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순간에도 법비(雨寶)는 내리고
무엇에 의지해야 하나?
누구나 하나 이상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 믿는 구석이 있고 기댈 언덕이 있다는 것은 삶을 살아 가는데 있어서 커다란 위안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것에 믿고 의지할까? 상윳따니까야에서 하늘 사람이 부처님에게 이렇게 묻는다.
“무엇이 인간의 의지처이고
세상에서 최상의 벗은 누구인가?
땅에 의존하는 뭇삶들은
도대체 어떤 존재들이 키우랴?” (S1.54, 전재성님역)
하늘사람은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간의 의지처는 누구인지, 최상의 벗은 누구인지, 그리고 땅에 사는 존재들은 무엇에 의지하는지 이렇게 세 가지이다.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한다.
puttā vatthu manussānaṃ
bhariyāva1 paramo sakhā,
Vuṭṭhiṃ bhūtūpajīvanti
ye pāṇā paṭhaviṃsitāti.
[세존]
“아들이 인간의 의지처이고
최상의 벗은 아내이고,
땅에 의존하는 뭇삶들은
비[雨]라는 존재들이 그들을 키우네.”
(Vatthusutta-의지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4, 전재성님역)
늙으면 아들이 의지처
아들이 인간의 의지처라 하였다. 여기서 아들이라고 번역한 것은 빠알리어 ‘뿟따(puttā)’이다. Puttā는 남성명사로서 ‘a son; a child, 子, 子息; 男児’의 뜻이다. 단수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아들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라 하였을 때 사람들을 대표하는 말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아들들이 인간들의 의지처이며”라 하였다. 아들과 인간을 모두 복수로 사용하였다. 이 구절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빅쿠보디의 CDB를 검색하여 보았다. 찾아 보니 “Sons are the support of human beings”라 되어 있다. Sons와 human beings로 되어 있어서 ‘복수’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아들들이 인간들의 의지처이다”라고 번역된다. 이렇게 CDB와 초불연에서는 복수로 사용하여 번역하여 놓았다.
아들이 인간의 의지처라는 것은 무슨뜻일까? 이에 대하여 성전협의 각주에 따르면 “늙으면 아들이 아버지의 의지처가 된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산업화 이전에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또 유교의 덕목이기도 하였다.
유교에서는 여자의 경우 어려서는 부모에게 의지하고, 결혼해서는 남편에게 의지하고, 늙어서는 아들에게 의지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런 삶의 방식은 남자도 예외가 아니다. 어려서는 부모에게 의지하고 커서는 배우자에게 의지하고 노년에는 자식에게 의지하는 것이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일곱 종류의 아내가 있는데
두 번째 구절을 보면 “최상의 벗은 아내이고”라 하였다. 이는 삶의 중간 단계라 볼 수 있다. 부부가 서로 의지함을 말한다. 그래서 여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최상의 벗은 남편이다”가 될 것이다.
최상의 벗은 아내라고 하였다. 이는 가장 이상적인 아내상이다. 그렇다면 어떤 아내가 있길래 친구 같은 아내가 최상이라 하였을까? 앙굿따라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아내의 종류가 있다.
[세존]
쑤자따여,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일곱 가지 아내가 있다. 일곱 가지란 무엇인가? 쑤자따여, 살인자와 같은 아내, 도둑과 같은 아내, 지배자와 같은 아내, 어머니와 같은 아내, 누이와 같은 아내, 친구와 같은 아내, 하인과 같은 아내이다. 쑤자따여,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일곱 가지 아내가 있다. 쑤자따여, 그대는 이들 가운데 어떠한 아내인가?”
(일곱가지 아내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7.63,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일곱 종류의 아내가 있다고 하였다. 듣기에도 섬뜻한 ‘살인자 같은 아내’도 있고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하인과도 같은 아내’도 있다.
악한 아내(惡妻)와 착한 아내(善妻)
이와 같은 일곱종류의 아내에 대하여 경을 근거로 하여 표로 만들었다.
