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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과 학자들의 인터넷글쓰기, 안하는 것인가 못하는 것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3. 6. 11:43

 

스님들과 학자들의 인터넷글쓰기, 안하는 것인가 못하는 것인가?

 

 

 

인터넷에 올려진 글은 쓰레기라는데

 

인터넷시대에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이전에는 오로지 특별한 사람만 글을 쓰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정보통신시대가 도래 하면서 블로그나 카페, 또는 게시판을 통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불신도 많다. 글을 전문으로 쓰는 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도 건질 것이 없는 쓰레기로 본다. 왜곡된 정보나 근거 없는 주장으로 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표기법이나 지식은 무시하라고

 

어느 카페에서 어떤 이가 질문을 하였다. 블로그에 실려 있는 ‘인연과’에 대한 것이다. 헤뚜-빠띳자-팔라라 불리우는 인연과에 대하여 카페지기 스님은 어원분석과 함께 매우 친절하게 댓글을 달아 주었다. 그런데 글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인터넷에 떠돈다는 이러한 두루뭉술한 내용을 가지고는 저의 능력으로는 빠알리 삼장에 의거한 정확한 표기법에 대한 답변은 드릴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정확한 경전적인 근거가 없이 인터넷에 떠도는 표기법이나 지식은 무시하는 것이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hetu paticca phala' 의미가 무엇인지요?)

 

 

인터넷글쓰기에 대한 불신이라 보여 진다. 그래서 두루뭉술한 내용이라 하였는데 이는 무엇을 말할까? 학자나 기자나 작가 등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들이 늘 주장하듯이 인터넷에 올려진 글은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불신이 있기 때문에 카페지기 스님은 경전적인 근거가 없이 인터넷에 떠도는 표기법이나 지식은 무시하는 것이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지적에 기본적으로 동의 한다.

 

인터넷 진주가 되고자

 

대부분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글, 특히 불교와 관련된 글은 경전적 근거가 없이 작성된 것이 많다. 그러다 보니 경전을 왜곡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한 경우가 다반사이다. 특히 인터넷시대의 사생아라 볼 수 있는 단멸론자의 견해가 그렇다.  따라서 불자라면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을 작성하여야 한다. 그래야 정견(正見)이 되는 것이다.

 

경전을 근거로 작성된 글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인터넷에 올려진 글은 모두 쓰레기는 아닐 것이다. 쓰레기통속에서 장미를 발견하는 것이 여렵다고 하지만 쓰레기글로 넘쳐 나는 인터넷의 바다에서 잘 하면 진주를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따와나경(Jetavanasutta) 첫 번째 게송

 

상윳따니까야 데와따상윳따에 제따와나경(Jetavanasutta)이 있다. 아나타삔디까가 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세 개의 게송이 있는데 모두 아나타삔디까가 읊고 있다. 먼저 첫 번째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Idañhi ta jetavana

isisaghanisevita
Āvuttha dhammarājena

pītisañjanana mama.

 

 

[하늘사람]

 

여기 과연 제따 숲은

거룩한 님들의 모임이 있으며,

가르침의 제왕이 살고

나에게 기쁨이 생겨나는 곳이네.

 

(제따숲의 경, 상윳따니까야 S1.48, 전재성님역)

 

 

[급고독 천신]

 

이것이 바로 제따 숲

선인의 승가가 머물고

법왕께서 거주하니

내게 희열이 생기는 곳이랴.

 

(제따숲 경, 상윳따니까야 S1.48, 각묵스님역)

 

 

[The devata Aniithapindika:]

 

This indeed is that Jeta's Grove,

The resort of the Order of seers,

Dwelt in by the Dhamma King,

A place that gives me joy.'

 

(Jeta's Grove, 상윳따니까야 S1.48, 빅쿠 보디역)

 

 

 

 

Jetavana

 

 

각주에 따르면 제따와나경(Jetavanasutta)은 아나타삔디까가 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아나타삔디까는 살아 생전에 기원정사를 지어 부처님에게 보시하였다. 그런 공덕 등 으로 인하여 죽어서 천상에 태어났다. 그래서 하늘사람이 되어 부처님과 가르침과 사리뿟따를 찬탄하는 게송을 읊고 있다.

