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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쾌락 뒤에 긴 고통이, 더러움으로 가득한 아홉가지 문(門)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2. 6. 19:30

 

짧은 쾌락 뒤에 긴 고통이, 더러움으로 가득한 아홉가지 문()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나는 왜 여기에 있게 되었을까?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이런 의문에 대하여 선불교에서는 나를 찾는 수행을 하라고 한다. 그래서 참나를 찾자고 한다. 나를 찾는 수행방법은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을 들 수 있다. 현재 조계종 종정스님인 진제선사가 늘 말하는 화두이다.

 

부모미생전본래면목의 뜻은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인고?”가 된다. 이는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여 이론적으로 교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따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만일 누군가 무엇이 마음입니까?”라고 물으면 선사들은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식으로 말할 것이다. 마치 동문서답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이는 개념화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역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기 않기 때문에 부모에 부모는 누구일까 라고 사유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어떻게 여기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일까? 부모에 부모는 누구일까? 이렇게 무한소급하여 올라 가다 보면 결국 ‘존재론’으로 귀결된다. 존재의 근원이 있어서 이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속에서 태어나 이 세상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를 찾는 수행은 보이지 않는다. 나를 찾아서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식으로 무한소급하다 보면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 대신 어떻게 여기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생각한다. 바로 그런 가르침에 대한 게송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짜뚜짝까경(S1.29)이 그것이다.

 

 

Catucakkasutta

 

Sāvatthiya-

 

(Devatā:)

Catucakka navadvāra puṇṇa lobhena sayuta,
Pa
kajāta mahāvīra katha yātrā bhavissati.

 

(Bhagavā:)

Chetvā naddhi varattañca icchālobhañca pāpaka,
Sam
ūla taha abbuyha eva yātrā bhavissatī'ti.

 

 

[천신]

“네 개의 바퀴와 아홉 개의 문을 가져

탐욕으로 채워졌고 꽁꽁 묶여 있으며

진흙에서 생겨나왔습니다, 대웅이시여.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나이까?”

 

[세존]

“채찍과 가죽 끈을 자르고

소망과 탐욕을 끊어 버리며

갈애를 뿌리째 뽑아버리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노라.”

 

(네 바퀴 경, 상윳따니까야 S1.29, 각묵스님역)

 

 

[하늘사람]

“네 개의 수레바퀴와 아홉 문이 엮이고

탐욕으로 채워진 진흙에서 태어났네.

위대한 영웅이여.

어떻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세존]

“밧줄과 가죽끈을 자르고

사악한 욕망과 탐욕을 부수고

갈애를 뿌리뽑으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으리.”

 

(네 수레바퀴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9, 전재성님역)

 

 

 "Having four wheels and nine doors,

Filled up and bound with greed,

Born from a bog, 0 great hero!

How does one escape from it?"

 

"Having cut the thong and the strap,

Having cut off evil desire and greed,

Having drawn out craving with its root:

Thus one escapes from it."56

 

(Four Wheels,CDB  S1.29, Bhikkhu Bodhi)

 

 

게송을 보면 어떻게 하면 존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이다. 이는 선불교에서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라 하여 나를 찾는 수행을 하는 것과 다르다. 존재의 근원을 탐구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선불교식의 ‘나를 찾는 수행’과 초기불교식의 ‘나로부터 벗어나는 수행’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네 개의 바퀴와 아홉 개의 문

 

데와따(하늘사람)는 부처님에게 질문한다. 먼저 네 개의 바퀴와 아홉 개의 문에 대하여 언급한다. 마치 수수께끼 놀이하는 것 같은 말이다. 이에 대한 해답을 알려면 각주를 보아야 한다. 먼저 빅쿠 보디의 영문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Spk: The four wheels are the four modes of deportment (walking, standing, sitting, lying down). The nine doors are the nine "wound openings" (eyes, ears, nostrils, mouth, genitals, anus). It is filled up with impure body parts (head-hairs, etc.), and bound with greed, i.e., with craving.

 

 (각주, 빅쿠 보디,  CDB 55번 각주 362p)

 

 

이 각주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주석: 네 개의 바퀴들은 네 가지 형태(걷는 것, 서 있는 것, 앉아 있는 것, 누워 있는 것)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아홉 가지의 문들은 아홉 가지의 고통열림(눈2, 귀2, 코,2 입1, 성기1, 항문1)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신체의 일부분으로서 청정하지 못한 것으로 가득채워져 있다. 그리고 갈망에 따른 탐욕 등의 범주안에 있다.

