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성불의 길과 아라한의 길의 갈림목, 상카루뻭카냐나(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 9. 13:55

 

성불의 길과 아라한의 길의 갈림목, 상카루뻭카냐나(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

 

 

 

매일 부처님 말씀을 접하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다. 달리 특별히 할 일이 없을 때 가르침을 접한다. 시간이 없으면 일부로 시간을 내서라도 접한다. 가르침을 접하는데 있어서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지만 경전만한 것이 없다고 본다. 다행히도 우리말로 번역된 초기경전에 있어서 어느 때나 꺼내 본다. 작업하는 책상 바로 옆에 있는 책장에서 아무 경이나 꺼내 보는 식이다.

 

속상한 마음이 일어날 때

 

경전은 아무곳이나 열어도 금새 마음의 변화가 일어 난다. 지금 여러 모로 혼란 스런 마음도 문구를 잡하는 순간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린다. 마음은 한순간에 한가지 일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래서 항상 알아차리라고 한다. 지금 현재의 마음을 알아 차리고, 그 마음을 알아차리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아는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아는 마음이 따로 있어서 알아차리는 마음을 안다면 이는 마하야나의 발상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오로지 한순간에 하나 밖에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알아차리면 후회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항상 알아차려야 함을 강조한다.

 

보통불자의 글쓰기는 오늘도 계속된다. 누가 무어라 하든 말든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다만 경전을 근거로 하여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개인적인 견해가 들어가지 않는다. 설령 들어 간다고 하더라도 주석등의 근거를 제시하기 때문에 그다지 크게 비난 받을 일은 없다고 본다. 그래서일까 종종 격려의 글도 받는다. 어느 법우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주셨다.

 

 

마음이 속상한 하루가 되면, 연꽃님 블러그 속의 내처지와 비슷한 부분에 대해 부처님이 설하신 원음을 읽어 보고, 마음속에 새겨보며, 두카를 조금씩이나마 녹여 봅니다. 그러한 부분이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됩니다.
추운 겨울날 감기 조심하시고, 건승하시기를 기원합니다.__()__

 

 

(B법우님)

 

 

종종 격려의 글을 주시는 법우님이다. 마음이 속상할 때 올려진 글을 보면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좋은 법문이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지 않으면 개인적 이야기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차라리 경전의 한구절이라도 말해 주는 것이 더 나음을 말한다.

 

불자들은 가르침에 목말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듣기 위하여 절에 가는 것이지 스님의 신변 이야기 듣기 위하여 가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법문은 경전에 근거해야 된다고 본다.

 

보통불자의 글쓰기는 경전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이런 글쓰기가 법문은 아니다. 보통불자가 능력껏 쓰는 글에 지나지 않는다. 학자나 스님 등 주류측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B급 삼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철저하게 B급 삼류 글쓰기를 지향한다.

 

사마야경(S1.37)에서

 

상윳따니까야 번역비교를 하고 있다. 1장부터 순서대로 하고 있는데 첫 부분을 보면 간단한 게송이나 짤막한 경위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점차 긴 길이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만의 특징이라 본다. 맛지마니까야처럼 처음부터 어려운 이야기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차츰차츰 강도를 높여 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사마야경(S1.37)의 경우 산문과 운문이 복합화 되어 있는 중간 길이의 경이다. 그래서 번역비교를 할 때 모두 대상으로 하면 엄청난 양이 되어 버린다. 일반적으로 열 페이지가 넘어 가면 지루 하다고 하는데 양이 너무 많은 경우 쉽게 싫증 날 것이다. 그래서 산문의 경우 전재성님 번역을 기본으로 하고 상징어로 되어 있는 심오한 게송에 대해서만 번역 비교를 하는 것이 나을 듯 하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끼야(*298) 족이 살고 있는 까삘라밧투시의 마하 숲에서 모두 아라한인 약 오백 명의 수행승들의 참 모임과 함께 계셨다.

 

그 때 시방세계에서도(*302) 또한 하늘사람들이 세존과 수행승들을 보기 위해서 수없이 모여들었다.

 

마침 청정한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303)의 하늘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늘사람들] '지금 세존께서 싸끼야 족이 살고 있는 까삘라밧투시의 마하 숲에서 모두 아라한인 약 오백 명의 수행승들의 참 모임과 함께 계신다. 시방세계에서도 또한 하늘사람들이 세존과 수행승들의 참 모임을 보기 위해서 수없이 모여 있다. 우리들도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가자. 가까이 가서 세존의 앞에서 각각 시를 읊어보자'

 

그래서 그 하늘사람들은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사이에, 정거천에서 모습을 감추고 세존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하늘사람들은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 쪽으로 물러나섰다. 한쪽으로 물러나 서서 한 하늘사람이 세존의 앞에서 이와 같은 시를 읊었다.

