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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리스와 브라흐마짜리야(청정한 삶)

담마다사 이병욱 2014. 3. 19. 23:17

 

섹스리스와 브라흐마짜리야(청정한 삶)

 

 

 

가띠까라의 경(S1.50)

 

상윳따니까야 아딧따왁가의 마지막 경은 가띠까라의 경(S1.50)이다. 이렇게 사람 이름이 경의 제목으로 될 수 있다.

 

경에서 가띠까라(Ghaīkārasutta)’라는 이름은 맛지마니까야에서도 나온다. 81번째 경인 가띠까라의 경(M81)’이 그것이다. 각주에 따르면 도기장이 가띠까라를 소재로 한 것이다. 과거불인 깟사빠붓다 당시 도기장이었던 가띠까라는 까사빠붓다의 열렬한 신도 이었고, 그 법문에 너무 감동한 나머지 자신의 친구인 자띠빨라에게 설법을 듣도록 만들었다. 이런 이야기가 게송에도 등장한다.  

 

다시는 돌아 오지 않는 자들

 

첫 게송에서 가띠까라가 읊는 게송이 등장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Aviha upapannāse

vimuttā satta bhikkhavo,
R
āgadosaparikkhīā

tiṇṇā loke visattikanti.

 

(Ghaīkārasutta, S1.50)

 

 

[가띠까라]

일곱 수행승이 해탈하여,

성공으로 타락하지 않는 하느님 세계에 태어났네.

탐욕과 성냄을 완전히 없애고

세상에 대한 애착을 건넜네.”

 

(Ghaīkārasutta- 가띠까라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0, 전재성님역)

 

 

[가띠까라]

일곱 분의 비구들이 해탈한 뒤에

무번천(無煩天)의 세상에 태어났으니

탐욕과 성냄 모두 완전히 없애

세상에 대한 애착 건넜습니다.”

 

(Ghaīkārasutta- 가띠까라 경, 상윳따니까야 S1.50, 각묵스님역)

 

 

[The devatii Ghafikgra:]

Seven bhikkhus reborn in Aviha

Have been fully liberated.

With lust and hatred utterly destroyed,

They have crossed over attachment to the world.

 

(Ghaīkāra, S1.50, 빅쿠보디역)

 

 

게송에서 ‘Aviha’가 나온다. 이에 대하여 성공으로 타락하지 않는 하느님세계(전재성님역)’무번천(無煩天, 각묵스님역)’으로 번역한 것을 알 수 있다. 빅쿠 보디는 원어 그대로 Aviha라 하였다.

 

아위하는 33세상도표를 보면 색계4선천의 정거천에 해당된다. 성전협 번역서의 말미에 있는 세상도표에 따르면 정거천은 색구경천, 선견천, 선현천, 무열천, 무번천 이렇게 다섯 천상이 있는데 게송에서 말하는 일곱명은 정거천의 가장 마지막에 있는 무번천에 태어 났다고 하였다. 무번천은 수명이 1000겁이다.

 

이렇게 정거천에 태어나는 자들을 불환자라 한다. 다시는 돌아 오지 않는 자라는 뜻이다. 불환자들은 정거천에 태어나 수와 복을 누리다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오상분결에서 해방되어

 

정거천에 태어나는 불환자들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설명한다.

 

 

Ke ca te ataru sagha

 maccudheyya suduttara,
Ke hitv
ā mānusa deha

dibba yoga upaccagu.

 

(Ghaīkārasutta, S1.50)

 

 

[세존]

“건너기 어려운 죽음의 땅인

진흙의 늪을 건넌 사람은 누구이며

사람의 몸을 버리고

하늘의 멍에마저 내려놓은 자는 누구인가?”

(Ghaīkārasutta- 가띠까라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0, 전재성님역)

 

 [세존]

“건너기 어려운 죽음의 영역

그런 흙탕 완전히 넘어버렸고

인간의 몸도 버리고 천상의 속박도 넘어선

그들은 대체 누군가?”

 

(Ghaīkārasutta- 가띠까라 경, 상윳따니까야 S1.50, 각묵스님역)

 

 

[The Blessed one:]

“And who are those who crossed the swamp,

The realm of Death so hard to cross?

Who, having left the human body,

Have overcome the celestial bond?”

