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들의 피난처는? 두 가지 풍난(風難)이야기
상윳따니까야 데와따상윳따(S1)에 ‘사뚤라빠 무리의 품’이 있다. 이품은 다른 품과 다르게 등장인물이 많다. 이전 품에서는 등장인물이 일인 이었으나 이 품에서는 다수가 등장하여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한다. 대부분 한계를 드러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관점에 대한 한계를 드러낸 하늘사람(데와따)과 한계를 훨씬 뛰어 넘는 부처님과의 대화가 전개 된다.
천상의 신은 실재 하는가?
사뚤라빠 무리의 품에서 첫 번째 경은 삽비경(Sabbhisutta, S1.31)이다. 경의 도입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때 많은 싸뚤라빠 무리의 하늘사람들이 깊은 밤중에 아름다운 빛으로 제따바나를 두루 밝히며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예배를 올리고 한쪽으로 물러나 섰다.
(Sabbhisutta-참사람과 함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1,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사뚤라빠 무리들’이라 하였다. 이는 신들의 무리라는 뜻이다. 부처님이 천상의 신들과 대화를 한 것이다.
부처님과 신들과의 대화는 주로 밤중에 이루어진다. 이는 부처님의 일과에 따른 것이다. ‘부처님의 일과’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부처님이 천상의 신들과의 대화시간은 ‘밤10시에서 새벽 2시’로 알려져 있다. 이때 하늘사람이나 악마 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제도하는 것으로 경전에서는 기록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하늘사람(데와따)나 악마(마라)는 실재 하는 것이 된다. 인간과 다른 세계에 사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인간만 교화한 것이 아니라 천상 등 다른 세계의 존재들도 대화로서 교화 한 것이다. 사뚤라빠 무리도 그런 존재들 중의 하나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뚤라빠 무리들은 어떤 존재들일까?
인연담을 보면
각주에 사뚤라빠 무리에 대한 설명이 있다. 성전협과 초불연의 번역서, 그리고 CDB에서도 공통적으로 언급된 것은 모두 주석서의 ‘인연담’을 근거로 하고 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먼저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The background story is as follows: once a merchant ship with a crew of seven hundred men, while crossing the sea, was beset by a terrible storm. As the ship sank, the crew members, praying frantically to their gods, noticed one of their number sitting calmly, cross-legged "like a yogi," free from fear. They asked him how he could remain so calm, and he explained that as he had undertaken the Three Refuges and Five Precepts he had no reason for fear. They requested the same from him, and after dividing them into seven groups of a hundred each he gave each group in turn the refuges and precepts, completing the procedure just as the ship was swallowed up by the sea. As the fruit of this final deed of merit, all the men were immediately reborn in the Tavatimsa heaven in a single group with their leader at the head. Recognizing that they had attained such fortune through their leader's kindness, they came to the Blessed one's presence to speak praise of him.
(사뚤라빠 무리 인연담 각주, 빅쿠 보디, CDB 363P 각주 59)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야기에 대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 한 때 선원 칠백명이 탄 상선이 있었는데 바다를 항해하던 중에 무시무시한 폭풍에 직면하였다.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선원들은 자신들의 신에게 미친듯이 매달리며 기도하였다.
그런데 그들 선원 중에 어떤 이는 마치 요기처럼 다리를 꼬고 두려움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는 세 가지 피난처(삼보)와 다섯 가지 가르침(오계)에 떠 맡겼었기 때문에 그 어떤 두려움도 없다고 하였다.
그들은 그와 똑같이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그는 선원들을 백명씩 일곱 그룹으로 나눈 후에 각 그룹에 피난처들과 교훈을 주었다. 이렇게 삼귀의와 오계 수지가 완성되는 순간 배는 바다에 의하여 삼켜져 버렸다.
이와 같은 최종 행위에 대한 과보로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속한 그룹의 리더와 함께 즉각적으로 삼십삼천에 태어났다. 그들은 리더들의 호의로 행운을 얻게 된 것을 알고나서 그들의 리더를 칭찬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면전에 나타났다.
