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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상대방을 깍아 내리려 하는가, 열등감을 바탕으로 한 자만심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26. 10:55

 

왜 상대방을 깍아 내리려 하는가, 열등감을 바탕으로 한 자만심

 

 

 

불자들이 늘 수지 독송하는 금강경에 처음 나오는 말이 있다. ‘여시아문 일시불세존 (如是我聞 一時佛世尊)’으로 시작 되는 문구이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부처님께서는라고 번역된다. 빠알리니까에서도 이와 똑 같은 의미의 문구가 있다.

 

초전법륜경을 예로 들면 가정 첫 구절이 에왕 메 수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Eva me suta, eka samaya bhagavā)’로 시작 된다. 이 것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라고 번역 된다. 그러고 보면 대승경전이나 초기불교 경전이나 도입부는 똑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빠알리니까야가 먼저 전승되었으므로 대승불교가 이를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여시아문(如是我聞)’에왕 메 수땅(Eva me suta)’에 해당되고, 한때를 뜻하는 일시(一時)’에깡 사마양(eka samaya)’, 불세존은 바가와(bhagavā) 해당됨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공통적으로 이와 같이 들었다로 시작되는 아난다의 기억을 사용하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 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자신이 말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친설임을 나타내는 말이 바로 에왕 메 수땅또는 여시아문인 것이다.

 

1. 첫 번째 게송

 

초기경전에서는 거의 대부분 에왕 메 수땅으로 시작된다. 아난다의 기억을 되살려 경전결집 당시 그렇게 합송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에서 는 어떤 의미일까? 초기불교의 교학에 대하여 지식이 있는 불자라면 어떤 의문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설프게 아는 자라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불교는 무아사상을 기반으로 한다는데 유아를 의미하는 나()가 들어간 것에 대하여 시비를 걸지 모른다. 다음과 같은 하늘사람의 게송이 이를 잘 나타내 준다.

 

 

Yo hoti bhikkhu araha katāvī
Kh
īāsavo antimadehadhārī
Aha
vadāmītipi so vadeyya
Mama
vadantītipi so vadeyyāti.

 

 

2. [천신]

번뇌가 다하여서 아라한 되고

마지막 몸을 받아 가진 비구가

나는 말을 한다.거나 그들이 내게 말한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사오리까?118)  {61}

 

(아라한 경, 상윳따니까야 S1.25, 초불연 각묵스님역)

 

 

[하늘사람]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궁극의 몸을 이룬 거룩한 수행승이

나는 말한다.’고 하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고 할 수 있으랴?”

 

(거룩한 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5, 성전협 전재성님역)

 

 

“If a bhikkhu is an arahant,

Consummate, with taints destroyed,

One who bears his final body,

Would he still say, ‘I speak’?

 

(The Arahant, S1.25, CDB, 빅쿠 보디 역)

 

 

 

 

Bo tree

 

 

 

빠알리 원문과 세 가지 번역에 대한 것이다. 먼저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마지막 몸이라 하였고, 전재성님은 궁극의 몸이라 하였다. 빅쿠 보디는 final body’라 하였다.

 

마지막 몸과 궁극의 몸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와 관련된 빠알리어가 Khīāsavo이다. 이는 Khīā+āsava 의 복합어이다. Khīā‘exhausted, destroyed, ()盡的, されたる의 의미이다. Āsava‘that which flows, , 流漏, 煩惱의 뜻이다. Khīāsava‘whose mind is free from mental obsessions, 의 뜻이 된다. 번뇌 다한 자의 뜻이 된다. antimadehadhārī에서 antimadeha最后身의 뜻인데 최후의 몸이 된다. 따라서 번뇌 다한 자의 최후의 몸이 된다. 그래서 빅쿠 보디는 ‘final body’라 하였다. 전재성님의 궁극의 몸 역시 같은 뜻이 된다.

 

고전적 화법 있사오리까?”

 

이렇게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나()가 들어간 말을 하는 것이 과연 맞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Aha vadāmītipi)” 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이 번역에 있어서 각묵스님은 말할 수가 있사오리까?”라 하여 마치 사극의 대사처럼 번역하였다.