No |
분 류 |
특 징 |
비고 |
1 |
살인자와 같은 아내 |
-남편에게 연민이 없음 -다른 남자에 빠져 남편을 멸시함 -악한 마음으로 살해 하고자 함 |
악처 |
2 |
도둑과 같은 아내 |
-남편이 벌어들인 재산을 자신을 위해 조금씩 훔침 |
악처 |
3 |
지배자와 같은 아내 |
-하는 일 없이 나태하게 잔뜩먹음 -사납고, 험담을 하고, 거친 말을 함 -남편을 제압하며 지냄 |
악처 |
4 |
어머니와 같은 아내 |
-항상 남편에게 연민함 -어머니가 외아들 돌보듯 남편을 돌봄 -남편이 벌어들인 재산을 수호함 |
선처 |
5 |
누이와 같은 아내 |
-남편을 지극한 공경심으로 대함 -부끄러워 하며 남편에게 순종함 |
선처 |
6 |
친구와 같은 아내 |
-남편 앞에서 항상 즐거운 모습을 보임 -계행을 지키며 헌신함 |
선처 |
7 |
하인과 같은 아내 |
-몽둥이도 두려워하지 않고 성내지 않음 -악한 마음 없이 남편에게 인내함 -분노하지 않고 남편에게 순종함 |
선처 |
일곱종류의 아내에 대한 특징을 보면 악처와 선처로 나눌 수 있다. 표에서 ‘악처’로서는 살인자 같은 아내, 도둑과 같은 아내, 지배자와 같은 아내 이렇게 세 종류를 들 수 있다. ‘선처’로서는 어머니와 같은 아내, 누이와 같은 아내, 친구와 같은 아내, 하인과 같은 아내 이렇게 네 종류의 아내를 들 수 있다.
기뻐하듯 남편을 대하는 아내
‘최상의 아내’는 어떤 것일까? 상윳따니까야 게송에서도 표현 되어 있듯이 ‘친구와 같은 아내’이다. 최상의 아내라 일컬어 지는 ‘친구와 같은 아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Yā cīdha disvāna patiṃ pamodati
Sakhī sakhāraṃva cirassamāgataṃ,
Koleyyakā sīlavatī patibbatā,
Yā eva rūpā purisassa bhariyā
Sakhī ca bhariyāti ca sā pavuccati.
[세존]
친구가 멀리서 오면 친구를 보고 기뻐하듯
여기 아내가 남편을 보고 기뻐한다.
고귀한 계행을 지닌 그녀는 남편에 충실하다.
이와 같은 아내가 있다면,
그녀는 친구와 같은 아내라고 불리네.
(일곱가지 아내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7.63, 전재성님역)
친구와 같은 아내에 대한 특징 중에 가장 잘 표현된 문구가 “친구를 보고 기뻐하듯”일 것이다. 오랜 친구를 만나면 반갑고 기뻐하듯이 남편을 대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남편을 보고 기뻐한다(patiṃ pamodati)”라 하였다. 이렇게 남편보기를 친구보듯 기뻐하는 아내가 최상의 아내라 하였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어려서는 부모에게 의존하고 커서는 아내와 남편에게 의존하고 늙어서는 아들에게 의존한다. 그런데 게송을 보면 의존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땅’이다. 산업사회와 달리 농경사회에서는 땅에 크게 의존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생류는 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게송에서 “땅에 의존하는 뭇삶들은 (ye pāṇā paṭhaviṃsitāti)”이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뭇삶이라 번역한 것은 pāṇā이다. 빠나(pāṇā)는 ‘life; breath; a living being, 生物, 有情, 生類, 生命’의 뜻이다. 이 빠나에 대하여 성전협에서는 ‘뭇삶’이라 하였고, 초불연에서는 ‘생명’이라 하였다. 빅쿠보디의 CDB에서는 ‘생물, 동물, 생명체, 창조물’의 뜻이 있는 ‘The creatures’라고 번역 하였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땅에 의지한다. 그런데 비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모두 말라 죽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비[雨]라는 존재들이 그들을 키우네. (Vuṭṭhiṃ bhūtūpajīvanti)”라 하였다. 여기서 존재라고 번역한 것은 ‘bhūta’이다. 부따(bhūta)는 bhavati의 과거분사형으로 ‘become; existed’의 뜻이다. 따라서 ‘이미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이미 있는 것’이라는 뜻을 가진 bhūta 에 대하여 성전협에서는 ‘존재’라고 번역하였다. 그래서 “비[雨]라는 존재들이 그들을 키우네.”라 하여, 비가 뭇삶(생류, pāṇā)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묘사 되고 있다. 이런 비는 어떤 성격일까?
