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기고 싶은 것 까지 기록된 내용, 니까야가 조작된 경전이 아닌 이유
“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불교의 궁극적 목적에 대하여 해탈과 열반이라 한다. 해탈은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을 말하고 열반은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것’ 또는 ‘불사’로 설명한다. 탐진치 등으로 대표 되는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 더 이상 재생의 원인이 되는 업을 짓지 않았을 때 마지막 죽음의식 다음에 일어나는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로 설명되는 연기의 고리가 끊어진다. 그래서 열반은 “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로도 설명된다. 이런 연기의 고리와 유사한 게송이 있다. 나산띠경(S1.34)에서 부처님의 세 번째 게송이 그것이다.
Pahāsi saṅkhaṃ na ca mānamajjhagā
acchecchi taṇhaṃ idha nāmarūpe,
Taṃ chinnaganthaṃ anīghaṃ nirāsaṃ
pariyesamānā nājjhagamuṃ
Devā manussā idha vā huraṃ vā
saggesu vā sabbanivesanesūti.
(Nasantisutta, S1.34)
헤아림을 버리고 자만심도 버린 그는
여기 [이 세상에서] 정신ㆍ물질에 대한 갈애 자르고
매듭 끊고 근심이 없이 바라는 것 없으니
신들이나 인간들이 여기서나 저 너머서나
천상서나 그 모든 거처에서나
그를 찾아보지만 발견하지 못하도다.”(*161)
(있는 것이 아님 경, 상윳따니까야 S1.34, 각묵스님역)
헤아림을 버리고 망상을 부리지 않고(*266)
세상의 명색에 대한 탐착을 없애
속박을 끊고 동요하지 않고 욕심이 없다면
하늘사람이든 사람이든 금생에나 내생에나
하늘에서나 모든 존재의 세계에서나
널리 찾더라도 그를 발견할 수 없다네”
(않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4, 전재성님역)
"He abandoned reckoning, did not assume conceit;
He cut off craving here for name-and-form.
Though devas and humans search for him
Here and beyond, in the heavens and all abodes,
They do not find the one whose knots are cut,
The one untroubled, free of longing."
(There Are No, CDB 1.34, 빅쿠 보디)
이 게송에 대한 특별한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짤막하게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각주만 있다.
(*161) 본 게송은 본서 「사맛디 경」(S1:20) {49}와 동일하다. 그곳의 주
해들을 참조할 것.
(각주, 각묵스님)
(*266) 위의 모든 시들은 가이거에 의하면, 아마도 여러 다른 하늘사람들이 각각 읊은 것으로 보인다.
(각주, 전재성님)
각묵스님은 사밋디경에 있는 49번 게송과 동일하기 때문에 그곳에 쓰여 있는 각주를 참고하라고 하였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에 동일 게송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고디까의 경(S4.23)에서
게송에서는 재생의 원인이 되는 갈애를 일으키지 않아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 나지 않으면 명색을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하늘에서나 모든 존재의 세계에서나 널리 찾더라도 그를 발견할 수 없다네.(S1.34)”라 하였다. 이 대목은 상윳따니까야 ‘고디까의 경(S4.23)’과 유사하다. 고디까의 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빠삐만]
“위와 아래와 옆과
사방과 팔방을 찾아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네.
고디까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세존]
“결단을 갖춘 현자는
항상 선정을 즐기며 참선하네.
목숨에 얽매이지 않고
밤과 낮으로 정진하네.
죽음의 군대를 쳐부수어
다시는 태어나지 않고
갈애를 뿌리째 뽑아서
고디까는 완전한 적멸에 들었네.”
(Godhikasutta-고디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3,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마라상윳따(S4)에서 악마 빠삐만과 부처님과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인 고디까 빅쿠가 자결하자 악마 빠삐만은 그의 식(윈냐나)를 찾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원냐나는 고대 인도에서 아뜨만 또는 영혼의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오늘날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중유의 존재로 머물다가 떠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빠삐만은 사방과 팔방을 찾아도 영혼을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고디까의 식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고디까는 완전한 적멸에 들었네.”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열반이라는 것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을 말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식을 조건으로 하여 명색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 죽음의식에서 더 이상 재생의 원인이 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수 없다.