(빅쿠 보디 각주 번역)
각묵스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사뚤라빠 무리의 천신들에 얽힌 이야기를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때 700명의 해양 무역을 하던 상인들(samudda-vanija)이 배(nava)로 바다를 건너다가 무시무시한 폭풍을 만났다. 배가 전복되자 상인들은 모두 그들이 믿는 신들에게 광적으로 기도를 올렸지만 한 상인은 요가 수행자(yogi)처럼 가부좌를 한 채 태연히 앉아 있었다. 감명을 받은 상인들이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삼귀의와 오계를 지키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들도 모두 그 상인을 스승(acariya)으로 하여 삼귀의와 오계를 받아서 편안한 마음으로 임종을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삼귀의와 오계를 준 상인을 우두머리로 하여 하나의 무리가 되어 즉시에 삼십삼천에 재생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우두머리를 칭송하기 위해 세존께 다가와 이런 게송을 읊었다고 한다.(SA.i.54-55)
(사뚤라빠 무리 인연담 각주, 각묵스님)
전재성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Satullapakāyikā : 하늘사람들인데, Srp.I.54에 인연담이 나온다. 상인들이 바다를 건너는데, 폭풍우가 몰아쳐서 배가 가라앉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각각 자신의 수호신을 외쳐 대며 도움을 청했다. 싸뚤라빠는 ‘백명의 외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만이 결가부좌한 채 동요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한 동승자가 그에게 태연자약한 이유를 묻자 그는 여행을 떠나기 전 승단에 공양을 드리고 귀의했으므로 어떤 두려움도 없다고 했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 달라는 동승자의 부탁을 받고, 그들을 백명씩 일곱 그룹으로 나누어 차례로 부처님의 오계를 가르치고 오계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확실히 귀의하도록 했다. 배는 점점 깊이 가라앉아 모두 죽게 되었고 그들은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도리천)에 태어나 제석천궁에서 살게 되었다. 싸뚤라빠 무리들은 이들이며, 지금 그들은 위대한 스승인 부처님을 찬양하기 위해 부처님을 방문한 것이다.
(각주, 전재성님)
세 개의 각주를 보았다. 비슷하지만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다.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사뚤라빠의 어원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Satullapa’에 대하여 ‘백명의 외치는 자’라 하였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다. 칠백명의 선원에 대하여 백명 단위로 묶으면 일곱 그룹이 되기 때문이다. 일곱 그룹에는 리더가 일곱명 있게 되는데 이 일곱명의 리더가 자신의 그룹에 속해 있는 선원들을 모두 교화하였기 때문이다.
삼보를 피난처로 삼음에 따라
이렇게 폭풍우를 만난 모든 선원이 구원 받게 되는 것은 한사람의 불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친 폭풍우가 몰아쳐서 배가 전복될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도 태연히 명상에 잠겨 있었다. 이를 보고 선원들이 감동한 것이다. 이렇게 태연할 수 있었던 것은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오계를 준수하는 삶의 덕분이다. 그래서 비록 지금 죽는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코 악처에 떨어질 염려가 업기 때문이다. 인간이나 또는 천상에 태어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태연히 명상을 하며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다른 선원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의 이름을 불렀다. 빅쿠 보디의 표현에 따르면 ‘미친듯이 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였다고 한다. 이는 인간이 극단적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 보여 진다.
불자선원이 이렇게 태연자약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요하던 선원들은 자신들도 그와 같은 믿을 갖게 해달라고 그 짧은 시간에 요청한다. 인연담의 내용으로 보아 선원 칠백명 전체를 모아 놓고 교화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본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상황에서 칠백명 전원을 한 자리에 모아 놓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불자는 백명 단위로 일곱개의 그룹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일곱 그룹의 리더들에게 먼저 삼귀의 하게 오계를 수지하게 하여 귀의하게 하였다. 그리고 일곱그룹의 리더들은 자신이 속한 영역으로 가서 선원들에게 삼귀의와 오계를 설함으로서 귀의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한사람의 불자로 인하여 칠백명 전원이 삼보에 귀의하게 되었다. 짧은 시간에 모두 불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선원 전체가 귀의하고 나자 배는 뒤집혔다. 그래서 모두 죽게 되었다. 그런데 선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삼보를 피난처로 삼음에 따라 그 공덕으로 모두 천상에 태어 나게 되었다. 빅쿠 보디에 따르면 ‘Tavatimsa’라 하였다. 이는 욕계천상의 삼십삼천(三十三天)을 말한다. 그러나 전재성님 각주에 따르면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忉利天)’이라 하였다. 삼십삼천의 또 다른 이름이 도리천이다. 도리천은 사전에 따르면 ‘육욕천(六欲天)의 둘째 하늘.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데, 가운데에 제석천(帝釋天)이 있고 그 사방에 하늘 사람들이 거처하는 여덟 개씩의 성이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왜 자신의 리더들을 칭찬하였을까?
