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불교의 세계관과 세상도표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 29. 17:57

 

불교의 세계관과 세상도표

 

 

 

카페테리아에서

 

수백명이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카페테리아가 있다. 손님이 직접 날라다가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식당을 말한다. 그런데 메뉴를 보면 고기가 빠지지 않는다. 매일 매끼 마다 고기가 등장하지 않은 때가 없다. 고기가 빠지면 손님이 오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주로 돼지고기와 닭고기가 주류를 이룬다. 이렇게 매일 고기를 먹으니 매일 잔칫날이고 매일 파티 하는 것과도 같다.

 

거의 매일 고기를 먹다시피 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식생활방식인 것 같다. 그러나 돼지와 닭, 소가 어떻게 사육되는지 안다면 고기좋아 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다.

 

TV에서 가축의 에 대한 프로를 보았다. 이제까지 전에 보지 못하던 내용이다. 광우병이나 AI 등이 이슈 될 때마다 산업화된 축산농가를 보여 주었으나 이번 프로를 보면 에 대한 것을 다루었다.

 

대규모로 사육되는 소나 돼지, 닭을 보면 온통 똥범벅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좁은 사육장에서 똥을 제때에 치워 주지 않다 보니 바닥에는 똥이 질펀하다.

 

이렇게 똥범벅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똥을 치울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똥을 별도로 모아 저장해 두는 탱크가 생겨나고 그것 마저 넘쳐 나서 이제 똥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축산업을 하는 농촌에 가면 똥냄새로 가득하고 파리, 모기 등 온갖 해충들이 창궐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국이 똥천지가 된 것은 가축의 숫자만 늘리는 데만 열중한 탓이다. 사료를 주면 일부는 고기로 변환되지만 나머지는 똥으로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임에도 똥처리를 소홀히 한 것이다. 이런 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재 가축 수를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카페테리아에서 즐겨 먹는 돼지고기는 똥범벅이 된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매일 매일 잔칫상을 받듯이 고기를 즐긴다. 그러나 똥범벅이 되고 잔뜩 스트레스 받은 생명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불살생계가 무력화 되고 있는 현실

 

산업화된 축산농가를 보면 생명의 존엄함이 느껴 지지 않는다. 마치 공장에서 물건 찍어 내듯이 출하되는 닭고기나 돼지고기를 보면 인간이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불교에서 말하는 오계 중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불살생계가 무력화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닭이나 돼지도 하나의 생명이고 유정체이다. 그런 유정체를 중생이라 하고, 심지어 대승불교에서는 불성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도 성불이 가능함을 말한다. 하지만 현대에 있어서 축생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입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산업화된 농가에서 사육되고 있는 축생들은 태어나자 마자 인간의 먹이가 될 비참한 운명을 태어난 것이다. 대체 축생은 어떤 운명을 타고 났길레 살코기가 되는 것일까?

 

인간과 축생의 가장 큰 차이점은?

 

불교에서는 육도윤회한다고 한다. 그래서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천상 이렇게 여섯 단계로 나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오감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축생뿐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축생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는 도올 김용옥교수의 강연에서 알 수 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발성의 체계를 반복해서 그 발송의 체계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다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가르키죠. 그 발성의 체계를 의미의 체계와 결합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무지막지하게 어린 영아가 서너살 때 이걸 다 해냅니다.

 

(도올 김용옥, 생각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축생의 가장 큰 차이점은 사유하는 능력이다. 이는 언어로써 표현 되는데, 놀라운 사실은 인간의 경우 불과 서너 살 때 발성체계를 의미체계와 결합시킨다는 사실이다. 이는 동물에게서 전혀 볼 수 없는 것으로서 인간만이 갖고 있는 능력이라 한다. 이처럼 사유하고 말을 하는 능력으로 인하여 인류는 만물의 영장이라 하고, 오늘날 놀라운 문명을 이루어 내었다.

 

축생은 사유하는 능력이 없다. 따라서 당연히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과 똑같은 능력이 있다. 그것은 먹고 싸는 것이다.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배설함으로써 몸집이 커져 가는데, 바로 이런 것 역시 기적이라면 기적일 것이다.

