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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 반복구문 뻬얄라(peyyala), 삽입인가 생략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2. 25. 18:31

 

 

니까야 반복구문 뻬얄라(peyyala), 삽입인가 생략인가

 

 

 

불교의 생명중시사상

 

불교는 유일신교와 다른 것이 많다. 그 중에 하나가 생명중시사상이다. 유일신교의 경우 인간을 신의 창조물로 보아 살인을 하지 말라 하였다. 이처럼 인간중심으로 본 것이 유일신교에서 생명중시사상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인간 뿐만 아니라 목숨이 붙어 있는 모든 생류에 대하여 살생하지 말라고 하였다. 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 그것은 불교에서 볼 수 있는 윤회사상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윤회한다고 본다. 그래서 지옥,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이렇게 여섯 가지 길로 윤회한다고 하여 육도윤회한다고 한다. 초기경에서는 동물과 관련된 윤회이야기도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Dīgharatta vo bhikkhave, gunna sata gobhūtāna sisacchinnāna lohita passanna paggharita, na tveva catusu mahāsamuddesu udaka.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소로 태어나 소가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Tisamattasutta-삼십 명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1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라고 말씀 하셨다. 왜 시작을 알 수 없다고 하였을까? 경에서는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창조신에 의하여 피조물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을 알 수 없으면 끝 역시 알 수 없다. 무명이 원인이 되어 갈애로 유전하는 뭇삶들은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삼계와 육도를 윤회 한다. 그래서 한량없는 기간동안 윤회하면서 소로도 태어났을 것이라 한다.

 

전형적인 반복구문

 

소로 태어나면 어떻게 될까? 뼈빠지게 일하다가 결국 도살장으로 가게 된다. 목이 잘려 죽게 되는데 그 때 흘린 피의 양이 사대양의 물보다도 더 많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소로 태어나서 죽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였음을 말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물소, , 염소,  사슴, , 돼지 등으로 태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여러 동물로 태어날 때 마다 목이 잘려 죽었는데 그때 흘린 피가 사대양의 물 보다 더 많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문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Dīgharatta vo bhikkhave, mahisāna sata mahisabhūtāna sisacchinnāna lohita passanna paggharita, na tveva catusu mahāsamuddesu udaka.

 

Dīgharatta vo bhikkhave, ajāna sata ajabhūtāna sīsacchinnāna lohita passanna paggharita, na tveva catusu mahāsamuddesu udaka.

 

Dīgharatta vo bhikkhave, urabbhāna sata urabbhabhūtāna sīsacchinnāna lohita passanna paggharita, na tveva catusu mahāsamuddesu udaka.

 

Dīgharatta vo bhikkhave,migāna sata migabhūtāna sīsacchinnāna lohita passanna paggharita, na tveva catusu mahāsamuddesu udaka.

 

Dīgharatta vo bhikkhave, sūkarāna sata sūkarabhūtāna sīsacchinnāna lohita passanna paggharita, na tveva catusu mahāsamuddesu udaka.

 

Dīgharatta vo bhikkhave, kukkuāna sata kukkuabhūtāna sīsacchinnāna lohita passanna paggharita, na tveva catusu mahāsamuddesu udaka.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물소로 태아나 물소가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양으로 태아나 양이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염소로 태아나 염소가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사슴으로 태아나 사슴이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돼지로 태아나 돼지가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으로 태아나 이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Tisamattasutta-삼십 명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13, 전재성님역)

 

 

 

이와 같은 구문은 초기경전에서 보는 전형적인 반복구문이다. 이런 반복구문을 싣는 것은 외우기 좋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뜻을 강조하는 목적도 있다.

 

초불연의 생략구문

 

그러나 일부 번역서를 보면 반복구문이 생략된 경우도 있다. 초불연 번역이 대표적이다. 위 부분과 관련된 초불연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은 오랜 세월 치달리고 윤회하는 동안 소가 되어 소로 태어나서 머리가 잘려 흘리고 내 뿜는 피와….