만일 선원들이 불자가 되지 않고 자신이 믿는 신만 미친듯이 통성기도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죽는 순간의 불안하고 두려움 마음을 원인으로 하여 악처에 태어 났을지 모른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선원들은 자신들에게 삼귀의오 오계를 준 그룹의 리더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래서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면 “그들은 리더들의 호의로 행운을 얻게 된 것을 알고나서 그들의 리더를 칭찬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면전에 나타났다.”라고 하였다. 이런 내용은 각묵스님이나 전재성님의 각주에는 보이지 않는다.
경에서 여섯 명의 사뚤라빠 무리들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 그들을 천상세계로 이끈 그룹리더들에 대한 찬사로 볼 수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한 불자가 칠백명을 모두 모아 놓고 한꺼번에 교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백명 단위로 구분하여 백명의 리더들을 먼저 교화하고 그 다음에 리더들이 백명에게 교화하는 수순을 밟은 것이다. 빅쿠 보디와 전재성님의 각주에는 이러한 사실이 비교적 잘 설명되어 있다.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에서
사뚤라빠 무리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서 한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와 유사한 내용이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에 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入於大海 假使黑風 吹其船舫 飄墮羅刹鬼國
입류대해 가사흑풍 취기선방 표타나찰귀국
큰 바다에 들어갔다가 가령 폭풍을 만나 그 배가 표류하다가
나찰 귀신들의 나라에 닿게 되었을지라도
其中 若有乃至一人 稱觀世音菩薩名者 是諸人等
皆得解脫羅刹之難 以是因緣 觀世音.
기중 약유재지일인 칭관세음보살명호 시제인등
개득해탈 나찰지난 이시인연 관세음.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은 일컫는 이가 있으면
여러 사람들이 모두 나찰 귀신들의 재난을 벗어나게 되나니,
이러한 인연으로 관세음이라 하느니라.
(관세음보살보문품, 무비스님역)
관세음보살보문품은 법화경에 속해 있다. 법화경을 구성하는 품이기도 하지만 관음경이라 하여 독립된 경전으로도 활용된다. 이런 관세음보살보문품은 대표적인 ‘타력신앙’에 대한 것이다.
염피관음력(念彼觀音力)으로
불교는 자력신앙의 종교이다. 그러나 타력의 요소가 없는 것도 아니다. 법화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는 불교가 특히 타력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래서 마치 ‘불교이단’처럼 보이는 것이 법화경이다. 그 중에서도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보면 타력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다. 이는 품에서 칠난으로 표현 된다. 품에서 표현된 ‘칠난(七難)’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설사 큰 불에 들지라도 불이 능히 태우지 못하며(火難)
2) 큰 물에 빠질지라도 죽는 일이 없을 것이며(水難)
3) 바다에서 검은 바람을 만나 죽음에 임박했더라도 해탈을 얻을 것이며(風難)
4) 죽음의 칼이 목전에 다달았을지라도 그 칼이 저절로 부러질 것이며(劍難)
5) 나찰 등 아무리 사나운 마귀라 할지라도 해를 끼치지 못하며(鬼難)
6) 죄가 있거나 죄가 없거나 감옥의 고통을 맞게 된 자들이 모두 자유로워지며(獄難)
7) 원수나 도적도 스스로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賊難)
이것이 칠난이다. 이외에도 구남구녀가 있어서 간절히 원하면 아들과 딸도 가려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품에 따르면 칠난이 닥쳤을 때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그 공덕으로 모두 벗어날 것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절에서 “나무보문시현 원력홍심대자대비 구고 구난 관세음보살,,,,,” 라고 ‘관음정근’을 하는 것이라 본다.
