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을 두려워 하니 삼계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네
특이한 제목의 경
‘사뚤라빠 무리의 품’의 네 번째 경은 나산띠경(Nasantisutta, S1.34)이다. 그런데 이 경에 대한 제목을 보면 매우 특이하다. 각묵스님은 ‘있는 것이 아님 경’이라 하였고, 전재성님은 ‘않음의 경’이라 하였고, 빅쿠 보디는 ‘There Are No’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제목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경의 제목 붙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다. 일반적으로 해당 경의 핵심어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때에 따라 첫 게송의 첫 부분의 단어가 제목으로 되는 경우도 있다. ‘나산띠경’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고 보여진다.
나산띠경에서 첫 번째 게송은 “Na santi kāmā manujesu niccā”로 시작 된다. 그런데 첫 번째로 나오는 단어가 ‘Na santi’이다. 바로 이 구문이 그대로 경의 제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Nasantisutta가 되었다. 이를 우리말로 ‘있는 것이 아님 경’, ‘않음의 경’ 으로 옮겼고, 빅쿠 보디는 ‘There Are No’라 하여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뜻의 희안한 제목이 붙었다.
하늘사람의 첫 번째 게송
Na santi kāmā manujesu niccā
santīdha kamanīyāni yesu baddho,
Yesu pamatto apunāgamanaṃ
anāgantā puriso maccudheyyāti.
(Nasantisutta, S1.34)
“인간에게 욕망이란 항상한 것 아니거늘
원하는 것에 묶여 그들 방일하구나.(*154)
그 사람들 죽음의 영역에서 벗어나
돌아오지 않는 경지(*155)로 나아가지 못하도다.”
(있는 것이 아님 경, 상윳따니까야 S1.34, 각묵스님역)
[하늘사람]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이 덧없음에도,
이 세상에 즐길 만한 것들에(*254) 묶여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곳에(*255) 두려워 굳으니,
죽음의 영토에서 돌아오지(256) 못하네.”
(않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4, 전재성님역)
“There are among humans
No permanent sensual pleasures;
Here there are just desirable things.
When a person is bound to these,
Heedless in their midst,
From Death's realm he does not reach
The state of no-more-coming-back."(*70)
(There Are No, CDB 1.34, 빅쿠 보디)
나산띠경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게송이다. 사뚤라빠 무리 중의 하나인 하늘사람이 읊은 것이다.
게송에 대한 각주를 보면
게송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154) “’원하는 것들(kamaniyani)’이란 좋아하는 형색 등 원하는 대상을 말
한다. 사람들은 그런 대상에 묶이고(baddha) 방일(pamatta) 한다.”(SA.i.62)
(*155) Eel&2에는 절대분사인 anagantva로 나타나지만 다른 여러 본에는 anaganta로 나타나는데 이 단어는 『앙굿따라 니까야』 「족쇄 경」(A2:45) 등에서 불환자(anagami)를 설명하는 단어로 나타난다. 역자는 후자 즉 anagata로 읽어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지’로 옮겼다.“dl 말은 삼계윤회라 불리는 죽음의 영역(maccu-dheyya)으로부터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라 불리는(apunagamana-sankhata) 열반으로 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중생들은 열반으로부터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감각적 욕망들에 묶이고 방일한 사람들은 그런 [열반에] 도달하지 못한다.”(SA.i.62)
(각주, 각묵스님)
(*70) In pada d, we should adopt the reading of the agent noun anāgantā in Be, Se, and Ee2, as against anāgantvā in Eel, which leaves the sentence with an unresolved absolutive clause. We find āgantā used in the sense of āgāmi, and anāgantā used synonymously with ānagāmi (in relation to itthattam, "this state of being") at AN 163,3+64,18.
Spk: They do not come from Death's realm, that is, from the round of existence with its three planes, to Nibbana, which is the state of no-more-coming-back (apunagamana), so called because beings do not return from NibbBna. one who is heedless and bound to sensual pleasures cannot attain that.
(각주, 빅쿠 보디)
(*254) kamanīyāni : Srp.I.62에 따르면, 우리의 감각대상, 즉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과 사실을 뜻한다.
(*255) apunāgamanaṃ : ‘다시 돌아오지 못함’은 열반의 다른 이름이다. Srp.I.62에 따르면, 하늘사람들은 열반을 ‘돌아오지 못하는’부정적인 절대적인 영역으로 생각했다.
(*256) anāgantvā : Srp.I.62에 따르면, anāgantā로 읽어야 한다.
(각주, 전재성님)
세 개의 게송과 세 개의 각주를 보면 ‘apunāgamanaṃ’에 대한 해석이 차이가 난다. ‘apunāgamanaṃ’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돌이 오지 않는 경지’라 하였고, 전재성님은 ‘다시 돌아오지 못함’이라 번역하였는데 이는 ‘열반의 다른 이름’이라 하였다. 왜 이렇게 번역의 차이가 나는 것일까?