물소가 되어 물소로 태어나서 머리가 잘려 흘리고 내뿜은 피와

양이 되어 양으로 태어나서 머리가 잘려 흘리고 내뿜은 피와

염소가 되어 염소로 태어나서 머리가 잘려 흘리고 내뿜은 피와

사슴이 되어 사슴으로 태어나서 머리가 잘려 흘리고 내뿜은 피와

닭이 되어 닭으로 태어나서 머리가 잘려 흘리고 내뿜은 피와

돼지가 되어 돼지로 태어나서 머리가 잘려 흘리고 내뿜은 피와

 

(삼십 명 경, 상윳따니까야 S15:13, 각묵스님역)

 

 

초불연 번역을 보면 반복구문이 생략 되어 있다. 이는 “…흘리고 내뿜은 피가 더 많다. 사대양에 있는 물이 많은 것은 아니다.”라는 문구가 생략 된 것이다. 하지만 생략된 구문만을 보면 어떤 말인지 알 수 없다. 이전의 문장을 보아야 알 수 있다.

 

생략은 전통적인 방법이라고

 

초불연에서는 왜 이와 같이 반복구문을 생략하였을까? 이는 해제글을 보면 알 수 있다. 반복구문 생략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방침을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출간하는 상윳따니까야6권을 번역하면서 고수한 원칙 몇 가지를 밝히고자 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먼저 밝히고자 하는 점은 반복되는 구문과 정형구들은 생략하여 옮겼다는 것이다. ? 이것이 전통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각묵스님, 상윳따니까야 1권 해제)

 

 

상윳따니까야 번역자 각묵스님에 따르면 반복구문은 과감하게 생략하였다고 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생략하는 것이 전통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PTS본을 보면 반복 구문이 모두 실려 있다.

 

각묵스님이 말한 전통적인 방법이란 무엇일까? 이어지는 해제글에서 합송(sangati)을 들고 있다. 초기경전은 합송으로 전승되어 왔는데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일종의 합창대회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합송으로 인하여 경의 도입 부문과 전개 부문이 같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형구로 정착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런 정형구를 모두 다 외게 되면 그 분량이 엄청 나게 커질 것이라 한다. 그래서 기원전 1세기 스리랑카 알루위하라에서 삼장이 문자로 정착될 때 정형구가 생략하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이후 현존하는 모든 필사본들은 생략이 되어서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PTS본의 경우 반복 구문이 생략이 되어 있지 않다.

 

반복구문생략 이유 세 가지

 

이와 같은 반복구문 생략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또 다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거듭말하지만 이것은 역자가 임으로 생략한 것이 결코 아니다. Ee, Be, Se에서 모두 생략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을 다 살려 독송하거나 편집하거나 번역한다면 기력도 소진되고, 전체 뜻을 파악하는데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고, 많은 종이가 낭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모든 판본은 이렇게 생략하여 편집하고 있고, 영역본을 비롯한 모든 번역서에서도 생략하고 있다.

 

(각묵스님, 상윳따니까야 1권 해제)

 

 

각묵스님은 반복구문 생략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이 있듯이 스님 자신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생략한 것이 아니라 한다. 그래서 Ee(PTS), Be(미얀마본), Se(스리랑카본)에서도 생략구문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에 실린 PTS본에는 반복구문이 실려 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각묵스님은 반복구문생략 이유로서 크게 세 가지로 들고 있다. 1) 기력소진, 2)전체 뜻 파악에 장애, 3)종이낭비 이렇게 세 가지를 들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본다.

 

방대한 니까야를 번역하는데 있어서 힘이 드는 것은 사실일지 몰라도 부처님 원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는 사명감을 가진다면 기력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또 전체 뜻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거꾸로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반복구문이 있음으로 인하여 오히려 부처님이 강조하고자 하신 말씀이 더 드러나기 때문이다. 끝으로 종이낭비라 하였는데 이 것 역시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본다. 반복구문이 실리면 권수가 늘어 나는 것은 맡지만 그렇게 많이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 본다.