 

(Samayasutta-모임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7, 전재성님역)

 

 

사마야경 도입부이다. 일종의 배경설명에 해당 된다. 경에서 298번에 싸끼야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빠알리 원문에서는 ‘sakkesu’라 표기 되어 있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싸끼야(sakyā)라 하였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삭까(sakka)라고 표기 하였다. 빅쿠 보디는 the Sakyans라 하였다. 이렇게 작은 차이가 보인다.

 

시방세계에 대하여

 

302번을 보면 시방세계라는 말이 보인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열군데 세계라 하였다. 빅쿠 보디는 ‘ten world systems’라 하였다. 이에 대한 원문을 보면 ‘Dasahi ca lokadhātūhi’라 되어 있다. 이 시방세계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302) Dasa lokadhātūyo : Srp.I.74에 따르면, 로까다뚜(lokadhātū)는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철위산(cakkavala)과 동의어이다. 시방세계는 동----사유(동북-동남-서남-서북)--하의 열군데이다.

 

(302번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이 시방세계라 번역한 Dasa lokadhātūyo을 의역한 것이다. 빅쿠 보디는 이를 ‘ten world systems’라 하였는데 직역한 것이다. 각묵스님 역시 열군데 세계라 하여 직역한 것이다. 열군데 세계는 동서남북사유상하를 뜻하는 것으로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시방세계라 한다.

 

숫다와사(suddhāvāsa, 淨居天)

 

303번은 청정한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에 대한 것이다. 이를 한자어로 말하면 정거천(淨居天)이다. 빠알리어 suddhāvāsa의 한역이다. suddhāvāsaSuddhā(청정함)+ vāsa(거주)의 합성이다. 따라서 깨끗한 자들이 머무는 천상이라는 뜻으로 정거천이라 한다. 빅쿠 보디는 ‘the Pure Abodes’라 하였다. Abode주소, 체류, 거처라는 뜻이다. 그래서 the Pure Abodes’순수한 자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우리말로 풀어서 청정한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라고 길게 이름 하였다. 각묵스님은 한역 그대로 정거천이라 번역하였다.

 

그들은 왜 참석하지 못하였을까?

 

그런데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특별한 내용이 보인다. 다른 번역서에서는 보이지 않는 각주가 있다. “그 때 시방세계에서도 또한 하늘사람들이 세존과 수행승들을 보기 위해서 수없이 모여들었다.(성전협)”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를 열군데 세계의 신들도 세존과 비구 승가를 친견하기 위해 대부분(*181) 다 모였다.(초불연)”라고 하였다. 여기서 큰 차이가 수없이대부분이다. 빅쿠 보디는 the most part 라 하였다. 각묵스님이 대부분이라고 한 것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181) “’대부분(yebhuyyena)’이라고 한 것은 지혜가 느린(manda) 무상유정천의 신들(asanni)과 무색계 신들(arupavacara-devata)은 제외 되었기 때문이다.(SA.i.73)

 

(181번 각주, 각묵스님)

 

 

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법문하면 인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의 십호 중에 천인사라는 말이 있듯이 부처님은 인간과 하늘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두 참석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yebhuyyena라는 표현을 하였는데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mostly의 뜻이다.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그렇다면 무상유정천과 무색계의 중생들은 왜 참석하지 못하였을까? 나름대로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 무상유정천의 경우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사는 존재와 같다. 평소에 인식하는 것을 혐오하여 마음이 있는 것 자체가 괴로움으로 보아 무념, 무상 등의 선정수행을 닦아 그 과보로 태어 난 곳이 무상유정천이라 한다.