 

데와따상윳따에서는 하늘사람과 부처님이 대등한 관계에서 대화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늘사람이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므로 극존칭을 붙이지 않는다. 다만 존중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동등한 입장처럼 보이는 것은 왜 그럴까? 그것은 하늘사람의 역할 때문이다. 하늘사람은 부처님과 대조되는 견해를 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주로 세속적인 것에 대해서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출세간적 답변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마라가 부처님과 반대 되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각하는 방식과는 약간 다르다.

 

게송에서 볼 수 있는 하늘사람은 부처님에게 사극에서처럼 극존칭을 써야할 별다른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이렇게 말할 수가 있사오리까?” 라든가, “속박이라 했으리까?” 등의 고전적인표현이 나온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 엉킴은 잘려 지도다.” 등과 같이 역시 고전적인 표현으로 번역하고 있다. 반면 전재성님의 번역은 시종 일관 대등한 관계이다. 그래서 하늘사람이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고 할 수 있으랴?”고 하면, 부처님은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라는 식으로 답한다. 빅쿠 보디의 영문 번역은 극 존칭 없이 일반적인 대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각주를 찾아 보면

 

이 게송에 대한 각주를 찾아 보았다. 먼저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Spk: This deva, who dwelt in a forest grove, heard the forest bhikkhus using such expressions as "I eat, I sit, my bowl, my robe," etc. Thinking, "I had imagined these bhikkhus to be arahants, but can arahants speak in ways that imply belief in a self?" he approached the Buddha and posed his question.

 

(각주, CDB, 빅쿠 보디)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주석: 숲속에 머무는 이 데와는 숲속에서 빅쿠들이 사용하는 말 내가 먹는다, 내가 앉는다. 내 바루, 내 가사.”등과 같은 말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빅쿠들이 아라한일 것이로 상상했었다, 그러나 자기가 있다는 뜻으로 말하는데 아라한일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데와가 부처님에게 다가가서 물은 것이다.

 

(빅쿠보디 각주 번역)

 

 

이 게송에 대한 초불연 각묵스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주석서에 의하면 이 천신은 숲에 사는 신이다. 그는 숲에 머무는 비구들이 나는 먹는다, 나는 앉는다, 내 발우, 내가사 등의 표현을 하는 것을 듣고 생각하기를, 나는 이 비구들이 번뇌 다한 아라한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번뇌 다한 자들이 자아를 상정하는 것을 의지한이야기(attupaladdhi-nissita-katha)를 할 수 있는가? 참으로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하면서 세존께 가서 이 게송을 읊었다고 한다.(SA.i.51)

 

(각주, 초불연 각묵스님)

 

 

이 게송에 대한 성전협 전재성님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Aha vadāmītipi so vadeyya : Srp.I.51에 따르면, 이 시는 하늘사람이 숲속에 사는 깨달은 수행승들이 ’, ‘나의’, 나에게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듣고, 불교적 가르침이 자아가 없다는 무아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어떻게 그러한 언어사용이 가능한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다음 시에서 그러한 사용은 관습적인 표현방법에 불과함을 밝히고 있다.

 

(각주, 성전협 전재성님)

 

 

세 번역자의 각주를 보면 같은 내용이다. 하늘사람이 숲속의 번뇌 다한 빅쿠들의 이야기를 듣고 의문을 표시 한 것이다.

 

2. 두 번째 게송

 

게송에서 하늘사람은 나(me)라는 표현을 사용한 빅쿠들이 과연 아라한일까 의문하고 있다. 이는 불교에 대하여 어설프게 아는 자들이 충분히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무아를 설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고정된 실체가 없음에도 나(me)라는 표현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어지는 게송을 보면 부처님이 명쾌하게 설명한다.

 

 

 

(Bhagavā:)

Yo hoti bhikkhu araha katāvī
Kh
īāsavo antimadehadhārī,
Aha
vadāmītipi so vadeyya
Mama
vadantītipi so vadeyya
Loke samañña
kusalo viditvā,
Voh
āramattena so vohareyyāti.

 

 

[세존]

번뇌가 다하여서 아라한 되고

마지막 몸을 가진 비구라 할지라도

나는 말을 한다.거나 그들이 내게 말한다.

그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라.

