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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매듭을 풀 사람 누구인가?” 청정도론의 오프닝테마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19. 17:41

 

 

이 매듭을 풀 사람 누구인가?” 청정도론의 오프닝테마

 

 

 

한국불교를 여러 단계 레벨업시킨 각묵스님

 

초기불교를 처음 접한 곳은 인터넷을 통해서이다.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는 인터넷에서 초기불교를 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 본다. 특히 각묵스님의 강의를 통하여 접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부분적으로 알고 있었으나 본격적으로 초기불교를 접히게 된 것은 각묵스님의 청정도론과 아비담마에 대한  인터넷 영상 강의를 듣고 나서부터이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리라 본다. 그러면으로 본다면 각묵스님의 영상강의는 한국불교를 여러 단계 레벨업시켰다고 볼 수 있다.

 

남방상좌불교의 부동의 준거틀

 

영상강의를 듣고 구입한 것이 청정도론과 아비담마이다. 빠알리 삼장이 율장, 경장, 논장 이렇게 세 개의 바구니(pitaka)로 구성되어 있는데, 경장 보다 논장을 먼저 접한 것이다. 특히 청정도론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다. 이유 중의 하나는 인터넷에서 본 게시판의 글때문이다. 어떤 게시판에서 청정도론 살림을 한다는 것이었다. 청정도론을 교재로 하여 공부하는 모임을 말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청정도론이 어떤 책인지 알고 싶었다. 더구나 청정도론이 남방상좌불교의 부동의 준거틀이라는 말도 있었기 때문에 흥미를 끌었다. 청정도론 하나만 보면 불교의 교학에 대하여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세 권으로 되어 있는 청정도로에 대하여 일장부터 읽어 나갔다.

 

청정도론 제1장 제1절에서

 

청정도론 제1장은 계청정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게송이 있다. 청정도론 제1장 제1절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마음과 통찰지를 갖춘다.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S.i.13)

 

 

이 게송과 함께 청정도론이 시작된다. 붓다고사는 이 게송에 대하여 상세한 설명을 해 놓았다. 그래서 이 게송과 함께 대림스님이 번역한 청정도론을 접하였다.

 

그런데 이 게송이 상윳따니까야에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것도 첫 번째 상윳따인 데와따상윳따(S1)’에서이다. 하지만 전재성님의 번역에서 이 게송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없었다. 다른 게송들과 마찬가지로 취급되어 있어서 그다지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런데 번역비교를 위하여 초불연과 CDB의 번역서를 보니  비중있게 취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청정도론과 연계한 설명이다.

 

이 매듭을 풀 사람 누구인가?

 

청정도론 제1장 제1절에 등장하는 유명한 게송은 ‘Jaāsutta(S1.23)’에 있. ‘매듭의 경또는 엉킴 경으로 번역되어 있다. 하늘사람과 부처님의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먼저 하늘사람이 묻는다.

 

 

Anto jaā bahi jaā jaāya jaitā pajā,
Ta
ta gotama pucchāmi ko ima vijaaye jaanti.

 

 

[천신]

안의 엉킴이 있고, 밖의 엉킴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엉킴으로 뒤얽혀 있습니다.

고따마시여, 당신께 그것을 여쭈오니

누가 이 엉킴을 풀 수 있습니까?

 

(Jaāsutta-엉킴 경, 상윳따니까야 S1.23, 초불연 각묵스님역)

 

 

[하늘사람]

“안으로 묶이고 밖으로 묶였네.

세상사람들은 매듭에 묶여 있네.

고따마께 이를 여쭈니

이 매듭을 풀 사람 누구인가?”

 

(Jaāsutta-매듭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3, 성전협 전재성님역)

 

 

“A tangle inside, a tangle outside,

This generation is entangled in a tangle.

I ask you this, 0 Gotama,

Who can disentangle this tangle?”

 

(CDB, 빅쿠보디)

 

 

 

 

tangle

 

 

 

게송을 보면 jaā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엉킴이라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매듭이라 하였다. CDB에서는 tangle’이라 하였다. 이렇게 번역이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jaā는 ‘tangle, braid, plaiting, 結縛, ’의 의미이다. 무언가에 매여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jāa가 있다. 이 jāa는 ‘born; arisen; becom, 已生的, 發生的, 生起的’로서 태어남과 관련이 있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매듭으로 번역된 jaā는 태어남과도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이 게송에 대한 각주를 찾아 보았다. 먼저 빅쿠 보디의 영문 각주는 다음과 같다.