 

isisagha에 대하여

 

게송에서 번역어 차이가 나는 것이 두 개 눈에 띈다. 먼저 isisagha에 대한 것을 보면, 전재성님은 거룩한 님들의 모임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선인의 승가라 하였다.

 

isisagha에서 isi‘a saint, a sage, a holy man, , 仙人, 仙者, , 聖者의 뜻이다. 성인, 선인의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게송에서는 isisagha라 하였으므로 상가를 수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사쌍팔배의 성자의 모임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초불연의 경우 신선 선()’자를 사용하여 선인의 승가라 하였다. 빅쿠 보디는 the Order of seers’라 하였는데, 여기서 seer는 영어사전에 따르면 (문어) 예견하는[선견지명이 있는] 사람; 선각자; 예언자; 손금쟁이, 점쟁이라 설명되어 있다. 이 중에 고른다면 선각자가 될 것이다.

 

Dhammarāja에 대하여

 

게송에서 dhammarājena가 있다. 이는 dhammarāja+ena형이다. 여기서 dhammarāja ‘King of Dhamma, Buddha; king of justice or righteousness’의 뜻이다. 우리말로 담마의 왕, 법의 왕의 뜻이다. 이는 바로 부처님을 뜻한다. Dhammarāj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가르침의 제왕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한자어로 법왕이라 하였다. 빅쿠 보디는 Dhamma King’이라 하였다.

 

아나타삔디까가 기증한 제따와나는 부처님이 머물던 곳이다. 그런데 게송에서는 부처님에 대하여 dhammarāja라 하여 간접적으로 지칭하였다. 그렇다면 담마라자라는 말이 이 게송에서만 보이는 것일까? 숫따니빠따에서도 담마라자라는 말이 보인다.

 

 

Rājāhamasmi sela                 라자하마스미 셀라

dhammarājā anuttaro,             담마라자 아눗따로
Dhammena cakka
vattemi         담메나 짝깡 왓떼미

cakka appativattiya.          짝깡 압빠띠왓띠양

 

“셀라여, 왕이지만 나는

위 없는 가르침의 왕으로

진리의 바퀴를 굴립니다.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stn554)

 

(셀라경, 숫따니빠따 Sn3.7, 전재성님역)

 

 

셀라경에서 담마라자(dhammarājā) 라는 말이 보인다. 이는 부처님이 스스로 지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위없는 가르침의 왕 (dhammarājā anuttaro)’ 이라 하였다.

 

제따와나경(Jetavanasutta) 두 번째 게송

 

제따와나경(Jetavanasutta) 두 번째 게송은 다음과 같다.

 

 

Kamma vijjā ca dhammo ca

sīla jīvitamuttama,
Etena macc
ā sujjhanti

na gottena dhanena vā.

 

 

바른 행위, 밝은 지혜

가르침, 계행과 올바른 생활로

시람은 청정해지네.

가문이나 재산 때문이 아니네.

 

(제따숲의 경, 상윳따니까야 S1.48, 전재성님역)

 

 

의도적 행위와 명지가 있고

법과 계와 최상의 삶 갖춰있으면

이것으로 인간들은 청정해지지

가문-재산 때문이 아니라네.

 

(제따숲 경, 상윳따니까야 S1.48, 각묵스님역)

 

 

Action, knowledge, righteousness,

Virtue, an excellent life:

By this are mortals purified,

Not by clan or wealth.

 

(Jeta's Grove, 상윳따니까야 S1.48, 빅쿠 보디역)

 

 

게송에서는 가문이나 재산 때문에 청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 당시 요새말로 하면 재벌이나 다름 없었던 아나타삔디까는 무엇하나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아나타삔디까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예류과를 얻어 천상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 천상은 욕계 천상이 아니라 범천이다.

