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보다 진리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좋다, 좋다” “그려, 그려”
금강경에 ‘선재 선재(善哉 善哉)’라는 말이 있다. 수보리가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샴막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오리까? (善男子 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라고 질문함에 따라 부처님이 “선재선재( 善哉善哉)”라고 답하는 장면이다. 이 ‘선재 선재’에 대한 해석을 보면 “좋다,좋다” 또는 “훌륭하고 훌륭하도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질문자에 대하여 칭찬과 격려에 대한 말이다. 그런데 또 다르게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순 우리말로 “그려, 그려”라고 하는 것이다.
선재에 대한 빠알리어는 ‘사두(Sādhu)’이다. Sādhu에 대하여 사전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다.
Sādhu
[adj.] good; virtuous; profitable. (adv.), well; thoroughly. (ind.), yes; alright.。 善き, 善良の, 善人, 善く, 【形】 善的,好的
좋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정하고 긍정하는 뜻임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사두라는 말은 ‘좋다, 훌륭하다’와 함께 ‘그려(well)’라고 표현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두라는 말을 제목으로 가진 경이 있다. 사두경(ādhusutta, S1.33)이 그것이다. 이를 초불연에서는 ‘좋음 경’이라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좋은 것의 경’, CDB에서는 ‘Good’이라 하였다. 그래서 사두경에서는 ‘Sādhu kho mārisa dānaṃ’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베푸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전재님역)”의 뜻이다. 보시하며 사는 것은 좋은 결과를 가져 오기 때문에 베푸는 삶은 훌륭하다는 뜻이다.
사두경에서는 세 명의 하늘사람이 등장하여 베푸는 삶의 좋은 점에 대하여 게송으로 읊는다. 마지막으로 부처님이 등장하여 하늘사람의 견해를 뛰어 넘는 가르침에 대한 게송을 읊는다.
1. 하늘사람 1 게송
Dānañca yuddhañca samānamāhu
appāpi santā bahuke jinanti,
Appampi ce saddahāno dadāti
teneva so hoti sukhī paratthāti.
(Sādhusuttaṃ, S1.33)
보시와 전쟁은 같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적은 수의 참된 사람 많은 것을 정복하기 때문이니
만일 적은 것일지라도 믿음으로 보시하면
이 때문에 저세상에서 행복하게 됩니다.”
(좋음 경, 상윳따니까야 S1.33, 각묵스님역)
[하늘사람]
보시와 싸움은 같은 것이라 불리니,
조금 있어도 베풀면 다른 많은 사람을 이기리.
조금 있어도 믿음으로 보시하면
참으로 저 세상에서 안락하게 되리.
(좋은 것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3, 전재성님역)
"Giving and warfare are similar, they say:
A few good ones conquer many.
If one with faith gives even a little,
He thereby becomes happy in the other world."(*66)
(Good, CDB S1.33, 빅쿠 보디)
믿음으로 보시하면
게송을 보면 ‘믿음’이 키워드이다. ‘믿음으로 보시하면 커다란 과보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믿음으로 보시한다’는 뜻이 빠알리어로 ‘saddahāna’이다. 이 saddahāna에 대한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66) Spk: "Faith" here means faith in kamma and its fruit. Just as in war a few heroic men conquer even many cowards, so one endowed with faith, etc., in giving even a small gift, crushes much stinginess and achieves abundant fruit.
(빅쿠 보디)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주석: 여기서 “믿음” 은 업과 그에 따른 과보에 대한 신앙을 의미한다. 방금 매우 소수의 영웅이 전쟁에서 다른 많은 겁쟁이들을 정복 하였듯이, 그렇게 누군가 신념을 가지고 작은 보시라도 한다면 관용이 없는 자를 부수는 것과 같고 커다란 과보를 가져오는 것과 같다.