법화경 약초유품에서
경전에서는 비에 대한 묘사가 종종 보인다. 대승경전인 법화경에 비에 대한 비유가 있다. 법화칠유 중의 하나인 ‘약초유(藥草喩)’ 이다. 약초유는 어떤 내용일까. 법화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가섭아, 비유하면 삼천대천세계의 산과 내와 골짜기와 땅 위에 나는 모든 초목이나 숲, 그리고 약초는 많지마는 각각 그 이름과 모양이 다르니라. 먹구름이 가득히 퍼져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고, 일시에 큰비가 고루 내려 흡족하면, 모든 초목이나 숲이나 약초들의 작은 뿌리, 작은 줄기, 작은 가지, 작은 잎과 중간 뿌리, 중간 줄기, 중간 가지, 중간 잎과, 큰 뿌리, 큰 줄기, 큰 가지, 큰 잎이며 여러 나무의 크고 작은 것들이 상-중-하를 따라서 제각기 비를 받느니라.
한 구름에서 내리는 비가 그들의 종류와 성질을 따라서 자라고 크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나니. 비록 한 땅에서 나는 것이며 한 비로 적시는 것이지마는, 여러 가지 풀과 나무가 저마다 차별이 있느니라.
(법화경, 약초유품)
이 세상의 모든 초목은 비를 맞고 자란다. 그런데 일정한 지역에 비가 내리면 차별 없이 골고루 내린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생명과 같은 비를 받아 들이는 것은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큰 줄기를 가졌으면 똑 같은 비가 내리더라도 더 많이 받아들임을 말한다. 그래서 풀과 나무 마다 차별이 있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같은 비를 맞고 자라도 풀과 나무가 차별이 있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는 자의 근기에 따라 차별이 있음을 말한다.
약초유(藥草喩)의 원형이 빠알리니까야에
그런데 법화경 약초유의 원형이 빠알리 니까야에 보인다는 사실이다. 약초유의 오리지널 버전은 어떤 것일까?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Vuṭṭhi alasaṃ analasañca
mātā puttaṃva posati,
Vuṭṭhiṃ bhūtūpajīvanti
ye pāṇā paṭhaviṃsitāti.
어머니가 아들을 키우듯,
비가 게으르거나 게으르지 않은 자 모두를 키우니,
비의 존재가 참으로
이 지상에 사는 생명들을 키우네.”
