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편과 실제, 비구름신의 딸 꼬까나다의 이귀의(二歸依)와 찬탄
비구름신의 딸 꼬까나다의 찬탄
사뚤라빠 무리의 품 마지막 경은 ‘비구름신의 딸의 경2(S1.40)’이다. 1번 경에서는 부처님에 대한 찬탄 게송이 네 개 있었다. 2번 경에서도 역시 부처님의 찬탄 게송만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
Idhāgamā vijjupabhāsavaṇṇā
Kokanadā pajjunnassa dhītā,
Buddhañca dhammañca namassamānā
Gāthā cimā atthavatī abhāsi.
2.
Bahunāpi kho naṃ vibhajeyyaṃ
Pariyāyena tādiso dhammo,
Saṃkhittamattaṃ lapayissāmi
Yāvatā me manasā pariyattaṃ.
3.
Pāpaṃ na kayirā vacasā manasā
Kāyena vā kiñcana sabbaloke,
Kāme pahāya satimā sampajāno
Dukkhaṃ na sevetha anatthasaṃhitanti.
(Cullapajjunnadhītusutta, S1.40)
1.
번개의 섬광과도 같이 아름다운
빳준나의 딸 꼬까나다는
부처님과 법에 예배하면서
이제 뜻있는 게송들을 읊습니다.
2.
참으로 그러하신 분 [세존]께서는(*206)
다양한 방법으로 법을 분석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마음으로 받들어 외운 대로
이제 간략하게 그 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3.
말로든 마음으로든 몸으로든 간에
이 세상 어디서도 악 행하지 말지라.
감각적 욕망 끊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려
고통주고 이익 주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 결코 받들어 행하지 말지라.”
(각묵스님역)
1.
“번개의 불빛 같은 미모를 지닌
비구름 신의 딸 꼬까나다가 여기에 와서
깨달은 님과 그 가르침에 귀의하고,
이익을 가져 오는 이 시를 읊네.
2.
참으로 사람들이 이와 같은 진리를
많은 방편으로 설명하지만,
제가 마음으로 파악한
그대로 간략히 그 뜻을 말하옵니다.
3.
온 누리 어떠한 세계에서도
언어와 정신과 신체로 악을 짓지 말지니,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떠나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
무익한 괴로움을 좇지 말아야 하리.”
(전재성님역)
1.
"Here came Kokanada, Pajjunna's daughter,
Beautiful as the gleam of lightning.
Venerating the Buddha and the Dhamma,
She spoke these verses full of meaning.
2.
"Though the Dhamma is of such a nature
That I might analyse it in many ways,
I will state its meaning briefly
To the extent I have learnt it by heart.(*95)
3.
one should do no evil in all the world,
Not by speech, mind, or body.
Having abandoned sense pleasures,
Mindful and clearly comprehending,
One should not pursue a course
That is painful and harmful."
(Pajjunna's Daughter2, 빅쿠 보디역)
세 개의 게송에서 첫 번째 게송을 보면 천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가 있다. 전재성님은 ‘번개의 불빛 같은 미모’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번개의 섬광과도 같이 아름다운’이라고 번역하였다. 또 빅쿠 보디는 ‘Beautiful as the gleam of lightning’라 하여 “번개의 섬광처럼 아름다운”이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대체 천인들은 얼마나 아름답길래 이렇게 표현 하였을까?
천녀들의 치명적인 아름다움
사뚤라빠 무리의 품에서 첫 번째 경의 각주를 보면 어떻게 ‘삽십삼천’에 태어났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다. 폭풍우가 몰아쳐서 죽음에 이르렀을 때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 과보로 뱃사람 칠백명 전원이 삼십삼천에 태어난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번 경의 경우 여성으로서의 천인이다. 아마도 칠백명 중의 일부가 여성천인으로 태어난 듯 하다. 그런데 그 미모가 매우 뛰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번개의 불빛 같은 미모’라 하였다. 이는 천인의 용모가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법구경 ‘난다테라 이야기’가 실려 있는 13번 14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부처님의 이복동생인 ‘난다’가 출가 하였지만 약혼한 전처를 잊지 못하자 부처님은 삼십삼천의 천인을 보여 준다. 이를 보고 난다는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자나빠다깔리야니는 귀와 코를 잃은 탐욕스런 원숭이만큼이나 못났습니다. (법구경 13번 인연담, 전재성님역)”라 하였다. 자신의 전처의 미모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겼으나 천인을 보자 마치 암원숭이를 보는 듯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천상의 여인은 지상의 여인과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빛나는 미모를 가진 것으로 묘사 되고 있다. 그래서 번개의 섬광과도 같이 ‘치명적인’ 아름다운 여인으로 묘사 하고 있다.
