 삼가는 삶

 

불교에서는 청정한 삶을 이상으로 한다. 그 청정한 삶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브라흐마짜리야이다. 고대 정통바라문교의 범행기에 해당되는 용어이다. 이처럼  브라흐마짜리야는 청정한 삶, 순결한 삶, 청정범행을 뜻한다. 그래서 공부하는 시기에 젊은 학생이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하듯이 청정한 삶을 실현 하기 위해서는 성적교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성적교섭이 없는 청정한 삶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경이 있다.

 

 

그 옛날 바라문들은

사십팔년 동안이나 동정을

지키며 청정한 삶을 살았고,

명지와 덕행을 구했습니다. (stn289)

 

그 후에 바라문들은 다른 계층으로 가서

아내를 구하지 않았고, 아내를 사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사랑하면서

함께 살고 화목하여 즐거웠습니다. (stn290)

 

월경기간이 끝난 후에,

바른 시기를 제쳐두고,

그 사이에 바라문들은

결코 성적 교섭을 갖지 않았습니다. (stn291)

 

청정한 삶과 계행을 지키는 것,

정직하고, 친절하고, 절제하고,

온화하고 남을 해치지 않는 것,

그리고 또한 인내하는 것을 칭찬했습니다. (stn292)

 

그들 중에서 으뜸가는

용맹스런 바라문들은

성적 교섭에 빠지는 일을

꿈속에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stn293)

 

(Brāhmaadhammikasutt-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 숫따니빠따 Sn2.7, 전재성님역)

 

 

고대인도의 정통바라문들의 청정한 삶에 대한 것이다. 특히 청정한 삶과 계행을 지키는 것(stn292)”이라 하였다. 여기서 청정한 삶이란 브라흐마짜리야을 말하며 인생사주기에 있어서 학습기인 범행기에 해당된다.

 

주석(Prj.II.317)에 따르면 청정한 삶이란 성적교섭을 삼가는 삶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청정한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성적교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마치 고대정통바라문교에서 학습기에 해당 되는 공부하는 시기에 젊은이들이 오로지 학습에만 몰두 하였듯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청정범행을 실현하기 위하여 성적교섭을 삼갈 것을 말한다.

 

성자의 삶과 성적교섭

 

숫따니빠따에는 성적교섭을 삼가는 게송이 여럿 등장 한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Etamādinava  ñatvā
Muni pubb
āpare idha,
Ekacariya
daha kayirā
Na nisevetha methuna

 

성자의 삶을 사는 자는

여기에 앞으로나 뒤로나

이러한 재난이 있음을 알아,

굳게 홀로 유행하는 삶을 지키고

성적 교섭을 일삼지 말아야 합니다. (stn821)

 

(Tissametteyya sutta -띳사 멧떼이야의 경, 숫따니빠따 Sn4.7, 전재성님역)

 

 

경에서 성자의 삶을 살아 가는 자세에 대하여 표현 되어 있다. 성자의 삶에서 성적교섭(methuna)’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명예와 명성을 다 잃게 됩니다

 

만일 청정한 삶을 살아가는 수행자 성접교섭을 하면 어떻게 될까? 경에서 띳사 멧떼이야는 부처님에게 “성적 교섭에 탐닉하는 자의 고뇌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Methunamanuyuttassa (metteyyāti bhagavā)
Mussatev
āpi sāsana,
Micch
ā ca paipajjati
Eta
tasmi anāriya

 

Eko pubbe caritvāna
Methuna
yo nisevati,
Y
āni hanta va ta loke
Hinam
āhu puthujjana.

 

Yaso kittiñca yā pubbe
H
āyate vā pi tassa sā,
Etampi disv
ā sikkhetha
Methuna
vippahātave.

 

[세존]

 멧떼이야여,

성적교섭에 팀닉하는 자는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잘못 실천합니다.

그의 안에 있는 탐닉은 천한 것입니다. (stn815)

 

여태까지는 홀로 살다가

나중에 성적 교섭에 탐닉하는 자는,

수레가 길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비속한 자라 부릅니다. (stn816)

 

지금껏 그가 가졌던

명예와 명성을 다 잃게 됩니다.

이 일을 보고 성적 교섭을

끊도록 공부해야 합니다. (stn817)

 

(Tissametteyya sutta -띳사 멧떼이야의 경, 숫따니빠따 Sn4.7, 전재성님역)

 

 

성접교섭에 탐닉하는 자는 천한것(anāriya)’라 하였다. 그리고 비속한 자(puthujjana)’라 하였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Yocayā kāmesu kāmasukhallikānuyogo hīno gammo pothujjaniko anariyo anatthasahito, S56.11)”라고 말한 것과 일치 한다. 

 

초전법륜경에서 anariyo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라 번역 되었고, pothujjaniko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으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성적교섭에 몰두하는 것은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에게 해당되고, 수행자가 성적교섭에 몰두 하는 것은 스스로 천한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성적교섭에 몰두 하다 보면 명예와 명성을 다 잃게 됩니다라 하였다.