(빅쿠 보디 각주 번역)
믿음으로 보시하는 것에 대한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147) “’믿음으로 하는 보시(saddhaya danam)’란 업(kamma)과 업의 결실(kamma-phala)을 믿고 베푸는 보시를 말한다. ∙∙∙ 마치 전쟁에서 몇 안되는 영웅들(vira-purisa)이 수많은 겁쟁이들을 정복하듯이 믿음 등을 갖춘 자는 적은 것을 보시하더라도 뿌리 깊은 인색함(bahu-macchera)을 쳐부수고 많은 보시의 과보(dana-vipaka)를 성취하게 된다.”(SA.i.60~61)
(초불연 각주, 각묵스님)
믿음으로 보시하는 것에 대한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Saddhano : Srp.I.61에 따르면, 믿음이란 행위와 그 과보에 대한 신념을 말한다.
(성전협 각주, 전재성님)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면 전쟁영웅과 겁쟁이의 비유를 들어 보시하는자와 인색한 자를 설명하였다. 각묵스님 각주 역시 빅쿠 보디의 각주의 내용과 같다.
믿음이 없으면
전재성님은 믿음이란 업과 과보에 대한 신념이라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보시하는 것에 대한 과보를 믿는 것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중에 유물론자들은 보시의 과보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정형구로 표현 되어 있다.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공양도 없고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홀연히 생겨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고 깨달아 천명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
(보시도 없음경, 상윳따니까야 S24.5, 전재성님역)
이것이 ‘허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전형적인 견해이다. 오로지 지금 여기 현세만 있을 뿐 내생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윤회를 부정한다. 이런 허무주의적 견해를 가지면 몸이 파괴되어 죽으면 정신 또한 소멸하여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허무주의적 단멸론에서는 그 어떤 공덕을 지어도 필요가 없다.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보시할 필요도 없고 오계를 지킬 필요도 없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단멸론자들에 대하여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공양도 없고…”라는 정형구로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진 자라면 보시의 공덕에 대하여 믿는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보시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 온다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맹신이 아니라 ‘합리적 믿음’이다.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도 곱다’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누군가에게 잘 해 주었을 때 상대방도 잘해 준다. 이렇게 일상에서 원인과 결과를 확인하게 되었을 때 부처님이 말씀 하신 보시공덕이 틀림이 없다는 것을 믿게 된다. 이처럼 합리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에 대하여 ‘삿다(saddha)’라 한다. 그래서 ‘보시하면 그 과보로서 천상에 태어난다’라는 말을 굳게 믿는 것이다. 따라서 게송에서는 “믿음으로 보시하면 참으로 저 세상에서 안락하게 되리.(S1.33)”이라 한 것이다.
2. 하늘사람 2 게송
Yo dhammaladdhassa dadāti dānaṃ
uṭṭhānaviriyādhigatassa jantu,
Atikkamma so vetaraṇiṃ yamassa
dibbāni ṭhānāni upeti maccoti.
(Sādhusuttaṃ, S1.33)
“법답게 얻은 것을 보시로 베푸는 자
열정과 노력으로 얻은 것을 베푸는 자
죽음의 신(*149) 영역인 웨따라니 강(*150)을 건너
그 사람은 천상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좋음 경, 상윳따니까야 S1.33, 각묵스님역)
[하늘사람]
“바르게 얻거나 힘써 노력하여 얻은
재산과 물건을 베푸는 사람은
지옥의 베따라니 강(*243)을 뛰어넘어,
죽을 때(*244) 하늘나라로 간다네.”
(좋은 것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3, 전재성님역)
“When he gives a gift of a righteous gain
Obtained by exertion and energy,
Having passed over Yama's Vetarani River,
That mortal arrives at celestial states.”(*67)
(Good, CDB S1.33, 빅쿠 보디)
하늘사람의 두 번째 보시에 대한 게송에서는 바른 보시에 대한 과보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바른 보시를 하였을 때 천상에 태어난 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보시를 하더라도 바르게 얻은 것을 보시하여야 함을 말한다. 살생이나 도둑질 등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여 얻은 보시가 아니라 바르게 얻은 것을 보시하였을 때 커다란 과보를 받을 것이라 한다.
