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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각강당(重閣講堂, kutagarasalaya)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 15. 12:36

 

중각강당(重閣講堂, kutagarasalaya)에 대하여

 

 

 

그저 그려려니 하고

 

초기경전을 접하다 보면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특히 상윳따니까야 1권이 그렇다. 그렇다고 후대에 꾸며낸 이야기라고 하여 무시 한다면 가르침을 제대로 접할 수 없다. 단지 그러려니 하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도 무시하지 않는다. 또 부정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초월적인 이야기가 등장하였을 때 이를 부정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있을까?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단지 자신의 견해로 단지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정중하지 못한 태도로 본다.

 

초월적인 존재가 등장한다고 하여 가르침에 대한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일 초월적인 이야기, 신통이야기가 등장한다고 하여 무시해 버린다면 가르침은 무미건조해질 것이다. 초월적인 이야기, 신통이야기가 있음으로 인하여 가르침을 훨씬 더 풍요롭고 감동적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초월이나 신통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였을 때 부정할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려려니하며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 본다.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진 불자라면 설사 경에서 초월적이거나 신통에 대한 이야기를 접해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빳준나경(Pajjunna dhītusutta, S1.39)에서

 

니까야 중의 니까야라 볼 수 있는 상윳따니까야에서는 하늘사람(데와따)와 부처님의 대화에 대한 게송으로 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하늘사람이 등장할 때는 항상 한밤중이다. 이는 인간과 하늘의 스승이라 불리우는 천인사로서 부처님 역할 때문이라 본다. 그래서 부처님은 낮에는 인간을 교화하고 밤중에는 하늘사람을 교화한다는 뜻에서 하늘사람이 등장하는지 모른다.

 

상윳따니까야 1 1상윳따 39번째 경은 빳준나경(Pajjunna dhītusutta)이라 한다. 이를 전재성님은 비구름 신의 딸의 경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빳준나의 딸 경이라 하였다. 빅쿠 보디는 원어 그대로 ‘Pajjunna's Daughter’ 라 하였다.

 

빳준나경은 경의 제목에서 표현 되어 있듯이 여성신이 등장하였다. 이제까지 남성신만 등장하였으나 여성신이 등장하여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을 읊고 있다.

 

빳준나경을 보면 장소가 웨살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Eva me suta eka samaya bhagavā vesāliya viharati mahāvane kūāgārasālāya.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큰 숲의 중각강당에 머무셨다.

(각묵스님)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세존께서 베쌀리 시의 미하 숲에 있는 꾸따가라 강당에 계셨다.

(전재성님)

 

 

Thus have I heard. on one occasion the Blessed one was dwelling at Vesali in the Great Wood in the Hall with the Peaked Roof.

(빅쿠 보디)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설법하신 장소는 여러 곳이다. 주로 아나타삔디까승원이라 되어 있다. 기원정사를 말한다. 그런데 웨살리에서 설법하는 경우 ‘kūāgārasālāya로 되어 있다. 이를 각묵스님은 중각강당이라 하였고, 전재성님은 꾸따가라 강당이라 하였다. 빅쿠 보디는 ‘the Hall with the Peaked Roof’라 하였다. 한역에서는 重閣講堂 (중각강당)’이라 한다.

 

중각강당(重閣講堂)에 대하여

 

kūāgārasālāya에 대하여 빠알리 사전(PCED194)을 찾아 보았다. 먼저 꾸따가라(kūāgāra)에 대하여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kūāgāra

 

1) [nt.] a pinnacle building, or such a temporary construction; a catafalque.。

2) 【 小尖塔般立的建筑物或如此的暂时建筑物柩台

 

 

영어를 보면 a pinnacle building 이라 되어 있다. 이는 작은 뾰족탑이 있는 건물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건물 중간에 첨탑처럼 생긴 구조물이 있어서 일것이다. 또 다른 설명으로서 ‘temporary construction’으로 되어 있다. ‘임시로 지은 건물또는 가건물이라는 뜻이다. 한역을 보면 小尖塔般立的建筑物라 되어 있어서 작은 첨탑이 있는 건물이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꾸따가라 승원은 건물에 첨탑이 있는 것임에 틀림 없다. 그래서 빅쿠 보디는 ‘the Hall with the Peaked Roof’라 하여 뾰족한 지붕을 가진 건물이라고 구체적으로 표현 하였다. 그런데 한역경전에서는 중각강당 (重閣講堂)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중각(重閣)이라는 뜻은 건물이 누각이 중첩 되어 있다는 뜻으로 보여 뾰족한 첨탑을 한문식으로 표현한 것이라 보여 진다.