 

여기서 범천이라고 말한 것은 색계와 무색계를 아우르는 곳으로 부처님이 새롭게 해석한 천상의 개념이다. 따라서 바라문 처럼 태생이 좋다고 하여 범천에 나는 것도 아니고 재산이 많다고 범천에 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왜 부자가 천상에 태어나기 어려운가

 

재산이 많은 것에 대하여 범천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이는 재산형성과정에서 지은 행위 때문일 것이다. 재산형성과정에 있어서 불법, 탈법, 편법 등 온갖 부정적 수단이 동원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재산이 많다는 것은 현생에서 천상과 같은 즐거움을 누릴지 몰라도 그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어둠의 세계로 가기 쉬울 것이다.

 

 

대왕이여, 사람이 어떻게 해서 빛에서 어둠으로 가게 되는가. 대왕이여, 여기 어떤 사람이 부유하고 돈이 많고 호화롭고 금과 은이 많고 재물이 풍부하고 재산과 곡식이 많은 권세 있는 귀족의 집이나 권세 있는 성직자의 집이나 권세 있는 장자의 집과 같은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름답고 보기에 좋고 깨끗하고 연꽃과 같은 최상의 아름다움을 갖추었습니다. 그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탈 것, 꽃장식, 향료, 크림, 침대, , 등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몸으로 나쁜 일을 하고 말로 나쁜 일을 하고 마음으로 나쁜 일을 합니다. 그가 몸으로 나쁜 일을 하고 말로 나쁜 일을 하고 마음으로 나쁜 일을 하면 몸이 부서진 뒤 죽어서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다.

 

대왕이여, 예를 들면 사람이 궁전에서 코끼리의 어깨에 내리고 코끼리의 어깨에서 말의 등에 내리고 말의 등에서 수레로 내리고 수레에서 땅으로 내리고 땅에서 암흑으로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이 사람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빛에서 어둠으로 갑니다.

 

(Puggalasutta-사람의 경, 상윳따니까야 S3:21,전재성님역)

 

 

제따와나경(Jetavanasutta) 세 번째 게송

 

제따와나경(Jetavanasutta) 세 번째 게송은 다음과 같다.

 

 

Tasmā hi paṇḍito poso

sampassa atthamattano,
Yoniso vicine dhamma

eva tattha visujjhati.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유익함을 생각하여

이치에 맞게 가르침을 사유하여,

그곳에서 청정한 삶을 찾으리.

 

(제따숲의 경, 상윳따니까야 S1.48, 전재성님역)

 

 

그러므로 여기서 현명한 사람

자신의 이로움을 꿰뚫어 보아

지혜롭게 법을 깊이 검증할지라.

이와 같이 그곳에서 청정해지리.

 

(제따숲 경, 상윳따니까야 S1.48, 각묵스님역)

 

 

Therefore a person who is wise,

Out of regaid for his own good,

Should carefully examine the Dhamma:

Thus he is purified in it.

 

(Jeta's Grove, 상윳따니까야 S1.48, 빅쿠 보디역)

 

 

세번째 게송은 가르침의 실천에 대한 것이다. 가르침이 자신에게 유익한 것임을 안다면 이를 이치에 맞게 사유하여 자신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제따와나임을 말한다.

 

 

Vici 에 대하여

 

세번째 구절에 ‘Yoniso vicine dhammaṃ’가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이치에 맞게 가르침을 사유하여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지혜롭게 법을 깊이 검증할지라.”라 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서로 다른 문장처럼 보인다. 이는 vicine에 대한 해석차이라 보여진다.