 

 

This verse and the next form the opening theme of Vism and are commented on at Vism 14 (Ppn k1-8); the explanation is incorporated into Spk. VAT suggests that the words antojāta bahijatā should be taken as bahubbihi compounds in apposition to paiā ("having a tangle inside, having a tangle outside"), but I translate in accordance with Spk, which treats them as tappurisa.

 

Spk: Tangle (jatā) is a term for the network of craving, in the sense that it "laces together," for it arises repeatedly up and down among the sense objects such as forms. There is a tangle inside, a tangle outside, because craving arises with respect to one's own possessions and those of others; with respect to one's own body and the bodies of others; and with respect to the internal and external sense bases.

 

(빅쿠보디 CDB 359p)

 

 

빅쿠보디의 영문각주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 게송은 청정도론의 오프닝테마의 형태로 청정도론 14(Ppn k1-8)에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주석에 쓰여져 있는 것과 병합하여 설명한다. VAT에서는 antojāta bahijatā라는 용어에 대하여 paiā와 동격으로서 bahubbihi 혼합어로 간주 되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안쪽 엉킴을 갖는 것, 바깥쪽 엉킴을 갖는 것). 그러나 나는 주석에 따라 tappurisa라고 번역한다.

 

주석: 엉킴(jatā) 은 갈망으로 얽혀 있는 용어이다. 이는 끈들이 함께 있는 것처럼 그런 형태로 감각대상에 따라 위로 아래로 끊임 없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거기에 안쪽 엉킴이 있다. 왜냐하면 갈망은 자기자신과 다른 것들, 자기 자신의 몸과 타인의 몸을 자기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이는 내적 외적 감각을 기본으로 한다.

 

(진흙속의연꽃 번역)

 

 

빅쿠보디의 각주에 따르면 이 경은 청정도론의 오프닝테마(opening theme)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게송에 대한 초불연과 성전협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초불연과 성전협의 각주를 보면

 

 

본 게송은 『청정도론』 제1장에서 『청정도론』의 시작 게송으로 인용된 잘 알려진 게송이다. 본 게송에 대한 『청정도론』의 설명을 인용한다.

 

“엉킴(jata)은 갈애의 그물과 동의어이다. 그것은 형색[, rupa] 등의 대상들에서 아래위로 계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서로 꼬여 있다는 뜻에서 엉킴이라 한다. 마치 대나무 덤불 등에서 그물처럼 얽혀 있는 것을 엉킴이라 부르듯이 그것은 자신의 네 가지 필수품과 다른 사람의 필수품에 대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 안의 감각장소[]와 밖의 감각장소에 대해 일어나기 때문에 안의 엉킴과 밖의 엉킴이라 한다. 이와 같이 일어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엉킴으로 뒤얽혀 있다.

 

마치 대나무 덤불 등이 대나무 가지들로 뒤얽혀 있듯이 중생의 무리라 불리는 모든 유정들이 이 갈애의 그물에 뒤얽혀 있다. 그것에 의해 한데 얽혀 있고, 서로 꼬여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뒤얽혀 있기 때문에 ‘고따마시여, 당신께 그것을 여쭙니다.’라고 그것을 여쭙고 있다. ‘이와 같이 삼계를 얽어두는 엉킴을 누가 풀 수 있습니까? 즉, 누가 이것을 풀 능력이 있습니까?라고 그 [천신]은 질문하고 있다.”(『청정도론』1.1)

 

(초불연각주, 각묵스님)

 

 

성전협의 전재성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Anto jaā bahi jaā jaāya jaitā pajā : 매듭(jaā)은 세속적인 것에 묶여 있는 상태를 말한다. 특히 Srp.I.49에 따르면, 갈애에 묶인 상태를 말한다. Dhp.180에는 ‘얽매는 갈애(Jalini tanha)’란 개념이 나온다. 안으로(anto)와 밖으로(bani)란 의미는 자신 또는 자신의 소유와 타인 또는 타인의 소유, 또는 감각능력과 감각대상을 말한다.

 

(성전협각주, 전재성님)

 

 

세 개의 각주를 보면 CDB와 초불연의 경우 공통적으로 청정도론을 언급하고 있다. 자따경(Jaāsutta, S1.23)이 청정도론에 메인테마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정도론과 관련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전협의 각주를 보면 주석을 인용하여 짤막하게 소개 하고 있다.

 

게송에서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질문한다. 세상사람들은 안팍으로 묶여 있는 존재와 같은데 어떻게 하면 이 매듭을 풀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안과 밖이라는 것은 주석에 따르면 자신과 타인, 또는 감각능력과 감각대상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여섯 가지 감각대상에 끄달릴 때 묶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묶임(Jaā)’은 결국 새로운 태어남(jāa)’을 유발하는데, 이는 세세생생 윤회하는 땔감으로 작용한다.

