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퇴전을 거듭하는가? 세간적 마음과 일시적 해탈
감각적 욕망, 까마라가
초기불교경전을 보면 자주 나오는 용어가 있다. 그것은 ‘감각적 욕망’이다. 이를 빠알리어로 ‘까마라가(kāmarāga)’라 한다. 까마라가는 까마와 라가의 합성어이다.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까마(kāma)는 pleasure(쾌락), lust(욕망), enjoyment(즐김)을 뜻한다. 그런데 까마에는 ‘object of sexual enjoyment(성적 즐김의 목적)’이라는 뜻도 있다. 이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인 성욕과도 매우 밀접한 용어이다.
이렇게 존재의 태어남으로 이끄는 까마와 욕망 또는 집착을 의미하는 라가(rāga)가 결합하였을 때 까마라가는 ‘감각적 욕망’ 또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 등으로 번역된다.
감각적 욕망은 제거 되어야 할 정신적 장애이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kāmarāga)은 분노(byāpāda),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흥분과 회환(uddhaccakukkucca), 의심(vicikicchā)과 함께 다섯 가지 장애, 즉 ‘오장애’에 속한다.
일시적으로 억압된 마음
오장애는 선정에 들어가면 사라진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억압될 뿐이다. 선정에서 나오면 다시 발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각적 욕망은 어떻게 해야 뿌리 뽑을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이 하늘사람과 부처님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Sattisuttaṃ
Sāvatthiyaṃ-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Sattiyā viya omaṭṭho ḍayhamānova matthake,
Kāmarāgappahāṇāya sato bhikkhu paribbaje'ti.
(Bhagavā:)
Sattiyā viya omaṭṭho ḍayhamānova2 matthake,
Sakkāyadiṭṭhippahāṇāya sato bhikkhu paribbaje'ti.
칼 경
2.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면전에서 이 게송을 읊었다.
“칼이 내려 꽂혀오는 것처럼, 머리에 불붙은 것처럼
감각적 욕망을 버리기 위해
비구는 마음챙겨 유행해야 합니다.”
3. [세존]
“칼이 내려 꽂혀오는 것처럼, 머리에 불붙은 것처럼
[불변하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견해[有身見] 버리기 위해
비구는 마음챙겨 유행해야 하노라.”
(칼 경, 상윳따니까야 S1.21, 각묵스님역)
칼의 경
한 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에 계셨다. 어떤 하늘사람이 한 쪽에서 서서 앞에서 이처럼 시를 읊었다.
[하늘사람] “칼날이 몸에 와 닿는 것처럼,
머리카락에 불이 붙은 것처럼
감각적 탐욕을 버리기 위해
수행승은 새김을 확립하고 유행해야 하리.
[세존] “칼날이 몸에 와 닿는 것처럼,
머리카락에 불이 붙은 것처럼
개체가 있다는 견해를 버리기 위해
수행승은 새김을 확립하고 유행해야 하리.
(칼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1, 전재성님역)
A Sword
At Savatthi. Standing to one side, that devata recited this verse
in the presence of the Blessed one:
“As if smitten by a sword,
As if his head were on fire,
A bhikkhu should wander mindfully
To abandon sensual lust.”
[The Blessed one:]
“As if smitten by a sword,
As if his head were on fire,
A bhikkhu should wander mindfully
To abandon identity view.”
(CDB, Bhikkhu Bodhi)
경의 제목은 ‘Satti’이다. 삿띠는 능력(Ability), 힘(power)의 뜻이 있지만 ‘칼( knife)’ 이라는 뜻도 있다. 게송에서 ‘Sattiyā viya omaṭṭho(칼이 몸에 접촉하는 것처럼)’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칼을 뜻하는 삿티(Satti)로 인하여 경의 제목이 붙여 졌을 것이다.
왜 엇박자가 나는 것일까?
게송을 보면 하늘사람과 부처님이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늘사람은 감각적 욕망을 제거 하기 위하여 몸에 칼이 닿는 것처럼, 머리카락에 불이 붙은 것처럼 정진해야 함을 말하고 있고, 반면 부처님은 유신견을 극복하여 먼저 성자의 흐름에 들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엇박자가 나는 이유에 대하여 빅쿠 보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In pada b, I read dayhamane va, with Eel and SS, as against dayhamano va in Be, Se, and Ee2. With bhavaraga in pada c, these verses also appear as Th 39-40 and 1162-63. In the present form the pair of verses sets a problem in interpretation, for kamaraga, sensual lust, is abandoned by the third path, while sakkyaditthi, identity view, is abandoned by the first path, so the devata appears to be advocating a higher attainment than the Buddha. This problem does not arise in the Th version, since bhavaraga, lust for existence, is abandoned by the fourth path, that of arahantship.
