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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도 아픔을 느낀다, 사깔리까경(돌 조각의 경, S1.38)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 11. 18:35

 

부처님도 아픔을 느낀다, 사깔리까경(돌 조각의 경, S1.38)

 

 

 

스님도 아프세요?”

 

언젠가 들은 말이 있다. 불교방송인지 불분명 하지만 어느 스님이 스님도 아프세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사람들은 스님들이 아프지도 않는 줄로 알아요라고 말하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스님들이 도를 닦기 때문에 아프지도 않고 병에 걸리지도 않은 것처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이 병원에 가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 본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에 선생님들은 화장실에도 가지 않는 줄 알았다. 한번도 화장실에 가는 것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 스님들은 도를 닦기 때문에 항상 건강한 줄 알았다. 아마도 이렇게 알고 있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도 화장실에 가고 스님도 병원에 간다. 모두 똑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아픔을 느낀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이다.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은 초월적이고 신격화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들 중생들과 다른 존재인 것처럼 묘사 되어 있다. 그러나 초기경전을 보면 다르다. 부처님도 우리와 똑 같은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픔을 느끼고 병이 나기도 한다. 그런 예가 하나 있다. 사깔리까경(Sakalikasutta, S1.38)이다. 이를 돌 조각의 경’, ‘돌조각 경이라 하고 영문으로는 ‘The Stone Splinter’라 한다. 경의 도입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Eva me suta eka samaya bhagavā rājagahe viharati maddakucchismi migadāye.

 

Tena kho pana samayena bhagavato pādo sakalikāya khato hoti, bhusā12 suda bhagavato vedanā vattanti sārīrikā vedanā dukkhā tibbā kharā kaukā asātā amanāpā. Tā suda bhagavā sato sampajāno adhivāseti avihaññamāno.

 

(Sakalikasutta, S1.38)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맛다꿋치의 녹야원에 머무셨다.

 

그 무렵 세존께서는 돌조각에 부딪혀 발에 상처를 입으셨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심한 고통을 느끼셨는데 그 육체적인 느낌은 고통스럽고 격심하고 쓰라리고 신랄하고 참혹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마음챙기고 알아차리시면서[正念正知] 흔들림 없이 그것을 감내하셨다.

 

(돌조각 경, 상윳따니까야 S1. 38, 각묵스님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라자가하 시의 맛다꿋치 숲에 있는 미가다야에 계셨다.

 

그런데 그때 세존께서 돌조각 때문에 발에 상처를 입으셨다. 세존께서는 몸이 몹시 아프고 무겁고 쑤시고 아리고 불쾌하고 언짢은 것을 심하게 느끼셨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마음을 가다듬어 상처받지 않으면서 참아내셨다.

 

(돌 조각의 경, 상윳따니까야 S1. 38, 전재성님역)

 

 

Thus have I heard. on one occasion the Blessed one was dwelling at Riijagaha in the Maddakucchi Deer Park.

 

Now on that occasion the Blessed one's foot had been cut by a stone splinter.(*86) Severe pains assailed the Blessed one-bodily feelings that were painful, racking, sharp, piercing, harrowing, disagreeable. But the Blessed one endured them, mindful and clearly comprehending, without becoming distressed.

 

(The Stone Splinter, CDB S1.38, 빅쿠 보디역)

 

 

경을 보면 분명히 부처님도 고통을 느끼고 있다. 이는 초월적이고 신격화 된 대승불교의 부처님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처럼 인간적인 부처님은 아픔과 고통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돌조각이 튀어 다리에 맞았을 때 경에 따르면 몹시 아프고 무겁고 쑤시고 아리고 불쾌하고 언짢은 것이라 하였다. 부처님이 발을 다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발을 다친 이유는 데와닷따가 부처님을 살해 하려고 맛다꾸치 숲에서 가까운 깃자꾸따 산에서 돌을 굴려 떨어 뜨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 그 돌은 중간에 다른 돌에 부딪쳐 멈추었으나 그 충격으로 작은 돌조각이 부처님 발에 날아 들었다. 부처님께서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자 제자들은 들 것으로 맛다꾸치 숲으로 옮기고 다시 지바깜바바나로 옮겨서 거기서 의사 지바까에게 치료를 받도록 했다.

