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멈춰라! 그리고 통찰하라!” 탐욕에 기초한 사유
매일 가르침을 접하는 즐거움
어느 인터넷 카페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보았다. 초기경전에 올려져 있는 것을 그대로 사경한 것이었다. 스님이 번역한 상윳따니까야 1권 제1상윳따에서부터 사경한 것이다. 그래서 주로 짤막한 게송을 매일 올린 것을 보았다. 이렇게 꾸준히 올리고 나자 매일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글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리게 되었다. 이렇게 매일 글 보는 재미로 방문하게 되었지만 어느 때부터 중단 되었다. 불과 10여 개를 올려 놓고 만 것이다. 좀 더 오랫동안 지속 되었더라면 일상에 매일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텐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쉬웠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리고 있다. 상윳따니까야 제1상윳따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번역비교’라는 형식으로 38회째 올렸다. 이렇게 경의 내용을 올리게 된 것은 부처님의 원음을 더 정확하게 알고 싶은 욕구도 있지만 매번 꾸준히 올림에 따라 누군가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인터넷 카페에서 올린 사경글을 고대하던 심리가 그대로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글을 올릴 바에야 어느 한사람의 번역자의 것 뿐만 아니라 다른 번역자의 것도 함께 올려 놓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영문을 포함하여 세 종류의 번역을 올려 놓고 있다. 그러나 번역만 보아서는 숨겨진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가급적 각주도 함께 올려 놓고 있다. 이렇게 올려 놓으면 누군가 매일 방문하는 이에게는 하나의 보는‘즐거움(樂)’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 진다.
나산띠경에서 부처님 첫 번째 게송
나산띠경(S1.34)에서 하늘사람들의 게송이 끝나자 부처님이 게송으로 말씀 하신다. 세 개의 게송을 연달아 말씀 하시는데 먼저 첫 번째 게송은 다음과 같다.
Na te kāmā yāni citrāni loke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
Tiṭṭhanti citrāni tatheva loke
athettha1 dhīrā vinayanti chandaṃ.
(Nasantisutta, S1.34)
[세존](*158)
“세상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
의도에서 생긴 애욕이 바로 감각적 욕망일 뿐이네.(*159)
아름다운 것들은 세상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뿐
지자는 여기에 대한 욕구를 길들이노라.
(있는 것이 아님 경, 상윳따니까야 S1.34, 각묵스님역)
[세존]
“세상 만물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260)
의도된 탐욕이(*261) 감각적 욕망이네.
세상에 참으로 그렇듯 갖가지가(*262) 있지만
여기서 참으로 그렇듯 갖가지가 있지만
여기 슬기로운 님이 욕망을 이겨내네.
(않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4, 전재성님역)
[The Blessed one:]
“They are not sense pleasures, the world's pretty things:
Man's sensuality is the intention of lust.
The pretty things remain as they are in the world
But the wise remove the desire for them. (*72)
(There Are No, CDB 1.34, 빅쿠 보디)
각주를 보면
이 게송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158) 원문에 따르면 위의 문장 마지막에도 ti 가 나타나므로 다른 사람의
게송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내용상으로도 세존의 말씀으로 간주하는 것
이 좋다. 보디 스님도 이렇게 옮기고 있다.
(*159) “’아름다운 것들(citrani)’이란 아름다운 대상들을 말한다. 의도의 애
욕(sankappa-raga)이란 ‘의도에서 생긴 애욕(sankappita-raga)’이다. 이
처럼 여기서는 대상으로서의 감각적 욕망(vatthu-kama)이 아닌 오염원으
로서의 감각적 욕망(kilesa-kama)을 ‘감각적 욕망’이라 부르고 있다.”
