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빠라마수카(parama sukha)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 8. 15:32

빠라마수카(parama sukha)에 대하여

 

 

 

보통불자가 감히 번역비교를

 

상윳따니까야 번역비교를 하고 있다. 과연 이런 시도가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스스로 의문을 갖는다. 학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스님도 아닌 보통불자가 감히 번역비교하는 것이 가당치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번역비교를 함으로써 구업을 짓고 있다. 구업에 대한 대가는 달게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다만 보고 듣고 느낀 사항에 대하여 기술하지만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감히 번역비교를 하는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다. 어느 한 번역서에 의존하기 보다 다양한 번역서를 접하여 서로 크로스 첵크 함으로써 부처님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번역비교는 상윳따니까야를 주로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는 사부니까야 중에서 상윳따니까야가 가장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또 고층일 뿐만 아니라 내용도 방대하고 간단한 게송에서부터 심오한 교리까지 총 망라 되어 있다. 그래서 상 상윳따니까야 하나만 소화 하여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거의 다 접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본다. 이렇게 사부니까야 중에서 상윳따니까야가 차지 하는 비중이 가장 높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이 가장 먼저 번역한 것이 상윳따니까야라 본다.

 

순차적으로 비교하고 있는데

 

상윳따니까야 번역비교는 제1장부터 순차적으로 하고 있다. 1장에는 주로 짤막한 게송으로 되어 있지만 심오한 뜻이 내포 되어 있다. 그래서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 것처럼 보면 볼수록 의미가 살아 난다. 그리고 다른 경들과 연계 되어 있어서 짤막한 게송 하나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부 녹아 들어 있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테라와다 불교 국가에서는 상윳따니까야 1권의 내용이  법문이나 교육용으로 널리 활용 된다고 한다. 그래서 제1장 제1절 식으로 처음부터 차례로 순차적으로 번역비교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순차적으로 비교 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오해를 받게 된다. 논쟁중인 사항과 맞아 떨어졌을 때 마치 오비이락식으로 의도를 가지고 글을 쓰게 된 것처럼 오해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우연히 맞아 떨어진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살아 있다는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이기 때문에 마치 자신을 향하여 들리는 것처럼 생각하지 때문이다. 그러나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단지 소개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삿다숫따(Saddhāsutta, S1.36)에서

 

사뚤라빠 무리의 품에서 웃자니쌍니까의 경(S1.35)’에 이어지는 것은 믿음의 경(S1.36)’이다. 빠알리어로 삿다숫따(Saddhāsutta)’ 라 하는데, 전재성님은 믿음의 경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믿음 경, 빅쿠 보디는 Faith라 하였다. 먼저 하늘사람이 부처님 면전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Saddhā dutiyā purisassa hoti

no ce assaddhiya avatiṭṭhati
Yaso ca kitt
ī ca tatvassa hoti
Saggañca so gacchati sar
īra pahāyāti.

 

(Saddhāsutta, S1.36)

 

 

믿음은 인간의 진정한 친구이니

믿음이 없다면 존속할 수 없습니다.

명성과 명예는 이것 때문에 생기고

이것 때문에 몸 버린 뒤 천상에 가게 됩니다. 

 

(믿음 경, 상윳따나까야 S1.36, 각묵스님역)

 

 

[하늘사람]

믿음은 인간의 참다운 벗

불신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명예와 칭찬이 생겨나고,

몸을 버리면 하늘나라에 이른다네.”

 

(믿음의 경, 상윳따나까야 S1.36, 전재성님역)

 

 

"Faith is a person's partner;

If lack of faith does not persist,

Fame and renown thereby come to him, <54>

And he goes to heaven on leaving the body."

 

(Faith, CDB S1.36, 빅쿠 보디)

 

 

경의 제목이 삿다(Saddhā)이다. 이를 일반적으로 믿음(, Faith)’이라 번역한다. 그렇다면 삿다는 어떤 믿음을 말할까?

 

묻지마믿음

 

믿음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믿을 信()자 앞에 수많은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맹신(盲信)’이다. 이는 맹목적인 믿음을 말한다. 마치 눈을 감고도 믿는 묻지마믿음이 이에 해당된다.