Spk gives an ingenious solution: The deva spoke his verse with reference to the abandoning of sensual lust by way of suppression only (vikkharmbhanappahanam eva), i.e., temporarily through the attainment of jhana, while the Buddha recommended the attainment of stream-entry, which eliminates identity view by way of eradication (samuccheda) so that not even the subtle underlying tendency (anusaya) remains, thus ensuring full liberation in a maximum of seven more lives.
(빅쿠 보디 각주, CDB 4번 각주, 357p)
영문으로 되어 있는 빅쿠 보디의 각주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b구절에서 나는 Be, Se, 와 Ee2에서 ‘다이하마노 와(ḍayhamāno va)’라고 읽는 대신에 Eel과 SS에서처럼 ‘다이하마네 와(ḍayhamāne va)’라 읽는다. c구절에서 바와라가(bhavaraga)처럼, 이들 게송은 테라가타 39번과 40번 그리고 1162번과 1163번에서도 보여 진다.
두 개의 셋트로 이루어진 게송을 보면 해석상의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다. 삭까야딧티, 즉 유신견이 첫 번째 길에서 포기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번 째 도에 해당하는 카마라가, 즉 감각적 욕망이 먼저 버려져야 하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사람이 부처님 보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 되어 있는 것으로 옹호 될 수 있다. 이 문제는 테리가타 버전에서는 일어 나지 않는다. 바와라가(bhavaraga), 즉 존재에 대한 욕망은 네 번째 길인 아라한이 되었을 때 포기 되어지기 때문이다.
주석(Spk)에서는 독창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데와(하늘사람)는 선의 경지를 통하여 단지 일시적으로 억압(vikkharmbhanappahanam eva)된 감각적 욕망의 포기와 관련된 게송을 노래 한 것이다. 반면 부처님은 미묘하게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경향이 남아 있지 않도록 자기동일성의 견해를 뿌리뽑아 흐름에 들어갈 것을 권유하고 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일곱생 이내에 진정한 자유가 보장된다.
(빅쿠 보디의 영역 각주 번역)
빅쿠 보디의 각주에서 Be, Se, 와 Ee2, Eel, SS 라는 기호가 등장한다. 이는 무슨뜻일까? 초불연의 상윳따니까야 약어에 따르면 Ee는 ‘PTS본’이고, Be는 ‘미얀마 6차 결집본’을 말한다. 또 Se는 ‘스리랑카본’을 말하고, SS는 ‘Ee에 언급된 싱할리어 필사본’이라 한다. 빅쿠 보디가 Eel과 SS를 따른 다고 하였는데, 이는 PTS본을 기본으로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빅쿠 보디의 각주에서 ‘Spk’라는 용어가 보인다. 이는 주석을 의미한다. 그래서 ‘Spk gives an ingenious solution (주석에서는 독창적인 해법을 제시한다)’라는 식으로 시작된다.
초불연과 성전협의 각주를 보면
게송에 대한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게송으로 천신은 감각적 욕망을 버릴 것을 주장했고, 세존께서는 두 번째 게송에서 유신견을 버릴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한 가지 살펴볼 점은 성자의 경지에서 보자면 감각적 욕망을 버리는 것은 세 번째 단계의 성자인 불환도에 의해 성취되고, 유신견을 버리는 것은 첫 번째 단계의 성자인 예류도에 의해 성취된다는데 있다. 이렇게 되면 천신의 주장이 더 높은 경지를 얻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에 대해서 주석서는 다음과 같은 멋진 설명을 하고 있다.“세존께서는 생각하셨다. ‘이 천신은 비유는 아주 강하게 들지만 그 뜻은 아주 제한적이다. 그가 계속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는 감각적 욕망을 단지 [삼매에 들어] 억압함을 통해서 버리는 것(vikkhambhana-pahana)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감각적 욕망이 불환도에 의해 완전히 뿌리 뽑히지 않는 한(samugghatiyati) 거기에 묶여 있는 것(anubaddha)이 된다.’라고 하시면서 천신이 들었던 비유를 가지고 첫 번째 도인 예류도(pathama-magga)에 대한 가르침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두 번째 게송을 읊으신 것이다.”(SA.i.48)
삼매 혹은 초선 이상의 경지에 들면 감각적 욕망은 제일 먼저 극복이 된다. 그러나 삼매에서 나오면 감각적 욕망은 다시 일어난다. 삼매에 의해 억압되었을 뿐이지 뿌리가 완전히 뽑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천신은 단지 삼매에 들어 감각적 욕망을 억압하는 것만을 말했을 뿐 실제로 뿌리 뽑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제거하는 불환자보다 더 낮은 단계이면서 성자의 첫 번째 단계인 예류자가 되는 가르침, 즉 유신견의 제거를 통해 그 천신을 교화하셨다는 것이다.오직 삼매에 들어 있는 순간에만 업압된 오염원들로부터 벗어난 이런 경지를 ‘일시적인 해탈(samayika vimutti)’이라고 한다. 일시적인 해탈에 대해서는 본서 「고디까 경」(S4:23) §2와 이에 대한 주해와, 『앙굿따라 니까야』제3권「일시적인 해탈 경」1(A5:149) §1의 주해를 참조할 것.