세상에서 통용되는 언어 두루 잘 알아서

능숙한 그 사람이 일상적인 어법으로

세상의 일상적인 말을 하는 것이라.

 

(아라한 경, 상윳따니까야 S1.25, 초불연 각묵스님역)

 

 

[세존]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궁극의 몸을 이룬 거룩한 수행승이

나는 말한다.’고 하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고 하여도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

 

(거룩한 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5, 성전협 전재성님역)

 

 

“If a bhikkhu is an arahant,

Consummate, with taints destroyed,

One who bears his final body,

He might still say, ‘I speak,’

And he might say, ‘They speak to me.’

Skilful, knowing the world's parlance,

He uses such terms as mere expressions.”

 

(The Arahant, S1.25, CDB, 빅쿠 보디 역)

 

 

이 게송의 핵심어는 Vohāramattena이다. 이는 Vohāracalling; expression, , , 慣用語, 慣例를 의미한다. matta‘a measure; quantit, , 小量, 程度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Vohāramattena어떤 것을 관습적으로 지칭하는 명칭임을 뜻한다. 그래서 번뇌 다한 수행승들이 나(me)를 붙이는 것에 각묵스님은 일상적인 어법으로 세상의 일상적인 말을 하는 것이라 하였고, 전재성님은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라 하였다. 빅쿠 보디는 ‘knowing the world's parlance, He uses such terms as mere expressions(세상의 말투로서 단지 표현에 지나지 않는 용어)”라 하였다. 이렇게 수행승에게 있어서 나(me)라는 말은 관례적으로 쓰이는 용어로서 그저 세상에서 통용되는 일상어임을 알 수 있다.

 

각주를 보면

 

이에 대하여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Vohāramattena so vohareyya. Spk: "Although arahants have abandoned talk that implies belief in a self, they do not violate conventional discourse by saying, 'The aggregates eat, the aggregates sit, the aggregates' bowl, the aggregatesr robe'; for no one would understand them." See in this

connection DN I 202,7-9: "Thus, Citta, there are these worldly expressions, worldly terms, worldly conventions, worldly concepts, which the Tathagata uses without grasping them."

 

(각주, CDB, 빅쿠 보디)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Vohāramattena so vohareyya. 주석: 비록 아라한이 자기가 있다는 믿음을 암시하는 말을 버렸을지라도, 그들은 무더기들이 먹는다, 무더기들이 앉는다. 무더기들의 바루, 무더기들의 가사와 같은 관습적인 담론을 어기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들을 이해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이 구문과 관련하여 그래서 찟따여, 세속적인 표현이 있고, 세속적인 용어가 있고, 세속적인 협약이 있고 세속적인 개념이 있다. 그것은 여래가 그것들을 집착없이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표현 되어 있는  DN I 202,7-9을 보라.

 

(빅쿠 보디 각주 번역)

 

 

이 게송에 대한 초불연의 각묵스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능숙한 자(kusala)란 오온 등에 능숙한 자이다.세상에서 통용되는 언어(loke samanna)란 세상에서 통용되는 표현(loka-nirutu), 세상에서 통용되는 일상적인 어법(loka-vohara)이다.다만 일상적인 어법으로 일상적인 말을 한다(voharamattena so vohareyya),는 것은 자아를 상정하는 것을 의지한 이야기는 버리지만 일상적인 어법을 깨는 것(vohara-bheda)을 범하지 않고 단지 , 내것 등으로 표현한다. 만일 오온이 먹는다, 오온이 앉는다, 오온의 발우, 오온의 가사 등으로 말하면 일상적인 어법을 깨어버린 것이 되어서 누구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지 않고 일상적인 어법으로 일상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SA.i.51)

 

『디가 니까야』 「뽓타빠다 경」(D9)에서도 세존께서는 “찟따여, 이런 것들은 세상의 일반적인 표현이며 세상의 언어이며 세상의 인습적 표현이며 세상의 개념이다. 여래는 이런 것을 통해서 집착하지 않고 표현할 뿐이다.(D9 §53)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중요한 것은 번뇌가 다했는가. 유신견으로 대표되는 자아관념을 척파하였는가에 있지 그 표현법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각주, 초불연, 각묵스님)

 

 