 

(Ghaīkāra, S1.50, 빅쿠보디역)

 

 

이 게송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이다. 그러나 THE TIPIKATA사이트에 실려 있는 PTS본에는 가띠까라가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모든 한 대화자의 이야기는 각가‘ti’로 마감 하므로 PTS본과 달리 두 번째시와 세 번째 시를 각각 세존과 가띠까라에게 배분되어야 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게송 말미에 ‘ti’라는 말이 붙어 있으면 “~라고.”의 뜻이 되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dibba yoga가 있다. 이에 대하여 하늘의 멍에천상의 속박으로 번역 하였다. 빅쿠보디는 ‘the celestial bond’라 하였다. Celestial하늘의뜻이므로 하늘의 속박이라 할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각주에서는 다섯가지 높은 단계의 결박이라 하였다. 이는 오상분결을 말한다. 1) 유신견(sakkāya-diṭṭhi), 2) 회의적 의심(vicikicchā), 3) 계금취(Sīlabbata-parāmāsa), 4) 감각적 욕망(탐욕, kāma-rāga), 5)  적의(성냄, paigha) 이렇게 다섯 가지 장애 또는 족쇄를 말한다. 이 다섯 가지가 모두 풀렸을 때 이를 아나함 (anāgāmi) 이라 하고 죽어서 다시 돌아 오지 않는다 하여 불환자라 한다. 부처님은 이 불환자들이 오상분결에서 해방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익숙한 이름, 우빠까와 뿌꾸사띠와 삥기야

 

일곱명의  불환자들에 대하여 가띠까라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이름을 말한다.

 

 

Upako palagaao ca

pukkusāti ca te tayo,
Bhaddiyo bhaddadevo ca

bāhudanti ca pigiyo.
Te hitv
ā mānusa deha

dibba yoga upaccagunti.

 

(Ghaīkārasutta, S1.50)

 

 

[가띠까라]

우빠까와 팔라간다와

뿟꾸싸띠와 밧디야와 칸다데바와

바후랏기와 삥기야는 사람의 몸을 버리고

하늘의 멍에마저 내려놓았네.”

 

(Ghaīkārasutta- 가띠까라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0, 전재성님역)

 

 

[가띠까라]

우빠까, 팔라간다, 뿍꾸사띠, 이 세분

밧디야, 칸다데와, 바후락기, 삥기야

이들은 인간의 몸도 버리고 천상의 속박도

완전히 넘어선 분 들입니다.”

 

(Ghaīkārasutta- 가띠까라 경, 상윳따니까야 S1.50, 각묵스님역)

 

 

[Ghatikara:]

Upaka and Palaganda,

With Pukkusati-these are three.

Then Bhaddiya and Bhaddadeva,

And Bahudanti and Piitgiya.

These, having left the human body,

Have overcome the celestial bond.

 

(Ghaīkāra, S1.50, 빅쿠보디역)

 

 

게송에서는 일곱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중 익숙한 이름이 있다. 우빠까와 뿌꾸사띠와 삥기야이다. 나머지 이름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나머지 네 명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232번각주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빅쿠 보디  The identity of the other bhikkhus cannot be established.(CDB 111 번 각주)”라 하여 역시 불분명함을 말하고 있다.

 

게송에서 언급된 세 명 빅쿠 이름은 친숙하다. 우빠까는 맛지마니까야 고귀한 구함의 경(M26)’에 등장하고, 뿌꾸사띠 역시 맛지마니까야 세계에 대한 분석의 경(M140)’에 등장한다. 삥기야는 숫따니빠따  학인 삥기야의 질문에 대한 경(Sn5.17)’에 등장한다. 이 세 명의 인물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보고 있으나, 각묵스님의 경우 ‘~인듯 하다라 하여 중립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우빠까는 부처님의 최초 제자가 될 뻔 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이 상윳따니까야와 맛지마니까야에 등장한다. 우빠까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빠까는 사명외도(Avijika)였는데, 부처님이 이씨빠따나에서 초전법륜을 설하기 위해 가야로 가는 도중에 만난 사람이다. 그 때 우빠까는 부처님이 무한승자인가를 물어 보았다. 부처님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럴지도 모르지하고 다른 길을 갔다. 그 후 우빠까는 방까하라 지방으로 가서 사냥꾼의 딸 짜빠와 사랑에 빠져 그녀와 결혼해서 사냥꾼이 잡아 오는 고기를 팔면서 살았다.

 

그럭저럭 그들에게는 쑤밧다라는 아들이 생겼다. 짜빠는 아들이 울 때 마다 고행자의 아들이라고 놀려댔다. 그러면 우빠까는 무한승자이야기를 하곤 하다가 마침내 부처님에게 나아가 출가하여 돌아 오지 않는 님(불환자)에 도달하여 성공으로 타락하지 않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무번천)’에 이르렀다.

 

(409번 각주, 전재성님)

 

 

우빠까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우빠까가 싱거운 사람으로 보인다. 이는 경에서 그렇게 표현 되어 있다.