 

갈애의 그믈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Dhp.180 ‘얽매는 갈애(Jalini tanha)’라는 말을 하였다. 그래서 법구경 180번 게송을 찾아 보았다.

 

 

Yassa jālini visattikā           야싸 잘리니 위삿띠가

tahā natthi kuhiñci netave      딴하 낫티 꾸힌찌 네따웨

ta buddhamanantagocara              땅 붓다마난따고짜랑

apada kena padena nessatha.    아빠당 께나 빠데나 네싸타.

 

 

깨달은 님에게는 자신을 어딘 가로 이끄는

그믈처럼 달라붙는 갈애가 없다.

그의 행경은 무한하고 그의 자취가 없다.

그 님을 어떤 자취를 따라 이끌 수 있으랴?

 

(법구경 Dhp180, 전재성님역)

 

 

게송에서는 갈애에 대하여 그믈에 비유하고 있다. 그래서 “그믈처럼 달라붙는 갈애가 없다. (tahā natthi kuhiñci netave)”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DhpA.III.198에 따르면, 갈애(tahā)는 그믈에 비유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속에 그믈이 있고 그믈을 만드는 것이고 그믈에 비유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꿰메어진 것이고 두루 짜여진 것이며 두루 싸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각주, 전재성님)

 

 

갈애는 그믈과도 같다고 하였다. 마치 매듭의 경에서 보는 매듭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갈애로 그믈을 만들어 그 안에 싸여진다. 그런데 갈애는 ‘달라 붙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달라 붙는 것의 의미는 형상 등과 같은 감각대상에 달라 붙는 것을 말한다. 그런 갈애는 마치 독이 있는 음식이나 과일, 꽃에 달라 붙는 것과 같다. 먹으면 유해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답하기를

 

하늘사람은 누가 얼키고 설킨 매듭을 풀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시로서 넌즈시 질문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한다.

 

 

Sīle patiṭṭhāya naro sapañño citta paññañca bhāvaya,
Ātāpi nipako bhikkhu so ima vijaaye jaanti.
Yesa
rāgo ca doso ca avijjā ca virājitā,
Khīāsavā arahanto tesa vijaitā jaā.

 

 

[세존]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

 

탐욕과 성냄과 무명이 빛바래고

번뇌 다한 아라한들이 이러한 엉킴을 푼다.

 

(Jaāsutta-엉킴  경, 상윳따니까야 S1.23, 초불연 각묵스님역)

 

 

[세존]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이라면,

이 매듭을 풀 수 있으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고

번뇌가 다한 성자에게

그 얽매인 매듭은 풀리리.

 

(Jaāsutta-매듭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3, 성전협 전재성님역)

 

 

A man established on virtue, wise,

Developing the mind and wisdom,

A bhkkhu ardent and discreet:

He can disentangle this tangle.

 

Those for whom lust and hatred

Along with ignorance have been expunged,

The arahants with taints destroyed:

For them the tangle is disentangled.

 

(CDB, 빅쿠보디)

 

 

바로 이 게송이 청정도론 메인테마게송에 해당된다. 마치 연속극이 시작 되면 오프닝테마곡이 흘러나오듯이, 이 게송이 청정도론에 첫 페이지에 등장하고 이어서 다른 장에서도 등장한다.

 

붓다고사는 왜 이 게송을 메인테마로 하였을까?

 

그렇다면 붓다고사는 왜 이 게송을 메인테마로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먼저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The Buddha's reply is a succinct statement of the threefold training, with samradhi referred to by the word citta. Spk says wisdom is mentioned three times in the verse: first as innate intelligence ("wise"); second, as insight-wisdom (vipassanā-paññā), the wisdom to be developed; and third,

as "discretion," the pragmatic wisdom that takes the lead in all tasks (sabbakiccaparināyikā  parihāriyapaññā).

 

Spk: "Just as a man standing on the ground and taking up a well-sharpened knife might disentangle a great tangle of bamboos, so this bhikkhu ... standing on the ground of virtue and taking up, with the hand of practical

intelligence exerted by the power of energy, the knife of insight-wisdom well sharpened on the stone of concentration, might disentangle, cut away, and demolish the entire tangle of craving that had overgrown his own mental continuum" (adapted from Ppn 1:7).