 

참고로 성전협의 전재성님의 번역방침은 반복구문을 빠짐 없이 실었다. 심지어 원본에서 생략된 반복 구문을 복원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한 결과 상윳따니까야 개정판의 경우 7권으로 되었다. 이는 반복구문을 생략하여 번역한 초불연의 상윳따니까야 6권과 1권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따라서 종이낭비라고 말한 것은 큰 이유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본다.

 

남들이 하니까 우리도 그렇게 한다?

 

각묵스님은 반복구문 생략과 관련하여 또 중요한 말을 하였다. 그것은 영역본을 비롯한 모든 번역서에서도 생략하고 있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자칫잘못 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영역본에서 생략하였기 때문에 우리도 따라서 생략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해의 논란이 있는 말을 실제로 하였다. 다음과 같은 글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경을 번역하면서 이러한 정형구를 모두 복원해서 번역할 까 고민하였다. 그러나 Ee, Be, Se와 태국본과 여러 나라에 남아 있는 필사본들 등 전통적인 모든 판본에서 예외 없이 생략해서 편집한 이런 입장과 이런 태도를 존중하는 것이 후학의 태도라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판본에서 생략한 정형구는 대부분 생략하여 옮기기로 하였다.

 

(각묵스님, 상윳따니까야 1권 해제)

 

 

각묵스님의 글을 보면 마치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우리도 그렇게 한다라는 뜻으로 비추어진다. 특히 영역본에서도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우리도 그렇게 한다라 하였는데 이는 빅쿠 보디의 영역본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이는 경의 제목과 관련하여 보디스님의 제안을 따른 경우기 많다.”라고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또 해제글의 맺는 말에서 빅쿠 보디에 대한 감사의 글을 올려 놓았는데 다음과 같다. 

 

 

역자가 꼭 밝히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본서 번역에 있어서 보디 스님이 10여 년간 노력하여 번역 출간한 ‘상윳따 니까야’ 영역본인 The Connected Discourses of the Buddha(vol. 1&2)를 많이 참조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보디 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달아 놓은 주옥 같은 주해들은 역자의 번역과 주해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각묵스님, 상윳따니까야 해제 ‘맷는 말’)

 

 

각묵스님은 빅쿠 보디에 감사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상윳따니까야 영역본 CDB(The Connected Discourses of the Buddha)의 저자 빅쿠 보디에게 신세를 많이 졌음을 밝히고 있다. 또 영역본을 많이 참조 하였다고 했다. 이렇게 빅쿠 보디에 대한 감사의 글은 해제 글에서 여러 번 나오는데 보디스님께 절을 올리면서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라고 하여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보디스님이 심혈을 기울여서 번역한 영역본이 큰 위안과 안심이 되었다.”라고 밝히면서 빅쿠 보디의 CDB에 크게 의존하였음을 간접적으로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빅쿠 보디의 생략구문을 보면

 

빅쿠 보디의 영역본 CDB에서 삼십명의 경(Tisamattasutta, S15:13)을 찾아 보았다. 초불연에서 크게 의존한 CDB에서는 동물들이 윤회하며 흘린 피에 대하여 어떻게 영역되어 있을까?

 

 

For a long time, bhikkhus, you have been cows, and

when as cows you were beheaded, the stream of blood that you

shed is greater than the waters in the four great oceans.

 

For a long time you have been buffalo, sheep, goats, deer, chickens,

and pigs.. ..

 

(Thirty Bhikkhus, S15:13, CDB, 빅쿠보디역)

 

 

 

빅쿠 보디의 영역을 보면 반복구문이 생략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동물들 중에 가장 처음 등장하는 소에 대해서만 완전한 문장이 구성되어 있을 뿐 이어지는 동물들에 대해서는 단지 “buffalo, sheep, goats, deer, chickens, and pigs.. ..”라 하여 이름만 나열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매우 간결한 구성이다. 그렇다면 빅쿠 보디는 왜 이렇게 단어 나열식으로 끝내 버린 것일까?