이 게송에 대한 성전협 전재성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Vohāramattena : Srp.I.51에 따르며느 아라한은 비록 , 나의 것이라는 믿음을 암시하는 말을 버렸으나 존재의 다발이 먹고, 존재의 다발이 앉고, 존재의 다발이 탁발하고 존재의 다발이 옷을 입는다.’라고 표현하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으므로 관례적인 대화의 표현법을 어기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각주, 성전협, 전재성님)

 

 

세 번역자의 각주를 보면 부처님이나 수행승들이 나(me)라고 칭하는 것은 단지 관례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래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럴 경우 오온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하였을 때 불편하다는 것이다. 밥을 먹을 때 내가 밥을 먹는다라고 하지 오온이 밥을 먹는다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뽓타빠다 경(D9)에서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은 공통적으로 디가니까야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디가까야 뽓타빠다 경(D9)’에 있는 문구를 활용하여 관습적인 언어사용을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한 문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Imā1 kho citta lokasamaññā lokaniruttiyo lokavohārā lokapaññattiyo yāhi tathāgato voharati aparāmasanti.

 

찟따여, 이런 것들은 세상의 일반적인 표현이며 세상의 언어이며 세상의 인습적 표현이며 세상의 개념이다. 여래는 이런 것을 통해서 집착하지 않고 표현할 뿐이다.(D9, 각묵스님역)

 

찟따여,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여래가 집착없이 설하는 세간의 명칭이며, 세간의 언사이며, 세간의 언표이며, 세간의 시설입니다.(D9, 전재성님역)

 

Thus, Citta, there are these worldly expressions, worldly terms, worldly conventions, worldly concepts, which the Tathagata uses without grasping them.(D9, 빅쿠보디역)

 

 

이 문구에 대한 전재성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 .382에 따르면, 이상과 같이 세존께서는 세 가지 종류의 자아에 대하여 설하였지만, 그 모든 것은 단지 관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최상의 의미 즉 승의(勝意)에서 보면 생겨 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는 공한 것이고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두 가지로 논한다. 세속적 논의(sammutikatha)와 승의적 논의(paramathakatha)가 있다. 세속적 논의의 주제는 뭇삶, 인간, , 하느님 같은 것이고, 승의적 논의의 주제는 무상, 괴로움, 실체없음, 존재의 다발, 세계, 감역, 새김의 토대 등과 같은 것이다. 세존 께서는 최초에는 세속적 논의를 하고 그 다음에 승의의 논의를 한다.

 

(각주, D9, 전재성님)

 

 

각주에서 말한 세 가지 자아는 거친 자아,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아, 물질을 여읜 자아 이렇게 세 가지를 말한다. 이런 세 가지 자아는 단지 구별하기 위한 명칭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경에서는 우유가 버터로 변하는 과정에 대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우유가 생겨 날 때 요구르트나 버터 같은 명칭으로 불리지 않는 것이다. 요구르트나 버터 같은 명칭은 우유가 변하는 과정에서 붙여 주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거친 자아,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아, 물질을 여읜 자아 이렇게 세 가지 자아 역시 과정에 따라 달리 불리는 명칭들이다. 그런데 이런 언표는 모두 세속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승들이 나(me)라고 하였을 때 이는 세속적 언표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3. 세 번째 게송

 

이렇게 부처님이 나(me)라는 것이 세속적이고 관례적인 표현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럼에도 하늘사람은 이번에는 자만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 한다.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자만이 남아 있어서 나라고 말한 것이 아닌가 의문하는 것이다. 자만이 남아 있다면 결코 번뇌가 다하였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Devatā:)

Yo hoti bhikkhu araha katāvī
Kh
īāsavo antimadehadhārī,
M
āna nu kho so upagamma bhikkhu
Aha
vadāmītipi so vadeyya
Mama
vadantītipi so vadeyyāti.

 

 

 [천신]

번뇌가 다하여서 아라한 되고

마지막 몸을 받아 가진 비구가

나는 말을 한다.거나 그들이 내게 말한다.

자만 가져 말할 수가 있사오리까?

 

(아라한 경, 상윳따니까야 S1.25, 초불연 각묵스님역)

 

 

[세존]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궁극의 몸을 이룬 거룩한 수행승이

실로 망상에 사로잡혀 나는 말한다.’고 하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고 할 수 있으리.”