(초불연 각주, 각묵스님)
성전협의 각주 역시 이와 비슷한 내용이다. 성전협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하늘사람이 주장하는 감각적 탐욕의 제거는 보다 높은 단계의 세 번째 길에서 제거 되지만, 개체가 있다는 견해는 첫 번째 길에서 제거 된다. 따라서 부처님은 기초부터 잘 다지라는 의미에서 이와 같이 언급한 것이다. Srp.I.48에서는 하늘사람이 감각적 욕망의 포기를 오로지 억압에 의해 해결하기만하고, 순간적으로 선정에 들려고 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그것을 부정하고 개체가 있다는 견해를 버릴 것을 권고했다고 적고 있다.
(성전협 각주, 전재성님역)
세 개의 각주를 보았다. 세 개의 각주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된 것은 감각적 욕망이 단지 선정수행으로 제거 되지 않음을 말한다. 선정상태에서는 장애가 일시적으로 억압은 되지만 선정에서 벗어났을 때는 다시 원위치 됨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빅쿠 보디는 ‘잠재성향(anusaya)’ 때문이라 하였다.
유신견을 타파해야
감각적 욕망은 어떻게 뿌리 뽑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게송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조건으로서 ‘유신견의 타파’를 들었다.
이 ‘유신견(有身見, sakkyaditthi)’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identity view’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유신견에 대하여 ‘[불변하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견해[有身見]’라 하여 긴길이로 번역하였다. 특히 괄호치기를 이용한 한문 사용과 주석적 번역을 한 것이 특징이다. 전재성님은 유신견에 대하여 ‘개체가 있다는 견해’라 번역하였다.
유신견은 흐름에 들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다. 그래서 첫 번째 도에 해당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전재성님의 각주에서 볼 수 있듯이 ‘기초부터 잘 다지라’는 말이다. 기초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집을 지으면 사상누각처럼 조그마한 충격에도 무너질 수 있듯이, 개체가 있다는 견해도 타파하지 못한 상태에서 선정으로 인한 일시적 억압은 근본적 대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늘사람의 게송과 부처님의 게송이 엇박자가 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해탈한 자의 경(A5:149)
빅쿠보디는 각주에서 테라가타에서도 동일한 게송이 있다고 하였다. 전재성님 각주에서도 Thag.39-40과 Thag.1162-1163을 소개 하고 있다. Thag.39-40를 찾아 보았다. 각묵스님은 ‘고디까 경(S4:23)’과 ‘일시적인 해탈 경1(A5:149)’을 참조하라고 하였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일시적인 해탈 경1(A5:149)을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Pañcime bhikkhave dhammā samayavimuttassa bhikkhuno parihānāya saṃvattanti. Katame pañca:
Kammārāmatā, bhassārāmatā, niddārāmatā, saṅgaṇikārāmatā, yathāvimuttaṃ cittaṃ na paccavekkhati. Ime kho bhikkhave pañca dhammā samayavimuttassa bhikkhuno parihānāya saṃvattanti.
비구들이여, 이 다섯 가지 법은 일시적인 해탈을 얻은 비구를 망가지게 한다. 무엇이 다섯인가?
[잡다한] 일하기를 좋아하는 것,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 잠자기를 좋아하는 것, 무리 짓기를 좋아하는 것, 해탈한 대로 마음을 반조하지 않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다섯 가지 법은 일시적인 해탈을 얻은 비구를 망가지게 한다.
(Paṭhama samayavimutta sutta-일시적 해탈 경1, 앙굿따라니까야 A5.149, 대림스님역)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리는 일시적으로 해탈한 수행승을 퇴전으로 이끈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속적인 일을 즐기고, 떠드는 것을 즐기고, 잠자는 것을 즐기고, 무리지어 지내는 것을 즐기고, 얼마나 해탈했는지 마음을 성찰하지 못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리는 일시적으로 해탈한 수행승을 퇴전으로 이끈다.