 

맹신은 주로 유일신교에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유일신교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에서 출발하여 믿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무조건적 믿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치로 따지고 조건으로 비교하여 믿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가 있다고 하였을 때 이를 믿어야만 종교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맹목적 믿음, 묻지마 믿음 중에는 마하야나의 믿음도 해당된다고 본다. 특히 견성성불식 믿음을 말한다. 본래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믿는 것을 말한다. 내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믿어야 그 다음 단계가 진행 될 수 있다. 이는 초기불교와 다르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초기불교에서 정견이 바로 서야 한다. 이때 정견은 사성제를 알고 이해하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마하야나에서의 정견은 본래 내가 부처다라는 본래불을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 된다. 이렇게 초기불교와 마하야나는 정견부터 차이가 난다. 이처럼 정견이 다르니 그 다음 단계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정견이 다르면 목적지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사성제를 정견으로 갖는 초기불교에서는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이지만, 본래불을 정견으로 갖는 마하야나에서는 견성성불이 된다.

 

왼쪽 길로 가지 말고 오른 쪽 길로

 

두 개의 길이 있을 때 바른 쪽 길이 초기불교이다. 이는 다름 아닌 정도이고 또 다른 말로 팔정도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항상 바른 길로 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두개의 길 중에 왼쪽 길이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띳싸여, 두가지 길이 있다는 것은 의혹을 지칭한 것이다. 왼쪽 길은 여덟가지의 잘못된 길을 지칭한다. 곧 잘못된 견해, 잘못된 사유, 잘못된 언어, 잘못된 행위, 잘못된 생활, 잘못된 정진, 잘못된 새김, 잘못된 집중을 말한다.

 

(Tissa sutta-띳싸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84,전재성님역)

 

 

등산하다 보면 두 개의 길을 만난다. 이때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진리의 길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지금 두 개의 가르침이 있는데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을 수 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때는 오른 길로 가야 한다. 이때 오른 길은 오른쪽 방향의 길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바른 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오른쪽 길이 있다면 왼쪽 길도 있을 것이다. 진리의 길로 따졌을 때 왼쪽 길은 길이 아니다. 물론 왼쪽 길은 진리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경에서도 왼쪽 길은 여덟가지의 잘못된 길을 지칭한다. (S22:84)”라고 하였다. 바른쪽 길로 가면 팔정도의 길이고, 왼쪽 길로 가면 팔정도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자라면 바른 길로 가야한다. 그 길이 팔정도의 길인 것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믿음, 삿다(Saddhā)

 

여기 두 개의 길이 있다면 바른 길로 가야 한다. 바른 길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것은 바른 견해를 갖는 것을 말한다. 바른 견해를 가져야 바른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른 견해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사성제를 알아 부처님의 가르침이 틀림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비로소 가르침을 받아 들인다.

 

예로 들어 고성제가 있다. 고성제에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라 하였다.

 

이런 사실을 과연 누군가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자신있게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받아 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고성제이다.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 보았을 때 틀림 없는 사실임을 알게 된다. 이때 비로소 믿음이 생긴다. 그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합리에 바탕을 둔 믿음이다. 그리고 이성적 믿음이다. 이렇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믿음에 대하여 삿다(Saddhā)’라 한다.

 

출세간적 이야기

 

게송에서는 특별한 각주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믿음은 인간의 참다운 벗 (Saddhā dutiyā purisassa hoti)’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빠알리어 ‘dutiyā에 대하여 친구로 번역하였다. Dutiyā는 원래 두 번째의 것이라는 뜻인데, 게송에서는 두 번째의 자기자신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믿음에 대하여 참다운 친구라 한 것이다.

 

그런데 하늘사람의 첫 번째 게송을 보면 마지막 구절에 하늘나라에 이른다네라 되어 있다. 이는 믿음과 지계와 보시의 생활을 하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시계생천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초심자나 재가자에게 해당되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첫 번째 게송에서 말하는 믿음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세간의 재가자에 대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두 번째 하늘사람 게송을 보면 이를 뛰어 넘는다. 다음과 같은 출세간적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Kodha jahe vippajaheyya māna

sayojana sabbamatikkameyya,
Ta
nāmarūpasmimasajjamāna

akiñcana nānupatanti sagāti.