 

무상유정천은 문자 그대로 지각()할 수 있는 기능이 없고 오로지 몸만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래서 마치 혼수상태처럼 나무토막과도 같은 삶을 사는 존재를 말한다. 마치 청동상 처럼, 목각 인형처럼 아무 의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죽어야만 의식이 돌아 온다. 죽어야 사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이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의 법문이 있어도 참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색계 존재는 몸이 없다. 다만 정신 기능만 있는 존재라 한다. 그럼에도 회합에 참석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주석에 따르면 지혜가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아마도 몸을 혐오 하여 선정수행을 닦은 결과일 것이다. 그렇게 몸이 없이 한량 없는 세월 동안 선정삼매의 즐거움만 누리고 있다면 회합에 참석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부처님 게송이 없는 이유

 

사마야경에서는 정거천의 하늘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경을 보면 하늘사람들의 게송만 있을 뿐이지 부처님의 게송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것과 다른 양상이다. 이전에는 하늘사람이 자신의 견해를 게송으로 말하면 부처님이 이를 뛰어넘는 출세간적 가르침에 대한 게송으로 답하는 것이 일반적 형식이었다.

 

그러나 사마야경에서는 모두 정거천사람들이 게송으로 말하는 것으로 그친다. 이는 정거천의 하늘사람들이 다른 천상의 존재와는 다르기 때문이라 본다. 정거천은 불환자들이 가는 곳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제자들이 태어나는 곳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 하시고자 같은 것이기 때문에 다만 부처님이 추인하는 형식이라 보여진다.

 

첫번째 게송에서

 

먼저 첫 번째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Mahāsamayo pavanasmi

devakāyā samāgatā,
Āgatamha ima dhammasamaya

dakkhitāye aparājitasaghanti.

 

 

이 숲에는 큰 회합이 개최되어 있으니

신들의 무리가 많이 모여들었고

법다운 이 회합에 우리도 왔으니

패하지 않는 승가를 친견하기 위함이라.” 

 

(각묵스님역)

 

 

[하늘사람]

 숲가운데 큰 모임에

하늘사람 무리가 함께 모였네.

무패의 승리자를 보고자 (*304)

우리도 고귀한 참모임에 왔네

 

(전재성님역)

 

 

"A great concourse takes place in the woods,

The deva hosts have assembled.

We have come to this Dhamma concourse

To see the invincible Sangha."

 

(빅쿠 보디역)

 

 

이 게송에 대하여 특별한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번역이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구절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빠알리 원문 세 번째 구절에 dhammasamaya가 있는데 이를 직역하면 담마모임이다. 이를 빅쿠 보디는 ‘Dhamma concourse’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법다운 이 회합이라 하였다. 전재성님은 고귀한 참모임이라 하였다. 이렇게 번역어가 다르다 보니 달라 보인다.

 

더구나 ‘dakkhitāye aparājitasaghanti’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무패의 승리자를 보고자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패하지 않는 승가를 친견하기 위함이라이라 하였다. 그리고 빅쿠 보디는 To see the invincible Sangha’라 하였다.

 

aparājitasaghanti에서 aparājita‘unconquered(정복되지 않음)’의 뜻이다. 따라서 aparājitasaghanti는 정복되지 않은 상가의 뜻이다. 이를 전재성님은 의역하여 무패의 승리자라 하였다. 그런데 전재성님의 304번 각주에 따르면 Dakkhitāye에 대하여 베다어적인 부정사이다라 하였다. 영어의  to 용법과 같은 것이라 본다. 그래서 Dakkhitāye‘to see’의 뜻이 된다. 이에 대하여 빅쿠 보디는 To see the invincible Sangha라 하여 정복되지 않는 상가를 보기 위하여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좀 더 나가 패하지 않는 승가를 친견하기 위함이라라 하여 친견이라는 말을 집어 넣어 의역하였다.

 

마지막 게송을 보면

 

사마야경은 부처님의 상가에 대한 찬탄이다. 그래서 네 게의 게송이 등장하는데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게송이 결론적이다. 이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Ye keci buddha saraa gatāse

na te gamissanti apāya,
Pahāya mānusa
deha

devakāya paripūressantīti.

 

누구든지 부처님께 귀의한 자들은

 악처로는 가지 않는 수승한 존재이니

인간의 몸 버린 뒤에 신의 무리 성취하리.”(*186)

 

(각묵스님역)

 

 

[다른 하늘사람]

누구라도 깨달은 님께 귀의하면

비천한 존재(*313)로 떨어지지 않네.

죽어서 사람의 몸을 버리면,

하늘사람의 몸을 성취하리라.”

 

(전재성님역)

 

 

"Those who have gone to the Buddha for refuge

Will not go to the plane of misery.