재생의 원인이 되는 마지막 마음은 아비담마에 따르면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말한다. 아라한은 악업이든 선업이든 업을 짓지 않기 때문에 지은 업을 대상으로 하는 마지막 죽음의 마음이 일어 날 수 없고, 또 업의 표상이나 태어날 곳의 표상이 일어날 수 없다.
이렇게 죽음의 순간에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 그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날 리 없다. 이는 마음은 오로지 한순간에 한가지 일을 하고,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는 대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지막 죽음의 마음에서 그 어떤 표상도 떠 오르지 않으니 그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리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재생연결식이 없으니 “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라는 과정이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식연명색과 명색연식의 과정이 성립 되지 않아 어떤 존재로도 태어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완전한 열반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결한 고디까에 대하여 “고디까는 완전한 적멸에 들었네.(S4.23)”이라 하신 것이다.
고디까는 왜 자살하였을까?
경에 따르면 고디까빅쿠는 자결하였다. 칼로 자신의 동맥을 끊어 자살한 것이다. 그렇다면 고디까는 왜 자살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일시적 마음의 해탈’ 때문이라 하였다.
고디까는 방일하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하였으나 매번 일시적 마음의 해탈에 그쳤다. 이 일시적 마음의 해탈에 대하여 각주에 따르면 집중에서 나오는 마음의 해탈이라 하였다. 각묵스님의 각주에 따르면 “본삼매에 들어 있는 순간에만 억압된 오염원으로부터 해탈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선정삼매에서 일시적으로 오염원이 억눌려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선정삼매에서 벗어나면 또 다시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번뇌를 뿌리 뽑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디까는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한다. 그러기를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하였다. 일곱 번째 마음의 해탈에 이르렀을 때 고디까는 결심한다. 여기서 퇴전하면 또 다시 일시적 마음의 해탈로 될까 두려운 마음이 든 것이다. 그래서 해탈의 마음 그대로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결하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가지고 있는 칼로 자신의 동맥을 끊는다.
고디까는 세속적인 마음의 해탈이라 불리우는 선정삼매 상태에서의 일시적 마음의 해탈만 이룬 것이다. 이런 일시적 마음의 해탈에 대하여 경에서는 sāmāyika ceto-vimutti라 한다.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가 뿌리 뽑히지 않은 선정삼매에서 일시적 해탈을 말한다. 그러나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가 완전히 뿌리 뽑혀 다시는 퇴전 하지 않는 해탈이 있다. 이를 경에서는 ‘흔들림 없는 마음의 해탈(akuppā cetovimutti, 不動心解脫)’이라 한다. 초전법륜경의 아라한 선언에서 언급된 “akuppā me cetovimutti.(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S56.11)”이라는 문구이다.
