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게! 저승갈 때 뭘 가져가지?” 뿐냐(功德行)와 빠빠(惡行)
어느 스님이 쓴 책이 있다. 책의 제목은 ‘여보게! 저승갈 때 뭘 가져가지?’이다. 이 책을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았다. 그러나 제목이 마음에 들어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늙어서 죽는다. 또 언제 어떻게 죽을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지금 살아 있어도 기대수명 만큼 산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기대수명은 단지 기대일 뿐이다. 그렇다면 저 세상에 갈 때 무엇을 가져 가야 할까?
Annamevābhinandanti ubhaye devamānusā,
Atha ko nāma so yakkho yaṃ annaṃ nābhinandatīti.
(Bhagavā:)ye naṃ dadanti saddhāya vippasannena cetasā,
Tameva annaṃ bhajati asmiṃ loke parambhi ca,
Tasmā vineyya maccheraṃ dajjā dānaṃ malābhibhū
Puññāni paralokasmiṃ patiṭṭhā honti pāṇinanti.
(Annasutta, S1.43)
[천신]
“신과 인간은 모두 음식을 즐깁니다.
그런데 그는 어떤 약카이기에
음식을 즐기지 않나이까?”
[세존]
“믿음과 깨끗한 마음으로 [음식을] 보시하면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먹을 것이 절로 생기리.
그러므로 인색함을 길들여야 하나니
[인색의] 더러움을 정복한 자는
보시를 받들어서 실천하노라.
그가 짓는 공덕은 저 세상에서
뭇 생명들의 의지처가 되노라.”
(음식 경, S1.43, 각묵스님역)
[하늘사람]
“모든 하늘사람과 사람들은
먹을 것을 즐기지만
먹을 것을 즐기지 않는
야차는 참으로 누구입니까?”
[세존]
“믿음과 즐거운 마음으로
음식을 베푸는 사람은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먹을 것이 따르네.
인색함을 반드시 이겨서 마음의
티끌을 극복하고 보시해야 하리.
이러한 공덕은 저 세상에서
뭇삶들에게 의지처가 되리.”
(먹을 것의 경, S1.43, 전재성님역)
"They always take delight in food,
Both devas and human beings.
So what sort of spirit could it be
That does not take delight in food?"(*97)
"When they give out of faith
With a heart of confidence,
Food accrues to [the giver] himself
Both in this world and the next.
"Therefore, having removed stinginess,
The conqueror of the stain should give a gift.
Merits are the support for living beings
[When they arise] in the other world."
( Food, S1.43, 빅쿠 보디역)
왜 야차라 하였을까?
데와따(하늘사람)가 읊은 게송을 보면 yakkha(약카)가 나온다. 이를 한자어로 야차( 夜叉) 라 한다. 영어로는 ‘a kind of ghost’ 또는 ‘a demon’으로 설명 되어 있다.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이 게송에서 야차의 의미는 ‘낯선 사람의 이미지’로 쓰였다고 하였다. 이는 하늘사람이 부처님을 보고서 하는 말이다. 처음 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저 ‘이상하게 생긴 사람’ 정도의 의미로 본다. 이 게송에서 지칭되고 있는 야차에 대하여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97)
Yakha in pads c is glossed by Spk-p;t as satta. Although ko is an interrogative, it seems that the sentence is declarative in force. The verse may be echoing the Taittiriyaka Upanisad, II.2, III.2, 7-10.
(97번 각주, 빅쿠 보디)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복주석에 따르면 c구절에서의 야카는 삿따(중생)이라고 주해 되어 있다. 비록 ko가 의문을 나타내는 것일지라도 이것은 문장을 강렬하게 서술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게송은 우파니사드 II.2, III.2, 7-10에 나오는 타잇띠리야카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97번 각주 번역)
빅쿠 보디에 따르면 하늘사람이 야차라고 지칭한 것은 ‘강한 효과’를 얻기 위해서 라고 한다. 아마도 하늘사람은 부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어떤 야차이냐?”는 식으로 말한 것은 좀더 주의를 끌기 위한 화법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화법은 요즘도 통용 된다. “너는 뭐하는 물건이냐?”처럼 일종의 충격요법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빠알리 원문에서는 “Atha ko nāma so yakkho” 라 하였다. 여기서 ko는 의문사로서 ‘who?’의 뜻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야차는 참으로 누구입니까?”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어떤 약카이기에”라 하였고, 빅쿠 보디는 “what sort of spirit”라 하였다.