 

소를 키우는 장면을 보면 끊임 없이 먹이를 준다. 그 먹이라는 것이 별다른 것이 아니다. 풀이나 건초 같은 것이다. 풀을 먹고서 뼈도 만들어 내고 장기도 만들어 내고 살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게 풀이 살코기로 변한 것이다. 물론 일부는 똥으로 나온다. 이렇게 풀이 소의 입으로 들어 가면 단백질과  똥 이렇게 두 가지로 변한다. 이런 변화의 과정 자체가 신비롭기만 하다. 마치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적은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밥이든 고기이든 입으로 들어 가면 뼈와 살이 되고 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축생이나 인간이나 하등의 다를 바 없다.

 

축생과 인간이 다른 것은 사유능력이다. 이는 곧 말하는 능력이다. 말을 할 수 있는 사람과 말을 할 수 없는 축생은 천지차이 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일까 축생은 인간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는지 모른다.

 

먹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면

 

초기경전을 보면 유난히 음식절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법구경에서도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알고(Dhp8)”라 하였고, 숫따니빠따에서도 라훌라에게 “ 음식의 분량을 아는 사람이 되어라.(stn337)”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도처에서 음식절제를 이야기 하고 있다.

 

부처님이 음식절제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음식에 지나치게 탐하는 것은 축생과 다름 없는 삶이라는 것을 뜻한다. 오로지 먹기만 하는 축생에게 있어서 먹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것이 없다. 먹고 싸고 살찌우고 발정기가 되면 후손을 남기는 것, 이것이 동물들의 살아 가는 방식이다.

 

사람은 먹어야 산다. 축생들과 마찬가지로 먹고 싸는 행위를 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인간 역시 동물에 속한다. 더구나 먹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면 더욱 더 동물의 본성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식사절제에 대하여 언급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축생들은 어떻게 그런 비참한 존재로 태어나게 되었을까?

 

부모는 하느님이고

 

불교에는 독특한 세계관이 있다. 이를 삼계라 한다. 가장 낮은 단계부터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기 까지 도표로 설명되어 있다. 그 중에 가장 안전지대가 천상이라 볼 수 있다. 천상에 태어나면 축생과 같은 비참한 운명은 면할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는 다른 종교와 다르게 천상의 종류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욕계천상, 색계천상, 무색계천상으로 크게 나누어 진다. 이를 세분화 하면 무려 28천이 된다. 이렇게 천상이 많다 보니 천상이라도 같은 천상이 아닌 것이다. 마치 과장이라도 같은 과장이 아닌 것과 같다. 지은 업에 따라 적합하게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천상들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앙굿따라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Brahmāti mātāpitaro pubbācariyāti vuccare,

Āhuneyyā ca puttāna pajāya anukampakā.

 

부모는 하느님이고

부모는 최초의 스승이라 하니

자식들에게 존귀한 님,

자손들을 어여삐 여기는 님이네.

 

(Sabrahmasutta-하느님과 함께 경, A3.31, 전재성님역)

 

 

이 게송에 대한 번역을 보면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불자들에게 있어서는 불편하게 생각하는 용어이다. 하느님이라는 말이 우리민족 고유의 용어임에도 기독교에서 선점함에 따라 이제는 생소하게 보이는 용어가 되었다. 그럼에도 전재성님의 경우 빠알리니까야를 번역함에 있어서 과감하게 하느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브라흐마(Brahma)’에 대하여 한역경전에서는 범천이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경우 하느님이라 한 것이다. 마치 새술은 새부대에 넣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빠알리니까야를 우리말로 번역하는데 있어서 한역경전의 용어를 답습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런 번역태도를 보면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자주번역의 의지가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똑 같은 브라흐마에 대하여 초불연의 경우 아들들에게 부모는 범천이요(A3.31, 초불연)”라고 번역함에 따라 기존 한역경전용어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하느님을 재해석하여

 

그렇다면 전재성님은 브라흐마에 대하여 왜 하느님이라 번역하였을까? 이에 대한 이유를 각주에서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Sabrahmakāni bhikkhave tāni kulāni : 하느님은 브라흐마[梵天:brahma]라고 하는데, 바라문교에서 우주의 창조자이자 제의의 대상으로 숭배되는 최고신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하느님을 재해석하여 미세한 물질의 세계와 비물질적 세계에 사는 신들의 부류에 바라문교의 신들을 집어 넣었다.