 

반복구문을 부정적으로 본 빅쿠보디

 

이와 같은 반복구문의 생략에 대하여 빅쿠 보디는 CDB해제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The Repetitions

 

Readers of the Pali suttas are invariably irked, and sometimes dismayed, by the ponderous repetitiveness of the texts. In SN these are more blatant than in the other Nikayas, even to the extent that in whole vaggas the suttas might differ from one another only in regard to a single word or phrase.

 

Besides this type of reiterative pattern, we also come across the liberal use of stock definitions, stereotyped formulas, and pericopes typical of the Niksyas as a whole, stemming from the period when they were transmitted orally.

 

It is difficult to tell how much of the repetition stems from the Buddha himself, who as an itinerant teacher must have often repeated whole discourses with only slight variations, and how much is due to zealous redactors eager to ring every conceivable change on a single idea and preserve it for posterity.

 

It is hard, however, not to suspect that the latter have had a heavy hand in the redaction of the texts. To avoid excessive repetitiveness in the translation 1 have had to make ample use of elisions. In this respect I follow the printed editions of the Pali texts, which are also highly abridged, but a translation intended for a contemporary reader requires still more compression if it is not to risk earning the reader's wrath.

 

On the other hand, I have been keen to see that nothing essential to the original text, including the flavour, has been lost due to the abridgement. The ideals of considerateness to the reader and fidelity to the text sometimes make contrary demands on a translator

 

The treatment of repetition patterns in which the same utterance is made regarding a set of items is a perpetual problem in translating Pali suttas. When translating a sutta about the five aggregates, for example, one is tempted to forgo the enumeration of the individual aggregates and instead turn the sutta into a general statement about the aggregates as a class. To my mind, such a method veers away from proper translation towards paraphrase and thus risks losing too much of the original text.

 

My general policy has been to translate the full utterance in relation to the first and last members of the set, and merely to enumerate the intermediate members separated by ellipsis points. Thus, in a sutta about the five aggregates, I render the statement in full only for form and consciousness, and in between have "feeling . . . perception . . . volitional formations . . .," implying thereby that the full statement likewise applies to them. With the bigger sets I often omit the intermediate terms, rendering the statement only for the first and last members.

 

This approach has required the frequent use of ellipsis points, a practice which also invites criticism. Several consulting readers thought I might improve the aesthetic appearance of the page (especially in Part N) by rephrasing repetitive passages in a way that would eliminate the need for ellipsis points.

 

I accepted this suggestion in regard to repetitions in the narrative framework, but in texts of straight doctrinal exposition I adhered to my original practice. The reason is that I think it an important responsibility of the translator, when translating passages of doctrinal significance, to show exactly- where text is being elided, and for this ellipsis points remain the best tool at hand.

 

(The Repetitions 41-42P, General In froduction, CDB, 빅쿠 보디)

 

 

문단은 편의상 나눈 것이다. 빅쿠 보디는 반복구문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이는 The Repetitions’ 서문에서 빠알리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다루기힘든 반복구문은 항상 괴롭히고, 때로 낙담하게 한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반복구문에 대하여 부처님이 진짜 반복구문으로 말씀 하셨는지 의문이라 하였다.

 

또 빅쿠보디는 반복구문에 대하여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 하였다. 스승에서 제자에게 구전으로 전승할 때 반복구문을 만들어 외우기 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반복구문이 부처님의 직설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반복구문을 과감하게 생략하였다고 한다.

 

뻬얄라(peyyala) 처리에 대하여

 

빅쿠 보디는 해제에서 반복구문에 대한 예를 제시 하였다. 오온에서 물질에 대한 설명은 완전한 문장으로 써 주지만 반복구문이 들어간 나머지에 대해서는 "feeling . . . perception . . . volitional formations . . .,"로 하여 점점점으로 처리하였다고 밝히고 있더. 이런 점점점…’처리에 대한 각묵스님의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렇게 생략된 정형구는 전통적으로 빼얄라(peyyala)라는 전문술어로 표현하는데 줄어서 ‘pe’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초기불전 즉 빠알리삼장 전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전의 편집방법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 빼얄라 를 모두 ‘…’라는 생략부호로 표기하고 있다.