뿐냐(Puññā)와 빠빠(Pāpa)
하늘사람은 게송에서 먹을 것을 즐기지 않는 부처님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대체 “어떤 야차이길레 먹을 것을 즐기지 않는 것이냐?”식으로 말한다. 중생들에게 있어서 먹을 것이 커다란 즐거움이자 삶의 의미임에도 부처님이 음식에 대하여 즐기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이상하게 본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하늘사람이 잘못 짚은 것이다. 탁발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수행자에게 있어서 음식을 즐기며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탁발수행자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걸식에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주는 대로 먹는다. 따라서 누군가 음식 보시를 해 주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음식을 베푸는 사람에 대하여 “공덕은 저 세상에서 뭇삶들에게 의지처가 되리”라고 하여 보시 공덕에 대하여 칭찬하고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게송에서 키워드는 ‘뿐냐(Puññā)’이다. 이를 두 번역자는 ‘공덕’이라 하였고, 빅쿠 보디는 ‘Merits’라 하였다. 공덕이라고 번역되는 뿐냐와 항상 대비 되어 쓰이는 용어가 악행이라 번역되는 ‘빠빠(Pāpa)’이다. 이 뿐냐와 빠빠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선과 악을 나타내는데 사용된 두 가지 다른 술어는 뿐냐(punna, 福)와 빠빠(papa, 惡)이다. 이것들은 간혹 공덕(功德, merit)과 죄(罪, sin)로 번역되기도 했다.
주석자 담마빨라(Dhammapala)는 뿐냐(punna)를 '마음을 정화하고 가득 차게 한 것'(santanam punati, visodheti)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이 술어를 다룬 팔리성전협회(PTS) 사전에서 뿐냐(punna)는 언제나 천상의 재생과 미래의 축복 받는 상태의 기초와 조건, 과거생에 쌓여진 공덕에 의존하여 즐김과 지속기간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빠빠(papa)는 '불행의 상태에서의 고통의 기초와 조건'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선과 악의 기준 , 위라라트네(W.G. Weeraratne) 지음/ 마성스님 옮김)
청정한 수행자에게 공양물을 제공하는 것은 공덕행에 속한다. 이런 공덕이 쌓이고 쌓이면 큰 무형의 재산이 된다. 그런데 게송에 따르면 이런 공덕행은 저 세상에 갈 때 큰 ‘의지처’가 된다고 하였다. 그 동안 베푼 공덕행에 대한 과보는 저 세상에 갈 때 든든한 ‘노자돈’과 같은 것으로 본다.
오로지 앞만 보고 가는 사람
오로지 앞만 보고 가는 사람이 있다. 호주머니에 들어 온 돈은 함부로 나가는 법이 없다. 아끼고 아껴서 30평 아파트를 장만하였다. 그런데 더 욕심을 50평 아파트를 목표로 한다. 마침내 50평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그러나 돈이 부족 하기 때문에 은행에서 빌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50평 아파트에 입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매월 내야 하는 이자 부담에 허리가 휘어질 정도이다. 더구나 집값은 오르지 않고 오히려 하락세이다. 이렇게 50평형 대의 집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가난하다. 그래서 이제까지 한 번도 보시를 해 본적도 없고 기부를 해 본적도 없다.
또 어떤 사업가가 있다. 사업이 잘 되어서 사업을 확장한다. 돈이 부족하니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 그러나 이자 갚기도 버겁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보시한 번 해 보지 못하고 기부한 번 못해 보았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 온 것이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 가는 자들에게 있어서 공덕을 쌓을 기회는 별로 없다. 앞만 보고 달릴 뿐 옆을 볼 여유가 없고 뒤돌아 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달려 죽을 때가 되었을 때 그는 오로지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서 산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모아 놓은 재산을 죽어서 가져 갈 수 있을까?
기대수명이 늘어 남에 따라 불과 이삼십년전에 비하여 배 이상 오래 살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각종 질병 또한 늘어나게 되었다. 기대수명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의료비는 증가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 동안 모아 놓은 재산중 상당부분이 암치료에 쓰여 진다고 한다. 오로지 앞만 보고 모아 놓은 재산을 병원에 몽땅 가져다 바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여보게! 저승갈 때 뭘 가져가지?”
돈이 많다고 하여, 재산이 많다고 하여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게송에서도 “인색함을 반드시 이겨서 마음의 티끌을 극복하고 보시해야 하리.”라 하였다. 또 게송에서는 “공덕은 저 세상에서 뭇삶들에게 의지처가 되리.”라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의지처는 재산이 아니라 ‘공덕(Puññā)’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보게! 저승갈 때 뭘 가져가지?”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2014-01-2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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