이렇게 흔들림 없는 마음의 해탈과 일시적 마음의 해탈은 다른 것이다. 따라서 흔들림 없는 마음의 해탈을 이룬 자는 아라한이라 볼 수 있고 다시는 태어남이 없다. 그래서 아라한송에서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S56.11)”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고디까는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하다 자결하였지만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이렇게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이 되어 열반을 성취하는 것에 대하여 ‘사마시시(samasisi)’라 한다. 사마시시란 한꺼번에 두 가지를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고디까의 자살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라한의 자살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하고 있다. 이는 오계에서 가장 먼저 강조 되고 있는 사항이다. 그래서 타인은 물론 자신을 죽이는 행위에 대하여 중죄를 짓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고디까의 자결에 대해서는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최근 교계신문에 발표된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허 교수는 “밧칼리·고디카·찬나 비구의 자살은 현대에서의 자발적 안락사와도 유사하다”면서도 “주의해야할 것은 붓다는 자살을 직접 권유하거나 안내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 허남결 교수 “불교라면 생명윤리, 자살에 대한 태도 재확립을”, 불교닷컴 2013-10-25)
허남결 교수에 따르면 고디까의 자살은 ‘자발적 안락사’와도 유사하다고 하였다. 이는 중병을 앓던 박칼리 빅쿠나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한 고디까 빅쿠 등이 이에 해당된다고 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 어떤 경우에서도 자살을 권유하거나 안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일 빅쿠가 자살하려 한다면 막았을 것이라 한다. 이는 고디까의 경에서 악마 빠삐만이 고디까의 자살하려는 것을 눈치 채고 부처님에게 알려 주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경에서는 “그때 악마 빠삐만이 존자 고디까가 품은 생각을 알고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 왔다.(S4.23)” 라고 말한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악마 빠삐만이 고디까에게 제지하라고 한다고 하여 그만 두지 않겠지만 부처님이 금한다면 그만 둘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디까는 자살하고 만다. 그러자 부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고디까가 자결한 이씨길리 산 중턱에 있는 검은 바위로 올라 간다. 이씨길리산은 라자가하에 있는 다섯 산 중의 하나이다. 라자가하 근교에 있는 다섯 산은 빤다바, 깃자꾸따(Gijjakuta), 베바라(Vebhara), 이시길리(Isigili), 베뿔라(Vepulla)산이다. 거기에 고디까가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양가의 아들 고디까는 의식이 머무는 곳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S4.23)”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하루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자살한다. 갖가지 사연을 가지고 생을 스스로 마감하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업이 있기 때문에 그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자살을 하면 대부분 ‘악처’라 한다. 자신이 자신을 죽이는 것도 살생업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뇌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자살은 재생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라한은 몸과 마음에 탐착 하지 않아 살아 있는 것이 큰 의미가 없기 떄문이라 한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면 마치 월급쟁이가 월급을 기다리는 것처럼 죽음을 조용히 기다릴 뿐이라 한다. 따라서 지금 죽으나 수명을 다하여 죽으나 아라한의 죽음은 큰 의미가 없다. 그런 아라한의 죽음에 대하여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라고도 한다. 이는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육체적 죽음과 다른 것이다.
니까야가 조작된 경전이 아닌 이유
빠알리니까에서 아라한의 자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대표적으로 고디까. 박칼리. 찬나 빅쿠이다. 이런 아라한의 자살이 경전에 실려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제자가 자살하였다는 것은 그리 자랑할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면, 그것도 아라한이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면 숨기고 은폐하기에 바쁠 것이다.
그럼에도 빠알리 니까야에서는 아라한의 자살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전에 올린 글 ‘아라한의 자살과 사마시시, 불리한 내용까지 기록된 니까야의 위대성, 2012-05-04)’이 있다. 아라한의 자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강연을 듣고 기록한 것이다. 아라한의 자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니까야가 정말 위대하다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솔직하기 때문에 그래요.
아니 부처님 제자 가운데 자살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누가 부처님을 따르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다 덮어 놓았을 것입니다. 기록에 안 남겼을 거라구요!
그런데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건 조작된 경전이 아닙니다.”
(전재성박사, 동국대정각원 토요법회 2012-3-10일자)
니까야가 위대한 이유는 불리한 내용까지 빠짐없이 기록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예는 전세계적으로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전세계의 모든 경전이 미사여구에다 화려하고 장엄한 묘사 위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제자가 자살하였다는 내용은 보기 힘들다. 대승경전에서도 보살이 자살 하였다는 내용은 없다. 그럼에도 니까야에서 제자의 자살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는 것은 니까야가 조작 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한다. 이렇게 빠알리니까야의 경우 숨기고 싶은 사항들도 솔직하게 기록 되어 있EK. 바로 이런 점에 있어서 니까야가 위대한 경전이고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 원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014-01-0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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