 

PCED194에서 vicine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vi+ci+nā+ti’라 되어 있다. Vici에 대하여 검색하면 ‘a wave; an interval, , (時間)間隔라 되어 있다. vicikiccha라는 말이 있는데 의심이라는 뜻이다. 라따나경(Sn2.1)에서는 ‘vicikicchitañca’라 하여 전재성님은 매사의 의심이라 번역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vici라는 뜻은 매순간을 뜻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Yoniso vicine dhamma라 하였을 때 매순간 담마를 주의깊게 또는 지혜롭게 살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지혜롭게 법을 깊이 검증할지라라 하여 검증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빅쿠보디는 Should carefully examine the Dhamma”라 하였는데, 여기서 examine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는 조사하다, 검사하다, 시험하다’의 뜻이다.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manasikāra)

 

Yoniso vicine dhamma문구에서 yoniso가 있다. 이 요니소는 마나시까라와 함께 쓰여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manasikara)가 된다. 이를 한자어로 여리작의라 한다. 요니소마나시까라가 들어간 문장이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에 나온다. 빠알리원문과 두 개의 한글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Yoniso ca manasikāra ayoniso ca manasikāra. Ayoniso bhikkhave manasikaroto anuppannā ceva āsavā uppajjanti uppannā ca āsavā pavaḍḍhanti.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과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올이는 것이 있는데, 수행승들이여,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아직 생겨 나지 않는 번뇌가 생겨나고 생겨난 번뇌는 더욱 증가한다.

 

(M2, 성전협 전재성님역)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과 지혜없이 마음에 잡도리함이다. 비구들이여, 지혜없이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번뇌들은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번뇌들은 증가한다.

 

(M2, 초불연 대림스님역)

 

 

Yoniso ca manasikār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이라 하였고, 대림스님은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이라 번역하였다. 여기서 Yoniso ‘wisely; properly , 根源より, 根本的의 뜻이고, Manasikāra‘ideation; consideration, 作意, 思念, 注意의 뜻이다. 따라서 Yoniso manasikāra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이다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이라 하여 잡도리함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 용어는 선가에서 사용할 뿐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렇게 Yonisomanasikāra와 함께 쓰이는 것으로 보아 게송의 세번째 문구인 Yoniso vicine dhamma에서 YonisoYoniso manasikāra의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매순간 담마를 지혜롭게 관찰한다라는  뜻이라 볼 수 있다.

 

제따와나경(Jetavanasutta) 네 번째 게송

 

제따와나경(Jetavanasutta) 네 번째 게송은 다음과 같다.

 

 

Sāriputtova paññāya

sīlenupasamena ca,
Yopi p
āragato bhikkhu

etāva paramo siyā'ti.

 

 

싸리뿟따가 지혜와

계행과 적정(寂靜)으로 최상인 것처럼

저 언덕에 도달한 수행승이야말로

참으로 가장 수승하리라.

 

(제따숲의 경, 상윳따니까야 S1.48, 전재성님역)

 

 

사리뿟따께서는 통찰지와 계

고요함을 두루 구족했나니

저 언덕에 도달한 비구 있다면

잘해야 그분과 동등할 정도.

 

(제따숲 경, 상윳따니까야 S1.48, 각묵스님역)

 

 

Sgriputta truly is endowed with wisdom,

With virtue and with inner peace.

Even a bhikkhu who has gone beyond

At best can only equal him. (*72)

 

(Jeta's Grove, 상윳따니까야 S1.48, 빅쿠 보디역)

 

 

네 번째 게송은 사리뿟따존자에 대한 찬탄이다. 이 네번째 게송으로 보아 부처님 당시 대부호 아나타삔디까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헌신(獻身)’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한다.

 

위대한 지혜를 지닌 자 가운데 제일(mahāpaññāna agga), 사리뿟따존자

 

죽어서 범천에 태어난 이전의 아나타삔디까는 사리뿟따를 극찬하고 있다. 사리뿟따는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지혜제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경에서는 위대한 지혜를 지닌 자 가운데 제일(mahāpaññāna agga)이다.

 

게송에서는 네번째 구절에서 사리뿟따에 대한 극찬으로서 etāva paramo siyā'ti 라는 문구가 보인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참으로 가장 수승하리라.”라 하였고, “잘해야 그분과 동등할 정도.”라고 하여 서로 다른 말처럼 보인다. 이는 etāva paramo siyā에 대한 번역의 차이라 보여 진다.