‘tādiso dhammo’에 대한 번역의 차이
두 번째 게송에 대한 번역을 보면 많이 차이가 난다. 마치 전혀 다른 말처럼 보인다. 이는 ‘tādiso dhammo’에 대한 번역의 차이이다. 이를 직역한 전재성님은 “이와 같은 진리를”이라고 번역하였지만, 각묵스님은 주석을 참고하여 “그러하신 분 [세존]께서는”라고 번역하여 전혀 다른 말이 되어 버렸다. 이 부분에 대하여 빅쿠 보디는 ‘the Dhamma is of such a nature’ 라 하여 “담마는 그러한 본성이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전재성님과 빅쿠 보디는 직역하였지만 각묵스님은 ‘의역’을 하였다. 그렇다면 각묵스님은 왜 이렇게 두 번역자와 차이가 나는 번역을 하였을까?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206) ‘그러하신 분[세존]은 tādiso dhammo를 옮긴 것이다. tādiso dhammo는 법이란 그러한 것으로 직역할 수 있다. 그러나 주석서와 복주석서에서 “tādiso dhammo는 그분 세존이라는 법이다(ayam bhagava dhammo).” (SA.i.82)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어서 역자는 주석서를 따라 이렇게 옮겼다. 그러나 보디 스님은 “The Dhamma is of such a nature”로 문자 그대로 옮기고 있다.
(206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의 206번 각주에 따르면, 각묵스님은 주석서의 견해를 중시하였다고 하였다. 주석서에 분명히 tādiso dhammo에 대하여 “그분 세존이라는 법이다(ayam bhagava dhammo)”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빅쿠 보디가 직역하였음에도 자신은 주석의 견해를 중시하여 “그러하신 분 [세존]께서는”라고 번역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tādiso dhammo에 대한 전재성님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빅쿠 보디의 각주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The Dhamma is of such a nature (tādiso dhammo).
Spk: "For such is the nature of the Dhamma, 0 Blessed one, it has
such a structure, such divisions, that it lends itself to analysis in many ways."
Spk-pt: "It is such that one who has penetrated the truths as they are, skilled in the meaning and the doctrine, might explain, teach, proclaim,
establish, disclose, analyse, and elucidate it, bringing forth examples, reasons, and conclusions."
(95번 각주, 374p,CDB,빅쿠 보디)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담마는 그러한 성품이다(tādiso dhammo).
주석(Spk): “오 축복받은자, 담마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에 이것은 그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러한 구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분석됨으로써 그것 자체를 도와 준다.”
복주석(Spk-pt): 의미와 교설에 있어서 능숙한 자들이 있어서 그것을 설명하고, 가르치고, 선언하고, 설정하고, 발표하고, 분석하고, 해명하고, 비유를 들고, 이유를 대고 결론을 내는 것처럼 진리를 통찰하는 자가 그러한 것이다.
(95번 각주 번역)
빅쿠 보디는 tādiso dhammo에 대하여 “담마는 그러한 성품이다” 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주석과 복주석의 내용을 소개 하고 있다. 영문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매끄럽지 않고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차이를 비교해 보면
주석과 복주석의 내용을 보면 각묵스님이 언급한 것처럼 tādiso dhammo에 대하여 ‘부처님’으로 묘사 하고 있다. 담마와 붓다를 같은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각묵스님은 ‘법이란 그러한 것’이라는 의미의 ‘tādiso dhammo’에 대하여 주석의 견해를 존중하여 “그러하신 분 [세존]께서는”라고 하여 담마에 대하여 세존으로 치환하여 번역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번역이 매끄럽지 않게 되었다. 마치 ‘억지로 꿰어 맞춘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
내 용 |
비 고 |
빠알리 |
Bahunāpi kho naṃ vibhajeyyaṃ |
tādiso dhammo |
각묵스님 |
참으로 그러하신 분 [세존]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법을 분석하실 수 있습니다. |
그러하신 분 [세존]께서는 |
전재성님 |
참으로 사람들이 이와 같은 진리를 많은 방편으로 설명하지만, |
이와 같은 진리를 |
빅쿠 보디 |
"Though the Dhamma is of such a nature That I might analyse it in many ways, |
the Dhamma is of such a nature |
이 구절은 사뚤라빠 무리 중에 여성천인 ‘꼬까나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찬탄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꼬까나다는 붓다와 담마에 귀의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게송에서 “깨달은 님과 그 가르침에 귀의하고”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상가에 귀의 하였다는 말은 없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천인 꼬까나다는 삼귀의가 아니라 ‘이귀의’ 한 것이다.