 

웨살리는 어떤 지역이었나?

 

이번에는 kūāgārasālāya에 대하여 사전을 찾아 보았다. 그러자 꽤 길고 자세한 설명을 접할 수 있었다. kūāgārasālāya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A hall in the Mahāvana near Vesāli. The Buddha stayed there on several occasions, and in the books are found records of various eminent persons who visited him there and of his conversations with them.

(PCED194)

 

 

이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웨살리 근처 마하와나에 있는 건물. 부처님이 거기에서 여러 차례 머무셨다. 그리고 경전에서는 부처님을 방문한 다양한 부류의 적대적 사람들과의 대화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 되어 있다.

(번역)

 

 

 

스투

 

 

 

사전에 따르면 웨살리라는 지역이 다른 인도 지역과 달리 대단히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과 견해를 달리 하는 사람, 심지어 적대적 사람들까지 있었는데, 부처님이 이들과 대화하여 교화 하였다는 내용이 경전에 기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환자병동이 있었는데

 

PCED194에 따르면 kūāgārasālāya에 대한 더 자세한 사항을 접할 수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According to Buddhaghosa (DA.i.310; MA.i.450), there was a monastery (sanghārāma) built for the monks in the Mahāvana. Part of it consisted of a storeyed house, with a hall below surrounded only by pillars. These pillars held the gabled room which formed the main part of the Buddha’s Gandha-kuti there. The hall lay from north to south and faced east (DA.i.311), and from this hall the whole monastery came to be known as the kūāgārasālāya. There was a sick ward attached to the monastery, where the Buddha would often visit the patients and talk with them (E.g., S.iv.210f; A.iii.142).

 

(kūāgārasālāya, PCED194)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붓다고사(AD310-450)에 따르면, 마하와나(大林)안에 승려들을 위하여 세워진 승원(sanghārāma)이 있다. 승원은 단지 기둥들에 의하여 둘러 쌓여진 홀과 함께  승원의 일부는 삼층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둥들은 박공구조로 되어 있어서 방을 지탱하고 있는데, 이는 부처님의 간다꾸띠(Gandha-kuti)의 주요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이홀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놓여 있고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 홀로 인하여 승원전체가 꾸따가라살라야(kūāgārasālāya)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승원에는 환자를 위한 병동도 있었다. 거기에서 부처님은 종종 환자들을 방문하여 말씀을 들려 주시곤 하였다.

(번역)

 

 

사전에 실려 있는 설명에 따르면 큰 홀을 중심으로 하여 삼층집 구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한자어로 重閣(중각)’이라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홀안에 환자병동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환자들을 찾아 법문도 해 주었다고 한다.

 

질병의 경(Gilānasutta, A5.121)에서

 

PECD194사전에는 ‘(E.g., S.iv.210f; A.iii.142)’라는 코멘트를 해 놓았다. 여기에서 ‘A.iii.142’를 찾아 보았다. 이는 PTS본 앙굿따라니까야 3권에 에는 142번째 페이지라는 뜻이다. 그래서 찾아 보니 질병의 경(Gilānasutta, A5.121)’이다.

 

질병의 경이 설해진 장소가 웨살리의 중각강당으로 되어 있다. 중각강당에는 환자병동도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이 나온 것 같다. 질병의 경에서 부처님은 부처님은 병약한 수행승을 보고나서 수행승들에게 다음과 같은 법문을 들려 주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병약한 자라도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리를 버리지 않으면, 그는 머지 않아 번뇌를 부수고 번뇌 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할 것이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신체에 대한 부정을 관찰하고, 음식에 대한 혐오를 지각하고, 일체의 세계에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없음을 지각하고, 모든 조건 지어진 것에서 무상을 관찰하고, 안으로 죽음에 대한 지각을 잘 정립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아무리 병약한 자라도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리를 버리지 않으면, 그는 머지 않아 번뇌를 부수고 번뇌 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할 것이다.

 

(Gilānasutta- 질병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121, 전재성님역)

 

 

중병에 걸린 자라도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면 나을 수 있음을 말한다. 환자를 위한 법문의 요지는 크게 다섯 가지이다. 1) 신체에 대한 부정관, 2) 음식에 대한 혐오, 3) 일체개고, 4) 제행무상, 5) 죽음에 대한 지각 이렇게 다섯 가지이다. 이는 다름 아닌 현상에 대하여 무상, , 무아를 통찰하라는 것과 같다. 사실 이런 통찰은 매우 효과가 있다고 본다.