On discarding the human body,

They will fill the hosts of devas." (*85)

 

(빅쿠 보디역)

 

 

이 게송은 saraa(귀의)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buddha saraa이라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깨달은 님께 귀의하면라 하여 buddha에 대하여 깨달은 자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buddha에 대하여 부처님이라 하여 마치 석가모니 부처님을 뜻하는 듯한 번역을 하였다. 빅쿠 보디는 ‘the Buddha’라 하였다. 그러나 문맥상 상가에서 깨달은 자는 모두 붓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깨달은 자로 번역한 것 같다.

 

게송에서는 buddha에 귀의하면 ‘비천한 존재로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na te gamissanti apāya에 대한 번역이다. 여기서 비참한 존재를 뜻하는 말이 apāya이다. Apāya에 bhumi가 붙으면 apāyabhumi가 되는 데 이는 고처를 말한다. 즉, 지옥, 축생, 아귀의 세계이다. 이를 다른 말로 악처라 한다. 그래서 각묵스님은 악처라 번역하였고, 빅쿠 보디는 the plane of misery라 하였다.

 

출세간적 귀의와 세간적 귀의

 

부처님에게 귀의하면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귀의한 자들을 보면 모두 다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출가자도 있을 것이고, 재가자도 있을 것이고, 또 사쌍팔배의 성자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빅쿠 보디는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85) Spk: This verse refers to those who have gone for refuge by the definitive going for refuge (nibbematika-saranagamana). Spk-pt: By this the supramundane going for refuge is meant (i.e., by the minimal attainment of stream-entry). But those who go for refuge to the Buddha by the mundane going for refuge (i.e., without a noble attainment) will not go to the plane of misery; and if there are other suitable conditions, on leaving the human body they will fill up the hosts of devas.

 

(85번 각주, 빅쿠 보디)

 

 

이에 대한 해석은 각묵스님의 각주를 참조 해도 된다.

 

 

(*186) “’부처님께 귀의한 자들(ye keci buddham saranam gatase)’이란 이견이 없이 전적인 귀의를 한(nibbematika-sarana-gamana) 사람들을 말한다.(SA.i.77)  “확고한 귀의를 하였기 때문에(parinitthita-sarana-gamanatta) 출세간적인 귀의를 한 자들(lokuttara-sarana-gamana, 즉 예류자 이상의 성자들을 말함)을 말한다. 그들은 필연적 결과로(niyama) 악도(apaya)에는 가지 않고 신들의 몸(deva-kaya)을 받기 때문이다. 세간적인 귀의(lokiyasarana-gamana)를 통해 부처님께 귀의한 자들도 악도에는 가지 않고 다른 조건이 성숙하면 인간의 몸을 버리고 신들의 몸을 받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SAT.i.100)

 

(186번 각주, 각묵스님)

 

 

두 가지 귀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출세간적 귀의와 세간적 귀의를 말한다. 출세간적 귀의는 출가자들을 말하고 세간적 귀의는 재가자를 말한다. 부처님께 귀의한 출가자들은 필연적으로 출세간의 진리를 향해서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류자가 되면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이를 것이기 때문에 결코 악처에 떨어질 수가 없다. 따라서 수다원이 되어야만 안심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세속에 사는 재가자의 경우 삼보에 대하여 피난처로 삼지만 출세간적 진리를 모두 실천하여 도와 과를 이루기가 힘이 든다. 그럴 경우 삼보에 대한 믿음과 지계하는 삶, 보시하는 삶 만으로도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예류자가 되는 것이다. 한번 수다원이 되면 그 길로 죽 가게 되어 궁극적으로 완전한 해탈을 이루어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되기 때문이다.

 

예류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런데 부처가 되기 위하여 예류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도 있다. 일단 한번 수다원이 되면 아라한이 되는 길로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보살의 길을 걷기로 서원한 경우이다. 그럴 경우 동물로도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부처님이 전생에서 보살로서 삶을 살 때 동물로서 태어나 살신하는 공덕을 쌓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렇게 아라한의 길로 갈 것인가 보살의 길로 갈 것인가에 대한 법문을 들었다. 아잔 브람의 수행기법으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아울러 새로운 통합불교를 시도하고 있는 각산스님의 법문이다. 각산스님은 법문에서 다음과 말하였다.

 

 

16단계 지혜중에 평등심을 얻는 단계가 나옵니다. 이때 여러분들이 성불의 길로 가는 것이 있고, 아라한도의 길로 가는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맞든 안맞든 경전에 나오는 것을 보면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제가 지금 부처가 되려 하면 저는 지금 아라한이 되면 안됩니다. 아라한이 되면 이 생에서 이 몸을 마치면 무여열반 그냥 이대로 생사를 벗어나 버립니다. 그러나 부처가 되는 길에는 보살행을 해야 합니다. 복덕을 쌓아야 합니다. 복덕을 쌓을려면 중생의 몸을 받아야 합니다.