여기서 바르게 얻은 것이라는 뜻의 빠알리어가 ‘dhammaladdhassa’이다. 이를 초불연에서는 ‘법답게 얻은’이라 번역하였다. 빅쿠 보디는 ‘a righteous gain’이라 하였다.
웨따라니강과 요단강
게송을 보면 정당하게 취득한 것을 보시 하였을 때 죽음의 강을 건너 천상에 태어날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149) ‘죽음의 신’은 야마(Yama)를 옮긴 것이다. 야마(Yama)는 중국에서 염라(閻羅)로 음역한 염라왕(Yama-raja) 혹은 우리에게 익숙한 염라대왕을 뜻하는 죽음의 신이다. 본서 「인색 경」(S1:49) §3의 주해를 참조할 것. 한편 이 염라대왕의 야마(Yama)와 야마천의 Yama는 다르다. 주석서는 야마천을 “천상의 행복을 얻어서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yata payata sampatta) 야마라 한다.”(VbhA.519; PsA441)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경들에서는 삼십삼천 바로 위의 천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Yama를 Yama의 곡용형으로 이해해서 저열한 곳으로 이해한 곳도 있기는 하다.(KhpA.166)
(*150)‘웨따라니(Vetarani)’는 대지옥(Mahaniraya)에 있는 강의 이름인데 이 강은 독한 가성(苛性)의 물(khara-udaka)로 되어 있다고 한다. 지옥의 중생들이 이것을 좋은 물인 줄 착각하여 목욕하거나 마시려고 들어가면 강둑에 설치된 날카로운 칼이나 무기에 난도질을 당한다고 한다.(SnA.ii.482) 주석서에 의하면 여기서 웨따라니 강을 언급한 것은 단지 비유를 들기 위한 것(desana-sisa-matta)이며 이렇게 법답게 보시하는 자는 이미 31개의 대지옥을 모두 다 건넜다고 설명하고 있다.(SA.i.61)
(각묵스님)
전재성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243)vetaraṇi(sk.vaitarani)는 잿물이 흐르는 강(灰河)으로서 지옥에 있는 강의 이름이다.
(*244) macco(sk. Martyh) : 죽어야 할 인간의 운명을 의미하지만Ggs.I.33에 의하면 ‘maccu’의 고대 힌디어적인 처격(loc.)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즉, ‘macco’가 sk.mrtyau일수 있는 것은 ‘ado’가 sk.adau(adi의 loc.)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전재성님)
게송에서 “지옥의 베따라니 강을 뛰어넘어, 죽을 때 하늘나라로 간다네.”라는 대목을 보면 기독교의 찬송가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기독교에서 죽음의 강을 의미하는 것이 ‘요단강’인데 찬송가에 ‘날 빛보다 더 밝은 천국’이라는 찬송 가사중에 후렴구를 보면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요단강을 죽음으로 상징하여 건너야 할 강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기불교 경전에서도 죽음의 강으로서 베따라니 강이 묘사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강을 건너면 천상에 이를 것이라 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동서양 어느 곳이나 죽음의 강이 언급되어 있고 죽음의 강 너머에는 천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천상으로 건너 가기 위해서는 보시공덕을 지으라고 한다. 이런 공덕에 대하여 강을 건너기 위한 ‘노잣돈’으로도 비유된다.
