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입은 것이 보기 좋아서, 모두 출가해 버리면
탐진치에 절어 사는 뭇삶이지만
빠알리니까야는 출가자들을 위한 경전일까? ‘빅카웨(비구들이여)’로 시작 되는 경이라 해서 출가자들만의 경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부처님이 출가자 위주로 가르침을 펼치셨기 때문에 출가자를 위한 경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전체니까야에서 재가에 대한 것은 적고 출가에 대한 것은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재가자가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안되는 것일까? 보더라도 앙굿따라니까에 실려 있는 재가자에 대한 것만 보아야 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출세간’의 가르침이다. 사성제가 그렇고 팔정도가 그렇다. 그래서 부처님은 전도선언에서 세상의 흐름과 거꾸로 가는 가르침을 펼친다고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역류도’이다. 세상의 흐름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기반한 오욕락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반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탐진치를 소멸하여 오욕락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출세간의 가르침이 단지 출가자들의 것이라 하여 재가자가 따를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굳이 재가자 빠알리니까야를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동방의 성서’라 불리우는 법구경도, 가장 고층경전이라 일컬어지는 숫따니빠따도 재가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재가의 삶에서 종종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를 접하면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가르침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비록 탐진치에 절어 사는 뭇삶이지만 마음 만은 늘 이상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가자에 대한 게송
전세계 불자들이 가장 많이 애송하는 법구경과 숫따니빠따는 사실상 출가자를 위한 것이다. 사부니까야에 실려 있는 핵심 가르침에 대하여 게송으로 표현 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상윳따니까야 1권에는 주로 짤막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교훈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 못지 않은 감동을 준다. 그래서일까 남방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는 상윳따니까야 1권에 실려 있는 게송이 매우 인기가 높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에 소개 되는 게송은 전형적인 출가자에 대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Mahaddhanasuttaṃ
28. Sāvatthiyaṃ-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ntaṃ gāthāya ajjhabhāsi:
Mahaddhanā mahābhogā raṭṭhavanto'pi khattiyā,
Aññamaññābhigijjhanti kāmesu analaṅkatā
Tesu ussukkajātesu2 bhavasotānusārisu,
Kedha3 taṇhaṃ pajahiṃsu ke lokasmiṃ anussukāti
(Bhagavā:)
Hitvā agāraṃ pabbajitā4 hitvā puttaṃ pasuṃ piyaṃ
Hitvā rāgañca dosañca avijjañca virājiya
Khīṇāsavā arahanto te lokasmiṃ anussukā'ti.
[천신]
“큰 재산 가졌고 큰 재물 가졌으며
왕국 가진 끄샤뜨리야들 조차도
서로가 서로의 [재화를] 탐하나니
감각적 욕망에 물릴 줄을 모릅니다.
존재의 흐름 속에 휩쓸려 가는
게걸스런 이런 자 가운데에서
누가 있어 욕탐을 버렸습니까?
게걸스럽지 않은 자 누구입니까”
[세존]
“집과 함께 사랑스런 아들도 버리고
가축도 버린 뒤에 집 없이 출가하여
탐욕ㆍ성냄 버리고 무명까지 빛이 바랜
번뇌 다한 아라한들 여기에 있으니
그들이 세상에서 게걸스럽지 않도다.”
(큰 재산 경, 상윳따니까야 S1.28, 각묵스님역)
[하늘사람]
“큰 부자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는 왕족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만족하지 못해
서로가 서로를 탐하네.
존재의 흐름을 따라 흐르는
모든 욕심을 부리는 존재들 가운데
누가 세상에 욕심을 버리지 않고
탐욕과 갈애를 버릴까?”
[세존]
“집을 떠나 출가하여
자식과 가축, 사랑스런 것을 버리고
탐욕과 성냄을 버리고
또한 어리석음을 떠나서,
모든 번뇌를 버린 거룩한 님들이
세상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자라네.”
(큰 부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8, 전재성님역)
“Those of great wealth and property,
Even khattiyas who rule the country,
Look at each other with greedy eyes,
Insatiable in sensual pleasures.
Among these who have become so avid,
Flowing along in the stream of existence,
Who here have abandoned craving?
Who in the world are no longer avid?”
“Having left their homes and gone forth,
Having left their dear sons and cattle,
Having left behind lust and hatred,
Having expunged ignorance-
The arahants with taints destroyed
Are those in the world no longer avid.”