 

언젠가 과식하여 뱃속에서 핵전쟁이 난 듯이 고통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앉아도 괴롭고, 서도 괴롭고, 누워도 괴롭고 온통 고통 뿐이었다. 도무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쓰리고 아리고 불쾌하였다. 어서 시간이 가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왜냐하면 복통과 같은 고통은 시간이 해결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겪고 있는 불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하신대로 무상, , 무아를 떠 올렸다.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고통에 대하여 주시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관찰 하였더니 견딜만 하였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 되지 않는 괴로움

 

괴로움은 두 가지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이 있는 가 하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괴로움이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은 복통이나 감기, 외상과 같은 고통이다. 사실 이런 고통은 고통축에도 들어 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괴로움이 있다. 이는 생노병사와 같은 근원적인 괴로움이라 볼 수 있다. 또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고통은 자신의 범주를 벗어나 버린다. 바로 이런 괴로움이 진짜 괴로움이라 볼 수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을 당하였을 때 겪는 고통을 감내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부처님은 우리 들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해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부처님은 병을 치유하는 의사와 같다.

 

부처님은 병을 치유하는 의사

 

이렇게 병을 치유하는 의사로서 부처님에 대한 찬탄이 있다. ‘까라나빨린의 경이다. 역시 웨살리의 중각강당이 배경이다. 부처님이 웨살리 중각강당에 머무를 때 바라문 삥기야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찬탄 하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삥기야닌]

존자여, 예를 들어 사람이 아프고 괴롭고 중병이 들었는데, 유능한 의사가 즉시 질병을 치유하듯이, 존자여, 이와 같이 경이든, 응송이든, 수기이든, 미증유법이든, 존자 고따마의 가르침을 들으면 들을 때마다, 언제나 슬픔과 비탄과 고통과 불만과 절망이 사라집니다.

 

(까라나빨린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194, 전재성님역)

 

 

말 한마디에도 고무 되는 경우가 있다. 회사생활 할 때의 일이다. 중요한 개발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회사를 책임지고 있는 분으로부터 자네만 믿네라는 격려를 받았다. 그 격려의 말에 크게 고무 받았다. 그래서 밤낮없이 주말없이 휴가없이 매진하여 크게 성과를 본 적이 있었다. 이렇게 칭찬은 코끼리도 춤추게 만든다고 한다. 전장에 임하는 장수에게 그대만 믿네라고 격려 하였을 때 충성을 맹세한다. 이렇게 지도자 또는 존경받는 분으로부터 한마디 격려의 말은 그 사람의 일생을 바꿀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32상을 갖춘 부처님이 환자동에 나나타서 법문을 하였을 때 그 감동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처님의 모습과 법문을 듣는 순간 엔돌핀이 돌아 몸과 마음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런 변화로 인하여 병이 나을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에 대하여 경이든, 응송이든, 수기이든, 미증유법이든, 존자 고따마의 가르침을 들으면 들을 때마다, 언제나 슬픔과 비탄과 고통과 불만과 절망이 사라집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다름아닌 부처님이 병을 치유하는 의사로서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빳준나경에서 네 게송을 보면

 

빳준나경(Pajjunna dhītusutta)에서는 오로지 하늘사람의 부처님의 찬탄에 대한 게송만 보인다. 비구름의 신의 딸인 쭐라꼬까나다가 깊은 밤중에 아름다운 빛으로 마하 숲을 두루 밝히고 부처님 앞에 나타나 읊은 게송은 다음과 같다.

 

 

1.

Vesāliya vane4 viharanta
Agga
sattassa sambuddha,
Kokanad
āhamasmi abhivande
Kokanad
ā pajjunnassa dhītā.

2.

Sutameva me pure āsi
Dhammo cakkhumat
ānubuddho,
S
āhadāni sakkhī jānāmi
Munino desayato sugatassa.

 

3.

Ye keci ariyadhamma1
Vigarahant
ā caranti dummedhā,

Upenti roruva ghora
Ciraratta
dukkhamanubhavanti

4.

Ye ca kho ariyadhamme
Khantiy
ā upasamena upetā,

Pahāya mānusa deha
Devak
āya paripūressantī'ti.

 

 

1.

웨살리의 큰 숲에 머물고 계신

중생 가운데 최상이신 바르게 깨달으신 분께

꼬까나다라는 제가 이제 예배드리오니

이런 저는 빳준나의 딸 꼬까나다이옵니다.