 

(13회 깨달음의 실제, 각산스님의 초기불교와 간화선 통합수행, 불교방송 TV, )

 

각산스님은 수행하는 과정에서 기로에 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수행을 더 진행하여 수다원이 되어 버리면 최대 일곱생 이내에 아라한이 되어 무여 열반에 들어 가버리기 때문에 부처가 되려고 하는 자는 수다원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한다.

 

두 갈래의 길의 갈림목

 

불교방송 사이트에서 본 각산스님의 법문은 참으로 신선하기도 하고 놀라웠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성불의 길과 아라한의 길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스님은 이 두 갈래의 길에서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하여 독특한 자신의 견해를 내 놓았다.

 

스님에 따르면 지금 여기 두 갈래의 길이 있을 때 그 갈림목평등의 지혜라 한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16단계 지혜를 설명할 때 11번 째 단계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평등의 지혜를 빠알리어로 상카루뻭카냐나(sakhārupekkhā ñāna)’라 한다. 참고로 상카루뻭카냐나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칠청정과 16단계 지혜

칠청정

16단계 지혜

1

계(sīla visuddhi)

 

네 가지 청정한 계

2

마음(citta visuddhi)

 

근접삼매와 본 삼매

3

(diṭṭhi visuddhi)

1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4

의심을 극복함

(kakhāvitaraa visuddhi)

2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paccaya pariggha ñāna)

5

도와 도아님에 대한 지와 견(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

6

도 닦음에 대한 지와 견

(patipadāāadassa visuddhi)

4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na)

5

무너짐의 지혜(bhaga ñāna)

6

공포의 지혜(bhaya ñāna)

7

위험의 지혜(ādīnava ñāna)

8

역겨움의 지혜(nibbidā ñāna)

9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muñcitukamyatā ñāna)

10

깊이 숙고하는 지혜(paisakhā ñāna)

11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sakhārupekkhā ñāna)

12

수순하는 지혜(anuloma ñāna)

6과 7사이에

13

종성의 지혜(gotrabhu ñāna)

7

지와 견

āadassa visuddhi)

14

도의 지혜(magga ñāna)

15

과의 지혜(phala ñāna)

16

회광반조의 지혜(paccavekkhaa ñāna)

 

 

상카루뻭카냐나는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라 번역 된다. 표에서와 같이 다음 지혜의 단계는 도와 과이다. 그래서 어떤 길을 갈것인지 갈림목에 있는 지혜라 볼 수 있다. 만일 계속해서 닦아 나가면 도와 과의 지혜를 증득하여 예류자가 되고 궁극적으로 아라한이 된다. 그래서 아라한의 길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도와 과를 증득 하면 되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two-roads

 

 

돌이킬 수 없는 길

 

도와 과를 이루면 가기 싫어도 완전한 열반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라따나경에서도 보인다.

 

 

Ye ariyasaccāni vibhāvayanti            예 아리야삿짜-니 위바-와얀띠
Gambh
īrapaññena sudesitāni              감비-라빤녜나 수데시따-
Kiñc
āpi te honti bhusappamattā          낀짜-삐 떼 혼띠 부삽빠맛따

Na te bhava aṭṭhama ādiyanti,        나 떼 바왕 앗타망 아-디얀띠
Idampi sa
ghe ratana paīta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심오한 지혜를 지닌 님께서 잘 설하신,

성스런 진리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여덟 번째의 윤회를 받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 stn230)

 

(Ratanasutta-보배경-寶石經, 숫따니빠따-Sn 2.1, 전재성님역)

 

 

초기경을 보면 수다원이 되면 최대 일곱생이내에 윤회가 끝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아라한의 길이다. 따라서 수다원이 된다는 것은 돌아 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다. 한번 수다원이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의 길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류자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16단계 지혜중에 11번째인 평등의 지혜에 이르렀을 때 거기서 스톱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의 길로 가기를 서원하였다면 그 이상의 지혜를 닦지 않음을 말한다.