 

사실혼 스님에게 문서견책

 

도덕성을 생명으로 하는 NGO활동가가 성적인 문제로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그가 이제까지 쌓아 왔던 명예와 명성을 모두 잃어 버리게 된다. 시정잡배들이 성적방종으로 인하여 문제 되지 않지만 사회 지도층에 있는 자가 스캔들에 휩싸이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런데 불교계는 그렇지 않다. 비구계를 받은 스님이 결혼을 하여 사실혼이 증명 되었음에도 버젓이 스님으로 행세 하는 케이스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최근 전은해사 주지이었던 D스님에 대하여 솜망망이 처벌이 내려져 문제가 되고 있다. 교계신문사이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반면 미국에서 혼인 및 이혼했다는 증명서가 제출돼 논란을 일으켜 징계에 회부된 은해사 돈명 스님은 초심호계원에서 공권정지 5년의 징계를 내렸다. 호계원 관계자는 "10교구 은해사 발전에 기여했고 문화재를 종단과 교구본사에 기증하는 등 공로가 크다는 점을 참작해 대폭 감형했다"고 밝혔다.

 

( 장주-멸빈, 적광- 제적, 돈명-문서견책, 불교닷컴 2014-04-22)

 

 

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혼인하여 사실혼이 증명된 스님에 대하여 문서견책이 내려졌다고 한다. 문서견책이란 매우 가벼운 징계를 말한다. 그래서 교계에서는 이를 솜방망이 징계라 한다. 비구계를 받은 자가 성적교섭을 하면 바라이죄로 승단추방에 해당된다. 그런데 혼인사실까지 있는 승려가 추방되기는커녕 문서견책이라는 경징계 조치 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은해사 발전에 기여했다는 등 공로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적절치 않은 번역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시기는 결혼 하기 이전이므로 젊은 시기이다. 그리고 청춘이다. 이렇게 본다면 게송에서 “vayo rattindivakkhayo(S1.58)” 구절은 젊음은 밤낮으로 사라지네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사람들이 애착하는 이성(異性)은 순결한 삶의 티끌이고 (Itthimala brahmacariyassa etthāya sajjate pajā, S1.58)”로 되어 있어서 이는 명백히 범행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vayo rattindivakkhayo(S1.58)”에서 vayo는 젊음 또는 청춘으로 번역되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수명이라 하였고, CDB에서는 Life라 하여 삶 또는 생명으로 번역하였다. 이런 번역은 이어지는 문구로 보았을 때 맞지 않고 더구나 학습기를 뜻하는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도 매칭이 되지 않는다vayo에 대한 초불연에서 수명’으로 번역한 것 CDB에서 Life로 번역한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세 번역을 비교해 보면

 

세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빠알리원문

 

rāgo uppatho akkhāto

vayo rattindivakkhayo,

Itthimala brahmacariyassa

etthāya sajjate pajā,
Tapo ca brahmacariya
ñca

ta sinānamanodakanti. (S1.58)

 

 

2) 성전협 전재성님역

 

[세존]

탐욕이 잘못된 길이라 불리고

젊음은 밤낮으로 사라지네.

사람들이 애착하는 이성(異性)

순결한 삶의 티끌이고,

고행과 청정한 삶은

물이 필요 없는 목욕이네.”

 

 

3) 초불연 각묵스님역

 

[세존]

애욕이 잘못된 길이라 불리며

수명이 밤낮으로 소멸해가도다.

여인이 청정범행의 더러움이니

남성들은 여기에 걸려 있도다.

고행과 청정범행이 물이 필요 없는 목욕이니라.”

 

 

4) CDB 빅쿠보디역

 

Lust is declared the deviant path;

Life undergoes destruction night and day;

Women are the stain of the holy life:

Here menfolk are enmeshed.

Austerity and the holy life--

That is the bath without water.

 

 

성전협에서는 여섯 구절로 구성하였다. 초불연과 CDB에서는 오구체로 하였다.

 

탐욕을 뜻하는 raga 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애욕으로 하였고,  CDB에서는 Lust(욕망, 정욕, 갈망)로 번역하였다.

 

확연하게 차이 나는 번역은 왜?

 

그런데 두 한글 번역에서 확연하게 차이 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초불연의 남성들은 여기에 걸려 있도다라는 번역어이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는 무엇일까? ‘etthāya sajjate pajā문구로 보인다. Sajjate‘sajjati + e’로서, sajjati‘clings to; to be attached’의 뜻이다. ‘붙잡혀 있다라는 뜻이다. Pajā‘Progeny, descendants, race, family; creature, living being; people; mankind, 后裔世代의 뜻이다. 제일의 뜻이 Progeny인데 이는 자손, 후계자, 결과로 번역된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남성들은 여기에 걸려 있도다라 하여,  Pajā남성으로 번역하였다. 성전협에서는 사람들이라 번역하였다. CDB에서는 menfolk’라 번역하였다. Menfolk남자들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Pajā에 대한 빠알리어사전 PCED194에 따르면 남자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초불연에서는 남성으로 번역하였을까?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etthāya sajjate pajā에 대하여 남성들은 여기에 걸려 있도다라고 번역하였다. ‘etthāya sajjate pajā에 대하여 직역하면 여기에 집착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여자와 같은 이성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초불연에서 pajā에 대하여 남성으로 번역하고 또 남성들은 여기에 걸려 있도다라 하여 성전협과 전혀 다르게 번역한 것은 아마도 CDB의 영향 때문이라 보여진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CDB에서는 “Here menfolk are enmeshed.”라 하였다. 이를 직역하면 여기에 남자들은 곤란에 빠졌다라는 뜻이 된다. 이는 초불연의 남성들은 여기에 걸려 있도다라고 번역한 것과 구문이 일치한다.

 

 

 

 

2014-05-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