 

(각주, 전재성님)

 

 

 

 

devadatta-and-buddha

Devadatta pushing a stone

from the hill near the Vulture’s Rock

while Buddha was walking beneath

 

 

 

2의 화살

 

이렇게 부처님도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느꼈다. 그런데 범부와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이어지는 문장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비록 육체적으로 고통을 느꼈지만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마음을 가다듬어 상처받지 않으면서 참아내셨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2의 화살을 맞지 않은 것이다.

 

부처님이 비록 고통으로 인한 육체적인 화살을 맞았지만 범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정신적인 화살을 맞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sato sampajāno’라는 표현을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마음챙기고 알아차리시면서[正念正知]”라 하였고, 전재성님은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라 하였다. 빅쿠 보디는 “mindful and clearly comprehending”이라 하였다. 그래서 위 문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사또 삼빠자노(sato sampajāno)이다.

 

사띠와 삼빠잔나는 어떤 관계일까?

 

사또 삼빠자노와 유사한 말이 있다. 그것은 사념처에서 ‘sampajāno satimā’라는 말이다. 순서가 서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해석도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초불연)’ 또는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성전협)’이라고 번역된다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초불연)’과 ‘새김(성전협)’으로 번역되어 있고, 삼빠잔나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알아차림’으로 번역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돌조각 경에서는 ‘sato sampajāno’라 하였다. 사띠가 앞에 나오고 삼빠잔나가 뒤따르는 순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띠와 삼빠잔나는 어떤 관계일까? 이에 대하여 인터넷 사이트에 실려 있는 참고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띠의 확립은 분명한 앎(sampajañña)을 일으킨다. 사띠가 대상에 마음을 보내서 대상을 포착하고 기억하는 마음작용이라면, 사띠의 확립은 대상을 포착하여 기억하는 작업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대상의 일어남과 머묾과 사라짐을 아는 분명한 앎이 생긴다.

 

(염처의 의미)

 

 

신수심법 사념처에서 사띠를 확립하면 분명한 앎(sati-sampajaññāya)을 일으키고, 분명한 앎은 대상의 생멸을 통찰할 수 있음을 말한다. 예를 들어 고통이 일어 났을 때 고통이 일어나고 있다고 알아차린다. 지금 몹시 아프고 무겁고 쑤시고 아리고 불쾌하고 언짢은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고통 그 자체는 영원하지 않다

 

그런데 고통 그 자체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어날 만한 조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아픈 것이다. 그런데 조건이 소멸하면 고통 역시 소멸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고통을 고통이라고 알아차리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몹시 아플 때 단지 아프네하면 그 뿐이다. 그러나 아픔을 참지 못하여 아이구 아파 죽겠네!”하고 소리 지르면 육체적 고통과 함께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아프네하면 육체적 고통으로 그치지만 죽겠네!”라고 하면 정신적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살을 한방 더 맞았다고 한다.

 

부처님은 돌조각에 다리를 다치셨지만 참아 내었다. 고통이라는 것이 단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림(sato sampajāno)’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난해한 문장이 있는데

 

사깔리까경에서는 고통을 참아 내는 부처님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표현 하였다. 사뚤라빠 무리의 하늘사람들이 고통을 참아 내는 부처님을 지켜 보면서 코끼리, 사자, 준마, 큰 소, 황소 같다고 찬탄하였다. 그런데 경에서 논란이 되는 내용이 있다. 하늘사람이 읊은 게송중에 그 뜻이 난해한 문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Passa samādhi subhāvita cittañca suvimutta nacābhinata nacāpanata na ca sasakhāraniggayhavāritavata

 

(Sakalikasutta, S1.38)

 

 

잘 닦은 삼매와 잘 해탈한 그분의 마음을 보십시오. [그분의 마음은] 앞으로도 기울지 않고 뒤로도 기울지 않았으며 [그분의 삼매는]억지로 노력하여 억압하고 억누른 것이 아닙니다.(*196)

 

(돌조각 경, 상윳따니까야 S1. 38, 각묵스님역)

 

 