(SA.i.63)
(각주, 각묵스님)
(*72) In pada b the unusual compound saṅkapparāga is glossed by Spk as saṅkappitarāga, "intended lust." Mp I11 407,5 glosses: saṅkappavasena uppannarāgao, "lust arisen by way of intention (or thought)." Spk-pt adds: subhādivasena saṅkappitavatthumhi rāga, "lust in regard to an object thought about as beautiful, etc." The key to the expression, however, is probably Dhp 339d (= Th 760d), where we find saṅkappa rāganissitā, "intentions based on lust." Spk sums up the purport of the verse thus: "Here the identification of sensuality with the sensual object is rejected; it is the sensual defilement that is called sensuality."
dhīrā allows of two derivations, one meaning "wise," the other "firm, steadfast"; see PED and MW, S.V. dhira. I have usually translated it as "wise," following the commentarial gloss pandita, but elsewhere (e.g., at vv. 411e! 413e, 493a, 495a) I have taken advantage of the word's ambivalence to render it "steadfast." The word has elevated overtones and seems to be used solely in verse.
(각주, 빅쿠 보디)
(*260) AN.III.411에서도 나온다. 그 내용은 감각적 쾌락의 종류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욕망에 문제가 되므로 욕망을 없애는 것이 현자의 할 일이라는 것이다.
(*261) saṅkapparāga : Srp.I.63에 따르면, 의도된 탐욕(saṅkappita rāga)을 뜻하며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에 토대를 둔 토대적 욕망(vatthukāma)을 포함하여 정신적 대상에 기초한 번뇌적 욕망(kilesakāma)을 뜻한다.
(*262) citrāni : 원래 ‘갖가지’란 뜻으로 다양한 탐욕(rāga)을 의미한다.
(각주, 전재성님)
빅쿠 보디의 영문각주를 보면
각묵스님의 158번 각주를 보면 ti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원문의 문장 마지막에도 ti 가 나타나므로 다른 사람의 게송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또 “내용상으로도 세존의 말씀으로 간주하는 것이 좋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더구나 “보디 스님도 이렇게 옮기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빅쿠 보디의 72번 각주에는 그런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빅쿠 보디의 72번 영문각주를 우리말로 옮겨 보았다.
b구절에서 그다지 많이 쓰이지 않는 혼합어 상깝빠라가(saṅkapparāga)는 주석에 따르면 ‘의도된 욕망 (intended lust)’이라는 뜻의 상깝피따라가(saṅkappitarāga)로 주석되어 있다. Mp I11 407에 다섯 가지 주석이 있다. saṅkappavasena uppannarāgao는 의도(또는 생각)의 방법으로 일어난 욕망이라는 뜻이다. 주석 (Spk-pt) 에서는 subhādivasena saṅkappitavatthumhi rāga라 하였는데 이는 ‘아름다운 것 등에 대한 대상과 관련된 욕망’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핵심적인 표현은 아마 법구경 339 d(=테리가타 Th760d)에 해당될 것이다. 거기에서 saṅkappa rāganissitā 형태로 발견되는데 이는 ‘욕망에 근거한 의도’라는 뜻이다. 주석에서는 게송에 대하여 “여기에 감각대상에 따른 관능의 확인은 제거된다. 이는 관능이라 불리우는 감각적 오염원을 말한다.
디라(dhīrā)는 두 가지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현명한(wise)’의 의미이고, 또 하나는 ‘확고한(firm), 견고한(steadfast)’의 뜻이다. PED와 MW, S.V에서 디라(dhīrā)를 찾아 보라. 나는 주석에서 빤디따(pandita)라 한 것에 따라서 일반적으로 ‘현명한’뜻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다른 곳(e.g., at vv. 411e! 413e, 493a, 495a)에서 이 단어의 양면이 뜻이 있기 때문에 ‘견고한’뜻으로도 번역한다. 이 단어는 고상한 함축적 의미를 가지고 있고 게송에서 단독으로 사용 되어진 것처럼 보인다.