 

우빠까는 부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벗이여, 그대의 감관은 맑고 피부색은 청정하다. 벗이여, 그대는 무엇을 위하여 출가하였으며, 그대의 스승은 누구인가, 누구의 가르침을 즐겨 배우는가?(M26)”라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부처님은 게송으로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 일체를 아는 자.

모든 상태에 오염되는 것이 없으니

일체를 버리고 갈애를 부수어 해탈을 이루었네

스스로 알았으니 누구를 스승이라 하겠는가.” (M26)

 

 

이렇게 부처님이 “나와 견줄 만한 이 없네”라 하고, 또 “우빠까여, 나는 승리자가 되었네”라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우빠까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경에서는 “ ‘벗이여,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말하고 머리를 흔들며 샛길로 사라졌다.(M26)”라고 되어 있다.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한 것은 ‘huveyyapāvuso이다. 여기서 huveyy ‘it may be’아마 그럴지도의 뜻이다. Āvuso‘friend; brother’의 뜻으로 벗이여또는 도반이여라고 번역된다.

 

‘huveyyapāvuso과 관련하여 초불연 번역을 보면 도반이여,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되어 있다. 빅쿠보디와 빅쿠냐나몰리가 영역한 MDB에서는 ‘May it be so, friend.’라 되어 있다. 우리말로 친구여, 아마 그럴지도의 뜻이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huveyy‘may be’의 뜻이다. 빠알리사전 PCED194에도 ‘it may be’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초불연의 도반이여,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로 된 번역은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우빠까가 반신반의 하며 고개를 갸웃갸웃하면서 ‘huveyyapāvuso라 말한 것은 친구여,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may be의 뜻으로 번역한 것이 타당해 보인다.

 

성행위를 하지 않는 삶

 

경에서 가띠까라는 깟사빠 부처님 당시 그릇을 굽는 도공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양하고 깟사빠 붓다를 따르는 신도이었다. 그런데 게송에서 가띠까라는는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Virato methunā dhammā

brahmacārī nirāmiso,
Ahuv
ā te sagāmeyyo

ahuvā te pure sakhā.

 

(Ghaīkārasutta, S1.50)

 

 

성적교섭의 습관을 멀리하고

세속의 자양을 여의고 청정히 수행했고

나는 당신의 고향사람

그 옛날 당신의 벗이었네.”

 

(Ghaīkārasutta- 가띠까라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0, 전재성님역)

 

 

성행위를 완전히 금하면서 지낸 저는

욕망 여읜 청정범행 부지런히 닦았나니

그런 저는 당신과 동향이었고

그때 저는 당신의 친구였지요.”

 

(Ghaīkārasutta- 가띠까라 경, 상윳따니까야 S1.50, 각묵스님역)

 

 

I abstained from sexual intercourse,

I was celibate, free from carnal ties.

I was your fellow villager,

In the past I was your friend.

 

(Ghaīkāra, S1.50, 빅쿠보디역)

 

 

가띠까라는 청정범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는 빠알리어로 brahmacārīya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맛지마니까야 각주에서 의 각주에 따르면 “이는 성행위를 하지 않는 삶을 의미한다.(M4, 179번 각주)”라고 하였다.

 

순결하지 못한 삶, 아브라흐마짜리야(abrahmacariyā)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청정한 삶’을 실현 하는데 있어서 성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출가한 빅쿠들에게 있어서 그렇다. 이는 위방가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Katamo ca bhikkhave, sammākammanto: yā kho bhikkhave, pāātipātā veramaī adinnādānā veramaī abrahmacariyā veramaī, aya vuccati bhikkhave, sammākammanto.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행위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1)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고

2)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고

3) 순결하지 못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행위라고 한다.

 

(Vibhagasutta-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8, 전재성님역)

 

 

 

 

 

Eight Fold Path

 

 

 

위방가경에 대하여 분별의 경이라 하는데, 이는 팔정도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올바른 행위 즉, ‘정업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서 세 번째 항을 보면 순결하지 못한 삶이 나온다. 이를 abrahmacariyā라 하였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여기서 청정행은 출가자에게 해당되고 재가신도에게는 대신에 불사음이 들어 간다. (s45.8, 43번 각주)”라 되어 있다. 그런데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라 되어 있다. 아브라흐마짜리야(abrahmacariyā)에 대하여 삿된 음행으로 해석해 놓은 것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출가자에게 있어서 청정한 삶을 실현 하기 위하여 성행위를 하지 않는 것임을 말한다.

 

청정한 삶,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ā)

 

청정한 삶을 실현하기 성적교섭을 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가  숫따니빠따에서도 실려 있다.