 

그들이 사는 곳은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梵天界]라고 한다. 이 신들의 하느님 세계에는 여러 가지 차원이 존재하는데 그 각각의 차원에 그에 상응하는 정신세계가 있다. 이 책의 부록 ‘불교의 세계관’을 참고하라.

 

하느님들은 그들의 동료와 함께 그들의 차원의 세계에 살며 위대한 하느님(Mahabrahma)이 그들의 지배자이다. 이 하느님의 모음에서 하느님은 자기자신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영원한 자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뭇삶들과 마찬가지로 윤회의 사슬에 묶여 있는 존재이다.

 

하느님들의 세계에 태어나는 길은 미세한 물질계나 비물질계의 특수한 차원과 일치하는 선정에 도달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때로는 청정한 삶이라고 번역되는 하느님의 삶[梵住]이 있는데, 그것은 자애(metta)와 연민(karuna)과 기쁨(mudita)과 평정(upekkha)의 삶을 말한다.

 

(각주, 전재성님)

 

 

문단은 편의상 나눈 것이다. 각주에서 눈여겨 본 것은 첫번째 문단에 있는 브라흐마에 대한 재해석이다. 부처님 당시 최고신 브라흐마를 불교의 세계관에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천계라 불리우는 하느님의 세계는 미세한 물질의 세계(색계)와 비물질적 세계(무색계)에 사는 신들의 부류라 한다.

 

사실 이런 분류 방식은 니까야를 보고서 알았다. 이전에는 단지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가 있고 그에 합당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으로 알았으나 부처님이 새롭게 재해석한 세계관에 따르면 색계와 무색계에 사는 신들은 모두 하느님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욕계천상의 신들은 하느님이 아니다. 천상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천상이 아닌 것이다.

 

하늘사람과 하느님

 

인간과 똑같이 남녀 구분이 있고 욕심으로 이루어져 있는 곳이 욕계천상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재해석한 세계관에 따르면 그들은 하느님이 아니다. 단지 천상의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상윳따니까야 1권에서 데와따상윳따나 데와뿟따상윳따에 등장하는 존재를 하느님이라 부르지 않고 하늘사람또는 하늘아들이라 불렀다고 본다. 이렇게 욕계천상의 존재에 대하여 하느님 취급을 안해 주는 것은 그들이 인간과 똑같이 남녀구분이 있고 또 욕심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나라라 불리우는 색계와 무색계는 남녀구분이 없다. 모두 중성이라 볼 수 있다. 또 욕심이 없는 곳이다. 이는 선정삼매의 경지와 똑같기 때문이다. 선정삼매에 들면 오장애가 극복 된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가 감각적 쾌락의 욕망(kāmarāga)’이 극복 된다. 따라서 색계와 무색계에 사는 존재들은 남녀구분이 있을 수 없고 욕망이 있을 수 없다. 이런 천상은 욕계천상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그래서 색계와 무색계를 하느님의 세계[梵天界]’라 한 것이다.

 

불교의 세계관

 

부처님이 새롭계 해석한 것이 브라흐마이다. 이를 전재성님은 하느님이라고 초지일관 모든 니까야 번역에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니까야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왜 하느님이라 하는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는 불교의 세계관을 잘 이해 하지 못함에 따른 혼란으로 본다.

 

부처님이 재해석한 세계관에 따르면 브라흐마(범천)는 색계와 무색계를 모두 아우른다. 색계와 무색계에 사는 존재를 브라흐마(범천, 하느님)라 하는 것이다. 불교의 세계관에 대한 세상도표를 다음과 같다.

 

 

불교의 세계관

 

형성

조건

생성

방식

  

수명

분류

No

무형상

화생

비상비비상처천

(非想非非想處天)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신들의 하느님 세계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

84,000

33

무소유처천

(無所有處天)

아무것도 없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ākiñcaññāyatana

60,000

32

식무변처천

(識無邊處天)

무한의식의 신들의 하느님 세계

viññāañāyatana

40,000

31

공무변처천

(空無邊處天)

무한공간의 신들의 하느님 세계

ākāsānañcāyatana

20,000

30

형상 또는 물질의 소멸

불환자

의 청정

(四禪)

화생

색구경천

(色究境天)

궁극적인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진 하느님 세계

akaniṭṭ

16,000

29

선견천

(善見天)

관찰이 잘 이루어지는 하느님 세계

sudassī

8,000

28

선현천

(善現天)