 

(빅쿠보디 CDB 359p)

 

 

빅쿠보디의 각주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은 마음에 의한 삼매를 언급함으로서 세 가지 학습에 대한 학습에 대하여 간결하게 말씀 하신다. 주석에서는 지혜라는 것이 게송에서 세 번 언급 되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선천적 지능(현명함)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개발된 지혜를 뜻하는 통찰지(위빠사나 지혜)에 대한 것이고, 세 번째는 분별, 즉 모든 일에 있어서 지도자가 가져할 실용적 지혜인 분별(sabbakiccaparināyikā  parihāriyapaññā)을 말한다.

 

주석: 지금 어떤 사람이 땅위에 서서 잘 간 날카롭게 생긴 칼을 들고서 커다란 대나무숲의 엉킴을 풀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이 빅쿠는… 미덕(계)를 기반으로 한 땅위에 서서, 정력의 힘을 행사하여 실용적인 지성에 기반한 손으로, 바위 같은 집중과 함께 날카롭게 잘 간 통찰지의 그의 정신적 연속의 성장을 해왔던 갈망이라는 엉킴 전체를 칼로서 베어 버리고 뭉게버리려서 엉킴을 풀지 모른다.

 

(진흙속의연꽃 번역)

 

 

초불연의 각묵스님 각주는 다음과 같다.

 

 

본 게송도 『청정도론』의 모두(冒頭)에 앞의 천신의 질문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 『청정도론』의 방대한 내용은 계ㆍ정ㆍ혜 삼학을 표방하고 있는 본 게송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청정도론』에 나타나는 본 게송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인용한다.

 

“여기서 이것이 [게송의] 간략한 설명이다.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 계에 머물러서, 계를 철저히 봉행하는 자를 여기서 계에 머무는 자라 부른다. 그러므로 계를 철저히 수지하여 계에 굳건히 머문다는 것이 여기서의 뜻이다. 사람 : 중생이다. 통찰지를 갖춘 :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재생연결을 통해 업에서 생긴 지혜를 가진,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 여기서 마음이라는 제목 아래 삼매를 서술했고, 통찰지라는 이름으로 위빳사나를 서술했다.

 

근면한 자 : 정진하는 자. 왜냐하면 정진은 오염원들을 말려버리고(atapana) 태워버린다(paritapana)는 뜻에서 열(atapa)이라 불른다. 그것을 가진 자가 근면한 자(atapi)다. 슬기로운 자 : 슬기로움을 일러 통찰지라 한다. 그것을 갖춘 자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깨어 있는 통찰지를 나타낸다. 질문에 대답하는 이 [게송]에서는 이처럼 세 번의 통찰지가 언급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첫 번째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통찰지(jati-panna)이고, 두 번째는 위빳사나의 통찰지(vipassana-panna)이고, 세 번째는 모든 일을 주도하는 깨어 있는 통찰지(pariharika-panna)이다.

 

윤회에서(samsare) 두려움을(bhayam) 보기(ikkhati) 때문에 비구(bhikkhu)라 한다. 그가 이 엉킴을 푼다. ① 계와 ② 마음이라는 제목 아래 표현된 삼매()와 ③-⑤ 세 가지의 통찰지()와 ⑥ 근면함이라는 이런 여섯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마치 사람이 땅 위에 굳게 서서 날카롭게 날을 세운 칼을 잡고 큰 대나무 덤불을 자르는 것처럼 할 것이다. 즉 그는 계의 땅 위에 굳게 서서, 삼매의 돌 위에 [같아] 날카롭게 날을 세운 위빳사나 통찰지의 칼을, 정진의 힘으로 노력하였기 때문에 깨어 있는 통찰지의 손으로 잡아, 자기의 상속에서 자란 갈애의 그물을 모두 풀고 자르고 부수어버릴 것이다. 그는 도의 순간에 엉킴을 푼다고 한다. 그는 과의 순간에 엉킴을 푼 자가 되어 신을 포함한 세상에서 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한 자가 된다.”(『청정도론』I.7)

 

(초불연 각주, 각묵스님)

 

 

성전협 전재성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citta paññañca bhāvaya : 원문에는 citta paññañ ca(마음과 지혜)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문맥상 Srp.I.159에 따라 선정과 지혜로 번역한다.

 

**이 시는 Vism 1; Pet44(45); Mil.34; Uv.6:8에도 나온다. Srp.I.150에 따르면, 사람이 땅위에 서서 잘 드는 날카로운 칼로 대나무가 엉킨 것을 잘라내듯, 수행승은 계행 위에 서서 집중의 돌로 질 갈아진 통찰적 지혜라는 칼을 잡고, 정진의 힘에 의해 발휘된 실천적 지혜의 손으로, 갈애의 얽힘을 자르고 부수어 버린다.