 

 (빅쿠 보디의 55번 각주 번역)

 

 

똑 같은 게송에 대한 각묵스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네 개의 바퀴(catu-cakka)’란 네 가지 자세(catu-iriyapatha, 걷고 서고 앉고 눕는 것 = 행ㆍ주ㆍ좌ㆍ와)를 말한다. ‘아홉 개의 문(nava-dvara)’은 눈, , , , 항문, 성기를 뜻한다.(SA.i.53)

“’진흙에서 생겨나온 것(panka-jata)’이란 이 몸은 어머니의 자궁(matukucchi)이라 불리는 더러운 진흙탕에서 생겼기 때문이고, 머리털 등의 더러운 진흙탕이 생겨나기 때문이다.(SAT.i.86)

 

(각주, 각묵스님)

 

 

전재성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Catucakka navadvāra… sayuta : Srp.I.53에 따르면, 네 수레바퀴(Catucakka)는 곧 인간의 네 가지 행동양식(威儀路 : iriyapatha), 즉 행주좌와(---)를 의미한다. 그리고 아홉 문(navadvara)은 사람의 몸에 난 입, 콧구멍 등 아홉가지 구멍을 의미한다.

 

(각주, 전재성님)

 

 

각주를 보면 수수께끼 같은 말에 대한 정답이 나온다. 네 개의 바퀴들은 행주좌와를 말하는 것이고, 아홉 가지 문들은 눈, , 코 등 신체에서 구멍이 있는 부위를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뭇삶들의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라는 유행가 가사가 있듯이 사람들은 앉으나 서나 걸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늘 생각하는 것은 신체에 있는 아홉 가지 구멍에 대하여 만족시키는 것이다.

 

사람의 몸에는 아홉 가지 구멍이 있다. 이에 대하여 빅쿠 보디는 the nine wound openings’라 하였다. 이는 고통의 문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eyes, ears, nostrils, mouth, genitals, anus’이라 하였다. 이를 번역하면 2, 2, ,2 1, 성기1, 항문1’이 된다. 빅쿠 보디는 이 아홉가지 문에 대하여 왜 고통의 문이라 하였을까?

 

왜 축축하고 습하다고 하였을까?

 

데와따의 이어지는 게송에서 “탐욕으로 채워진 진흙에서 태어났네”라고 읊었다. 아홉 가지 문에 집착하는 것이 탐욕에 따른 것으로서 진흙에서 태어 났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아홉가지 구멍에서 벗어 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묻는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How does one escape from it?: How can there be emergence from such a body? How can there be freedom, release, a transcendence of it? Spk-pt adds: It is born from a bog (pankajata) because it is produced in the foul bog of the mother's womb. The Pali expression could also have been rendered, "It is a bog," but I follow Spk-pt. This stark perspective on the body is elaborated at Sn I, 11, pp. 34-35.

 

(각주, 빅쿠 보디,  CDB 55번 각주 362p)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어떻게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그와 같은 신체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에서 초월하여 대자유, 해탈을 얻을 수 있을까? 주석 (Spk-pt)에서는 ‘이것은 어머니의 축축한 자궁에서 발생되었기 때문에 습한 것에서 생겨난 것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빠알리로는 “이것이 습지이다”라고 표현된다. 그러나 나는 주석(Spk-pt)를 따른다.  몸에 대한 완전한 견해는 Sn I, 11, pp. 34-35에서 상세히 설명 되어 있다.

 

(빅쿠 보디 각주 번역)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진흙에서 생겨나온 것(panka-jata)’이란 이 몸은 어머니의 자궁(matukucchi)이라 불리는 더러운 진흙탕에서 생겼기 때문이고, 머리털 등의 더러운 진흙탕이 생겨나기 때문이다.(SAT.i.86)

 

(각주, 각묵스님)

 

 

빅쿠 보디의 각주에 따르면 진흙탕에서 생겨난 것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자궁이라 한다. 그것도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자궁이다. 이는 주석에 근거한 설명이다.

 

모태에 태어날 때

 

주석서에 설명된 자궁개념은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자궁개념과 다르다. 현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어머니의 자궁에 대하여 안온한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석서에 따르면 물기가 있고 차갑고 축축하고 더러운 개념이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임신하였을 때 태아가 머무는 자궁에 대한 설명에서도 나타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37.