 

(각묵스님, 상윳따니까야 1권 해제)

 

 

‘점점점’처리하는 것에 대하여 ‘뻬얄라(peyyala)’라 한다. 이런 방식은 기록된 빠알리삼장 전체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라 한다. 그래서 원본에 충실하고자 반복구문을 생략하고 ‘…’ 방식으로 처리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초불연의 점점점…’처리

 

초불연 번역서에서 점점점…’처리한 부분에 대한 또 다른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태어남 경 등(S12:72~82)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태어남을(S12:72)…존재를(S12:73)…취착을(S12:74)…갈애를(S12:75)…느낌을(S12:76)…감각접촉을(S12:77)…여섯감각장소를(S12:78)…정신-물질을(S12:79)… 알음알이를(S12:80)…[130]의도적 행위들을(S12:81)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의도적 행위들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의도적 행위들의 소멸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의도적 행위들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 누구든지, 사문들 가운데는 사문이라 불릴 수 없고 바라문들 가운데는 바라문이라 불릴 수 없다. 그 존자들은 사문생활의 결실이나 바라문 생활의 결실이나 바라문 생활의 결실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내지 못한다.

 

(S12:72~82, 각묵스님역)

 

 

이 경은 인연상윳따(S12)에서 72번경 부초 시작하여 82번경까지에 대하여 모두 한꺼번에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경의 제목이 태어남 경 등(S12:72~82)’라 되어 있다.

 

72번 경을 보면 ‘태어남을(S12:72)…’라고 표현 하였다. 여기서 ‘점점점’으로 표현한 것은 후반부 반복구문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십이연기에서 지루하게 반복되는 문구에 대하여 “태어남을(S12:72)…존재를(S12:73)…취착을(S12:74)…”식으로 표현함으로써 간략화 한 것이다. 이런 방식이 문자로 기록되어 전승된 빠알리삼장에서 보는 뻬얄라(peyyala)라 한다.

 

빅쿠보디의 뻬얄라 처리를 보면

 

이와 같은 빼얄라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어떻게 영역하였을까? 동일경에 대하여 CDB를 보면 다음과 같다.

 

 

72 (2)-81 (11) Birth, Etc.

 

"Bhikkhus, those ascetics or brahmins who do not understand birth ... existence ... clinging ... craving ... feeling ... contact ... the six sense bases . . . name-and-form . . . consciousness [I301 . . . volitional formations, their origin, their cessation, and the way leading to their cessation: these I do not consider to be ascetics among ascetics or brahrnins among brahmins, and these venerable ones do not, by realizing it for themselves with direct knowledge, in this very life enter and dwell in the goal of asceticism or the goal of brahrninhood.

 

(빅쿠 보디역, CDB 1권 619페이지)

 

 

경의 제목을 보면 ‘72 (2)-81 (11) Birth, Etc’  되어 있다. 이는 초불연에서 제목을 붙인 태어남 경 등(S12:72~82)’라 한 것과 동일한 형식이다. 또 번역을 보면 ‘birth ... existence ... ~”로 뻬얄라처리 하였는데 이런 방식 역시 초불연의 태어남을(S12:72)…존재를(S12:73)…’라고 한 것과 역시 동일하다.