 

(거룩한 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5, 성전협 전재성님)

 

 

“When a bhikkhu is an arahant,

Consummate, with taints destroyed,

One who bears his final body,

Is it because he has come upon conceit

That he would say, ‘I speak,’

That he would say, ‘They speak to me’?”

 

(The Arahant, S1.25, CDB, 빅쿠 보디 역)

 

 

이 게송의 핵심어는 마나(Māna)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자만이라 하였고, 전재성님은 망상이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conceit(자만)이라 하였다.

 

각주를 보면

 

이 게송에 대한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Spk: At this point the deva thought that while arahants may not speak thus because they hold a view (of self), they might do so because they still have conceit (i.e., asmimāna, the conceit "I am"). Hence he asked the second question, and the Buddha's reply indicates arahants have abandoned the ninefold conceit (see n. 37).

 

(각주, CDB, 빅쿠 보디)

 

 

빅쿠보디의 각주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주석: 이 지점에서 데와는 아라한들이 (자기의) 견해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말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데와는 아라한들이 여전히 자만(asmimāna, ‘나는 ~이다라는 자만)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일것이다. 그래서 데와는 두번째 질문을 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답변 아라한들이 아홉가지 자만(n. 37을 보라)을 포기 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빅쿠보디 각주 번역)

 

 

이 게송에 대한 초불연 각묵스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주석서는, 아라한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가졌기 때문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은 [내가 있다는] 자만(mana)을 가졌

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천신은 세존께 질문을 드리고, 세존께서는 번뇌 다

한 아라한에게는 아홉 가지 자만이 없다고 대답하고 계신다고 설명하고

있다.(SA.I.51)

 

(각주, 초불연 각묵스님)

 

 

이 게송에 대한 성전협 전재성님의 각주는 없다.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공통적으로 아라한의 자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자만이 있을리 없지만 데와는 아라한 들이 asmimāna, 즉 자만 (the pride of self; egotism)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홉 가지 자만에 대하여

 

자만은 나는~이다(I am)”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내가 본다라든가 내가 앉는다  (me)가 들어가는 말은 모조리 자만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데와의 의구심에 대하여 부처님은 아홉가지 자만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고 하였다. 아라한이 되면 아홉가지 자만이 버려진다는 것이다.

 

아홉가지 자만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see n. 37(n. 37을 보라)’고 하였다. ‘n. 37’은 무엇일까? 각묵스님의 각주에도 나와 있지 않다. 빅쿠 보디의 글 ‘the ninefold conceit (see n. 37)’을 키워드로 하여 문장검색을 하였다. 구글검색결과 놀랍게도 블로그에 올린 글이 검색 되었다. 다음과 같은 글이다.

 

 

세 가지 분별(tayo vidhā)은 세 가지 자만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 자만은 “내가 더 낫다(seyyo 'ham asmimāna)”,  “나는 동등하다(sadiso 'ham asmimāna)”, “나는 못하다(hino 'ham asmimāna)”이다. 22:49 (I11 48-49), 45:162, 46:41. 을보라. At Vibh 389-90 에서는 이들 세 가지 자만이 더욱 더 확장되어 진짜 좋은, 진짜 동등한, 진짜 나쁜 형식으로 되어 삼개조로 형성된 아홉가지 형태로 보여진다.

 

(왜 다툼을 하는가? 세 가지 자만과 자만이라는 족쇄가 뿌리뽑힌 자, 2013-11-11)

 

 

사밋디의 경(S1.20)에 대하여 올린 글이다. 빅쿠보디의 영문을 번역한 것이다. 각주에서 빅쿠보디는 위방가를 근거로 하여 세 가지 자만에 대하여 각각 세 가지 확장된 형태로 아홉가지 자만이 있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다투는 이유는

 

자만의 기본적인 형태는 우월, 동등, 열등으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우월감을 가지는 것을 자만이라 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동등감이나 열등감도 함께 자만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항상 세 가지 자만형태로 등장한다. 빅쿠보디는 ‘’22:49 (I11 48-49), 45:162, 46:41. 를 보라라 하여 상윳따니까야의 근거를 들었지만 숫따니빠따에서도 세 가지 자만에 대해서 수 없이 나온다. 한가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Samo vihesi uda cā nibhino
Yo maññati so vivadetha tena,
Tisu vidhāsu avikampamāno
Samo visesiti na tassa hoti.