야마(Yama)가 염라대왕이라고?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Yama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그런데 야마에 대하여 ‘염라대왕’이라 하였다. 그래서 “중국에서 염라(閻羅)로 음역한 염라왕(Yama-raja) 혹은 우리에게 익숙한 염라대왕을 뜻하는 죽음의 신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야마에 대하여 염라대왕으로 본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왜 그런가? 죽음 이후에 49일 동안 머무는 곳으로서 사후영역이 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사십구재’를 지낸다. 사십구제는 사람이 죽은 후 49일동안 영혼이 지상에 머물다가 하늘로 올라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때 영혼에 대한 최종심판자가 염라대왕이다. 그런데 위키 백과에 따르면 염라대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염라대왕은 힌두교 신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염라대왕은 죽음을 맞이한 후 천상세계로 가는 길을 가장 먼저 발견한 존재로, 생전의 공덕으로 인해 죽은 자들의 통치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염라대왕, 위키백과)
위키백과에 따르면 염라대왕은 힌두교 신화에 뿌리를 둔 것이라 한다. 힌두교와 대승불교에서는 사후세계를 관장하는 가상의 군주로 보기 때문이다.
초불연 각주를 보면 ‘야마’에 대하여 ‘염라대왕’이라 하고 더구나 번역에서는 ‘yamassa에 대하여 ‘죽음의 영역’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사후에 영혼이 머무는 세계를 사실상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사람이 죽어서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아 다음 생이 결정된다는 대승불교의 ‘중유(中有)’관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중유는 인정되지 않는다. 연기의 법칙에 따라 죽자마자 곧바로 다음 생이 시작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이연기에서 식을 ‘재생연결식’으로 본다.
사후세계를 인정하는 듯한 번역
논장에 따르면 마지막 죽음의 마음이 일어 날 때 이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래서 이생과 다음생의 간격은 없는 ‘무간(無間)’으로 본다. 마치 한생각이 일어난 다음 다음생각이 일어나듯이, ‘죽음의 마음(사몰심)’ 다음에 ‘재생연결의 마음(결생식)’이 일어나 그 어떤 틈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생과 다음생 역시 연기적 현상으로 보아 십이연기 순환고리로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야마를 염라대왕으로 설명함으로서 영혼이 머무는 특정한 장소가 있는 것처럼 설명하였다. 더구나 본문게송에서는 “죽음의 신 영역인 웨따라니 강을 건너”라 하여 마치 죽은 자가 따로 머무는 장소가 있는 것처럼 번역하였다.
이에 반하여 전재성님은 “지옥의 베따라니 강을 뛰어넘어, 죽을 때 하늘나라로 간다네.” 라 하였다. 야마에 대하여 염라대왕이라 번역하지 않고 야맛사에 대하여 지옥 그 자체로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지옥의 베따라니 강을 뛰어넘어”라 하여 뛰어넘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그 어떤 중간과정도 거치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이어지는 문구인 “죽을 때 하늘나라로 간다네.”라고 번역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죽을 때’라고 한 것은 죽자마자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macco에 대하여 ‘죽을 때’라 하였는데 각주에 따르면 이를 운명이라 번역하지 않고 ‘처격’으로 하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나 빅쿠 보디는 이를 That mortal이라 하여 주어로 번역하였다. 마치 어떤 영혼이 있어서 죽음의 영역을 지나 천상으로 가기 위하여 죽음의 강을 건너는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그래서 빅쿠보디는 “Having passed over Yama's Vetarani River, That mortal arrives at celestial states.” 라 하였다. 이는 “야마의 웨따라니강을 지나서 그 죽음은 천상의 영역에 도달한다.”라는 뜻이다. 각묵스님 역시“죽음의 신 영역인 웨따라니 강을 건너”라고 번역하여 빅쿠 보디와 유사하게 번역하였다.
이렇게 macco에 대하여 격을 어떻게 취하느냐의 따라 번역이 하늘과 땅차이만큼이나 벌어진다.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중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연기법칙에 따라고 있음을 말한다. 죽음과 재생 역시 연기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중유나 이를 심판하는 자는 있을 수 없다. 자신의 일생동안 업에 대한 과보로서 즉각적으로 다음생이 결정됨을 말한다. 따라서 보시를 하여 공덕을 많이 쌓은 자는 죽자마자 곧바로 천상에 태어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의 번역에서 별도의 죽음의 영역이 있고 죽음의 강을 건너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기독교의 요단강을 건넌다는 찬송가 구절과 매우 유사하다. 영혼을 인정하는 기독교에서는 죽은 자가 죽음의 강이라 일컫는 요단강을 건너야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빅쿠 보디의 경우 미국인인이기 때문에 서양적 사고방식의 영향이 남아 있어서라고 보여진다.