선정이 잘 이루어지는 하느님 세계

sudassā

4,000

27

무열천(無熱天)

타는 듯한 고뇌를 여읜 신들의 하느님 세계

atappā

2,000

26

무번천(無煩天)

성공으로 타락하지 않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avihā

1,000

25

四禪

화생

무상유정천

(無想有情天)

지각을 초월한 신들의 하느님 세계

assañña-satta

500

24

광과천(廣果天)

위대한 경지로 얻은 신들의 하느님 세계

veha-pphalā

 

500

23

복생천(福生天)

Puññappasava

공덕이 생겨나는 하느님 세계

大乘

22

무운천

(無雲天)

Anabhaka

번뇌의 구름이 없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大乘

21

三禪

화생

변정천

(遍淨天)

영광으로 충만한 신들의 하느님 세계

subhaki

64

20

무량정천

(無量淨天)

한량없는 영광의 신들의 하느님 세계

appāmāasubhā

32

19

소정천

(小淨天)

작은 영광의 신들의 하느님 세계

parittasubhā

16

18

二禪

화생

광음천

(光音天)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ābhassarā

8

17

무량광천

(無量光天)

한량없이 빛나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appamā ābhā

4

16

소광천(小光天)

작게 빛나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Parittābhā

2

15

初禪

화생

대범천

(大梵天)

위대한 신들의 하느님 세계

mahā-brahma

1

14

범보천

(梵輔天)

하느님을 보좌하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brahma-purohitā

1/2

13

범중천

(梵衆天)

하느님의 권속인 신들의 하느님 세계

brahma-pārisajjā

1/3

12

다섯 가지 장애의 소멸

믿음

보시

지계

화생

타화자재천

(他化自在天)

남이 만든 존재를 지배하는 신들의 하늘나라

paranimmita-vasa-vatti

16,000 천상년

(9216백만년)

11

화락천

(化樂天)

창조하고 기뻐하는 신들의 하늘나라

nimmāna-rati

8,000 천상년

(2304백만년)

10

도솔천

(兜率天)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

tusitā

4,000 천상년

(576백만년)

9

야마천(耶麻天)

축복받는 신들의 하늘나라

yāmā

2,000 천상년

(144백만년)

8

삼십삼천

(三十三天)

서른 셋 신들의 하늘나라

tāvatisa

1,000 천상년

(36백만년)

7

사천왕천

(四天王天)

네 위대한 왕들의 하늘나라

cātu-māha-rajikā

500 천상년

(9백만년)

6

오계

태생

인간

(人間)

manussa

비결정

 

5

성냄

화생

아수라

(阿修羅)

Asura

비결정

 

4

우치

탐욕

 

태란

습화

축생

(畜生)

tiracchāna

비결정

 

3

인색

집착

 

화생

아귀

(餓鬼)

peta

비결정

 

2

잔인

살해

화생

지옥

(地獄)

niraya

비결정

 

1

 

근거: 성전협 상윳따니까야 권말부록   2014-01-29 진흙속의연꽃

 

 

불교의 세계관과 세상도표.docx

 

 

 

 

Lotus

 

 

 

위 표는 전재성님이 번역한 상윳따니까야 권말 부록을 근거로 작성한 것이다. 참고로 성전협의 니까야에는 각권마다 권말 부록에 33개의 세상도표가 실려 있다.

 

하늘나라에 태어나려면

 

표를 보면 모두 33개의 세상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래로 지옥에서부터 위로 비상비비상처천에 이르기 까지 모두 33개의 세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모두 수명이 결정되어 있는 곳이 있다. 천상의 존재들은 수명이 명기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낮은 수명은 인간 바로 위에 있는 하늘나라인 사대왕천(cātu-māha-rajikā)이다. 이 하늘나라의 경우 인간으로 따졌을 때 무려 9백만년을 산다. 이렇게 9백만년의 수명이 보장 되어 있기 때문에 9백만년동안 천상락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위로 올라갈수록 수명이 늘어난다. 욕계천상의 정점이라 볼 수 있는 타화자재천 (paranimmita-vasa-vatti)’의 수명은 9216백만년이다. 이는 92억년에 달한다.