 

사람이 ‘동등하다’든가 ‘우월하다’든가

‘열등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때문에 다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동등하다’든가 ‘우월하다’는 것이 없습니다. (Sn4.9, stn842)

 

 

마간디야에 대한 설법의 경(Sn4.9)에 나오는 개송이다. 사람들이 다투는 이유는 자만때문이라 한다. 그런 다툼은 자신이 열등하다고 생각할 때 더 치열하게 전개 된다. 이는 상대방을 깔보고 얕보는 바탕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자신 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더 낫게 보였을 때 약점을 붙들고 늘어진다든가 중상모략하는 행위 역시 열등감을 바탕으로 한 자만이라 볼 수 있다.

 

진실로 자만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아홉가지 자만에 대하여 검색결과 다음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1. Being superior to others, one thinks, “I am better.”

2. Being superior to others, one thinks, “I am equal.”

3. Being superior to others, one thinks, “I am worse.”

4. Being equal to others, one thinks, “I am better.”

5. Being equal to others, one thinks, “I am equal.”

6. Being equal to others, one thinks, “I am worse.”

7. Being inferior to others, one thinks, “I am better.”

8. Being inferior to others, one thinks, “I am equal.”

9. Being inferior to others, one thinks, “I am worse.” (Nm 80; Nc 226; Vbh 389 f)

 

(Pubba Sambodha Sutta 1 (Ajjhatta))

 

 

위방가에 실린 것을 근거로 작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문구에 대한 해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

 

 

Bodhi, in his note to the Samiddhi Sutta (S 48)31 on these ninefold conceit, says: “At Vbh 389-90 it is shown that these three [the conceit, „I am better. „I am equal, and „I am worse] become ninefold in so far as each triad may be entertained by one who is truly better, truly equal, or truly worse.”32 The underscored remark here poses a dilemma or catch-22: if we were “truly” better or even “truly” equal, we would not measure ourselves against others. If we were to do so, then we would not really be “better” or even “equal.”

 

These ninefold conceits reflect social realities (including in Buddhist circles) where people are measured by their social status (eg coming from a powerful family or in a position of power), economic level (the number of rooms we have in our apartment), academic titles (eg Ven Dr), and so on.33 The point here is that, on the Dharma level, these threefold or ninefold conceit do not really exist: they are merely how the worldly person measures himself against others.

 

(Pubba Sambodha Sutta 1 (Ajjhatta))

 

 

첫 번째 문단을 보면 빅쿠 보디의 각주를 그대로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두 번째 문단에서는 아홉가지 자만이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사회적 지위나, 재산, 아파트 평수 등에 따른 우열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기준으로 하였을 때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현재 30평에 살고 있다면 50평에 사는 자에게는 열등감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50평에 사는 자는 100평에 사는 자에게 나는 열등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중심으로 하였을 때 세 가지 자만 또는 세 가지 자만이 확장된 아홉 가지 자만은 진실로(really)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4. 네 번째 게송

 

하늘사람이 아라한에게도 자만이 있어서 라고 하지 않았는지 의구심을 품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어라 답하였을까? 다음과 같은 게송이 이를 잘 말해 준다.

 

 

(Bhagavā:)

Pahīamānassa na santi ganthā
Vidh
ūpitā mānaganthassa sabbe,
So v
ītivatto maññana sumedho
Aha
vadāmītipi so vadeyya
Mama
vadantītipi so vadeyya,
Loke samañña
kusalo viditvā
Voh
āramattena so vohareyyā'ti.

 

 

 [세존]

자만 버린 자에게 매듭이란 없으니

그에게서 자만과 매듭 모두 흩어졌기 때문이라.

그 현자는 모든 망상 이미 넘어섰지만

나는 말을 한다.거나 그들이 네게 말한다.

그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라.

세상에서 통용되는 언어 두루 잘 알아서

능숙한 그 사람이 일상적인 어법으로

세상의 일상적인 말을 하는 것이라.