3. 하늘사람 2 게송
Viceyya dānaṃ sugatappasatthaṃ
Ye dakkhiṇeyyā idha jīvaloke,
Etesu dinnāni mahapphalāni
Bījāni vuttāni yathā sukhetteti.
(Sādhusuttaṃ, S1.33)
“차별보시를 선서께서는 칭송하셨습니다.
생명 있는 세상에서 보시 받아 마땅한 분들
그분들께 올리는 보시 큰 결실이 있으니
비옥한 들판에 뿌린 씨앗과도 같습니다.”
(좋음 경, 상윳따니까야 S1.33, 각묵스님역)
[하늘사람]
“잘 살펴 보시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칭찬하는 일.
이 생명의 세계에서 보시 받아야 할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처럼, 커다란 공덕을 가져오리.”
(좋은 것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3, 전재성님역)
"Giving discriminately is praised by the Fortunate one-
To those worthy of offerings
Here in the world of the living.
What is given to them bears great fruit
Like seeds sown in a fertile field."
(Good, CDB S1.33, 빅쿠 보디)
차별보시란 무엇인가?
하늘사람의 세 번째 게송의 핵심어는 ‘Viceyya dāna’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차별보시’라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잘 살펴 보시하는 것’이라 하였다. 빅쿠 보디는 ‘Giving discriminately’라 하여 ‘구분하여 주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Viceyya dāna’의 뜻은 무엇일까? 먼저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151) “’차별보시(viceyya danam)’에는 두 가지 차별(vicinana)이 있다. 하나는 보시물의 차별(dakkhina-vicinana)이고 다른 하나는 보시물을 받는 자의 차별(dakkhineyya-vicinana)이다. 저급한(lamaka) 공양물(paccaya)은 제쳐두고 뛰어난 것(panita)들만 차별하여 모아서 하는 보시가 보시물의 차별이다. 계행을 구족하지 못한 자나 95종류의 외도(pasanda-bheda)들에게 베푸는 것을 제쳐두고 계행 등의 덕을 구족한 불교교단(sasana)에 출가한 자(pabbajita)들에게 하는 보시가 보시물을 받는 자의 차별이다. 이처럼 두 가지 차별보시가 있다.”(SA.i.61-62)
한국 절집에는 ‘평등공양 차별보시’라는 말이 널리 통용된다. 음식 등을 위주로 한 대중공양은 평등하게 하고 스님들에게 개별적으로 올리는 보시에는 차이가 나도 된다는 말이다. 주석서의 이런 설명을 보면 지금 우리 절집에서 통용되는 ‘차별보시’는 초기불전과 주석서적인 근거가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역자도 차별보시로 옮겼다.
(각묵스님)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68) Viceyya dānaṃ. The expression is an absolutive syntactical compound; see Norman, "Syntactical Compounds in Middle Indo-Aryan," in Collected Papers, 4:218-19.
Spk: A gift given after making discrimination. There are two kinds of discrimination: (i) regarding the offering, i.e., one puts aside inferior items and gives only superior items; and (ii) regarding the recipient, i.e., one leaves aside those defective in morality or the followers of the ninetyfive heretical creeds (pdsanda, the non-Buddhist sects; see n. 355) and gives to those endowed with such qualities as virtue, etc., who have gone forth in the Buddha's dispensation. 69 In pgda a, I read
(빅쿠 보디)
빅쿠 보디는 두 가지 구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첫번째는 열등한 아이템은 제쳐두고 우수한 아이템만을 주는 것이라 하고, 두번째는 수령인에 대하여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자나 95종의 이단교리를 따르는 자들을 제쳐두는 것이라 한다.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246) Viceyya dānaṃ : Srp.I.61에 따르면, 살피고 나서 보시하는 것이다. 한역으로는 심찰시(審察施)라 한다. 1) 보시물에 대해서는 열등한 것을 피하고 보다 훌륭한 것인지 2) 보시물을 받는 자에 대해서는 계행이나 덕행을 갖춘 자인지 살펴 보아야 한다.