 

(성전협 각주, 전재성님)

 

 

각주를 보면 공통적으로 주석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계정혜삼학에 대한 것이다. 이는 게송에서 ‘Sīle patiṭṭhāya naro sapañño citta paññañca bhāvaya,’라는 문구가 있다. 게송을 보면 Sīla(), citta(), paññ()가 언급되어 있. 여기서 citta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삼매라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서 칠청정에 따르면 사마디청정이라 하지 않고 ‘마음청정 (citta visuddhi )’이라 한다. 참고로 칠청정과 십육단계의 지혜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칠청정과 16단계 지혜

칠청정

16단계 지혜

1

(sīla visuddhi)

 

네 가지 청정한 계

2

마음(citta visuddhi)

 

근접삼매와 본 삼매

3

(diṭṭhi visuddhi)

1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4

의심을 극복함

(kakhāvitaraa visuddhi)

2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paccaya pariggha ñāna)

5

도와 도아님에 대한 지와 견(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

6

도 닦음에 대한 지와 견

(patipadāāadassa visuddhi)

4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na)

5

무너짐의 지혜(bhaga ñāna)

6

공포의 지혜(bhaya ñāna)

7

위험의 지혜(ādīnava ñāna)

8

역겨움의 지혜(nibbidā ñāna)

9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muñcitukamyatā ñāna)

10

깊이 숙고하는 지혜(paisakhā ñāna)

11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sakhārupekkhā ñāna)

12

수순하는 지혜(anuloma ñāna)

6과 7사이에

13

종성의 지혜(gotrabhu ñāna)

7

지와 견

āadassa visuddhi)

14

도의 지혜(magga ñāna)

15

과의 지혜(phala ñāna)

16

회광반조의 지혜(paccavekkhaa ñāna)

 

 

이것이 청정도론에서 설명되고 있는 계정혜 삼학에 대한 것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계청정(sīla visuddhi)’이 이루어져야 하고, 계청정의 바탕하에 마음청정(citta visuddhi)’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계청정과 마음청정이 이루어졌을 때 본격적으로 지혜의 계발에 들어간다. 그래서 칠청정을 보면 지혜에 대한 것이 다섯 가지로 가장 많다.

 

이런 지혜의 계발은 모두 열 여섯 가지로 구분된다. 이렇게 칠정정을 닦고 십육단계의 지혜를 계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도와 과를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실천하여 열반을 성취하고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단계적 수행방법이라 볼 수 있다.

 

 

타고난 지혜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세 가지 지혜가 언급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빅쿠 보디는  각주에서

 

 

1) first as innate intelligence ("wise");

2) second, as insight-wisdom (vipassanā-paññā), the wisdom to be developed;

3) and third, as "discretion," the pragmatic wisdom that takes the lead in all tasks (sabbakiccaparināyikā  parihāriyapaññā).

 

 

라 하였다. 이는 1)선천적 지능(현명함), 2)통찰지(위빠사나 지혜), 3)실용적 지혜인 분별을 말한다.  이 세가지 지혜중에서 첫번째로 언급된 선천적 지능(innate intelligence)’에 주목한다. 이것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통찰지(jati-panna)’라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별다른 언급이 없다.

 

이렇게 선천적 또는 태어나면서 갖추게 된 지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대림스님이 번역한 청정도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통찰지는 일종의 생이지라 할 수 있는데 이런 통찰지를 가지고 태어나려면 세 가지 원인을 가진 과보로 나타난 마음이 그 생의 재생연결식이 되고 그래서 그것이 그 사람의 바왕가(잠재의식)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내포 되어 있다.

 

(청정도론 , 통찰지 각주, 대림스님)

 

 

대림스님의 각주에 따르면 통찰지는 생이지(生而知)’라 한다. 생이지란 타고난 것을 말한다. 이는 학습에 의하여 형성된 경지인 학이지(學而知)’와 비교 되는 말이다. 그래서 빅쿠보디는 ‘innate intelligence(타고난 지성)’이라 하였다.

 

빅쿠 냐나몰리의 The Path of Purification Visuddhimagga’에서

 

계정혜에서 혜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각주에서는 타고난 지혜라든가 생이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주석서에 그렇게 적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또 하나의 청정도론인 빅쿠 냐나몰리의 영역 The Path of Purification Visuddhimagga’에서 해당 부분을 찾아 보았다.

 

 

Wise: possessing the kind of understanding that is born of kamma by means of a rebirth-linking with triple root-cause.

 

(The Path of Purification Visuddhimagga, 빅쿠 냐나몰리)

 

 

이를 번역하면 현명함: 세 가지 뿌리를 원인으로 하여 재생연결의 수단으로 업에 의하여 태어나는 일종의 지식을 갖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재생연결식에 따른 지혜에 대하여 대림스님은 생이지라 하였고, 빅쿠 보디는 innate intelligence(타고난 지성)’이라 하였다.