잘 수행된 삼매와 잘 해탈된 마음을 보시오. 앞으로 기울거나 뒤로 기울지 않고

마음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계행을 지키는 데 주저하지 않는 잘 수행된 삼매와 잘 해탈된 마음을 보시오.(*233)

 

(돌 조각의 경, 상윳따니까야 S1. 38, 전재성님역)

 

 

See his concentration well developed and his mind well liberated-not bent forward and not bent back, and not blocked and checked by forceful suppression!(*88)

 

(The Stone Splinter, CDB S1.38, 빅쿠 보디역)

 

 

이 구절은 하늘사람이 마치 코끼리, 사자 등과 같이 고통을 참아 내고 있는 부처님을 찬탄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각주에 따르면 매우 난해한 문장이라 한다. 문장이 왜 난해 한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이 구절은 모든 판본이 불완전 한데, AN.I.254에도 등장하는 난해한 문장이다. .(*233)”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은 문장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라 한다. 예를 들어 단어가 잘못 들어 갔거나 한줄이 빠진 경우를 말한다. 그래서 왜 난해한 문장이 되었는지에 대하여 문법적인 설명을 곁들여 길게 설명되어 있다.

 

각묵스님의 각주에서

 

각묵스님의 각주 에서도 역시 번역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달아 놓았다.

 

 

(*196) 보디스님은 여러 판본을 비교하면서 억누른으로 옮긴 vāritavata에 대한 자세한 고찰을 하고 있다. 그의 학문적인 완성도를 보여주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자세한 것은 보디 스님 371-374쪽의 주해 88번을 참조할 것.

 

(196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보디 스님의 학문적 태도에 대하여 칭찬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세한 것은 빅쿠 보디의 CBD 1권의 주해를 참조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빅쿠 보디의 88번 주해를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88) I read with Se: Passa samddhil?~su bhduitam cittaii ca suuirnuttam

na cdbhinatam na cdpanatanz nu ca sasarikhdraniggayhavdritavatam.

Be is identical except that the final word in the

compound is read as -gatam; Eel -cdritavatam is clearly an

error, rectified in PED, s.v. vdritavata. Ee2 reads as in Se,

but with niggayha taken as uncompounded, which leaves

sasarikhdra dangling. The same expression occurs elsewhere:

at AN IV 428,9-10 th'e full formula is used to

describe a samddhi called afiridyhala, the fruit of final

knowledge (or perhaps, "having final knowledge as its

fruit"); sasarikhdraniggayhaairitauata, at AN I 254,3i,

describes a samddhi developed as the basis for the six

abhiiiiin (probably the fourth jhiina); and at AN I11 24,9,

DN 111 279,4, and Vibh 334,15, it characterizes a "right concentration

of fivefold knowledge" (paficaiidnika sanzmd

samadhi). In the present cantext, it seems, the expression

qualifies cittam, mind, though the mirid has these qualities

by virtue of the samddhi in which it is absorbed. At

AN IV 428,9-10 and elsewhere the phrase clearly qualifies

the samtidhi.

Spk (Se): The concentration is that of the fruit of arahantship

(arahattaphalasamddhi). The mind is said to be iuell

liberated (suvimuttam) because it is liberated by the fruit.

Not bent forward and not bent back: the mind accompanied

by lust is said to be "bent forward" (abhinatam), that

accompanied by hate to be "bent back" (apanata~z).

Rejecting both, he speaks thus. Not blocked and checked by

forceful suppression: It is not blocked and checked, having

suppressed the defilements forcefully, with effort; rather,

it is checked because the defilements have been cut off.

The meaning is that it is concentrated by the concentration

of fruition (na ca ~asa~khdranigga~havnritavattai nn a

sasarikhtirena sappayogena kilese nig@ ., hetvd vdritavatay;

kilesdnarn pana chinnattri vatam, phalasamddhinri sam&itan ti

attho). (N.B. While Spk (Be) reads -gatam in the lemma, it

reads -vatam twice in the explanation.)

Spk-pt: This is not achieved, not fixed, forcefully, with

effort, by way of abandoning in a particular respect or by

way of abandoning through suppression as is the mundane-

jhana mind or insight; but rather (it is achieved)

because the defilements have been completely cut off

(lokiyajjhnacitfam viya vipassana viya ca sasarikharena sappayogena

tadangappahiina-vikkhambhanappahrinavasena ca

vikkhambhetvii nu adhigatam nu thapitam, kiAcarahi kiiesanam

sabbaso chinnatiiya).