(전재성님)
세 개의 각주를 보면 보시할 때 가려서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잘 살펴서 보시산다는 뜻으로 ‘심찰시(審察施)’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계행이 되어 있지 않은 자나 삿된 견해를 가진 외도들에게 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고귀한 보시와 열등한 보시
맛지마니까야에 고귀한 보시와 열등한 보시에 대한 것이 있다. 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M412)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읊었다.
계행을 지키는 자가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법하게 얻어진 것을 흔쾌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보시하는 자의 덕행이 보시를 청정하게 만드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가 계행을 지키는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지 않고
여법하지 않게 얻어진 것을 불신의 마음으로 보시하면
보시받는 자의 덕행이 보시를 청정하게 만드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가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지 않고
여법하지 않게 얻어진 것을 불신의 마음으로 보시하면
어느 쪽의 덕행도 보시를 청정하게 만들지 못하네.
계행을 지키는 자가 계행을 지키는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법하게 얻어진 것을 흔쾌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그 보시는 굉장한 과보를 가져온다고 나는 말한다.
탐욕을 떠난 자가 탐욕을 떠난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법하게 얻어진 것을 흔쾌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그 보시는 세간적 보시 가운데 최상이라고 나는 말한다.
(Dakkhiṇāvibhaṇgasutta-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42, 전재성박사역)
게송을 보면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이 중에 가장 마지막 게송이 가장 수승한 보시이다. 청정한 자가 청정한 자에게 보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여법하게 얻어진 것을 흔쾌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그 보시는 세간적 보시 가운데 최상”이라 하였다.
4. 부처님 게송
Saddhāhi dānaṃ bahudhā pasatthaṃ
Dānā ca kho dhammapadaṃva seyyo.
Pubbe ca hi5 pubbatare va santo
Nibbāṇamevajjhagamuṃ sapaññāti.
(Sādhusuttaṃ, S1.33)
“참으로(*152) 보시는 많은 방법으로 칭송되나
보시보다 법의 구절[法句]이 더 뛰어나도다.(*153)
이전에도 그 이전에도 참된 사람들이 있어
그들은 통찰지 갖춰 오직 열반을 증득했도다.”
(좋음 경, 상윳따니까야 S1.33, 각묵스님역)
[세존]
믿음으로 베풀면 갖가지 칭찬받지만
보시보다 진리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251) 더 훌륭하네.
예전에도 그 이전에도 그러한 참 사람,
지혜로운 자는 모두 열반에 들었다네.”
(좋은 것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3, 전재성님역)
"Surely giving is praised in many ways,
But the path of Dhamma surpasses giving.
For in the past and even long ago,
The good and wise ones attained Nibbana."(*69)
(Good, CDB S1.33, 빅쿠 보디)
하늘사람들이 보시공덕에 대하여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그러면서 부처님 면전에서 “세존이시여, 누구의 말이 잘 말한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대들은 모두 방편적으로 좋은 말을 하였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하늘사람들이 찬탄한 보시 공덕에 대하여 방편이라 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은 하늘 사람들의 견해를 뛰어넘는 가르침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간적인 방편이 아닌 진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말씀 하신 것이다.
보디스님의 제안대로?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152) 역자는 Eel, Be, Se의 saddha hi(믿음으로 [행한])를 택하지 않고 보디스님의 제안대로 Ee2와 SS에 나타나는 addha hi(참으로)를 택해서 이렇게 옮겼다.