 

이런 문구를 접하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성자의 흐름에 들면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이르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올바른 견해를 갖추고 진리에 대한 올바른 꿰뚫음에 도달한 고귀한 제자들에게는 이미 파괴되어 끝나 버린 괴로움이 더 많고 남아 있는 괴로움은 아주 적다. 많이 잡아 일곱 번을 더 환생한다 할지라도,…(S13.1)”라고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성자의 지혜는 다음생까지 이어짐을 말한다. 그래서 innate intelligence(타고난 지성) 또는 생이지라 하였을 것이다.

 

이생에서 완전한 열반을 실현하고자

 

게송을 설명하는 각주를 보면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비유가 있다. 그것은 주석을 근거로 하는 것인데 이를 비교표로 만들어 보았다.

 

 

  

       

  

 

빅쿠 냐나몰리

 

standing on the ground of virtue and taking up with the hand of protective understanding exerted by the power of energy the knife of insight-understanding well-sharpened on the stone of concentration, might disentangle, cut away and demolish all the tangle of craving that had overgrown his own life’s continuity.

The Path of Purification Visuddhimagga, 1장 7절(영역 청정도론)

빅쿠 보디

"Just as a man standing on the ground and taking up a well-sharpened knife might disentangle a great tangle of bamboos, so this bhikkhu ... standing on the ground of virtue and taking up, with the hand of practical intelligence exerted by the power of energy, the knife of insight-wisdom well sharpened on the stone of concentration, might disentangle, cut away, and demolish the entire tangle of craving that had overgrown his own mental continuum"

(adapted from Ppn 1:7).

빅쿠 냐나몰리의 영역 청정도론에서 채용함

각묵스님

윤회에서(samsare) 두려움을(bhayam) 보기(ikkhati) 때문에 비구(bhikkhu)라 한다. 그가 이 엉킴을 푼다.

 

① 계와 ② 마음이라는 제목 아래 표현된 삼매()와 ③-⑤ 세 가지의 통찰지()와 ⑥ 근면함이라는 이런 여섯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마치 사람이 땅 위에 굳게 서서 날카롭게 날을 세운 칼을 잡고 큰 대나무 덤불을 자르는 것처럼 할 것이다. 즉 그는 계의 땅 위에 굳게 서서, 삼매의 돌 위에 [같아] 날카롭게 날을 세운 위빳사나 통찰지의 칼을, 정진의 힘으로 노력하였기 때문에 깨어 있는 통찰지의 손으로 잡아, 자기의 상속에서 자란 갈애의 그물을 모두 풀고 자르고 부수어버릴 것이다.

 

그는 도의 순간에 엉킴을 푼다고 한다. 그는 과의 순간에 엉킴을 푼 자가 되어 신을 포함한 세상에서 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한 자가 된다.

(『청정도론』I.7)

청정도론 1 7절 인용(대림스님역)

전재성님

사람이 땅위에 서서 잘 드는 날카로운 칼로 대나무가 엉킨 것을 잘라내듯, 수행승은 계행 위에 서서 집중의 돌로 질 갈아진 통찰적 지혜라는 칼을 잡고, 정진의 힘에 의해 발휘된 실천적 지혜의 손으로, 갈애의 얽힘을 자르고 부수어 버린다.

Srp.I.150

 

 

각주를 보면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의 각주는 빅쿠냐마몰리의 영역청정도론인 ‘The Path of Purification Visuddhimagga’ 제1장 7절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빅쿠보디는 그대로 옮겼고, 각묵스님은 대림스님이 편역한 청정도론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 왔다. 반면에 전재성님은 주석서 Srp.I.150에 근거하여 짤막하게 언급해 놓았다.

 

내용은 이렇다. 여기 타고난 지혜를 가진 빅쿠가 있다. 그는 전생에서부터 지혜를 닦아 왔다. 그런 인연으로 금생에서도 빅쿠가 되어 지혜를 계발하고 있다. 이미 기본이 되어 있기에 굳건한 계행의 바탕위에서 이생에서 완전한 열반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래서 계행의 땅에 굳게 서서, 삼매의 돌에 칼을 날카롭게 갈아, 두 손으로 지혜의 칼을 단단히 잡고서 대나무가 엉킨 것을 잘라내듯 미래 태어남의 원인이 되는 갈애라는 엉킴 전체를 베어 버리고 잘라내고 부수어 버린다.