 

이렇게 수명이 오랫동안 보장되고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천상락을 누리리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것은 형성조건을 보면 알 수 있다. 믿음과 지계와 보시의 생활을 하면 이와 같은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이다. 이때 하늘나라는 ‘욕계천상’을 말한다.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형성조건을 보면 ‘오계’라고 되어 있다. 오계를 준수하면 인간으로 태어날 조건이 성립 되는 것이다. 그런데 수명은 비결정이다. 수명이 결정되어 있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인간 이하의 세계는 모두 공통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업대로 살기 때문이다. 이는 수명이 보장 되어 있는 천상과 다르다.

 

믿음, 지계, 보시의 삶을 사는 자들은 천상행이 보장 되어 있어서 수명 대로 살지만, 오계준수만으로 인간이 된 자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이렇게 인간과 천상의 차이는 매우 크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이 적합하다고 한다. 비록 수명이 보장 되어 있지 않아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인생에 있어서 희로애락을 겪음에 따라 더 빨리 깨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상에 나는 것 보다 인간으로 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축생으로 태어나는 자들은

 

축생으로 태어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 형성조건을 보면 우치탐욕으로 되어 있다. 오로지 먹을 것 밖에 모르고 쌀 줄 밖에 모르는 자들이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동물처럼 사는 자들은 동물과 같은 업을 짓기 때문에 그에 적합한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본다. 아귀계에 태어나는 자들은 인색하고 집착이 강한 자들이다. 지옥에 태어나는 자들은 잔인하고 살해를 많이 하는 자들이다. 이들 역시 수명이 결정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런데 한번 악처에 떨어지면 좀처럼 빠져 나오기 힘들다고 한다. 왜 그럴까? 축생을 예를 든다면 부처님이 거기에는 법다운 실천이 없고, 바른 실천이 없고, 착한 실천이 없고, 공덕 있는 실천이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만이 있다.(M129)”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약육강식의 축생의 세계에서 먹고 살기 위하여 살생업을 지었을 때 빠져 나오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수행승들이여, 한 번 타락한 곳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사람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M129)”라 하여 ‘맹구우목’의 비유를 들었다.

 

이렇게 한 번 악처로 타락하면 빠져 나오기 힘들다. 그래서 오계를 준수하고, 믿음과 지계와 보시의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신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최소한 인간으로는 태어난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되려 한다면

 

표를 보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세계관과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범천계(梵天界)이다. 대승불교의 세계관을 보면 범천에 대하여 색계초선천으로 한정 지은 듯하다. 그래서 범천 하면 색계초선천인줄 알았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범천은 더 확장 된다. 그래서 색계와 무색계를 아우르고 있다. 이를 노랑면칠로 표기 하였다.

 

색계 초선천인 범중천에서부터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천 까지를 범천계로 본다. 그리고 이곳에 머무는 존재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하느님’이라 번역하였다. 이는 ‘브라흐마(brahma)’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초불연 번역을 보면 한역경전을 그대로 답습하여 ‘범천’이라 하였다.

 

그런데 선정삼매를 닦으면 누구나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 보시, 지계의 삶을 살면 하늘나라에 가서 ‘하늘사람’이 되지만, 선정삼매를 닦거나 불환자가 되면 누구나 ‘하느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늘사람이 되는 것과 하느님이 되는 길이 다르다.

 

믿음, 보시, 지계의 삶을 살면 욕계천상에 태어나 하늘사람이 될 수 있고, 선정수행을 하거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불환자가 되면 그에 대한 과보로 하느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사람과 하느님은 어떻게 다른가?

 

천상이라고 하여 같은 천상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런 극명한 차이를 보여 주는 것이 욕계천상과 범천계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상윳따니까야 해제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초기불전에서 신으로 언급이 되는 범천(Brahma,브라흐마)이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를 뜻하는지는 정확하지는 않다. 주석서들도 여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DPPN은 범천을 범천의 세상(brahma-loka)에 사는 자들로 정리하고 있다.