 

etāva에서 etā‘that; this’의 뜻이다. Parama‘superior; best; excellent, 最高的, 最上的으로 최상이라는 뜻이다. Siyā에 대한 영문설명은 보이지 않으나 일본어에는 ‘atthi ① opt. あるであろう, あれかし라 되어 있다. 굳이 해석하자면 있을까?”라는 뜻이다. 따라서 etāva paramo siyā의 구문은 이처럼 최상이 있을까?”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etāva paramo siyā구문에 대한 번역을 보면 서로 다른 말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다르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단서로 초불연 각주를 들 수 있다. 이 구절에 대한 각주를 보면 열반을 증득한 비구라 할지라도 그와 동등할 뿐이지(etāva paramo siyā)’장로를 넘어서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SA.i.89)”라고 주석을 인용하여 설명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초불연에서 잘해야 그분과 동등할 정도.”라고 번역한 것은 주석을 참고한 주석적 번역이라 보여 진다. 그래서 성전협의  참으로 가장 수승하리라.”와 비교하였을 때 전혀 다른 말차럼 보이는 보이는 것이다.

 

안하는 것인가 못하는 것인가

 

인터넷시대가 도래 하면서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자유롭게 살고 있기 때문에 글을 쓰고 있다. 그럼에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도 있다. 재가자 주제에 글을 쓴다는 것이다.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스님도 함부로 인터넷에 글을 올리지 않고 또 불교학을 전문으로 하는 학자도 함부로 글을 쓰지 않는데 재가자 주제에 무엇을 안다고 함부로 글을 쓰냐는 것이다.  

 

수행의 경험이 풍부하다거나 교학적인 지식이 있어서 글을 올리는 것은 아니다. 노느니 염불한다고 이왕이면 남는 시간에 또는 일부로 시간을 내서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런 글이 전문가들 입장에서 본다면 아마츄어로 보일 것이다. 그러건 말건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이렇게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실려 있는 정보는 고려할 가치가 없는 쓰레기로 보는 것이다. 진짜 중요한 정보는 숨겨 놓고 내놓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어느 카페지기 스님은 정확한 경전적인 근거가 없이 인터넷에 떠도는 표기법이나 지식은 무시하는 것이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것이라 본다.

 

수행을 많이 한 스님들이 글을 써야 한다. 글을 써서 단행권으로 출간하는 것도 좋지만 인터넷에 글을 올려 놓으면 누군가 감명 받을지 모른다.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 역시 글을 써야 한다. 학회나 학술지에 올릴 논문에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 정기적으로 글을 올려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담마에 대한 갈증이 있는 불자들에게나 후학들에게 훌륭한 법보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스님들이나 학자들이 블로그나 카페를 만들어 놓고 지속적으로 글을 올리는 경우는 극히 드믈다. 설령 인터넷공간을 활용한다고 해도 어쩌다 한 번 볼 수 있다. 왜 그런 것일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인터넷글쓰기에 대하여 '시간낭비'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돈도 되지 않는 글쓰기에 시간투자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 일 것이다. 또 하나는 모두 바빠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일년 내내 바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돈도 되지 않고 그렇다고 알아 주지도 않는 인터넷 글쓰기에 귀중한 시간을 투자할 스님과 학자는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스님들과 학자들의 10% 정도 만이라도 최소한 일주일 한 번, 한달에 네 번 정도만 올려 주어도 십자가가 넘치는 세상에서 불자들의 갈증을 풀어 줄 것이다.

 

스님들이나 학자들의 글보기가 가뭄에 콩나듯 하다. 그 많은 스님들과 학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돈이 전혀 들지 않는 인터넷공간에서 인터넷 불사를 한다면 불자들이 환호 할 텐데 왜 안하는 것일까 아니면 못하는 것일까? 안한다고 하면 직무유기에 해당되고, 못한다면 한국불교 망신에 해당될 것이다. 스님과 학자, 안하는 것인가 못하는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2014-03-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