여기서 입태에 기인한 것 등으로 분류되는 괴로움은 다음과 같다. 이 중생이 모태에 태어날 때 청련, 홍련, 백련 등의 안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위장의 아래와 소장의 위인 위장막과 척추 중간의 아주 좁고 어둡고 갖가지 몸의 냄새가 퍼져있고 심한 악취가 통풍구로 순환하며 극도로 혐오스런 자궁에서 마치 썩은 생선과 썩은 죽과 오물구덩이 속의 벌레처럼 태어난다. 그곳에 태어나서 그는 열 달 동안 자궁에서 생긴 열로 자루에 넣어서 구워진 과자처럼 구어지고 경단처럼 쪄져서 구부리거나 펴는 것도 없이 극심한 괴로움을 겪는다. 이것은 입태에 기인한 괴로움이다.

 

38.

어머니가 갑자기 비틀거리거나 가거나 앉거나 일어서거나 돌 때 마치 술 취한 자의 손에 잡힌 새끼 염소처럼, 뱀 장수의 손아귀에 든 새끼 뱀처럼, 위로 끌리고 아래로 끌리며 위로 흔들리고 아래로 흔들리는 등의 습격으로 극심한 괴로움을 겪는다. 어머니가 찬물을 마실 때 마치 차디찬 지옥에 떨어지는 것 같고, 뜨거운 죽과 밥을 삼킬 때 마치 숯불의 비가 쏟아지는 것 같고, 짜거나 신 것을 삼킬 때 마치 숯불의 비가 쏟아지는 것 같고, 짜거나 신 것을 삼킬 때는 마치 도끼로 몸을 찍고 소금물을 붓는 등의 고문을 겪는 것 같이 극심한 괴로움을 겪는다. 이것은 임신에 기인한 괴로움이다.

 

(청정도론, 제 16장 기능과 진리 37-38절, 대림스님역)

 

 

 

 

womb

 

 

청정도론에 따르면 태아가 자궁속에서 겪는 고통이 상세하게 묘사 되어 있다.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이 중생이 모태에 태어날 때 청련, 홍련, 백련 등의 안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라 하였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태어나는 것은 고통이다. 입태 하는 순간부터 괴로움이 시작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어머니의 자궁에 대하여 진흙탕속과 같다고 하였다. 그런 진흙탕 속에서 눈, , 코 등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아홉 가지 구멍은 깨끗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홉가지 구멍을 통하여 들어 오고 나가기 때문에 항상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홉 가지 문에 대하여 집착한다. 그래서 입으로는 먹을 것을 찾고, 코로는 냄새를 맡고, 입으로는 먹고, 항문과 성기로는 배설한다. 이렇게 목구멍을 넘어 간 것은 마침내 똥이 되어 항문으로 나오고 오줌이 되어 나온다. 배설된 것을 보면 모두 더러운 것들이다. 이렇게 먹고 마시고 배설함에 따라 존재가 윤회하는데 아홉 가지 문은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통로인 셈이다.  

 

마하비라와 대웅전

 

게송에서 데와따는 부처님에게 위대한 영웅이여. 어떻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여기서 위대한 영웅에 대한 빠알리어가 마하비라(mahāvīra)’이다. 이를 각묵스님은 대웅이라 하였고, 빅쿠보디는 ‘great hero’라 하였다.

 

 

마하비라는 mahā와 vīra의 합성어이다. Vīra는 ‘[adj.] brave; heroic. (m.) a hero, 英雄, 雄者, 勇者의 뜻이다. 그래서 마하비라는 대영웅이라는 뜻이 된다. 게송에서는 부처님에 대하여 대영웅이라 하였다.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vīra is often an Ep. of the Buddha’라고 되어 있어서 부처님을 부르는 또 하나의 명칭임을 알 수 있다.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의 제자나 재가신도들이 마하비라(mahāvīra)’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데와따(하늘사람)나 범천(하느님)은 부처님에 대하여 마하비라 또는 비라라고 부른다. 이는 청원경에서 사함빠띠의 게송으로 알 수 있다.

 

 

Uṭṭhehi vīra vijitasagāma

satthavāha anaa vicara loke,
Desassu bhagav
ā dhamma

aññātāro bhavissantīti.

 

일어서소서. 영웅이여,

전쟁의 승리자여, 세상을 거니소서.

캐러밴의 지도자여, 허물없는 님이여,

알아듣는 자가 반드시 있으리니,

세존께서는 가르침을 설하여 주소서.

 

(Brahmāyācanasutta-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6:1, 전재성님역)

 

 

게송을 보면 ‘Uṭṭhehi vīra’가 있는데 이를 “일어서소서. 영웅이여”라 하였다. 사함빠띠가 부처님에 대하여 vīra(영웅)로 칭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부처님을 모셔 놓은 법당을 대웅전 (大雄殿) 또는 대웅보전 (大雄寶殿) 이라 한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명칭을 사용하였을까?