(Saddhāsutta, S1.36)

 

 

분노를 버리고 자만을 내던져야 하고

모든 족쇄 끊고서 건너야 합니다.

정신과 물질에 집착하지 않기에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그 사람

매듭은 그런 분을 덮치지 못합니다. (*173)

 

(믿음 경, 상윳따나까야 S1.36, 각묵스님역)

 

 

[다른 하늘사람]

분노를 떠나서 망상을 버리고

일체의 결박을 뛰어넘어야 하리.

정신-신체적 과정에 집착하지 않아

아무 것도 없는 님에겐 애착이 따르지 않네.”

 

(믿음의 경, 상윳따나까야 S1.36, 전재성님역)

 

 

 one should discard anger, cast off conceit,

Transcend all the fetters.

No ties torment one who has nothing,

Who does not adhere to name-and-form."(*81)

 

(Faith, CDB S1.36, 빅쿠 보디)

 

 

또 다른 하늘사람의 두 번째 게송을 보면 첫 번째 게송과 비교하여 진전된 형태이다. 이는 니까야의 특징이다. 먼저 세속적인 견해가 나오면 이어서 출세간적 견해로 반박하는 내용이 나오는 형식이다. 이는 마라가 등장하였을 때 확연히 드러난다. 마라(악마)가 주로 세속적인 삶의 흐름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만 이어지는 부처님의 말씀은 이를 뛰어 넘는 출세간적 가르침을 제시하여 차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게송인데 단어만 차이 나는 경우

 

두번째 게송은 이전의 나산띠경(S1.34)에 실려 있는 게송이 그대로 나와 있다. 나산띠경에서는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삿다경(S1.36)에서는 하늘사람이 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이와 다르다.

 

이렇게 같은 게송을 놓고 어느 경에서는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으로 되어 있고, 또 어느 경에서는 부처님이 아닌 다른 존재가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니까야의 특징이다. 진리라는 것이 어느 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명한 게송을 보면 이곳 저곳에서 수 없이 인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라 본다. 좋은 문구가 있으면 외우고 이사람 저사람이 인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에서 인용된 게송을 보면 약간 차이가 있다. 백프로 똑같지 않다는 말이다. 한단어가 차이가 난다. 게송의 네 번째 구절 마지막 부분의 sagāti가 그것이다. 이를 초불연 번역에서는 매듭이라 하였고, 성전협 번역에서는 애착이라 번역하였다. 그런데 성전협 전재성님은 이 게송에 대하여 294번 각주에서 앞에 나온 시 103과 동일하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오류이다. 나산띠경에 실려 있는 게송 103번을 보면 마지막 구절에 있는 단어가 sagāti 대신 dukkha 라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173) 본서 「있는 것이 아님 경」(S1:34){104}에서는 세존이 읊으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거기서는 제4연의 ‘매듭(sanga)’ 대신에 괴로움(dukkha)이 나타난 것만 다르다.

 

(173각주, 각묵스님)

 

 

차이는 sagātidukkha이다. 이는 매듭과 괴로움이다. 똑 같은 형식의 게송이지만 단어 한 개의 차이로 인하여 백프로 똑같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산띠경에서는 괴로움은 결코 그를 덥치지 못하노라(akiñcana nānupatanti dukkha, S1.34)”라고 되어 있지만, 삿다경에서는 매듭은 그런 분을 덮치지 못합니다.( akiñcana nānupatanti sagāti , S1.36)”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빅쿠 보디도 다음과 같이 똑 같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81) This verse is identical with v. 104 except that in pada d sanga replaces dukkha. on the five ties, see n. 12.

 

(81번 각주, 빅쿠 보디)

 

 

하늘사람의 두 번째 게송은 오취온에 대한 것이다. 오온이 내것이다라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이런 오취온이 떨어져 나갔을 때 더 이상 괴로움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정신-신체적 과정에 집착하지 않아라 하였다.