(빅쿠 보디 영문 각주 72번 번역)
빅쿠 보디의 영문 각주는 크게 두 가지로 되어 있다. 하나는 ‘상깝빠라가(saṅkapparāga)’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디라(dhīrā)’에 대한 것이다.
상깝빠라가(saṅkapparāga)에 대하여
먼저 상깝빠라가(saṅkapparāga)를 보면 ‘intended lust(의도된 욕망)’이라 하였다. 주석의 설명을 인용하여 욕망이라는 것이 의도하거나 생각함에 따라 일어난 것임을 말한다. 이는 게송에서 부처님이 “Na te kāmā yāni citrāni loke”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전재성님은 “세상 만물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라 하였다.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감각적 쾌락의 종류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욕망에 문제가 되므로 욕망을 없애는 것이 현자의 할 일이라는 것”이라 한다. 대상을 보았을 때 아름다운 것, 사랑스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의도하였을 때 욕망이 일어남을 말한다. 단지 보여지는 것, 들려 지는 것은 있는 그대로에 지나지 않지만 여기에 좋거나 싫거나 하는 느낌이 일어 날 때만 욕망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법구경의 339번 네 번째 구절에서
상깝빠라가(saṅkapparāga)에 대하여 빅쿠 보디는 법구경의 339번을 참조하라고 하였다. 의도된 욕망에 대한 것이 네 번째 구절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법구경 339번을 보니 다음과 같다.
Yassa chattiṃsati sotā
Vāhā vahanti duddiṭṭhiṃ
saṅkappā rāganissitā.
쾌락을 좇아 달리는 강력한
서른 여섯 가지 흐름을 지닌 자,
탐욕에 기초한 사유의 격류가
그 타락한 견해를 지닌 자를 떠내려 보낸다.
(법구경, Dhp339, 전재성님역)
게송을 보면 네 번째 구절이 “saṅkappā rāganissitā”로 되어 있다. 이는 상깝빠라가(saṅkapparāga)와 유사한 뜻이다. 그래서 ‘탐욕에 기초한 사유’로 번역된다. 그렇다면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전재성님의 법구경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Vāhā vahanti duddiṭṭhiṃ saṅkappā rāganissitā: DhpA.IV.48에 따르면, 탐욕으로 물든 사유가 무력화된 앎 때문에 타락한 견해를 지닌 자를 떠내려 보낸다. 멈춤(止: samatha)과 통찰(觀: vipassana)이 아니라, 탐욕으로 물든 사유가, 반복되는 발생으로 커다란 급류가 되어 그를 떠내려 보낸다.
(Dhp 339, 1694번 각주, 전재성님)
쾌락을 좇아 달리는 자는 서른 여섯 가지의 흐름에 지배를 받는 자라 하였다. 여기서 서른 여섯 가지란 내적 감역 열여덟 가지와 외적 감역 열여덟 가지를 말한다. 이렇게 서른 여섯 가지의 흐름에 떠 밀려 가는 자는 그 어떤 앎도 무력화 된다.
“그대로 멈춰라!”
그렇다면 갈애에 떠밀려 내려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주석에서는 멈춤과 통찰을 이야기 하고 있다. 먼저 지금 이 자리에서 그대로 멈추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아이들 동요와 같다. 아이들 동요에 이런 내용이 있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눈도 감지말고
웃지도 말고
울지도 말고 움직이지마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즐겁게 춤을 추다가)
대상에 대한 좋고 싫음에 대한 느낌이 일어 났을 때 우선 멈추는 것이다. 마치 아이들이 춤을 추다가 선생님이 “멈춰!”라고 말했을 때 일제히 얼어 붙는 것과 같다. 이처럼 갑자기“동작그만!”하먄 갖가지 모양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먼저 멈추라고 하였다. 이런 멈춤에 대하여 지(止)와 사마타(samatha)라 한다.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관찰’하는 것이다. 주석에서는 이를‘통찰(觀: vipassana)’이라 하였다. 어떻게 통찰하는가? 대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멈춤과 통찰이 일어나면 사유에 기반한 욕망의 흐름에 떠밀려 내려 가지 않을 것이라 한다.