(Pajjotasutta-불빛의 경, 상윳따니까야 S1:80, 전재성님역)
비는 게으른자나 부지런한 자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뿌린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어머니의 자식사랑으로 비유하고 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듯이 ‘어느 자식도 다 똑같이 사랑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부모사랑에 대하여 비로 비유하였다. 그런데 경전에서 비는 가르침으로 비유 된다. 모든 생류에게 차별 없이 비가 내리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다만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게송에서 비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비와 어머니와 담마는 동의어
‘불빛의 경(S1:80)’ 게송에서 “비의 존재가 참으로 이 지상에 사는 생명들을 키우네. (Vuṭṭhiṃ bhūtūpajīvanti ye pāṇā paṭhaviṃsitāti, S1:80 )”라 하였다. 그런데 이 구절은 앞서 언급된 “땅에 의존하는 뭇삶들은 비[雨]라는 존재들이 그들을 키우네. (Vuṭṭhiṃ bhūtūpajīvanti ye pāṇā paṭhaviṃsitāti,S1.54)” 구절의 빠알리어 구문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다만 우리말 번역만 약간 달리 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 빠알리 구문에 대한 두 한글번역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구 분 |
의지처의 경(S1.54) |
불빛의 경(S1:80) |
빠알리어 |
Vuṭṭhiṃ bhūtūpajīvanti ye pāṇā paṭhaviṃsitāti |
Vuṭṭhiṃ bhūtūpajīvanti ye pāṇā paṭhaviṃsitāti |
성전협 전재성님역 |
땅에 의존하는 뭇삶들은 비[雨]라는 존재들이 그들을 키우네. |
비의 존재가 참으로 이 지상에 사는 생명들을 키우네. |
초불연 각묵스님역 |
땅에 의지해서 사는 생명들은 비로 목숨을 연명하노라. |
땅에 의지해서 사는 생명들 바로 그들 삶을 영위 하도다. |
CDB 빅쿠보디역 |
The creatures who dwell on the earth Sustain their life by rain |
Those creatures who dwell on the earth Sustain their life by rain. |
가장 큰 차이는 ‘Vuṭṭhiṃ bhūtūpajīvanti’에 대한 번역이다. 전재성님은 이빠알리 구문에 대하여 ‘Vuṭṭhibhūta ūpajīvanti’라 하였다. PTS본과 달리 Vuṭṭhi와bhūta를 합하여 Vuṭṭhibhūta라 한 것이다. 그래서 번역도 ‘비[雨]라는 존재들’ 또는 ‘비의 존재’라 번역 하였다. 그러나 초불연의 경우 단지 ‘비’만 표시 하였다. 초불연 번역서에는 각주에 빠알리 원문을 실려 있지 않다. 그러나 성전협의 각주에는 게송에 대한 빠알리어가 각주에 모두 실려 있어서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비는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의 어머니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들을 키우듯(mātā puttaṃva posati, S1.80)”이라 하여 비에 대하여 어머니로 비유한 것이다. 따라서 비와 어머니는 동의어이다. 또 비는 담마와 동의어이다. 이렇게 본다면 비와 어머니와 담마는 똑 같은 말이 된다.
지금 이순간에도 법비(雨寶)는 계속 내리고
불자들이 의지하는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삼보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과 가르침과 성스런 상가에 대하여 귀의하고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불자가 된다는 것은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은 이보(二寶)이다. 부처님이 면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처님이 안계시는 것일까?
빠알리니까야를 열면 언제든지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 부처님이 설하였던 내용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에 마치 부처님이 면전에 있는 듯하고 바로 옆에서 말씀을 들려 주시는 것 같다. 이렇게 말씀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바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dhammaṃ passati so maṃ passati, yo m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S22:87)”라 하셨다.
부처님의 원음을 접할 수 있는 시대이다. 이렇게 원음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가르침의 비를 맞는 것과 같다. 이렇게 가르침이 전승 되어 왔다는 것은 계속 ‘법비(雨寶)’가 내려 왔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법화경 약초유에서와 같이 차별없이 비가 내리지만 저마다 차별이 있기 때문에 받아 들이는 것도 다를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경전에 대하여 선별하여 받아 들이고 또 어떤 이는 경전을 무시하기도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변함 없이 전승 되어 왔다. 그리고 마치 공기처럼 항상 법계에 진리로서 남아 있다. 이런 진리의 말씀은 ‘비’와 같은 것이다. 법비가 항상 내리고 있지만 이를 받아 들이는 것은 각자 선택에 달렸다. 그러건 말건 지금 이순간에도 법비는 계속 내리고 있다.
2014-04-08
진흙속의연꽃
'니까야번역비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결한 삶과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 (0) | 2014.05.01 |
---|---|
“내 마음 나도 모르게~”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의 특징 네 가지 (0) | 2014.04.12 |
섹스리스와 브라흐마짜리야(청정한 삶) (0) | 2014.03.19 |
도돌이표 인생, 지금 여기에서 무르익은 과보(Ditthe dhamme savipako, S1.49) (0) | 2014.03.12 |
스님들과 학자들의 인터넷글쓰기, 안하는 것인가 못하는 것인가? (0) | 2014.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