 

위키백과에 대웅전이라는 명칭에 대한 설명이 있다. “ '대웅'이라는 명칭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위대한 영웅이라고 지칭한 데서 비롯되었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대웅전이라는 명칭이 법화경에서 유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초기경전에서는 제자들이나 신도들이 대웅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을 지칭하는 열 가지 명칭, 즉 여래 십호 중의 하나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명칭이 세존이다. 그럼에도 자이나교 등 외도들이나 사용하는 마하비라라는 명칭을 대웅이라 하여 사용한다면 이는 부처님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대웅전 명칭은 바뀌어야 한다.

 

두 번째 게송 각주를 보면

 

두 번째 게송은 데와따의 물음에 대한 부처님의 답송이다.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는 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In pada a (= Dhp 398a), Eel naddhi should be amended to naddhim. Spk explains that in the Dhp verse varatta is craving (tanha), but as craving is mentioned separately in our verse, varatta is glossed differently here.

 

Spk: The thong (naddhi) is hostility (upanaha), i.e., strong anger; the strap (varatta) is the remaining defilements. Desire and greed refer to the same mental state spoken of in two senses: desire (iccha) is the preliminary weak stage, or the desire for what has not been obtained; greed (lobha) is the subsequent strong stage, or the holding to an acquired object. Craving with its root: with its root of ignorance.

 

(각주, 빅쿠 보디,  CDB 56번 각주 362p)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c구절에서(= 법구경 398a), Ee1의 nadhi은 naddhi으로 수정 되어야 한다. 주석에 따르면 법구경(Dhp) 게송에서 varatta는 갈망(tanha)를 의미한다고 설명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게송에서의 갈망은 별도로 언급되어 있다. 여기에서 Varatta는 윤문 되어 있다.

 

주석: 가죽끈(naddhi)은 강한 적개심(upanaha), 즉 강한 분노이다. 혁대(varatta)는 남아 있는 오염원들이다. 욕망과 탐욕은 두 개의 문장에서 언급된 것과 똑 같은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욕망은 최초의 발생하는 약한 정신적 상태 또는 아직 얻어지지 못한 바램이다. 탐욕(lobha)은 뒤이어 일어나는 강한 정신적 상태 또는 대상을 얻기 위하여 붙잡는 것을 말한다. 갈망은 이것들의 뿌리이다. 이것들은 무지에 기반한다.

 

(빅쿠 보디 56번 각주 번역)

 

 

각묵스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채찍(naddhi)’이란 증오(upanaha)이니 처음에는 분노(kodha)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증오가 된다. 이처럼 강한 분노(halava-kodha)를 뜻한다. ‘가죽 끈(varatta)’이란 “채찍과 가죽 끈과 밧줄을 차례대로 자르고”(Dhp.57; Snn,120)라는 게송에서 갈애(tanha)를 뜻한다. 밧줄(sandana)은 견해를 말한다. 그러나 본 게송에서는 나머지 오염원(kilesa)들을 가죽 끈이라고 알아야 한다.

 

‘소망과 탐욕(iccha lobha)’에서 소망은 처음에 생긴 힘이 약한 것(dubbala)이고 나중에 전개되는 강한 것(balava)이 탐욕이다. 혹은 얻지 못한 것을 원하는 것(aladdha-patthana)이 소망이고 얻은 대상(patiladdhavatthu)을 [움켜 쥐는 것이] 탐욕이다.‘갈애를 뿌리째(samulam tanham)’라고 한 것은 무명을 뿌리로 하는(avijja-mula) 갈애를 뜻한다. ‘뽑아 버린다(abbuyha)’는 것은 아라한 도(agga-magga)로써 뽑아버리는 것을 말한다.”(SA.i.53)

 

(각주, 각묵스님)

 

 

전재성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addhi varatta ca: Srp.I.53에 따르면, 밧줄은 과거의 분노나 미래의 원한을, 가죽끈은 남아 있는 번뇌를 뜻한다.

 

**icchālobhañca : Srp.I.53에 따르면, 욕망과 탐욕은 동일한 정신적 상태이지만, 욕망은 얻지 못한 것을 원하는 전단계의 약한 상태이고, 탐욕은 얻은 것에 대하여 강하게 원하는 상태이다.

 

(각주, 전재성님)

 

 

세 개의 각주를 보면 욕망과 탐욕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그말이  그말인 것 처럼 보이지만 풀이 해 놓은 것을 보면 차이가 난다.