 

주석서에서는 색계초선천부터 삼선천까지의 9가지 천상과 4선천의 무상유정천과 광과천과 다섯 가지 정거천과 네 가지 무색계 천상- 이 20가지 천상을 모두 범천의 세상(brahma-loka)으로 부르고 있다. (VibhA.521 등) 

 

마라는 욕계의 가장 높은 천상인 타화자재천에 거주하는 신인데 반해, 범천은 이러한 마라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색계 이상의 천상에 거주하는 신인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1권 해제, 각묵스님)

 

 

각묵스님의 해제 글에 따르면 범천계가 색계와 무색계를 아우르고 있는 것에 대하여 주석서의 근거한다고 하였다. 색계 초선천에 대하여 범천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주석서에 따르면 색계이상의 천상에 머무는 신들을 통칭하여 브라흐마라 칭한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말로 범천또는 하느님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재미 있는 사실은 욕계천상의 정점에 있는 타화자재천신이 마라라는 사실이다. 이를 악마로 번역한다. 부처님과 대척점에 있고 대조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깨달음을 방해하는 그 악마를 말한다. 이런 하늘사람과 하느님(브라흐마)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 한다.

 

하느님이 나타날 때 전조가 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 것일까? 디가니까야에서는 하느님이 나타나는 전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제석천]

 

벗들이여, 광대한 빛이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나는 징조들이 보이면, 하느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광대한 빛이 생겨나고 광명이 나타나는 것은 하느님이 나타나는 전조이기 때문입니다. (D18)

 

 

제석천은 욕계천상인 도솔천(뚜시따)의 왕이다. 이 제석천은 하느님의 지배를 받는다. 천상이라도 같은 천상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이 나타날 때 전조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태양이 떠오를 때 일출이 먼저 성립 하는 것처럼, 하느님이 출현하기 전에 먼저 광대한 빛이 보인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위력인데 경에서는 devānubhāvanti로 표현 되어 있다.

 

하느님 보다 더 뛰어난 존재는?

 

이렇게 욕계천상의 존재와 브라흐마는 격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보다 더 뛰어난 존재가 있다. 그것은 부처님이다. 부처님이 출현할 때 예전에 보지 못하던 현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라고 표현 되어 있다.

 

하느님이 나타날 때 빛으로 전조를 보이지만 이를 뛰어 넘는 빛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광대무변한 빛이 구석구석을 비춘다고 하였다. 특히 아직까지 한번도 빛이 들어 가지 않았던 아비지옥에 까지 빛이 도달하여 고통받는 중생들이 부처가 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하느님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다. 이런 빛이 출현 할 때가 있는 부처님이 모태에 들 때, 그리고 모태에서 나왔을 때, 또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렸을 때 이렇게 세 가지 경우라 한다.

 

하느님은 어떻게 먹고 사는가?

 

색계와 무색계를 총칭하여 브라흐마로까라 하였다. 이를 범천계 또는 하느님의 세계라 한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 자들을 브라흐마라 하고, 이를 범천 또는 하느님이라 한다. 그런데 이들 하느님들은 욕계천상처럼 남녀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성의 구분이 없으므로 중성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욕심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먹고 사는가? 이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아간냐경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세존]

바쎗타여, 언제 어느 때인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이 세계가 괴멸하는 시기가 있다. 세상이 괴멸할 때에 대부분 뭇삶들은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에 태어난다. 그들은 거기서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로서, 기쁨을 먹고 지내고, 스스로 빛을 내고, 허공을 날며, 영광스럽게 오랜 세월을 산다.

 

(아간냐경-Aggaññasutta-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 디가니까야 D27, 전재성님역)

 

 

불교의 33개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천상 역시 제행무상의 법칙에서 벗어 날 수 없다. 그래서 성주괴공하게 되는데 불에 의하여 색계 초선천까지 주기적으로 파괴 되는 것으로 본다. 그 기간이 1겁이라 한다. 이는 색계 초선천의 수명 1겁과 일치 한다. 그런데 청정도론에 따르면 물에 의하여 색계 2선천까지 파괴 되고, 바람에 의하여 색계 3선천 까지 파괴된다고 한다. 불환자들과 사선정을 닦은 자들이 가는 색계 4선천은 파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우주가 주기적으로 파괴 되는 것은 겁화가 일어 나기 때문이라 한다. 겁화는 탐진치가 치성하였을 때 일어난다고 한다.

 

세상이 파괴 되어 텅비게 되었을 때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 (ābhassarā)’에 한 존재가 태어난다고 하였다. 여기서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는 색계 2선천으로서 광음천 또는 극광천을 말한다. 이 존재가 하느님이다. 그런데 이 존재에 대한 설명을 보면 기쁨을 먹고 살고 빛을 내고 날아 다닌다고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브라흐마(범천, 하느님)은 기쁨이라는 음식을 먹고 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기쁨, 희열, 행복의 존재이기 때문에 몸이 깃털처럼 가벼울 것이라 본다. 그리고 빛이 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나타나면 동트기 전의 하늘처럼 전조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욕계천상의 신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이렇게 하느님은 기쁨을 먹고 사는 존재들이다.