The Pgli phrase is extremely difficult and the exact reading

uncertain. Indeed, in the Central Asian Skt ms corresponding

to DN I11 279,4 (Waldschmidt, Sanskrittexte aus

den Turfanfunden IV, p. 70, V.8 (3)), it is conspicuously

absent. A Skt version in S~BV-b(hp. 444,~-21)r eads vririvad

dhytam, "maintained like water," which seems to me

unlikely to correspond to the original reading.

Eel puts a hiatus after niggayha, and Ee2 separates it off

entirely; the other eds. integrate niggayha into the long

compound. There is no way to determine, on the basis of

grammar alone, which is correct. Each attempt to resolve

the expression into its elements gives rise to its own special

problems, and even the affhakathrls and filals offer conflicting

explanations, e.g., Sv 111 1060,11-13 and Vibh-a 421,13-15

take niggayha to be absolutive (as does Spk) and turn viirita

into the absolutive varetva; their respective tikas, Sv-pt

I11 284,24-27 (Be) and Vibh-mt 205,1618 (Be), take niggayha

as the gerundive niggahetabba and v6rita as the gerundive

vriretabba. Since niggayha occurs elsewhere unambiguously

as an absolutive (e.g., at MN I11 118,4, interestingly, as

here, without a direct object), whle there seem to be no

instances in canonical Pgli of the word occurring as a

gerundive, the affhakathas are more likely to be right.

~o r r n a nqu estions this interpretation on the ground that

there is no other known instance in P ~ loif an absolutive

occurring as the second member of a compound (~ersonal

communication), but perhaps we should not rule out the

possibility that we have such a construction here. I trans-

late, however, in compliance with natural English idiom

rather than in strict conformity with the syntax of the Pali.

Readings of the last part of the compound vary among

the different traditions: in general vlfritavata prevails in the

Sinhalese tradition, vdritagata in the Burmese, with

Burmese vv.11. varivrivata and vririvdvafa also recorded.

Varita here is a past participle of the causative vareti, to

block, to restrain. The terminal member of the compound

could then be either vata or gata. Gafa is clearly a past participle.

Vatu is more problematic. At KS 1:39, vdritavatam is

rendered "having the habit of self-denial." Apparently

C.Rh.D understands vata as equivalent to Skt vrata.

However, Spk's gloss, chinnattri vatam phalasarnridhinri

sumahitam, suggests that we have a past participle here,

and I would propose that vatu represents Skt vyta, which

according to MW can mean "stopped, checked, held

back." I cannot cite other occurrences of the simple participle

vata in Pali, but prefixed forms are common enough:

samvuta, nibbuta, vivafa, avafa, etc. Thus we would have

here two past participles from the same root, one

causative, the other simple, so that the compound vliritavatu

would mean "blocked and checked" (unfortunately

two distinct English verbs are needed to capture the

nuances). Although this construction is certainly unusual,

it need not be rejected out of hand, as it may have been

used for special emphasis. If the reading gata is accepted,

vfiritagata could mean "gone to (attained to) control," with

varita taken as a noun of state. This certainly sounds more

natural than vdritavata, but the prevalence of vata in the

textual tradition lends strong support to its authenticity.

 

(88번 각주, 빅쿠 보디)

 

 

 

빅쿠 보디의 88번 각주는 무려 4페이지에 걸쳐서 설명되어 있다. 이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스캔한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빅쿠보디는 번역하기 난해한 문장에 대하여 여러 판본을 대조해 가며 학문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이런 빅쿠 보디의 태도에 각묵스님은 경의를 표하고 필요하면 참고하라고 하였다.

 

학생은 왜 내 얼굴만 빤히 쳐다 보지요?”

 

경전을 보면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있다. 아무리 읽어 보아도 무슨 뜻인지 모를 경우가 있다. 특히 한역 된 대승경전의 경우가 그렇다. 대표적으로 금강경을 들 수 있다.