(Those of Great Wealth, CDB, S1.28, Bhikkhu Bodhi)
게송을 보면 가족을 버리고 출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게송에서는 “자식과 가축, 사랑스런 것을 버리고 (hitvā puttaṃ pasuṃ piyaṃ)”라고 되어 있다. 이 대목에 대하여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처자식을 버리고 출가하는 것이 오로지 개인적인 이익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소승’이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모두 출가해 버리면
초기경전을 보면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여 아라한이 되는 장면이 많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아라한이 되어 윤회의 사슬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비판론자들은 중생에 대한 자비가 없다고 한다. 오로지 개인의 해탈과 열반만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후에 대승운동이 일어났다는 빌미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더구나 있는 처와 자식, 그리고 모든 재산을 버리고 자신의 해탈과 열반을 위하여 떠난다고 하였을 때 좋게 볼리가 없을 것이다.
재가자이면서 초기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해탈과 열반을 이야기 하면 “처자식을 내버려 두고 떠나라는 말이냐?”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초기불교 경전을 읽고서 처자식을 내버려 두고 떠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하늘사람이 “누가 세상에 욕심을 버리지 않고 탐욕과 갈애를 버릴까?”라고 말한 것이다. 바로 욕심이 문제인 것이다. 욕심이 있기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게송을 해석하면 처자식을 버리지 못하는 존재들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소유하려는 욕심을 말한다. 이렇게 욕심을 부리는 자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ussukkajāta라 하였다. 이는 ussukka(zeal) 와 jāta(arisen)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질투가 일어나는’ 뜻이 된다.
이ussukkajāta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게걸스런 자’로 번역하였고, 전재성님은 ‘욕심을 부리는 존재’로 번역하였다. 빅쿠 보디는 ‘avid(몹시 탐내는)’라 하였다. 처자식과 재산을 버리지 못하고 출가 하지 못하는 자들은 몹시 탐욕스런 자들이라는 뜻이다.
처자식과 재산에 애착이 강하면 놓지 못한다. 그래서 출가하라고 해도 못하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안심해도 될 것 같다. 초기불교경전을 읽고서 모두 출가해 버릴 염려는 안해도 된다.
가사입은 것이 보기 좋아서
처자식과 재산을 버리고 출가한 자들은 극소수이다.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처자식과 재산에 대하여 애착이 너무 강하여 아무리 떼어내어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출가하는 경우가 있다. 랏타빨라 경(M82)이 대표적이다.
맛지마니까야 랏타빨라경에 따르면 랏타빨라는 처가 있는 몸이었다. 그것도 여러 명이었다. 더구나 재산까지 많은 장자의 아들이었다. 이렇게 모든 것을 갖추고 남부러울 것 없는 랏타빨라에게 출가해야 겠다는 마음이 일어난 것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나서이다. 다음과 같은 이유가 시발이 되었다.
“세존께서 가르치신 가르침을 알면 알수록, 재가에 살면서 궁극적으로 원만하고 궁극적으로 청정하고 소라껍질처럼 잘 연마된 청정한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 자, 나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것이 어떨까?”
(랏타빨라의 경, 맛지마니까야 M82, 전재성님역)
이것이 랏타빨라가 출가하게 된 동기이다. 청정범행을 닦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보기에 좋았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가사를 입고 출가의 삶을 살고자 꿈을 꾼 것이다. 이런 꿈은 현실이 되어 마침내 랏타빨라는 출가하게 된다. 그러나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친다. 그래서 랏타빨라의 부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하는 아들 랏타빨라야, 너는 우리에게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너는 안락하게 살고 안락하게 성장했다. 너는 어떠한 괴로움도 모른다. 자, 사랑하는 아들 랏타빨라야, 먹고 마시고 놀고 감각적인 쾌락을 향수하고 공덕을 쌓으며 즐겨라. 우리는 네가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네가 죽었다고 해도 우리는 너 없이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물며 살아있는 네가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겠는가?”
(랏타빨라의 경, 맛지마니까야 M82, 전재성님역)
랏타빨라의 부모는 절대 출가를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현생에서는 감각적 쾌락을 마음껏 즐기고 공덕을 쌓아서 죽어서는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랏타빨라는 출가결심을 굽히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서 제가 죽던가 아니면 출가할 것입니다. (M82)”라고 극한 말을 한다.
옛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마침내 랏타빨라의 부모는 출가를 허락한다. 그러나 조건부 출가이다. 랏타빨라 부모가 “얘야, 아들 랏타빨라에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의 출가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러나 출가한 뒤에 부모를 방문해야 한다.’라고 전해다오. (M82)” 라고 친구를 통하여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랏타빨라의 부모는 왜 조건부출가를 허용하였을까? 그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출가생활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마음이 변할 수도 있다고 여겼을 수 있다. 이는 경에서 랏타빨라가 집을 방문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왜 조건부출가를 허용하였을까?