 

저는 부처가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부처의 길로 가고자 하는 사람은 보살도를 닦아야 한다.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4아승지 겁 이상의 보살행을 하여 공덕을 쌓아야 한다. 그래서  수행의 갈림목에 해당되는 상카루뻭카냐나(평등심의 지혜)단계에서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 각산스님의 이야기이다. 이에 대하여 각산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라한의 길로 가는 것이 있는데, 왜 여기에서 수행을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을 해 버리면 내 의지하고 관계 없이.. ‘저는 부처가 되고 싶습니다  왜 그러냐  한국불교에 태어나서 저는 대승불교를 받아 들였습니다. 저는 전생에 제나름대로 서원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승려가 되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전생에 인연이 있어서 초기불교 하는 나라를 여러 오랫동안 다녀 왔습니다. 그러면 기본적 제 마인드는 옳든 그르든 대승적 마인드가 들어 있습니다. 진화발전인 것, 더 효율적인 것.

 

(13회 깨달음의 실제, 각산스님의 초기불교와 간화선 통합수행, 불교방송 TV, )

 

각산스님은 부처가 되고 싶다고 하였다. 이는 초기불교를 접하고 나서 자신이 어느 길로 갈 것인가를 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만일 초기불교를 몰랐더라면 자신이 믿고 있었던 것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였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초기불교를 접하고 나서 교리와 수행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스님은 아잔 브람을 만나 더욱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렇게 대승에서 시작하여 초기불교를 경험하고 아잔브람의 수행법을 알게 되었을 때 좀 더 발전적인 불교수행방법을 개발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요지는 한국의 간화선과 초기불교, 특히 아잔 브람의 수행불교와 접목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혼합불교를 시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어떤 존재로 태어나든 상관 없다고

 

이렇게 스님은 초기불교를 접하고 미얀마에서 수행하고 청정도론과 아비담마 이론에 대하여 알게 되자 자신이 가야할 방향에 대하여 알게 되었음을 말한다. 그래서 이어지는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완전하게 여기서(상카루뻭카냐나) 공부를 멈추고 지난 번에 수기 조건에 여덟 가지 길만 닦아 나갈 뿐이다 이말입니다.

 

(13회 깨달음의 실제, 각산스님의 초기불교와 간화선 통합수행, 불교방송 TV, )


각산스님이 말하는 여덟 가지 길은 보살행을 말한다. 수기를 받는 등의 보살행이다. 이렇게 스님은 수다원이 되기를 거부하고 보살의 길, 부처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공덕을 쌓는 보살도를 닦기로 서원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존재로 태어나든 상관 없다고 한다. 부처님도 과거전생에 동물로 태어나 살신 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 주었기 때문에 동물로도 태어 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서 여기에서 공부를 멈추고 다음에 태어날 때 내 업에 의해서 또 동물로 태어납니다. 축생으로. 부처님께서도. 나름대로 공부하여 이렇게 11단계 까지 올라 갔지만 전생의 업에 의해서 다시 축생의 몸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랬을 때 부처님을 만나서 수기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놓고 평등심을 얻고 사선정을 이것을 능숙하게 닦아 나가는 거죠. 다음생에 여자로 태어나고, 동물로 태어나고 하지만 사람일 것, 남자 일 것, 비구일 것 서원을 가져 갑니다.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까 저는 계속 서원을 세우고 있죠.

 

(13회 깨달음의 실제, 각산스님의 초기불교와 간화선 통합수행, 불교방송 TV, )

 

비록 동물로 태어날지라도 서원을 세워 놓은 것이 있다면 서원대로 된다고 한다. 그리고 복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부처님의 은혜, 시주의 은혜 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상카루뻭카 단계를 알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멈추고 있다고 한다.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지금 여기 두 개의 길이 있다. 아직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길이라 하였을 때 어느 길로 가야 할까? 이럴 때 부처님은 바른 길로 가야 된다고 하였다. 이는 왼쪽 길로 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왼쪽길은 바른길과 반대 되는 개념으로서 길을 말한다.

 

지금 여기 두개의 길이 있다. 하는 성불의 길이고 또 하나는 아라한의 길이다. 그런데 성불의 길은 매우 험난하다.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4아승지 이상 보살도를 닦아야 하고 또 살아 있는 부처로부터 수기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아라한의 길은 이미 닦여져 있는 길이다. 그래서 그대로 죽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아라한의 길은 다시는 돌아 오지 않는 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류자가 되면 일곱생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 생사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라한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부처가 되고자 다시 중생으로 태어나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그 결과 동물로도 태어날 수 있다. 이렇게 성불의 길과 아라한의 길이 있다. 불자들은 과연 어느 길로 가야 할까?

 

 

2014-01-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