 

오온에 집착하지 않았을 때 괴로움은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게송에는 괴로움이라는 둑카(dukkha) 대신 매듭을 뜻하는 상가(sagā)를 집어 넣었다. 오온을 내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마치 단단히 묶여져 있는 매듭과도 같은 것이라 본 것이다. 그래서 빅쿠 보디는 No ties torment one who has nothing”라 하였다. 이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에게 고통으로 묶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이는 akiñcana nānupatanti sagāti.에 대한 해석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그 사람 매듭은 그런 분을 덮치지 못합니다.”라고 하여 길게 번역하였다. 전재성님은 sagā에 대하여 애착으로 번역하여 아무 것도 없는 님에겐 애착이 따르지 않네.”라 하였다. 같은 번역이라도 한편에서는 길게 두 줄로 번역하고 또 한편에서는 한줄로 짧게 번역하였다. 이런 번역 차이는 무엇일까?

 

사구게(四句偈)’라 하였을까?

 

게송번역이 어렵다고 한다. 산문은 기본적인 소양이 있으면 누구나 번역할 수 있지만 시와 같은 운문체는 상징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내용이 심오하여 번역하기가 난해 하다고 한다. 그래서 시어를 번역할 때는 언어학적 인문학적 소양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대부분 게송을 보면 네 개의 구절로 되어 있다. 그래서 사구게라 하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부분 게송은 네 개의 구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번 게송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akiñcana nānupatanti sagāti.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사구절의 원칙을 어겼다. 이를 원어와 타번역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비 고

빠알리

akiñcana nānupatanti sagāti.

 

초불연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그 사람

매듭은 그런 분을 덮치지 못합니다.

두 개의 구절로 됨

성전협

아무 것도 없는 님에겐 애착이 따르지 않네.

 

CDB

No ties torment one who has nothing

 

 

 

초불연의 번역이 사구절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다. 이는 주석적 번역 때문이라 본다. 주석에서 설명되어야 할 내용이 종종 본문에 실린 경우 마치 설명식의 딱딱한 번역이 되기 쉽다.

 

시어는 상징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원문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설명이 필요하면 각주에서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번역서를 보면 주석적 번역을 다수 볼 수 있는데 초불연 번역도 그 중의 하나라 본다. 대괄호치기 역시 주석적 번역의 범주로 본다.

 

누가 읊은 게송인가?

 

두 명의 하늘사람 게송에 이어 부처님이 역시 게송을 답하였다.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게송이다.

 

 

Pamādamanuyuñjanti

bālā dummedhino janā
Appamādañca medhāvī

dhana seṭṭha'va rakkhati.

Mā pamādamanuyuñjetha

mā kāmaratisanthava
Appamatto hi jhāyanto

pappoti parama sukhanti.

 

 

[세존](*174)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들은 방일에 몰두하지만

현자는 불방일을 최상의 재산으로 보호하노라.

 

방일에 몰두하지 말고

감각적 욕망과 내통하지 말지니

방일하지 않고 참선하는(*175)

궁극적인 행복(*176)을 얻기 때문이로다. 

 

(믿음 경, 상윳따나까야 S1.36, 각묵스님역)

 

 

[세존]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자는

방일에 탐닉하고

슬기로운 자는 값비싼 재물을 보호하듯,

방일하지 않음을 수호하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거나

방일에 탐닉하지 말라.

방일하지 않고 선정을 닦으면,

최상의 행복을 성취하리.”

(
믿음의 경, 상윳따나까야 S1.36, 전재성님역)

 

 

[Another devatā]

 

"Foolish people devoid of wisdom

Devote themselves to negligence.

But the wise man guards diligence

As his foremost treasure.

 

 "Do not yield to negligence,

Don't be intimate with sensual delight.

For the diligent ones, meditating,

Attain supreme happiness."