이렇게 관세음보살을 애타게 부르면 그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공덕으로 위기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한다. 이를 염피관음력 (念彼觀音力)이라 한다.
관세음보살을 애타게 부르면
한국불교에서 관음신앙의 위력은 대단하다. 어느 절에서든지 ‘관음재일’이라 하여 매달 음력 24일이 되면 기도법회가 열린다. 그래서 불자들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며 관음정근을 한다.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를 찾듯이 애타게 관세음보살을 명호 하면서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이렇게 애타게 명호하면 마치 엄마가 아이의 목소리를 알아보듯이 관세음보살의 가피가 있을 것이라 한다. 하지만 이는 대표적인 기복신앙이다. 학업, 취업, 승진, 사업, 건강 등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을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힘으로 성취하겠다는 발상이다. 이와 같은 타력적인 요서는 유일신교와 하등 다를 바 없다.
관세음보살보문품과 관련하여 기억나는 것이 있다. 불교교양대학에서 공부할 당시 어느 법우님이 아주 기쁜 목소리로 마치 큰 것을 발견한 듯 말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관세음보살보문품이었다. 불교에 처음 입문하여 어느 경이 있는지 잘 모르던 시절 그 법우님은 대단한 경을 발견하였다는 듯이 말한 것이다. 천주교를 믿다가 불교로 개종한 불자이다. 그 법우님은 관세음보살보문문품에 들어 있는 칠난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그러면서 관세음보살을 명호 하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첩처럼 작은 사이즈의 얄팍한 책을 여러 권 사서 법우님들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든지 꺼내 볼 수 있도록 항상 소지 하고 다닐 것을 주문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것은 관음신앙의 모태가 되는 법화경 관세음보문품이었다.
기복(祈福)보다 작복(作福)을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읽어 보면 타력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다. 관세음보살만 염하면 물에 빠져도 죽는 일이 없고, 더구나 칼(枷, 형틀)이 목에 다달아도 저절로 부러질 것이라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원수나 도적을 만나도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오로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며 정근하였을 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자력의 불교에서 관음신앙은 대표적인 타력신앙으로 본다.
하지만 또 다른 해석도 있다. 관음신앙이 반드시 타력적인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방송에서 월호스님은 “관세음보살을 명호 함으로써 육근을 청정히 하고 지계하고 보시하는 삶을 살아 간다면 어떤 일이든지 잘 풀려 나가기 때문에 ‘작복(作福)신앙’이 될 수 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비록 처음에는 학업, 취업, 사업, 건강 등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기도로 시작하였을지라도 기도를 열심히 하다 보면 육근이 청정해지기 때문에 주변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기도라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복을 달라고 하는 ‘기복(祈福)’보다 복을 짓는 ‘작복(作福)’을 하라는 것이다.
풍난(風難)의 모티브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칠난을 보면 세 번째 난이 ‘풍난(風難)’이다. 이 풍난에 대하여 품에서는 ‘개득해탈 나찰지난(皆得解脫羅刹之難)’이라 하였다. 무비스님역에 따르면 “모두 나찰 귀신들의 재난을 벗어나게 되나니”라고 되어 있다. 한문 득해탈(得解脫)에 대하여 ‘벗어나게 된다’라고 번역한 것이다.
벗어난다는 것은 위험에서 빠져 나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살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해탈이라 하였을 때 그 해탈이 죽음이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는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대한 산스크리트 원전을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보문품의 풍난에 대한 것은 초기경전을 모티브로 한 듯하다. 그 원형이 바로 상윳따니까야 ‘사뚤라빠 무리의 품’의 삽비경(S1.31)의 인연담에에서 보여 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우리말 번역을 보면 관음염피력에 따라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삽비경 인연담에서는 선원들이 모두 죽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임종을 맞이할 것인가
배가 뒵집혀 바다에 빠지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누군가 구조해 주기 전에는 거의 대부분 죽는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삽비경 인연담에서도 그렇게 표현 되어 있다. 그런데 죽는 순간이 매우 중요하다. 삼보에 귀의 하고 오계준수하는 불자라면 죽은 순간에도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편한한 자세로 죽음을 맞이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결가부좌한 채 동요하지 않고”라고 표현 하였고, 불자가 된 선원들 역시 삼귀의와 오계를 받아서 편안한 마음으로 임종을 맞이 한 것이다. 이는 임종에 임하는 자세에 대한 것이다.