 

금강경을 처음 접한 불자들은 한글로 번역 되어 내용을 잘 이해 하지 못한다. 너무 심하게 축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무유정법이라 하였을 때 달리 정해진 법이 없다라고 해석되는데 이 것이 무슨 뜻인지 누군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정확하게 모른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이후의 문장과 연결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 없이 어렵게 느껴진다. 이렇게 난해하고 심지어 심오해지는 것은 무슨이유일까? 그것은 전승과정에서 한줄이 빠졌기 때문이다.그래서 彼如來妙體 卽法身諸佛 法體不可見 疲識不能知’를 집어 넣어 해석하면 뜻이 들어 온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의 왁깔리경에서 “박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S22:87)”라는 문구와 같은 내용이다. 이는  몸이나 음성과 같은 외형으로 진리를 찾지 말고 진리의 몸(법신)을 보고서 진리를 찾으라는 뜻이다.

 

쉽게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지금 어느 남학생이 있는데 미모의 여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있다. 그런데 이 학생은 선생의 강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수업시간 내내 선생의 얼굴만 빤히 쳐다 보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선생이 분명히 학생에게 학생은 왜 내 얼굴만 빤히 쳐다 보지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도 제자에게 몸을 보지 말고 진리를 볼 것을 말하였다.  그래서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S22:87)”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한줄이 빠져 버리면

 

그래서 전재성님은 동국대 정각원 법회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제가 독일에서 공부를 해 보니까 티베트대장경, 빠알리대장경, 산스크리트대장경을 다 진열해 놓고 봐요. 그런데 보니까 한문도 한줄이 빠진거에요. 산스크리트나 빠알리에 있는데 한문이 한줄이 없어요. 이건 사경사가 졸다가 빼 먹은 거에요.

 

한문대장경이라도 완벽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냐. 한문이 너무 심오해지는 거에요. 앞뒤가 해석이 안되니까. 한줄 빼먹었으니까. 그러면 심오하게 해석해 버린다고.

 

(전재성님, 2012년 3월31 정각원 토요법회, 미디어붓다 2012-05-16)

 

 

한줄이 빠지면 경이 난해하고 심지어 심오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번역할 때 일일이 판본을 대조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마찬가지로 돌조각 경에서도 판본 마다 차이가 있다 보니 번역에 혼란이 생긴 것이다.그래서 빅쿠 보디는 매우 길게 설명하였다.

 

대체 누가 읊은 것인가?

 

또 한 가지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돌조각 경에 소개 되어 있는 네 개의 게송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논란이 첫 번째 게송이다.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Pañcavedā sata sama
Tapass
ī brāhmaā cara,
Cittañca nesa
na sammā vimutta
H
īnattarūpā na pāragamā te

 

(Sakalikasutta, S1.38)

 

 

[세존](*197)

다섯 베다를 잘 배운 바라문들이 있어

백 년 동안 고행을 한다고 하더라고

그들 마음 바르게 해탈하지 못하나니

저열한 성품으로는 저 언덕에 이르지 못하노라.

 

(돌조각 경, 상윳따니까야 S1. 38, 각묵스님역)

 

 

[하늘사람]

다섯 가지 베다에 정통한 백 명의 사람이

한결같이 바라문의 고행을 닦았지만 (*325)

마음을 올바로 해탈하지 못하고

성품이 저열해서 피안에 이르지 못했네.

 

(돌 조각의 경, 상윳따니까야 S1. 38, 전재성님역)

 

 

Though brahmins learned in the five Vedas

Practise austerities for a hundred years,

Their minds are not rightly liberated:

Those of low nature do not reach the far shore.89

 

(The Stone Splinter, CDB S1.38, 빅쿠 보디역)

 

 