 

(Faith, CDB S1.36, 빅쿠 보디)

 

 

두 한글 번역을 보면 부처님이 읊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빅쿠 보디의 번역을 보면 [Another devatā]로 되어 있어서 또 다른 하늘사람이 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오로지 초불연의 각주만 보이는데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174) 내용상으로나 문맥상으로 다음 게송들은 세존의 말씀으로 간주해야 할듯하다. 미얀마어 번역본도 세존의 말씀으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보디 스님은 이 두 게송을 다른 천신이 읊은 것으로 표기하고 있다.한편 이 게송은 『맛지마 니까야』「앙굴리말라 경」(M86) §18과 『장로게』(Thag) {883}에는 앙굴리말라 존자가 읊은 것으로 나타나고, 『법구경』(Dhp) {26~27}에는 세존께서 읊으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74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의 각주에 따르면 문맥상 부처님의 말씀으로 간주 해야 된다고 한다. 그러나 CDB에서 빅쿠 보디는 하늘사람(devatā)’이 읊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미얀마본에서는 분명이 부처님이 읊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맛지마 니까야 등 다른 경전에서도 부처님이 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전재성님도 부처님이 읊은 것으로 하였다

 

빅쿠 보디는 왜 하늘사람이 읊었다고 하였을까?

 

그럼에도 빅쿠 보디는 하늘사람이 읊은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빅쿠 보디가 실수한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TPS본이 실려 있는 TIPITAKA사이트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기 때문이다.

 

 

Atha kho apar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ā gāthāyo abhāsi:

 

Kodha jahe vippajaheyya māna sayojana sabbamatikkameyya,
Ta
nāmarūpasmimasajjamāna akiñcana nānupatanti sagāti.
Pamādamanuyuñjanti bālā dummedhino janā
Appamādañca medhāvī dhana
seṭṭha'va4 rakkhati.
Mā pamādamanuyuñjetha mā kāmaratisanthava

Appamatto hi jhāyanto pappoti parama
sukhanti.

 

(TIPITAKA 사이트에서 PTS)

 

 

TPS본을 보면 ‘Atha kho apar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ā gāthāyo abhāsi:’라 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하늘사람이 세존 앞에서 이와 같은 시를 읊었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연속하여 세 개의 게송이 소개 되고 있다. 위에 언급된 두 개의 게송은 첫 번째 게송에 이어지는 두 번째와 세 번째 게송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겉으로 보기에는 하늘사람이 세 개의 게송을 모두 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TPS 본을 기준으로 한다면 빅쿠 보디의 번역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초불연의 경우 이번에는 빅쿠 보디의 견해를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부처님이 게송을 읊은 것으로 번역해 놓았다.

 

빠라마수카(parama sukha)에 대하여

 

게송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지막 구절에 있는 ‘parama sukhanti.’이다. 이는 ‘빠라마수카(parama sukha)’에 대한 것이다. 이 빠라마수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궁극적 행복’이라 번역하였다. 전재성님은 ‘최상의 행복’이라 하였고, 빅쿠 보디는 ‘supreme happiness라 하였다. 그렇다면 빠라마수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176) “여기서 ‘궁극적인 행복(parama sukha)’이란 아라한과의 행복(arahatta sukha)을 말한다.(SA.i.67)

 

(176번 각주, 각묵스님)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빠라마수카(parama sukha)는 ‘아라한과의 행복(arahatta sukha)’이라 하였다. 이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예상을 빗나간 것이다. 왜냐하면 궁극적 행복이라는 것은 열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각묵스님이 그동안 각종 기고문과 강연에서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의 행복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이때 궁극의 행복을 열반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궁극적 행복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세 번째 행복은 궁극적 행복(parama-sukha, 至福)이며 이것은 열반이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깨달음, 해탈, 열반, 성불은 세상의 어떤 가치체계나 신념체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이 제시하는 고귀한 가르침이다. 스님들은 이러한 궁극적 행복을 위해서 출가하여 수행을 하며, 재가 신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가치체계와 신념체계로 받아들이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 『니까야 강독 II 들어가는 2. 궁극적 행복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 2013-12-16, 각묵스님)

 

 