어근과 어원으로 해석한 빅쿠 보디
각묵스님의 각주에 따르면 ‘apunāgamanaṃ’에 대하여 앙굿따라 니까야 「족쇄 경」(A2:45) 등에서 불환자(anagami)를 설명하는 단어로 나타나기 때문에 anagata로 읽어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지’로 번역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는 빅쿠 보디의 각주와 같은 내용이다. 주석에서는 죽음의 영역에서 돌아 오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닙바나라 하였음에도, 주석의 견해 보다는 빅쿠 보디의 견해를 더 따른 듯 하다. 왜냐하면 빅쿠 보디는 영문 각주에서 불환자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빅쿠 보디는 전통적인 주석서의 견해를 중시하기 보다 어원과 어근에 따라 용어를 해석하다. 그래서 “We find āgantā used in the sense of āgāmi, and anāgantā used synonymously with ānagāmi”라 하였다. 이는 “우리는 아간따에 대하여 아가미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아나간따는 아나가미와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빅쿠 보디는 어근과 어원을 중시하여 번역함으로서 전통적인 주석의 견해와 다른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책의 해제글에서 “첫째, 주석서를 중시하였다.”라고 천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석보다는 빅쿠 보디의 견해를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번역이 다른가?
이와 같이 ‘apunāgamanaṃ’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보니 게송의 번역 내용 역시 다르게 되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차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
초불연 |
성전협 |
Yesu pamatto apunāgamanaṃ anāgantā puriso maccudheyyāti. (S1.34) |
그 사람들 죽음의 영역에서 벗어나 돌아오지 않는 경지로 나아가지 못하도다. (S1.34)
|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곳에 두려워 굳으니, 죽음의 영토에서 돌아오지 못하네. (S1.34)
|
각주 |
불환자(anagami)를 설명하는 단어로 나타난다. 역자는 후자 즉 anagata로 읽어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지’로 옮겼다. |
‘다시 돌아오지 못함’은 열반의 다른 이름이다. Srp.I.62에 따르면, 하늘사람들은 열반을 ‘돌아오지 못하는’부정적인 절대적인 영역으로 생각했다. |
apunāgamanaṃ의미 |
불환자 |
열반 |
maccudheyyā의미 |
삼계윤회라 불리는 죽음의 영역 |
삼계윤회라 불리는 ‘죽음의 영토’(개인적 견해) |
전통적인 주석에서는 apunāgamanaṃ에 대하여 열반으로 보았다. 이는 하늘사람들이 열반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하늘사람들은 열반에 대하여 단멸하는 것처럼 두려운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라 보여 진다. 아마도 ‘존재론’을 바탕에 둔 자들 입장에서 보았을 때 열반은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다시는 존재로 되돌아 오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본 것이라 보여진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곳에(*255) 두려워 굳으니 죽음의 영토에서 돌아오지(256) 못하네.”라고 번역하였다고 본다.
반면 apunāgamanaṃ에 대하여 불환자(아나가미)의 의미로 번역한 각묵스님은 “돌아오지 않는 경지(*155)로 나아가지 못하도다.”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돌아 오지 않는 경지는 바로 불환자를 뜻한다. 이는 빅쿠 보디가 번역한 ‘The state of no-more-coming-back’과 같은 의미이다.
한편 각묵스님의 번역에 ‘죽음의 영역’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maccudheyyā 에 대한 번역어로서 전재성님이 ‘죽음의 영토’라 한 것과 같은 뜻으로 본다. 이 maccudheyyā 에 대한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각묵스님은 주석을 인용하여 “삼계윤회라 불리는 죽음의 영역(maccu-dheyya)”이라 하였다. 이는 빅쿠 보디의 각주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있다.
열반을 두려워 하니 삼계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네
이렇게 apunāgamanaṃ에 대하여 한편에서는 어원으로 접근하여 ‘아나가미(불환자)’로 번역 하였고, 또 한편에서는 주석을 존중하여 ‘열반’의 의미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maccudheyyā에 대해서는 모두 주석의 견해를 중시하여 삼계윤회에 대하여 ‘죽음의 영역’ 또는 ‘죽음의 영토’라 하였다. 그래서 두 게송을 우리말로 의역해 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각묵스님역
인간에게 욕망이란 항상한 것 아니거늘
원하는 것에 묶여 그들 방일하구나.
그 사람들 죽음의 영역에서 벗어나
돌아오지 않는 경지로 나아가지 못하도다.
(의역)
인간에게 욕망이란 항상한 것 아니거늘
원하는 것에 묶여 그들 방일하구나.
그 사람들은 삼계윤회에서 머물러 있을 뿐
불환자의 경지로 나아아지 못한다.
2. 전재성님역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이 덧없음에도,
이 세상에 즐길 만한 것들에 묶여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곳에 두려워 굳으니,
죽음의 영토에서 돌아오지 못하네.
(의역)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이 덧없음에도,
이 세상에 즐길 만한 것들에 묶여
열반을 두려워 하니
삼계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네.
(나산띠경 계속)
2013-12-2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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