(* 153) “보시보다는 열반이라 불리는(nibbana-sankhata) 법의 구절[法句, dhamma-pada]이 더 뛰어나다.”(SA.i.62) 보디 스님은 여기서 dhamma-pada를 ‘법의 구절’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법의 실천’ 혹은 ‘법을 닦음’(dhamma-patipada)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사례를 들면서 예시하고 있다. 즉 본 게송에 나타나는 dhamma-pada라는 단어는 dhamma-patipada(법을 닦음)에서 운율을 맞추기 위해서 pati가 생략된 형태로 보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문맥상으로도 보시보다는 법을 실천하는 것이 더 뛰어나다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보디 스님 365쪽 69번 주해 참조) 역자는 원문을 존중하여 ‘법의 구절’로 직역을 하였다.
(각묵스님)
각묵스님의 152번 각주를 보면 놀랍게도 ‘보디스님의 제안대로’라는 말이 보인다. 이는 무슨뜻일까? 빅쿠 보디의 CDB를 참고 하였음을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153번 각주를 보면 ‘(보디 스님 365쪽 69번 주해 참조)’라고 코멘트 하였다. 초불연의 상윳따니까야가 빅쿠 보디의 CDB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빅쿠 보디는 어떻게 표현 하였을까? 빅쿠 보디의 69번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69) In pgda a, I read addhli hi with Ee2 and SS (also at Ja I11 472,29), as against saddhd hi in Be and Eel and saddhdbhi in Se. Spk glosses dhammapadam va in piida b thus: nibbdnasankhdtam dhammapadam eva, "just the state of Dhamma known as Nibbana." Usually dhammapada is a stanza or saying of Dhamma (as at w. 785-86,826), which is also plausible in this context, but I prefer to take it as a metrical contraction of dhammapafipada, the practice-path of Dhamma, a sense attested to at Sn 88, which explicitly equates dhammapada with magga. The point the Buddha is then making is that the practice of Dhamma (by the Noble Eightfold Path aimed at Nibbana) is better than the practice of giving aimed at a heavenly rebirth. The fuller gloss on the verse at Ja I11 474 supports the above interpretation: "Although giving is definitely (ekamsen' eva, apparently the gloss on addhri hi) praised in many ways, a dharnmapada--a portion of Dhamrna (dhammakotthdsa) consisting in serenity and insight and in Nibbana-is even better than giving. Why so? Because in the past (pubb' ma)-that is, in this aeon, Kassapa Buddha and so on-and even earlier (pubbatar' eva), that is,
Vessabhii Buddha and so on (in earlier aeons), the good, the superior persons (sappurisd), endowed with wisdom, developed serenity and insight and attained Nibbana." 70 In pada d, we should adopt the reading of the agent nou
(빅쿠 보디)
꽤 긴 설명이다. 빠알리원문을 이용하여 어떻게 dhamma-pada가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이 빅쿠 보디의 각주는 인터넷사이트에서 책을 스캔한 것을 올려 놓은 것이기 때문에 빠알리 특수 문자에 오류가 있다.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보다
Dhammapada에 대한 전재성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251) dhammapada : Dhp.100에 따르면, ‘진리의 말씀’이다. Srp.I.62에서는 이것을 열반으로 해석했으나, 그렇게 되면 그 다음 구절의 ‘지혜로운(sapaññā)’이란 말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Ja.III. 472에서는 법의 요소(dhammakottha-sa)로서의 서른일곱 가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법(37조도품)을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보시보다 가르침의 실천이 열반의 성취란 관점에서 더욱 훌륭한 것이다.
(전재성님)
전재성님은 dhammapada에 대하여 ‘진리의 말씀’으로 번역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법의 구절[法句]’이라 하였고, 빅쿠 보디는 ‘the path of Dhamma(법의 길)’라 하였다. 이렇게 pada에 대하여 ‘말씀’, ‘구절’, ‘길’이라는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게송의 요지는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보시보다 가르침의 실천이 열반의 성취란 관점에서 더욱 훌륭한 것”이라 하였다. 보시를 하면 많은 칭찬을 받고 그에 대한 과보로서 천상에 태어나기는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의 번역이 왜 오역(誤譯)인가?