랏타빨라가 출가한 후에 자신의 집을 방문하였다. 부모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방문하던 날 랏타빨라의 부모는 랏타빨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옛처들에게 옷을 치장하여 입히고 맞을 준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랏타빨라가 도착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하는 랏타빨라야, 이것이 너의 어머니의 재산이다. 달리 말하면 나의 재산이고 할아버지의 재산이다. 자, 사랑하는 아들 랏타빨라야, 재산을 향유하고 또한 공덕을 쌓을 수 있다. 자, 사랑하는 아들 랏타빨라야, 공부를 버리고 환속하여 재산을 향유하고 또한 공덕을 쌓아라.”
(랏타빨라의 경, 맛지마니까야 M82, 전재성님역)
이렇게 랏타빨라의 부모는 옛처들을 대기 시키고 재산을 주면서 환속을 요구하였다. 조건부 출가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모든 감각적 욕망을 포기하고 탁발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아들에게 감각적 쾌락으로 환속을 유도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옛처들은 랏타빨라의 두 발을 잡고서 “서방님이여, 얼마나 아름다운 하늘여인들이 있어서 그녀들을 위해 청정한 삶을 영위합니까?”라고 말하면서 환속할 것을 요청하였다.
번뇌다한 아라한에게
하지만 전처들의 노력은 모두 허사가 되었다. 왜냐하면 랏타빨라가 집을 방문하기 이전에 이미 ‘아라한’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에게 있어서 옛처들이 매달려도 소용없는 일이다. 랏타빨라는 울며 매달리는 전처들을 멀리 하면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보라, 찬란한 형상을,
그것은 상처의 더미가 쌓인 것
질병이 많고 욕망의 대상으로
견고하게 지속하지 못하네.
보라, 치장된 몸을,
그것은 뼈와 가죽으로 덮여 있을 뿐
보석과 귀고리,
옷에 묶여 아름답네.
두 발은 헤나 염료로 장식하고
얼굴에는 분을 바르고
어리석은 자를 기만하여도
피안을 구하는 자를 속이지 못하네.
머리는 여덟 쪽으로 따고
눈에는 연고를 발랐네,
어리석은 자를 기만하여도
피안을 구하는 자를 속이지 못하네.
새롭게 장식한 연고단지처럼
더러운 몸을 아름답게 꾸몄다.
어리석은 자를 기만하여도
피안을 구하는 자를 속이지 못하네.
사슴사냥꾼이 그물을 쳐놓았지만
사슴은 그물에 걸려들지 않네.
사슴사냥꾼이 울게 내버려두고
사슴은 먹이를 먹고 간다네.
(랏타빨라의 경, 맛지마니까야 M82, 전재성님역)
재가자도 가르침을 실천하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갔다고 하여 가정생활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아나함이 되어 탐욕이 완전히 뿌리 뽑히기 전까지는 가정생활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보면 재가의 청신사나 청신녀가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간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나함이 되면 더 이상 가정생활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재산을 부인에게 넘겨 주고 심지어 부인에게 “좋은 배우자 만나서 시집가라”는 말까지 해 준다. 하물며 모든 번뇌가 소멸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재가의 삶으로 돌아 올리 만무하다. 그래서 랏타빨라는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전처들에게 이와 같은 게송을 읊은 것이다.
비구 보디의 주해를 참고하라고?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게송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해 놓았다.
(첫번째 게송)
Ee2는 본 게송 앞에 {70}을 새로 첨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북부 태국에서 발견된 두 개의 Lanna 필사본에만 나타나고 있을 뿐 다른 어떤 『상윳따 니까야』 필사본에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본 경의 문맥과도 어울리지 않으며 더군다나 주석서도 복주서도 아무 언급이
없다. 보디 스님 361쪽 53번 주해를 참조할 것.
(두번째 게송)
‘게걸스런 자’는 ussukka-jata를 옮긴 것이다. ussuka는 여기서처럼 부정적인 의미로도 나타나고 본서 제4권 「이시닷따 경」1(S41:2) §12에서처럼 ‘성심을 다해(ussukkam)’라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인다.본 게송에 대한 여러 가지 판본 고찰은 보디 스님 361쪽 53번 주해를 참조할 것.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빅쿠 보디의 각주를 참고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보디 스님 361쪽 53번 주해를 참조할 것’ 과 ‘보디 스님 361쪽 53번 주해를 참조할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각주에서 공개적으로 빅쿠 보디의 CDB를 참조하라고 한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할까?
초불연 번역서에서 빅쿠 보디의 책을 참조하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첫번째로 지적해야 할 사항은 번역의 주체성문제이다. 빠알리니까야를 직역하였다면 굳이 다른 번역서를 참고 하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주석서를 인용하여 각주를 달았을 때 번역자가 판단할 임에도 다른 번역서를 참조하라는 것은 스스로 번역의 주체자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두번째로 지적해야 할 사항은 빅쿠보디의 번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번역자가 각주에서 비구 보디의 몇 번 각주를 참고할 것이라고 다소 명령조로 언급하였을 때 독자들은 영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빠알리니까야 번역서 가격이 만만치 않아 구입하는 것도 여러 번 망설이다 큰 마음 먹고 구입하였는데 또 다시 빅쿠 보디의 CDB를 구입하여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빅쿠 보디의 영역본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구입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대뜸 ‘보디 스님 361쪽 53번 주해를 참조할 것’라는 문구를 접하였을 때 참으로 난감하기만 하다.