 

그 얽매인 매듭은 풀리리

 

마지막 게송은 역시 부처님이 읊은 게송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Yattha nāmañca rūpañca asesa uparujjhati,
Pa
igha rūpasaññā ca etthesā1 chijjate jaāti.

 

 

정신ㆍ물질 남김없이 소멸하는 곳

부딪힘[의 인식도 남김없이 소멸하고]

물질의 인식까지 남김없이 소멸하는

여기서 그 엉킴은 잘려지도다.

 

(Jaāsutta-엉킴  경, 상윳따니까야 S1.23, 초불연 각묵스님역)

 

 

[세존]

정신-신체적 과정과 감각적 저촉과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지각마저

남김없이 부서지는 곳에서

그 얽매인 매듭은 풀리리.

 

(Jaāsutta-매듭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3, 성전협 전재성님역)

 

 

Where name-and-form ceases,

Stops without remainder,

And also impingement and perception of form:

It is here this tangle is cut.

 

(CDB, 빅쿠보디)

 

 

매듭은 어떻게 풀려지는가?

 

이 게송은 어떤 내용일까? 그리고 매듭은 어떻게 풀려지는가? 먼저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While the previous verse shows the trainee (sekha), who is capable of disentangling the tangle, this verse shows the arahant, the one beyond training (asekha), who has finished disentangling the tangle.

 

Spk says this verse is stated to show the opportunity (or region) for the disentangling of the tangle (jatāya vijatanokasa). Here name (nama) represents the four mental aggregates. Spk treats impingement (patigha) as metrical shorthand for perception of impingement (patighasaññā). According to Spk-pt, in pida c we should read a compressed dvanda compound, Paigha rūpasaññā ("perceptions of impingement and of form),The first part of which has been truncated, split off, and nasalized to fit the metre. Impingement being the impact of the five sense objects on the five sense bases, "perception of impingement" (patighasaññā) is defined as the fivefold sense perception (see Vibh 261,31-34 and Vism 329,22-24; Ppn 10:16).

 

Perception of form (rupasaññā) has a wider range, comprising as well the perceptions of form visualized in the jhanas [Spk-pt: perception of the form of the earth-kasina, etc.].

 

Spk explains that the former implies sense-sphere existence, the latter form-sphere existence, and the two jointly imply formless-sphere existence, thus completing the three realms of existence. It is here that this tangle is cut. Spk: The tangle is cut, in the sense that the round with its three planes is terminated; it is cut and ceases in dependence on Nibbana.

 

(빅쿠보디 CDB 359p)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전 게송에서는 엉킴을 풀 수 있는 수련자(sekha)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이 번 게송에서는 엉킴이 모두 풀린 더 이상 수련하지 않는 자(asekha)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주석에서는 이 게송에 대하여 엉킴을 푸는 기회(또는 영역)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jatāya vijatanokasa). 여기에서 이름(nama)은 네 개의 정신적 무더기를 나타낸다. 주석에서는 충돌(Paighasaññā)에 대하여 운율적으로 짧아진 인식으로서 충돌(patigha)로 간주한다. 주석(Spk-pt)에 따르면, c구절에서 우리는 압축된 dvanda혼합, 즉 Paighasaññā (지각과 형태의 충덜)로 읽어야 한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일부가 줄여져 있고, 분리되어 있고, 미터에 적합하게 비음화 되어 있다.

 

다섯 감각에 기반하여 다섯 감각 대상이 영향을 준 것이 충돌이다.  이러한 ‘충돌에 의힌 지각(Paighasaññā)’은 다섯 개의 감각지각으로 정의된다(청정도론 261,31-34과 329,22-24를 보라 : Ppn 10:16 ).

 

물질의 지각(rupasaññā)은 범위가 넓다. 선정에서 마음에 떠올려진 지각의 형태로서 함께 일어난다[주석서에서는 땅의 까시나 등의 지각 형태로 설명된다].

 

주석에서는 이전의 것은 감각 영역존재 (sense-sphere existence) 로 함축되고, 나중의 것은 형상영역존재 (form-sphere existence) 로 함축된다고 설명된다. 그리고 두 개가 형상없는 영역존재 (formless-sphere existence)로 합쳐서 함축된다. 그래서 완전한 세 가지 영역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이러한 엉킴은 잘려진다. 주석서에 따르면, 그것의 세 가지 영역이 종결되는 회전이 함께  하는 감각에서 엉킴은 잘려진다. 그것은 단절이고 열반에 따른 중단이다.