번역비교를 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번역용어를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유아론’적이고 ‘영혼론’적인 번역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하늘사람의 두 번째 게송인 ‘Atikkamma so vetaraṇiṃ yamassa dibbāni ṭhānāni upeti maccoti’의 번역어가 대표적이다. 이를 초불연에서 “죽음의 신 영역인 웨따라니 강 건너 그 사람은 천상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라 하였고, CDB에서는 “Having passed over Yama's Vetarani River, That mortal arrives at celestial states.(야마의 웨따라니 강을 지나쳐서 그 죽은 자는 천상에 도달한다)”라 하였다. 그런데 이는 명백히 ‘사후 세계’를 인정하는 것에 해당된다. 마치 중유를 인정하는 듯이 macco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그 사람’이라 하여 주어로 사용하였고, 빅쿠 보디 역시 ‘That mortal’라 하여 주어로 사용하였다. 이는 죽은 영혼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오역(誤譯)’이라 본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macco에 대하여 처격으로 하여 ‘죽을 때’라 하였다. 그래서 “지옥의 베따라니 강을 뛰어넘어, 죽을 때 하늘나라로 간다네.”라 하였는데 이는 보시공덕을 지은 자가 죽자마자 바로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중유를 인정하는 듯하고 더구나 야마에 대하여 힌두교와 대승불교에서 칭하는 염라대왕이라고 설명한 각묵스님의 각주는 명백히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어긋난 것이다. 그래서 번역이 “죽음의 신 영역인 웨따라니 강 건너 그 사람은 천상으로 올라가게 됩니다.”가 되었는데, 마치 기독교에서 ‘죽은 자가 죽음의 강인 요단강을 건너는 것’과 유사한 느낌을 갖게 한다.
불교인 보다 더 많이 보시하는 타종교인
보시는 좋은 것이다. 주는 사람은 주어서 좋고 또 그 공덕으로 천상에서 태어나서 좋은 것이다. 그래서 ‘좋다’ 또는 ‘훌륭하다’는 뜻이 사두(Sādhu)인데 경의 이름도 사두경(Sādhusutta)이다. 그러나 보시공덕으로 천상에 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방편(pariyāyena)’이라 하였다.
부처님이 방편이 아닌 직설적으로 말씀 하신 것은 열반이다. 그래서 “보시보다 진리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더 훌륭하네.”라 하신 것이다.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보시보다 가르침을 실천하여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말한다.
보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불자가 아니라도 종교가 없는 일반사람도 할 수 있고 타종교인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누고 베푸는 일에 있어서는 오히려 타종교인이 불자들을 압도한다.
불교닷컴 기사에 따르면 기독교 구호단체의 일년 모금액을 보면 월드비전이 1,400억원이고 굿네이버스가 1.035억원이라 한다. 그렇다면 불교단체의 모금액은 얼마나될까? 기독교와 천주교 단체와 비교하면 비교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다. 기사에 따르면 불교의 아름다운 동행의 경우 123억원이고, 승가원은 129억원이라 한다. 거의 열 배가까이 차이가 난다. 이렇게 기부하고 나누고 베푸는 것만으로 본다면 타종교인들이 천상에 태어나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보시보다 더 좋은 것은
부처님은 보시에 대하여 칭찬하였다. 더구나 보시하면 반드시 좋은 과보를 받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 궁극적 목적은 해탈과 열반에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믿음으로 베풀면 갖가지 칭찬받지만
보시보다 진리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더 훌륭하네.
예전에도 그 이전에도 그러한 참 사람,
지혜로운 자는 모두 열반에 들었다네.”(S1.33)
2013-12-1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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