학인스님들을 위한 교재로서 초불연에서 출간된 니까야 강독에 따르면 궁극의 행복에 대한 정의가 내려져 있다. 각묵스님이 인터넷 카페에 올린 글에 따르면 궁극적 행복(parama-sukha, 至福)이며 이것은 열반이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똑 같은 단어에 대하여 삿다경(S1.36)에서는 ‘궁극적인 행복(parama sukha)’이란 아라한과의 행복(arahatta sukha)을 말한다.”라고 주석을 인용하여 설명해 놓았다. 대체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빠라마수카가 열반일 수도 있고 아라한의 행복일 수도 있다. 그러나 뉘앙스는 매우 다르다. 열반은 시설 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이는 그 어느 것으로도 표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반에 대하여 행복이다라고 정의 해 버리면, 막말로 열반이라는 것은 느낌이 되어 버리기 쉽다. 열반이 최상의 궁극의 행복한 느낌이 되는 것을 말한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인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궁극적 행복에 대하여 열반이라고 정의 내렸을 때 열반은 행복한 느낌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열반은 무상, , 무아인 것이어서 알아차릴 대상이 되어 버린다. 이는 모순이다. 따라서 빠라마수카에 대하여 열반이다라고 표현한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아라한의 삶은 축복 그 자체

 

그러나 주석의 견해대로 빠라마수카에 대하여 아라한과의 행복이라고 정의하면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 아라한과를 증득한 아라한의 삶에 있어서 그 삶 자체가 축복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갈라경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Tapo ca brahmacariyañca          따뽀 짜 브라흐마짜리얀짜

ariyasaccānadassana,           아리야삿짜나닷사낭
Nibb
ānasacchikiriyā ca           닙바나삿치끼리야 짜

eta magalamuttama.           에땅 망갈라뭇따망

 

감관을 수호하여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stn267)

 

(Magalasutta- 위대한 축복의 경, 숫따니파타Sn 2.4, 전재성님역)

 

 

 

Water drop

 

 

망갈라경(길상경, Sn2.4)에서는 열반을 이루는 것에 대하여 더 없는 축복이라 하였다. 여기서 경의 제목인 망갈라(magala)’는 행복을 뜻하는 수카(sukha)가 아니다. 망갈라는 상서로운 조짐, 길상, 행운, 축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행복한 것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행복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영문제목도 일반적으로 ‘Blessings(축복)’ 이라고 번역 된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행복감, 즉 일시적 행복감과는 엄연하게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는 망갈라경에 대하여 행복경이라 번역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종종 본다.

 

빠라마수카(parama sukha)와 아라한의 삶

 

초불연에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세 번째 행복은 궁극적 행복(parama-sukha, 至福)이며 이것은 열반이다”라 하였는데 이는 모순이다. 또 “스님들은 이러한 궁극적 행복을 위해서 출가하여 수행을 하며”라 하였는데 마치 열반이라는 행복을 얻기 위하여 출가한 것처럼 보인다.

 

열반은 결코 행복이라는 말로 시설될 수 없다. 설령 ‘tesa vūpasamo sukhoti.(寂滅爲樂, S1.11)’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는 열반 그 자체를 말하기 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이치를 알아 마음의 고요함으로 얻어지는 현상을 노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문구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그 현상의 적멸이야말로 지복일세.”라 하였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이들의 가라앉음 진정한 행복일세라 하여 행복을 강조하였다.

 

행복은 행복을 누리는 자의 느낌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빠라마수카에 대하여 시설할 수 없는 열반이라고 정의한 것은 지나치다. 차라리 주석의 견해대로 아라한과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다.

 

빠라마수카에 대하여 아라한과의 행복으로 본다면 Uppajjitvā nirujjhanti  tesa vūpasamo sukhoti (生滅滅已 寂滅爲樂, S1.11)”라는 말은 쉽게 해석된다.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는 것을 아는 아라한에게 있어서 무엇이든지 집착할 것이 없다. 따라서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괴로움이 소멸된 그 상태가 아라한의 삶이다. 따라서 궁극적 행복(초불연) 또는 광대한 지복(성전협)의 뜻으로 번역되는 빠라마수카(parama sukha)는 아라한과를 이룬 아라한의 삶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2014-01-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