 

자애의 마음을 닦은 과보로

 

경에 따르면 누구나 하느님(브라흐마)이 될 수 있다. 선정삼매 수행을 하거나 불환자가 된다면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사람이 되기 보다 하느님이 되려 한다면 선정삼매를 닦거나 불환자가 되면 된다. 그런데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전재성님의 각주에 “때로는 청정한 삶이라고 번역되는 하느님의 삶[梵住]이 있는데, 그것은 자애(metta)와 연민(karuna)과 기쁨(mudita)과 평정(upekkha)의 삶을 말한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무량심을 닦으면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떻게 가능한가? 앙굿따라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Sattavassāni metta citta bhāvetvā sattasavaṭṭavivaṭṭakappe  nayima loka punarāgamāsi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칠년간 자애의 마음을 닦았는데, 칠년간 자애의 마음을 닦고 나서 일곱 파괴의 겁과 생성의 겁 기간 동안 이 세계에 돌아 오지 않았다.”

 

(Māpuññabhāyi sutta-공덕에 두려워 하지 않음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7.6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과거 전생에 보살로서 수행을 할 때 자애의 마음을 닦았다고 하였다. 그 과보로서 우주가 파괴 될 때에는 빛이 흐르는 하느님의 세계(극광천 또는 광음천)’에 있었다고 한다. 이는 색계 이선천을 말한다. 이렇게 자애의 마음을 닦은 과보로 우주의 성주괴공으로부터 벗어난 안전지대에 있었음을 말한다.

 

위대한 하느님, 승리자, 정복되지 않는 자, 널리 관찰하는 자, 자재한 자

 

그런데 우주가 생성 될 때 텅빈 공간이 하나 생겨 났다고 하여싸. 그래서  그곳에서 최초로 태어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Tatra suda bhikkhave, (sattakkhattu) brahmā homi mahābrahmā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 daso vasavattī. Chattisakkhattu kho panāha bhikkhave sakko ahosi devānamindo. Anekasatakkhattu rājā ahosi cakkavatti dhammiko dhammarājā cāturanto vijitāvi janapadatthāvariyappatto sattaratanasamannāgato.

 

수행승들이여, 거기서 나는 일곱 번이나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승리자, 정복되지 않는 자, 널리 관찰하는 자, 자재한 자이었다. 수행승들이여, 서른 여섯 번이나 나는 신들의 제왕인 제석천이었고, 수백번이나 나는 전륜왕, 정법자, 법왕, 사방의 정복자, 왕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자, 일곱 가지 보물을 갖춘 자이었다.

 

(Māpuññabhāyi sutta-공덕에 두려워 하지 않음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7.62,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전생담을 보면 동물로도 태어나 스스로 먹이가 되었다는 보살행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경에 보여지는 전생담은 하느님으로서 이야기이다. 이는 자애의 마음을 닦은 과보이다. 칠년간 자애의 마음을 닦은 과보로 ‘일곱 번이나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승리자, 정복되지 않는 자, 널리 관찰하는 자, 자재한 자’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 얼마나 큰 과보를 가져 오는지 알 수 있다.

 

믿거나 말거나 불교?

 

부처님이 재해석한 불교관을 보면 모두 33개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또 천상의 경우 수명까지 명기 되어 있다. 이는 모두 경전을 근거로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사대왕천에 대한 것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인간의 오십년이 네 위대한 왕의 하늘나라 신들의 하루 밤낮이고, 그러한 서른 밤이 한 달이고,…(A8.42)”라고 되어 있어서 표의 어느 것 한 가지라도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은 것이 없다. 따라서 부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33가지 세상에 대한 도표가 작성된 것이다.

 

이런 도표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믿거나 말거나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삼보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도표 하나가 모든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도표에는 하늘사람이 되는 방법이나 하느님이 되는 방법이 설명 되어 있다. 믿음과 보시와 지계의 삶을 살면 하늘나라, 즉 욕계천상에 태어나지만 하느님 나라(범천계, brahma loka)에는 태어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 나라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선정수행을 하거나 불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 하느님과 하늘사람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 도표를 보면 모두 윤회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33개의 새상을 돌도 도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자애수행을 하여 하느님이 되었다고 하였다.