세 번역자의 번역이 모두 다르다
꼬까나다는 붓다과 담마에 대하여 찬탄하고 있다. 그런데 게송을 보면 분명히 ‘Pariyāyena tādiso dhammo’로 되어 있다. 이는 직역하면 “이와 같은 진리를 많은 방편으로(전재성님)”이 된다. 이 구절에 대한 온전한 번역을 보면 “참으로 사람들이 이와 같은 진리를 많은 방편으로 설명하지만”으로 되어 있어서 주어가 ‘사람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주석의 견해를 중시한 초불연 번역을 보면 주어가 부처님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참으로 그러하신 분 [세존]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법을 분석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빅쿠 보디의 번역을 보면 주어가 I(나)로 되어 있다. 그래서 “Though the Dhamma is of such a nature That I might analyse it in many ways”라 하였는데, 이를 번역하면 “비록 내가 여러가지 방법(방편)으로 그것(법)을 분석하였을지 모를 그러한 성품을 가진 담마일지라도”의 뜻이 된다. 주어가 나인 것이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I will state its meaning briefly”라고 되어 있어서 “나는 간략하게 이것(법)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세 번역자의 번역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이다. 가장 큰 차이는 주어이다. 전재성님은 ‘사람들’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세존’, 빅쿠 보디는 ‘나 (I)’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대체 누구 번역이 맞는 것일까?
방편과 실제
게송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 게송은 꼬까나다의 아름다운 모습에 대한 묘사이고, 두 번째 게송은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이 알기 쉽게 설명한 ‘방편’이라는 것이고, 세 번째의 게송은 그 방편이 의미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실제에 대한 것이다.
불교를 처음 접하는 자들이나 또는 출재가자들에게 믿음과 보시와 지계의 생활을 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이 방편이다. 그런데 이 방편에서 핵심을 가로 지르는 말은 세번째 게송에서와 같이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satimā sampajāno’라는 표현을 하였다. 이는 사념처 수행에서 강조한 것 뿐만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 도처에서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수행의 가르침, 즉 실제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처음에는 믿음, 지계, 보시의 생활에 따라 천상에 태어난다는 방편(Pariyāyena)을 펴지만, 근본 가르침은 항상 ‘사띠를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satimā sampajāno)’신구의 삼업에 따른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각묵스님의 두 번째 게송에 대한 번역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번역에 무리가 있어 보여
각묵스님의 두 번째 게송은 이렇다.
참으로 그러하신 분 [세존]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법을 분석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마음으로 받들어 외운 대로
이제 간략하게 그 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번째와 두번째 구절과 세번째와 네번째 구절에 대한 연결이 매끄럽지 않다. 이는 tādiso dhammo에 대하여 주석의 견해를 무리하게 적용한 결과라 본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이 “다양한 방법으로 법을 분석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되어 버렸다. 여기서 ‘방법’은 ‘Pariyāyena’를 번역한 것이다. Pariyāyena는 ‘방편’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빅쿠 보디는 ‘ways’라 하여 ‘방법’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런 영향이어서인지 각묵스님 역시 ‘방법’으로 번역한 것 같다. 그래서 ‘부처님이 다양한 방편으로 법을 분석하였다’라는 뜻으로 비치어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어지는 구절에서 꼬까나다 가 말한 “제가 마음으로 받들어 외운 대로”와도 매칭이 안된다. 보통불자의 이런 번역비교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2014-01-17
진흙속의 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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