임종하는 순간 마지막 마음이 다음 생을 결정한다고 한다. 그래서 임종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논장에서는 말한다. 이는 매우 짧은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고는 순간에 일어난다. 특히 죽음에 이르는 사고가 났을 때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슬로비디오 같다고들 이야기 한다. 그래서 죽음 직전까지 내몰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짧은 순간에 일생에 겪었던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나타난다고 한다. 마치 꿈을 꾸었는데 매우 짧은 순간에 일생을 산 듯한 것과 같은 이치라 본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고에서 그 짧은 몇 초 동안 일생 겪었던 일들이 모두 파노라마 친다는 것이다.
논장에 따르면 임종순간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는 인상적이었던 사건이 가장 나중의 마음이 되어 이 마음을 조건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소에 선업을 많이 닦아 놓은 사람이라면 죽음이 두려울 것이 없고 오히려 담담이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오계준수생활을 하였다면 악처에 떨어질 일이 없고 천상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선업 보다 악업을 더 많이 지은 자는 두려움에 떨지 모른다. 자신의 죄는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을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해저물 무렵 산그림자가 드리우듯이 자신이 지은 악행이 시도 때도 없이 엄습할 것이다. 만일 살인을 저질러 완전범죄에 성공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끔찍한 장면이 시시때때로 엄습한다면 임종 순간 마지막 마음을 지배할지 모른다. 그럴 경우 끔찍한 장면에 대한 마음을 조건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면 악처에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임종순간 만큼은 차분히 맞이하라는 것이다.
칭관세음보살명자(稱觀世音菩薩名者)
그런데 삽비경 인연담을 보면 배가 폭풍으로 침몰위기에 처하자 선원들은 각자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을 미친듯이 불렀다고 하였다. 신의 이름을 부르면 자신의 신이 이를 듣고 구원 해줄 것이라 믿은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칭관세음보살명자(稱觀世音菩薩名者)’도 비슷한 유형이라 보인다.
그래서 관세음보살 보문품 풍난을 보면
假使黑風이 吹其船舫하야
漂墮羅刹鬼國커든其中에
若有乃至一人이라도
稱觀世音菩薩名者면是諸人等이
皆得解脫羅刹之難하리니.
가령 폭풍을 만나 그 배가 표류하다가
나찰 귀신들의 나라에 닿게 되었을지라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은 일컫는 이가 있으면 여러 사람들이
모두 나찰 귀신들의 재난을 벗어나게 되나니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이름은 ‘관세음보살의 이름은 일컫는 이’가 ‘칭관세음보살명자(稱觀世音菩薩名者)’이다. 稱(칭)은 ‘일컫다, 부르다’의 뜻인데 문구로 보아 ‘소리내어 부른다’의 뜻이 강하다. 이 문구를 보면 삽비경 인연담에서 빅쿠 보디가 각주한 ‘praying frantically to their gods’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자신의 신들에게 미친듯이 기도하면서”라는 뜻이다.
법화경에서는 ‘칭관세음보살명(稱觀世音菩薩名)’하였을 때 나찰 귀신들에서 벗아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삽비경 인연담에 따르면 선원들은 삼귀의와 오계수지로 불자가 된 후 조용히 최후를 맞이 하였다. 이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미친듯이 외치는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이렇게 불자가 되어 조용히 죽음을 맞은 공덕으로 선원들은 모두 천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바로 이런 점이 관세음보살보문품과 또 다른 점이다.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망망대해에서 폭풍우를 만나 배가 뒤집혔다면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일 것이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을 칭명하여 그 관음염피력으로 모두 구제 되었다는 것은 마치 유일신교를 연상케 하는 ‘타력의 정수’를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러나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삼귀의와 오계를 수지하여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여 천상에 태어났다면 이는 자력에 가깝다. 자신이 지은 공덕으로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같은 풍난에 대한 이야기라도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극과 극을 보여 준다.
201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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