가장 큰 차이는 누가 이 게송을 읊었느냐는 것이다. 전재성님은 하늘사람이 읊은 것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부처님이 읊은 것이라 하였다. 빅쿠 보디는 네 게송 모두 하늘사람이 읊은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각묵스님은 왜 부처님이 읊은 것으로 보았을까?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7) 여기에 나타나는 {125-128} 의 네 개의 게송들은 누가 읊은 것인지 문맥이나 내용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다. 보디 스님은 경을 합송하여 결집한 분들이 앞의 신들의 감흥어를 게송으로 추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런데 본경의 {127} {128}은 위의 본서 자만에 빠진 자의 경(S1.9) {15} {16}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그곳에서 {15}={127}은 천신이 읊은 것으로 나타나고, {16}={128}은 세존이 읊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본경에서도 이 두 게송을 이렇게 간주하여 옮겼으며, {125-126}은 세존께서 읊은 것으로 옮긴다. 미얀마어 번역본에는 이 네 개의 게송들이 모두 세존께서 읊으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197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에 따르면 부처님이 읊은 것으로 보는 이유는 미얀마본의 번역서에 근거한다고 하였다. 대체로 빅쿠 보디의 견해를 존중하는 입장에 있는 초불연의 번역태도와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이 게송은 초불연의 번역에 따르면 부처님이 읊은 것으로 되어 있다.

 

백년으로 해석하면 틀리다고

 

그런데 번역의 내용을 보면 또 하나 확연하게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sata에 대한 번역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백 년 동안이라 하였다. 빅쿠 보디도 ‘a hundred years’라 하여 백년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백 명’이라 하여 완전히 다르게 번역하였다. 이에 대한 이유를 보면 다음과 같다.

 

 

(*325) Srp.I.81sata sama백년으로 해석했지만, Ggs.I.45에 의하면 분명히 틀린 해석이다. sama‘(a)cara(3rd.pl.)’의 목적어이다. 그 뜻은 고행을 닦는다.’라는 의미로 그 예는 Dhp.142에도 나온다. 그러나 고행이라는 말은 tapassi’란 단어로 나와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sama을 원래의 뜻대로 한결같이로 번역한다.

 

(325번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에 따르면 ‘sata samaṃ’에 대하여 백년으로 번역한 것은 명백히 잘못된 번역이라 하였다. 이는 주석서에 그렇게 되어 있지만 , Ggs.I.45에 따르면 틀린 해석이라는 것이다. 옛날 주석서에 오류가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문법적 설명을 곁들여 법구경 142번 게송에서의 사용례를 들고 있다.

 

법구경 142번 게송에서 첫 번째 구절에 Alakato ce pi sama careyya 가 있는데 이는 치장을 했어도 평정하게 행하고라고 번역 되어 있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좋은 옷과 장식물로 치장을 했어도 신체적 행위, 언어적 행위, 정신적 행위는 안온하게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되어 있다. 아무리 사치하여도 신구의 삼업이 깨끗하면 안온한 것임을 말한다. 이 구절에 대하여 거해스님역을 보면 그의 마음이 고요하고 번뇌로부터 벗어났고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sama에 대하여 법구경 142번 게송 첫번째 구절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sama에 대하여 한결같이로 번역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법구경에서는 평정하게 로 번역 되어 있다. 약간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의미로 본다.

 

너무나 다른 번역

 

문제는 돌조각 경의 게송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구절의 해석이 번역자마다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

Pañcavedā sata sama
Tapass
ī brāhmaā cara

sata

각묵스님역

다섯 베다를 잘 배운 바라문들이 있어

백 년 동안 고행을 한다고 하더라고

백 년 동안

전재성님역

다섯 가지 베다에 정통한 백 명의 사람이

한결같이 바라문의 고행을 닦았지만

-백 명의 사람이

빅쿠 보디역

Though brahmins learned in the five Vedas

Practise austerities for a hundred years,

a hundred years,

 

 

 

차이는 sata에 대한 해석이다. 빅쿠 보디와 각묵스님은 ‘백 년’이라 하였고, 전재성님은  ‘백 명’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sata 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따라 다른 것이다. 그래서 각묵스님은 ‘잘 배운 바라문들’이라 하였고, 전재성님은 ‘베다에 정통한 백 명의 사람’이라 하여 바라문이 백명임을 말하고 있다. 또 각묵스님은 ‘백 년 동안’이라 하였는데, 전재성님은 ‘한결같이’라 하였다. 이런 차이는 전통적인 주석을 수용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해석에 따르냐의 차이로 보여진다. 그러다 보니 전혀 다른 번역 처럼 보인다.

 

 

 

2014-01-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