 

(아라한 경, 상윳따니까야 S1.25, 초불연 각묵스님역)

 

 

[세존]

망상을 버린 자에게 속박이 없으니

망상의 모든 속박은 남김없이 부서졌네.

개념지어진 것을 넘어서는 현자는,

나는 말한다.’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해도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

 

(거룩한 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5, 성전협 전재성님)

 

 

“No knots exist for one with conceit abandoned;

For him all knots of conceit are consumed.

Though the wise one has transcended the conceived,

He still might say, ‘I speak,’

He might say too, ‘They speak to me.’

Skilful, knowing the world's parlance,

He uses such terms as mere expressions.”

 

(빅쿠보디, 25 (5) The Arahant, CDB)

 

 

부처님은 아라한에게 자만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라고 부르는 명칭은 단지  세상에서 통용되는 관례적인 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각주를 보면

 

그런데 초불연과 성전협의 번역을 보면 용어를 달리 사용하였을음 알 수 있다. 그것은 초불연에서는 망상이라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개념지어진 것이라 하였다. 빅쿠 보디는 the conceived(생각되어진 것)’이라 하였다. 왜 이와 같은 차이가 날까? 먼저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망상을 넘어섰다(vitivatto mannatam).’는 것은 갈애, 견해[邪見],

자만(tanha-ditthi-mana)의 망상(mannana)을 넘어섰다, 건넜다(atikkanta)

는 뜻이다.”(SA.i.52)

판본 고찰에 대해서는 보디 스님 360쪽 51번 주해를 참조할 것. 역자가

택한 mannatam은 Be를 따랐다.

 

(각주, 초불연 각묵스님)

 

 

성전협의 전재성님은 maññana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maññana: 미얀마본과 싱할리본에는 maññana 으로 PTS본은 yamata  으로 되어 있다. yamata에 관해서는 여러 이설이 있다. Srp.I.52 에 따르면, 붓다고싸는 갈애와 견해와 자만에 따르는 망상이라고 주석했다. Ggs.I.24는 글자 그대로 죽음의 신인 야마(Yama)의 상태로 보아 죽음의 상태(Sterbichkeit)로 번역했고, Krs.I.22는 ‘잘못된 마음에서 오는 자만과 생각(conceit and deeming of errant mind)’이라고 옮겼다. 그러나 역자는 ‘yamata’으로 분석하여 개념지어진 것, 즉 사물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사유작용의 결과를 의미한다고 본다.

 

(각주, 성전협 전재성님)

 

 

두 개의 각주를 보면 대조적이다. 각묵스님의 경우 maññana에 대하여 망상이라 하였는데 이는 붓다고사의 주석을 따른 것이다. 반면 전재성님은 붓다고사의 주석(Srp.I.52) 뿐만 아니라 독일의 번역서들(Ggs.I.2, Krs.I.22)을 참고 하여 maññana에 대하여 사물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사유작용의 결과를 의미한다고 보아 개념지어진 것이라고 번역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초불연의 경우 가급적 붓다고사 등 전통적인 주석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판본을 달리 함에 따라

 

그런데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그것은 뜻 밖에도 판본 고찰에 대해서는 보디 스님 360 51번 주해를 참조할 것.’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초불연의 번역이 빅쿠 보디의 CDB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전재성님의 각주에서는 이런 현상을 찾아 볼 수 없다. 빅쿠 보디의 존재론적 번역 등에 대하여 때로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각묵스님이 참조하라는 빅쿠 보디의 판본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Spk resolves mānaganthassa in pāda b as māno ca ganthā assa, "for him conceit and knots," in order to conform to the doctrinal tetrad of gantha, which does not include māna; see 45:174. It seems, however, that here mānaganthā should be understood in a looser sense, as mānassa ganthā.

 

At It 4,16, in a sutta solely about māna, we find mānaganthā used as a bahubbihi compound qualifying pajā ("a generation knotted by conceit") and arahants described as mānanaganthābhibhuno ("those who have overcome the knots of conceit"), which supports my rendering here. The readings of pāda c vary: Be has mānatam, Se maññna (which is the gloss in Spk (Be)), Ee1 yamatam, Ee2 ya mata (= yam mata).