 

2.

눈을 가지신 분께서 법을 깨달으셨다고

전에는 단지 제가 듣기만을 했습니다.

선서이신 성인께서 [법을] 설하실 때에

이제 제가 두 눈으로 직접 알게 되었습니다.

 

3.

성스러운 법을 두고 비방하며 다니는

지혜없는 가엾은 자들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무서운 곳 규환[지옥] 떨어질게 분명하니

오랜 세월 그곳에서 괴로움을 겪게 되리.

 

4.

그러나 참으로 성스런 법에 귀의하여

묵묵히 따르고 고요히 따르는 자들

인간의 몸 버린 뒤애 신의 몸을 성취하리.”

 

(각묵스님역)

 

 

[쭐라 꼬까나다]

1.

뭇삶 가운데 위없는 님

올바로 깨달은 님께서 베쌀리 시의 숲에 계시니

꼬까나다가 인사드리네.

비구름 신의 딸 꼬까나다가 예배드리네.

 

2.

지혜로운 님께서 진리를 깨달았다고

전에 내가 듣기만 했지만

깨달은 님, 해탈한 님의 가르침을

지금 나는 눈으로 확인 하네.

 

3.

누구라도 고귀한 가르침을 헐뜯고

어리석어 방황하는 사람은

공포의 규환지옥에 이르러

오랫동안 괴로움을 받으리.

 

4.

누구라도 참으로 고귀한 가르침을 수용하여

평화로운 사람은

죽어서 사람의 몸을 버리면

하늘사람의 몸을 성취하리.”

 

 (전재성님역)

 

 

1.

"I worshp the Buddha, the best of beings,

Dwelling in the woods at Vesali.

Kokanada am I,

Kokanada, Pajjunna's daughter.

 

2.

 "Earlier I had only heard that the Dhamma

Has been realized by the one with Vision;

But now I know it as a witness

While the Sage, the Fortunate one, teaches.

 

3.

 "Those ignorant people who go about

Criticizing the noble Dhamma

Pass on to the terrible Roruva hell

And experience suffering for a long time.

 

4.

 "But those who have peace and acquiescence

In regard to the noble Dhamma,

On discarding the human body,

Will fill the host of devas."

 

(빅쿠 보디역)

 

 

 

번역에서 차이 나는 것 하나

 

번역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은 2번 게송의 네번째 구절이다. 빠알리어로 ‘Munino desayato sugatassa’라 되어 있는데, 여기서 눈에 띄는 단어가 수가따(sugata)’이다. 여래 십호에서 수가따는 한자어로 善逝(선서)라 번역된다. ‘피안으로 잘 가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이 수가따를 선서로 번역하여 선서이신 성인께서 [법을] 설하실 때에라고 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깨달은 님, 해탈한 님의 가르침을이라고 번역하여 수가따에 대하여 해탈한 님이라 하였다. 빅쿠 보디는 While the Sage, the Fortunate one, teaches.”라 하여 ‘Fortunate one’이라 하였다. 그래서 이를 직역하면 운이 좋은 자, 현자가 가르칠 동안에가 될 것이다. 이렇게 수가따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번역하였지만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왜 아비지옥인가?

 

게송에서 비구름 신의 딸이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찬탄하고 있다. 그런데 세 번째 개송을 보면 누구라도 고귀한 가르침을 헐뜯고라는 말이 보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공포의 규환지옥에 이르러라고 되어 있다.

 

근거 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방하거나 가르침을 따르지 않게 되면 악처에 떨어질 것이라 하였다.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삿된 견해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처님 당시 유물론, 운명론, 단멸론 등의 외도를 말한다.

 

이렇게 삿된 견해를 가졌을 때 악처로 떨어 질 수밖에 없는데 가장 끔찍한 곳이‘roruva’라 하였다. 이는 규환지옥을 말한다. 각주에 따르면 두 개의 규환지옥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연기의 규환지옥이고, 또 하나는 화염의 규환지옥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아비지옥(avici-niraya)’이라 한다.

 

왜 아비지옥인가? 그것은 중생들이 불에 탈 때 비명을 지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비명소리가 끊임 없이 들려 오기 때문에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고 한다. 그래서 끔찍한 장면을 묘사할 때 아비지옥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을 가르침을 수용하였을 때 지옥에 떨어질 일이 없을 것이다. 그대신 몸이 파괴되어 죽으면 하늘나라에 태어 날 것이라 하였다.

 

 

 

2014-01-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