 

번역자들의 수고로 인하여

 

이와 같이 CDB와 초불연 번역에서는 반복구문에 대하여 점점점(…)으로 표시된 뻬얄라 처리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성전협의 전재성님은 S12:72~82에 대하여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S12:72에 대한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Ye hi ke ci bhikkhave, samaā vā brāhmaā vā jāti nappajānanti, jātisamudaya nappajānanti, jātinirodha nappajānanti, jātinirodhagāmini paipada nappajānanti. Namete bhikkhave, samaā vā brāhmaā vā samaesu vā samaasammatā, brāhmaesu vā brāhmaasammatā, na ca pana te āyasmanto sāmaññattha vā brahmaññattha vā diṭṭheva dhamme saya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n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라도 태어남을 완전히 알지 못하고 태어남의 원인을 완전히 알지 못하고 태어남의 소멸을 완전히 알지 못하고 태어남의 소멸에 이끄는 길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수행자나 성직자는 내게 있어서 수행자로서 올바른 수행자가 아니며 성직자로서 올바른 성직자가 아니다. 또한 이 존자들은 수행자의 목표나 성직자의 목표를 바로 현세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하지 못한다.

 

(Jātisutta-태어남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72, 전재성님역)

 

 

사성제의 진리를 모르는 자는 올바른 수행자가 아니라 하였다. 그리고 사성제를 모르는 자들은 결코 현세에서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하였다. 이렇게 태어남(jāti)’에 대하여 사성제의 네 개의 구절에 대입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십이연기에 모두 적용할 수 있는데, 전재성님의 경우 모두 개별적으로 적용하였다. 그래서 태어남의 경(S12.72), 존재의 경(S12.73), 집착의 경(S12.74) 등 과 같이 여러 개의 단독 경으로 번역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무려 7페이지에 걸쳐 실려 있다. 

 

그러나 뻬얄라를 적용하면 태어남을(S12:72)… 존재를(S12:73)… 취착을(S12:74)…~’이나 ‘birth ... existence ... clinging ...~’로 되어 단 두 줄로 끝난다. 이렇게 점점점(…)’으로 표기 하면 번역하는데 있어서 기력의 낭비나 인쇄후에 종이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가 보기에는 반복구문이 실려 있더라도 지루하긴 하지만 한눈에 내용이 들어 온다. 번역자들의 수고로 인하여 독자들은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반복구문삽입과 반복구문생략, 어느 것이 좋은가?

 

초기경전을 보면 수 많은 반복구문을 볼 수 있다. 오온이라면 색수상행식에 대하여 다섯 번 반복된다. 칠각지라면 일곱번 반복 된다. 이런 반복구문에 대하여 찬반양론이 있을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다. 성전협과 초불연에서 발간된 것들이다. 그런데 번역의 내용을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대표적으로 반복구문을 들 수 있다. 성전협의 경우 반복구문이 하나도 빠짐 없이 모두 실려 있다. 반면 초불연 번역을 보면 반복구문이 생략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번역 방침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한다.

 

 

 

 

 

성전협 번역에서는 왜 반복구문이 모두 실려 있을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맛지마니까야 일러두기에서 “구전 되어 온 빠알리 문헌의 특성상 문장의 반복과 유사한 용어의 반복이 많다. 그러나 말 하나하나가 고유한 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번역 과정에서 함부로 고칠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반복구문에 대하여 하나도 빠짐 없이 실었다고 하였다. 심지어 “모든 경에서 생략된 내용들은 모두 복원해서 독자가 알기 쉽게 했다.”라고 하였다. 반복구문을 모두 실은 것은 전승된 내용을 고스란히 보전하기 위함이고 또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반면 초불연에서는 반복구문을 생략하였다. 생략한 이유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전통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생략하였다고 하였다. 전승된 판본에는 모두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생략하는 것이 후학의 태도라 강조 하였다. 또 반복구문이 들어가면 전체를 파악하는데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하였다. 이는 성전협에서 주장하는 것과 정반대이다. 더구나 각묵스님은 반복구문을 넣는 것에 대하여 기력소모종이낭비로 보았다. 결정적으로 영역본을 비롯한 모든 번역서에서도 생략하고 있다라고 주장하며 반복구문생략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 하였다. 이런 번역 방침은 자주불교를 강조하는 초불연의 방침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본다. 자주불교는 자주번역에서 시작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반복구문삽입과 반복구문생략, 이렇게 두 개의 빠알리니까야 번역서를 가지고 있다. 어느 것이 좋을지는 독자의 판단이다.

 

 

 

2014-02-2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