 

 

Brahmacariyañca sīlañca

ajjava maddava tapa
Soracca
avihisañca

khantiñcāpi avaṇṇayu.

 Yo  nesa paramo āsi

brahmā dahaparakkamo
Sa c
āpi methuna dhamma

supinantepi nāgamā.

 

 

청정한 삶과 계행을 지키는 것,

정직하고, 친절하고, 절제하고,

온화하고 남을 해치지 않는 것,

그리고 또한 인내하는 것을 칭찬했습니다. (stn292)

 

그들 중에서 으뜸가는

용맹스런 바라문들은

성적 교섭에 빠지는 일을

꿈속에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stn293)

 

(Brāhmaadhammikasutta-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 숫따니빠따 Sn2.7, 전재성님역)

 

 

stn292의 첫번째 구절에 Brahmacariya가 있다. 이를 청정한 삶이라 번역하였다. 그런데 청정한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성적교섭을 삼가는 것이라 하였다.

 

stn293에서 methuna이 있는데 이는 ‘sexual intercourse’의 뜻이다. 그래서 주석에 따르면 청정한 삶은 성적교섭을 삼가는 삶(Prj.II.317)”이라 하였다.

 

부처님이 새롭게 해석한 브라흐마짜리야

 

가띠까라의 경에서 가띠까라는 “Virato methunā dhammā brahmacārī nirāmiso(S1.50)”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성적교섭의 습관을 멀리하고 세속의 자양을 여의고 청정히 수행했고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성행위를 완전히 금하면서 지낸 저는 욕망 여읜 청정범행 부지런히 닦았나니라 하였다. 빅쿠 보디는 “I abstained from sexual intercourse, I was celibate, free from carnal ties”라 하였다.

 

이렇게 초기경전에서 출가한 빅쿠에게 성적교섭은 금지 되어 있다. 청정한 삶을 사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청정한 삶 또는 청정범행이라는 말이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이다. 이는 brahma() cariya()의 복합어기 때문이다.

 

브라만의 행에 대하여 청정한 삶이라 한 것은 부처님 당시 타락한 브라만에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예전의 브라만은 인생사주기라 하여 학습기, 가주기, 임서기, 유행기의 삶을 살았는데, 이런 브라만의 삶의 방식을 부처님이 새롭게 해석한 것이 브라흐마짜리야이다. 이는 법구경 바라문의 품(26)’에서  나는 그를 브라만이라 부른다라는 정형구가 들어 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재해석한 바라문에 대하여 아라한과 동급으로 보았다. 그래서 범행을 뜻하는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 , ‘청정한 삶이 가르침의 목표가 된 것이다. 청정한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 성적교섭을 금지한 것이다.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

 

출가하여 걸식에 의존하며 거처없이 유행하는 출가수행자에게 있어서 성적교섭이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청정한 삶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성적교섭은 장애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Eko pubbe caritvāna
Methuna
yo nisevati,
Y
āni hanta va ta loke
Hinam
āhu puthujjana.

 

Yaso kittiñca yā pubbe
H
āyate vā pi tassa sā,
Etampi disv
ā sikkhetha
Methuna
vippahātave.

 

 

여태까지는 홀로 살다가

나중에 성적 교섭에 탐닉하는 자는,

수레가 길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비속한 자라 부릅니다. (Stn816)

 

지금껏 그가 가졌던

명예와 명성을 다 잃게 됩니다.

이 일을 보고 성적 교섭을

끊도록 공부해야 합니다.  (Stn817)

 

(Tissametteyya sutta -띳사 멧떼이야의 경, 숫따니빠따  Sn4.7,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성적교섭에 탐닉하는 자의 고뇌에 대한 것이다. 청정한 삶을 실현하기 위한 수행자가 성적교섭에 탐닉하였을 때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릴 수 있음을 말한다.

 

바라이죄를 지으면 승단에서 추방된다. 마치 세속에서 목이 잘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 자는 머리가 잘릴 만한, 비난 받을 만한 악업을 지었구나. ( A4:242)”라 한 것이다.

 

이처럼 타락한 반승반속에 대하여 세상사람들은 손가락질 한다. 그리고 마치 화장터에서 타다만 나무토막 보듯 한다. 그래서 성적교섭과 같은 바라이죄를 지으면 이제까지 쌓아 왔던 명예와 칭송을 모두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황진이와 지족선사의 이야기가 있다. 십년동안 공부하여 살아 있는 부처 즉, 생불로서 추앙받던 지족선사가 황진이의 의도적인 유혹으로 결국 파계하고 말았을 때 사람들은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라 하였다.

 

 

 

2013-03-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