지금은 인터넷시대이다. 검색을 통하여 빅쿠 보디의 영역 사이트(CDB, S1.28)를 발견하였다. 책 두권을 스캔하여 PDF로 올려 놓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스크랩할 때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빠알리어를 표기하기 위한 특수문자가 그렇다. 그럴경우 일일이 잡아 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인터넷에서 빅쿠 보디의 영역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판단의 영역을 넓혀 준다. 각 번역서를 비교함으로서 부처님의 원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빅쿠 보디의 각주 53번과 54번을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53번 각주
Ee2 precedes this verse with another (v. 70) found only in two Lanna rnss from northern Thailand. As that verse is not included in any other edition or known ms of SN, and hardly relates to the subject matter of the dialogue
between the Buddha and the devatk it clearly does not belong here; thus I have not translated it.
My decision is further supported by the absence of any gloss on the verse
in Spk and Spk-p!, which indicates it was not found in the texts available to the commentators. At Ee2, p. xvii, the editor argues that this verse must be "restored" to provide a question put by the deity, but he assumes that the sutta originally read the first word of v. 72d as te which was then changed to ko or ke by the textual tradition in order to supply a question. But since ke as a question makes perfectly good sense, both syntactically and semantically, there is no reason to suppose the original reading was te and thus no need to interpolate a new verse to supply the question.
54번 각주
Spk: "Among those who have become so avid (ussukkajātesu): Among those who are engaged in various tasks, avid to produce unarisen forms, etc., and to enjoy those that have arisen." In pada c of the second verse I read Kedha taṇhaṃ with Be and Se, as against gedhataṇhaṃ ("greed and craving") in Eel & 2, and kodhatanham ("anger and craving") in SS. In pads d, Ee2 reads te lokasmiṃ as against ke lokasmiṃ in the other eds.
Ussuka (Skt utsuka) means anxiously desirous, zealous, or busily engaged in some pursuit. The corresponding noun is ussukka, which is sometimes found where the adjective would have been more appropriate.
Ussuka is used in both a laudatory and reprobative sense. At 41:3 (IV 288,12 = 291,4, 302,7), it occurs in the commendatory sense, which I render "zealous." See too MN I 324,27 and Vin I 49,19-50,8. The negative sense-of being greedy, ambitious, or "avid" (my preferred rendering)-is found here and at Dhp 199.
The expression appossukka, lit. "having little zeal," is used to describe one who refrains from busy activity. In SN we find this expression-which I generally render, loosely, "(living)-at easeu-at 9:10 (I 202,22), 21:4 (I1 277,12), 35240 (IV 178,1, here "keeping still"), and 51:10 (V 262,ls). The abstract noun appossukkatd, at 6:1 (I 137,1, 6), characterizes the Buddha's original inclination, just after his enlightenment, towards a life of quietude rather than towards the "busy work" of preaching the Dhamma. See too below n. 366 and n. 551.
(각주, CDB, S1.28, Bhikkhu Bodhi)
문단은 편의상 나눈 것이다. 빅쿠 보디는 자신이 번역한 게송에 사용되는 용어 ‘avid(몹시 탐내는)’를 사용하였다. 이는 빠알리어 ussuka 에 대한 번역어이다. 그런데 법구경 199번 게송에도 ussuka가 들어간다고 하였다.
열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199번 게송은 어떤 내용일까?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Susukhaṃ vata jīvāma 수수깡 와따 지와마
ussukesu anussukā 우쑤께수 아누쑤까
ussukesu manussesu 우쑤께수 마누쎄수
viharāma anussukā 위하라마 아누쑤까.
아,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열망하는 자들 속에서 열망을 여의고,
열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열망을 여읜 자로서 지낸다.
(법구경 dhp199,전재성님역)
199번 게송에서 ussuka라는 말이 보인다. 이는 ‘zealous; energetic’의 뜻으로 ‘질투하는, 몹시열망하는’ 뜻이다. 각묵스님은 ‘게걸스런’이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처자식을 거느리고 재산을 가진 세상에 사는 뭇삶들의 특징이 몹시 열망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욕망이 동력으로 작용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열망을 여윈 자들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이 출가자들이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사는 자들이다. 이렇게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살기 때문에 출가자들이 적은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보고서 해탈과 열반에 대하여 말한다고 하여 또는 동경한다고 하여 모두 출가해 버릴 것이라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2013-12-0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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