 

수수께끼 같은 게송

 

돌고 도는 곳이 삼사라(윤회)’이다. 따라서 그 어디에도 영원히 머무는 곳이 없다. 가장 오래 산다는 비상비비상처정도 84천겁이라는 수명이 있다. 그렇다면 84천겁은 오랜 기간일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십년이 하루 같다는 말이 있듯이 선정삼매 상태에서 84천 겁은 순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반면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이 있듯이 매우 짧은 생을 사는 지옥에서의 삶이 84천 겁이나 될 정도로 길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반드시 축복일 수 없다. 즐겁고 행복한 것은 단지 느낌으로서 순간에 지나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계라는 것은 숨을 곳이 못 된다. 특히 영원주의자나 허무주의자에게 그렇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에서 어느 하늘사람은 부처님 면전에서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 같은 게송을 읊었다.

 

 

(Devatā:)

 Ekamūla dvirāvaṭṭa timala pañcapatthara,
Samudda
dvādasāvaṭṭa pātāla atarī isīti.

(Ekamūlasutta, S1.44)

 

 

[천신]

“하나의 뿌리와 두 개의 회오리와

세 개의 더러움과 다섯 개의 바윗덩이와

열두 개의 소용돌이 품고 있는 큰 바다-

그 심연을 선인(仙人)은 건넜습니다.

 

(하나의 뿌리 경, S1.44,각묵스님역)

 

 

[하늘사람]

“한 뿌리, 두 회오리,

세 티끌, 다섯 돌맹이,

열두 소용돌이의 큰 바다,

선인은 그 지옥을 건넜네.”

 

(한뿌리의 경, S1.44, 전재성님역)

 

 

[A devata:]

"The seer has crossed over the abyss

With its one root, two whirlpools,

Three stains, five extensions,

An ocean with twelve eddies."

 

(One Root, S1.44,빅쿠 보디역)

 

 

게송에서 한뿌리무명(avijja)’를 말한다. ‘두 회오리는 영원한 자아에 기초를 둔 영원주의와 죽으면 그만이라는 허무주의의 극단적 견해를 말한다.

 

세 티끌탐진치 삼독을 말한다. ‘다섯 돌맹이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를 말한다. ‘열 두 소용돌이육내입처육외입처를 말한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에 대하여 pātāla라 하였는데, 이를 전재성님은 지옥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심연’, 빅쿠 보디는 abyss(심연)이라 하였다. PECD194에 따르면 pātāla는 지옥(地獄)과 심연()의 뜻이 있다. 따라서 하늘사람은 부처님에 대하여 삼계를 뛰어 넘는 위대한 선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삼계에 의지할 곳이 없을 때

 

축생의 삶은 비참하다. 특히 산업화 된 축생들은 말로가 비참하다. 마치 전자조립공장에서 콘베이어 벨트 돌아 가듯이 생명이 상품화 되어 나온다. 그것을 도시사람들은 매일 먹는다.

 

오로지 먹고 싸는 일만 하여 살만 찌는 축생은 더 이상 불성을 가진 중생이 아니라 하나의 기호식품일 뿐이다. 이처럼 생명 있는 것이 생명 있는 것을 잡아 먹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공장식 축산을 하는 농가나 이를 소비하는 도시사람들이나 모두 살생하는 데 있어서 공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오계가 무력화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오계를 준수하면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하였다. 더 좋은 곳에 태어나려면 믿음, 보시, 지계의 삶을 살면 된다고 한다. 하느님이 되고자 한다면 선정수행을 하거나 불환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오계준수도 되어 있지 않다면 인간으로 나기도 힘들 것 같다. 요즘 같이 대량으로 사육되고 상품화 되고, 전염병이 돌면 수십만, 수백만 마리를 살처분 하는 시대에 모두 공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천상에 태어나면 안심일까? 즐거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듯이 84천 겁을 살아도 순간일 수 있다. 그래서 항상 악처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삼계 어느 곳을 보아도 갈 데도 없고 숨을 데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삼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의심 없이 받아 들이는 것이라 본다.

 

 

 

2014-01-2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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