 

욕망과 탐욕은 어떻게 다른가

 

그래서 욕망과 탐욕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전재성님

각묵스님

빅쿠 보디

  

icchā

욕망

소망

desire

얻지 못한 것을 원하는 전단계의 약한 상태

lobha

탐욕

탐욕

greed

얻은 것에 대하여 강하게 원하는 상태

 

 

잇차(욕망) 와 로바(탐욕)에 대한 것을 보면, 잇차가 약한 욕망이고 로바가 강한 욕망임을 알 수 있다. 강약에 따라 용어를 달리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게송에서는 naddhivaratta에 대하여 욕망과 탐욕으로 비유 하였다. 그런데 이에 대한 번역이 번역자 마다 다르다.

 

Naddhi, 밧줄인가 째찍인가

 

naddhi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밧줄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째찍이라 하였고, 빅쿠 보디는 ‘thong’ 이라 하였다. varatta에 대하여 전재성님과 각묵스님은 가죽끈이라 하였고, 빅쿠 보디는 ‘strap’ 이라 하였다. 문제는 naddhi에 대한 것이다. 전재성님의 밧줄과 각묵스님의 째찍은 너무나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naddhi에 대하여 빠알리어 사전을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f.] a thong(가죽끈). 로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유사한 단어인 naddha結縛, 繫結의 뜻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존재를 단단히 묶어 두는 것을 말한다. 각주에서는addhi에 대하여 과거의 분노나 미래의 원한을을 뜻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미 지나간 버린 과거를 후회 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사는 것이 뭇삶들이기 때문에 이를 결박으로 본 것이다.그래서 단단히 옭아 매는 가죽끈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째찍이라 하였다. 째찍이라면  가축을 때려서 모는데 쓰는 물건이라는 뜻인데 결박의 의미와는 아주 다르다.

 

참고경을 찾아 보았으나

 

게송에서는 naddhi와 함께 varatta가 쓰였다. 이 varatta에 대한 각주를 보면 ‘남아 있는 번뇌’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빅쿠 보디는 법구경의 예를 들었다. 법구경 게송에서 varatta가 있는데 이것이 갈망(tanha)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각묵스님은 ‘Dhp.57; Snn,120’이라 하였다. 법구경 57번 게송과 숫따니빠따 120번 게송이라는 뜻이다. 법구경 57번 을 찾아 보았다. 그러나 varatta에 대한 문구를 발견할 수 없다. 또한 내용도 다르다. 아마 오타로 본다. 이번에는 숫따니빠따 120번 게송(stn120)을 찾아 보았다. 역시 전혀 다른 내용이다.

 

부처님은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이는 게송에서 icchā(욕망),lobha(탐욕), taha(갈애)로 표현 되었다. 가장 약한 욕망 (icchā) 과 강한 탐욕(lobha), 그리고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나는 갈애(taha)가 윤회의 동력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욕망과 탐욕은 끊어 버려야 하고, 갈애는 뿌리 뽑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갈애가 존재로 하여금 윤회하게 하는 원인임을 알 수 있다.

 

짧은 쾌락 뒤에 긴 고통이

 

욕망, 탐욕, 갈애는 다름 아닌 아홉 가지 문과 관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홉가지 문에서 나오는 것은 공통적으로 모두 축축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빅쿠 보디는 주석서를 인용하여 이것은 어머니의 축축한 자궁에서 발생되었기 때문에 습한 것에서 생겨난 것이다.”라 하였다.

 

습하고 축축한 것은 기본적으로 더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눈, , 코 등 아홉 가지 구멍()에 엮여 있다. 그래서 그래서 앉으나 서나 구멍생각만 하고 구멍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먹고 마시고 배설한다. 하지만 그런 행복도 오래 가지 않는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목구멍을 넘어 가는 순간 똥으로 변하는 과정만 남아 있고, 아무리 고급양주라도 목구멍을 넘어 가는 순간 오줌으로 변하여 배출 될 뿐이다. ‘행복은 짧고 삶은 길다는 말이 있듯이 아홉 가지 구멍에 엮여 있는 뭇삶들은 짧은 쾌락 뒤에  긴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하늘사람]

“네 개의 수레바퀴와 아홉 문이 엮이고

탐욕으로 채워진 진흙에서 태어났네.

위대한 영웅이여.

어떻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세존]

“밧줄과 가죽끈을 자르고

사악한 욕망과 탐욕을 부수고

갈애를 뿌리뽑으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으리.” (S1.29)

 

 

 

2013-12-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