 

(진흙속의연꽃 번역)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다. 따라서 번역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 ‘정신(nama)’이란 네 가지 정신의 무더기(수ㆍ상ㆍ행ㆍ식)이다. ‘부

딪힘의 인식과 물질에 대한 인식(patigham rupasanna ca)’에서 ‘부딪힘의

인식’이라는 문구는 욕계(kama-bhava)를 말했고, ‘물질에 대한 인식’이라

는 문구는 색계(rupa-bhava)를 말했다. 이 둘을 취함으로써 무색계

(arupa-bhava)도 포함되었다. ‘여기서 그 엉킴은 잘려진다(etthesa

chijjate jata).’는 것은 여기 삼계윤회가 끝나는 이곳(pariyatiyana-tthana)

에서 이 엉킴은 잘려 진다는 말이다. 열반에 도달한 뒤 잘려진다, 소멸된

다는 뜻을 보이신 것이다.”(SA.i.50)

 

(초불연 각주, 각묵스님)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nāmañca rūpañca : 명색을 의미하는데, 정신-신체적인 모든 과정을 말한다.

 

** Paigha rūpasaññā ca : 한역은 감각적 저촉을 장애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다섯 가지 선정을 방해하는 장애와 혼동됨으로 역자는 감각적 저촉을 사용한다. Srp.I.150에 따르면, 감각적 저촉(Paigha, 장애)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세계(욕계)에 대한 지각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서 물질계(색계)에 대한 지각(rūpasaññā)을 언급하고 있는데, 문맥상 비물질계(무색계)에 대한 지각까지 포함한다.

 

(성전협 각주, 전재성님)

 

 

이 게송은 각주를 읽어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주석서에 쓰여 있는 것을 기반으로 한 각주의 내용을 보면 열반에 대한 설명이다. 열반이 성취되면 정신-신체적인 소멸 뿐만 아니라 색계, 무색계 역시 모조리 소멸됨을 말한다. 이렇게 남김 없이 부서졌을 때 얽혔던 매듭이 풀릴 것이라 한다.

 

빠띠가산냐(Paighasaññā, 충돌에 의힌 지각의)

 

게송에서 Paighasaññā라는 말이 나온다. 이를 빅쿠보디는 ‘충돌에 의한 지각(perception of impingement)이라 하였다. 감각기관이 감각 대상을 보았을 때 충돌(Paigha)이 일어나는데 그 때 지각(saññ)을 하게 된다. 이런 충돌은 정신-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우리의 오감에서 일어나는데 이를 루빠산냐(rupasaññā, 물질의 지각)라 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루빠산냐는 범위는 매우 넓어서 선정상태에서 형성된 까시나(표상)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욕계의 다섯 가지 감각에 따른 오온의 소멸 뿐만 아니라 색계와 무색계의 표상 역시 소멸의 대상이다. 따라서 충돌에 따른 지각이 남김 없이 소멸 되었을 때 열반이 성취되는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Ppn 10:16’를 보라고 하였다. Ppn 10:16은 빅쿠 냐마몰리의 영역 10 16절을 말한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대림스님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부딪힘의 인식이 사라졌기 때문에: 눈 등의 토대와 형상(색깔) 등의 대상이 맞닿아서 일어난 인식이 부딪힘의 인식이다. 이것은 물질의 인식 등의 동의어이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여기서 무엇이 부딪힘의 인식인가? 형상(색깔)의 인식, 소리의 인식, 냄새의 인식, 맛의 인식, 감촉의 인식을 부딪힘의 인식이라 한다.” 다섯 가지 유익한 과보와 다섯 가지의 해로운 과보인 이 열 가지 부딪힘의 인식이 사라지고, 버려지고, 생기지 않는다. 그들을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청정도론, 10장 16절, 대림스님역)

 

 

 

‘부딪침에 대한 지각(Paighasaññā)’이 사라졌을 때 더 이상 과보가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과보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은 더 이상 재생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탐진치가 소멸되고, 더 이상 지각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얼키고 설켰던 모듭 매듭은 풀릴 것이라 한다.

 

 청정도론의 오프닝테마

 

계정혜 삼학을 닦아 청정한 도와 과를 성취하기 위한 수행지침서이자 주석서가 청정도론이다. 그런데 청정도론의 방향을 제시하는 게송이 자따경(Jaāsutta, S1.23)에 실려 있다. 앞서 언급된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Sīle patiṭṭhāya naro sapañño

citta paññañca bhāvaya,
Ātāpi nipako bhikkhu

so ima vijaaye jaanti.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이라면,

이 매듭을 풀 수 있으리.(S1.23)

 

 

이 게송은 청정도론의 메인테마이자 제1장 제1절에 등장하는 오프닝테마이기도 하다. 그리고 청정도론의 매번 언급 되기 때문에 메인테마곡과도 같은 것이다.

 

 

 

2013-11-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