디라(dhīrā)에 대하여
빅쿠 보디의 각주에 따르면 디라(dhīrā)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이 디라에 대하여 ‘현명한(wise)’의 뜻과 ‘확고한(firm), 견고한(steadfast)’의 뜻이 있다고 하였다.
나산띠경의 게송에서는 ‘현명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the wise remove the desire for them”라 하였는데, 이는 “현명한 자들은 그들 욕망을 제거 한다”라는 뜻이 된다. 각묵스님은 dhīrā에 대하여 ‘지자’라 하였고, 전재성님은 ‘슬기로운 님’이라 하였다. 디라에 대한 빠알리어 사전을 보면 다음과 같다.
dhīrā
1) [adj.] wise; the wise.。
2) Sk. dhīrā “firm” fr.
3)a. m. [〃] 堅固的, 賢的, 賢者, 慧者, 英賢.。
4)a. m. [〃] 堅固な, 賢き, 賢者, 慧者, 英賢.。
디라는 일반적으로 ‘현명한’ 뜻이지만, ‘견고한’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디라와 유사한 말이 ‘빤디따(pandita)’이다. 이는 맛지마니까야에서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M129’이라는 뜻의 ‘Bālapaṇḍita sutta’ 에서도 알 수 있다. 발라(Bāla)가 ‘어리석은 자’라는 뜻이고, 빤디따(paṇḍita)가 ‘현명한 자’라는 뜻이다. 이렇게 디라와 빤디따는 현명한 자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일반적으로 어리석음과 대비하여 빤디따가 주로 사용되고 있다.
디라가 성자의 의미로 사용될 때
디라의 경우 현자 또는 지혜로운자의 의미로 사용된다. 때로는 성자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도와 과를 이루신 사쌍팔배의 뜻도 있는데 다음과 같이 라따나경에서도 볼 수 있다.
Khīṇaṃ purāṇaṃ navaṃ natthi sambhavaṃ 키-낭 뿌라-낭 나왕 낫티 삼바왕
Virattacittā āyatike bhavasmiṃ, 위랏따찟따- 아-야띠께 바와스밍
Te ṇīṇabilā avirūḷhicchandā 떼 니나빌라- 아위루-리찬다-
Nibbanti dhīrā yathāyampadīpo, 닙반띠 디-라- 야-타-얌빠디-뽀
Idampi saṅghe ratanaṃ paṇītaṃ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그에게 과거는 소멸하고 새로운 태어남은 없으니,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를 파괴하고 그 성장을 원치 않으니,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stn235)
(Ratanasuttaṃ-보배경-寶石經, 숫따니빠따-Sn 2.1, 전재성님역)
게송을 보면 “Nibbanti dhīrā yathāyampadīpo”가 있다. 이는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라 번역 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디라(dhīrā)’라는 말은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가르침을 실천하여 궁극적 경지에 들어 선 부처님의 제자를 일컫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이야기 또 하고 또 하지만
글을 매일 쓰다시피 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 경전에 근거한 글이다. 그래서 가급적 개인적인 견해는 피하고자 한다. 이렇게 경전의 가르침을 올려 놓으면 누군가 접할 것이다. 그래서 매일 가르침을 접한다면 마음의 위로와 안정을 느낄 지 모른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무리 반복 되어도 질리지 않고 언제 보아도 신선하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올리면 마치 ‘술취한 사람처럼’ 한이야기 또하고 또한다고 비판할지 모른다. 그러나 경에 실려 있는 내용은 아무리 반복해도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주 봄으로 인하여 외울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경에 실려 있는 말씀은 한이야기 또하며 또 매번 반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 아는 경의 내용이라 하더라도 다시 한번 보면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을 수 있다.
2013-12-2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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