 

Spk explains that he has transcended the threefold conceiving due to craving, views, and conceit.

 

(각주, 빅쿠 보디)

 

 

이것이 마지막 게송에 대한 빅쿠 보디의 각주이다. 마지막 문장을 보면 주석에서는 그가 갈망, 견해, 자만으로 인한 세 가지로 만들어진 것을 초월하였다고 설명된다.’라고 되어 있다. 그 초월한 것은 무엇일까? 각묵스님의 각주에 따르면 망상이라 하였다. 이는 각묵스님이 각주에서 역자가 택한 mannatam Be를 따랐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아닌 빅쿠보디가 언급한 Bemānatam이다. Be는 미얀마6차 결집본을 말한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역자는 ‘yamata으로 분석하여라고 함으로서 PTS(Ee)를 따랐음을 밣히고 있다.

 

이렇게 판본을 달리 함에 따라 번역 역시 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라고 부르는 명칭에 대하여 빅쿠 보디는 ‘the conceived(생각되어진 것)’이라 하였고, 빅쿠 보디의 견해와 입장을 같이 하는 각묵스님은 망상이라 하였다. 이에 반하여 전재성님은 개념지어진 것이라 번역하였다.

 

불교는 무아인데 왜 라는 표현을?

 

빠일리니까야를 보면 종종 접하는 문구가 있다.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설하고 분별해 보이겠다. 듣고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S45.18)”와 같은 문구이다. 여기서 부처님은 내가 설하겠다(manasi karotha)”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부처님이 나는 ~이다라고 자만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초기경전에서 라고 말한 것은 Arahantasutta(S1.25)에 따르면 단지 관습적으로 부르는 말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저기 여자가 지나간다라고 하였을 때, 이를 물질 정신 등으로 이루어진 무더기들이 지나간다라고 말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관습적으로 저기 여자가 지나간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글을 쓰다 보면 종종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 불교는 무아인데 왜 라는 표현을 썼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몸은 오온으로 이루어졌고~”로 시작 되는 말을 늘어 놓는 것을 보았다.

 

경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경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유신견에 대한 것이고, 또하는 자만에 대한 것이다.

 

유신견에 대한 것은 하늘사람의 첫번째 질문에서 거론 하였다. 이때 부처님은 나라는 것이 번뇌 다한 자에게 있어서 하나의 관습적이 표현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그러자 하늘사람은 번뇌다한 자가 나라는 표현을 하는 것은 아직까지 자만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고 그들이 진짜 아라한인지 의구심을 표하는 두 번째 질문을 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나라는 것은 개념지어진 것에 지나지 않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두 번에 걸친 하늘사람의 의구심에 대하여 나라는 부르는 명칭은 단지 관습적으로 부르는 명칭에 지나지 않지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 하신 것이다.

 

나를 기준으로 하였을 때

 

게송을 통하여 자만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이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 가지 자만을 갖게 되는 것은 철저하게 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보다 우월한 자, 나와 동등한 자, 나보다 못한 자 이렇게 가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허구이다. 지금 내가 1500 CC 소형차를 가지고 있는데 어느 날 친구의 차를 보니 2000 CC이었다면 열등감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가 또 다른 절친이 3500 CC를 몰고 다닌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역시 열등감을 느낄 것이다.

 

나를 기준으로 하였을 때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이 일어난다. 그런데 유신견이 사라지고 번뇌가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과연 나라는 개념이 있을까? 단지 관례상 나라고 부르는 아라한에게 있어서 나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개념지어진 것(yamata)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나가 존재하지 않는 아라한에게 있어서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열등감을 바탕으로 한 자만심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을 느끼는 자들은 나가 있다고 여기는 범부들이다. 나 보다 더 좋은 아파트에 살고 나보다 더 좋은 차를 보고 다니면 시기와 질투가 나는 자들, 그리고 남 잘 되는 꼴 보지 못하는 자들, 정법을 말하는데 딴지를 거는 자들은 어떻게 해서 든지 상대방을 깍아 내리려 한다. 이 모두가 열등감을 바탕으로 한 자만심이다. 그 열등감에는 나는 ~이다(I am)”라는 아상(我相)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2013-11-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