(Paṭhama samayavimutta sutta-일시적 해탈자의 경1, 앙굿따라니까야 A5.149, 전재성님역)
초불연과 성전협의 번역을 비교하여 올려 놓았다. 일시적 해탈을 얻은 자는 잠재성향이 남아 있어서 조건이 맞으면 언제든지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빠알리 원문에서는 ‘parihānāya’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 빠리하나야에 대하여 사전을 찾아 보면 parihānā의 뜻은 ‘diminution(축소), decrease(감소), wasting away(낭비하여 버림), 退失(퇴실), 衰退(쇠퇴)’의 뜻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bhikkhuno parihānāya saṃvattanti’구절은 “빅쿠를 쇠퇴로 이끈다”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비구를 망가지게 한다”라고 번역하였다. ‘망가진다’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경전에서 사용하기에는 ‘품격’이 떨어진다고 본다. 성전협에서는 “퇴전으로 이끈다”라고 번역하였다.
퇴전으로 이끄는 다섯 가지 요인
경에서는 수행자를 퇴전으로 이끄는 다섯 가지 요인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퇴전으로 이끄는 다섯 가지
구 분 |
초불연 |
성전협 |
Kammārāmatā |
일하기를 좋아하는 것 |
세속적인 일을 즐기는 것 |
bhassārāmatā |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 |
떠드는 것을 즐기는 것 |
niddārāmatā |
잠자기를 좋아하는 것 |
잠자는 것을 즐기는 것 |
saṅgaṇikārāmatā |
무리 짓기를 좋아하는 것 |
무리지어 지내는 것을 즐기는 것 |
yathāvimutta |
해탈한 대로 마음을 반조하지 않는 것 |
얼마나 해탈했는지 마음을 성찰하지 못하는 것 |
다섯 가지를 보면 세상사람들이 흔히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일을 하고 잡담을 하는 등 오욕락을 즐기는 것을 말한다.
다섯 가지 요인 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언급된 ‘일하기 좋아하는 것(Kammārāmatā)’이 눈에 띈다. 왜냐하면 한국불교에서 일하기 좋아하는 스님들이 있기 때문이다.
일하기 좋아하는 스님들
어느 인터넷 카페에서 어느 스님이 글을 올렸다. 인터넷 공간에서 스님들이 올린 글을 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반가웠다. 더구나 ‘사문OO’이라는 필명까지 사용 하였으므로 잔뜩 기대하였다. 그러나 글을 열어 본 순간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개발한 상품을 광고 하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스님들은 못 하는 것이 없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음식이면 음식 등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너무 일에 몰두 하다 보니 부업이 본업이 된 듯 하다. 그래서 본업인 수행과 포교는 제쳐 두고 부업에만 몰두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준다.
부업에 몰두한 스님들은 음반을 내는가 하면 가게를 차린다. 또 사찰음식점을 만들어 체인점화 하기도 한다. 이렇게 한국 스님들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스님들이 하는 일을 보면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세속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다지 가치 있는 일은 아니다. 세속 사람들도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일에 몰두 하는 스님들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스님들이 세속적인 일에 몰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나라 불자들이 스님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사찰음식 전문 스님은 “불자들은 믿잖아요. 믿을 수 있는 음식이나 물건이기 때문에 그걸 불교백화점 처럼… 제가 오프라인에 나와 해 보니까..(불교방송- 우리절 우리스님. 07:00 일요일 방송, 2013-04-21일자)”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자들은 스님들을 믿기에 불자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출가자는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일을 하지 않은 대신 철저하게 ‘탁발’에 의존한다. 따라서 진짜 빅쿠는 탁발에 의존하는 자라 볼 수 있고, 빅쿠 아닌 자는 직업을 가진 자라 볼 수 있다.
왜 퇴전을 거듭하는가?
이렇게 세속사람들이나 하는 일을 즐기는 수행승에게 해탈은 요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다만 선정상태에서 일시적으로 욕망에서 벗어나긴 하지만 일상으로 되돌아 오면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이는 ‘일시적 해탈(samayavimutta)’에 따른 결과이다. 이와 같은 일시적 해탈에 대한 각주는 다음과 같다.
Mrp.III.292에 따르면, 이 것은 집중되는 순간마다 번뇌가 부수어져 해탈하기 때문에 일시적 해탈이라 불리운다. 이것은 출세간적인 해탈이 아니라, 세간적인 해탈이다.
(일시적 해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집중하는 순간에만 번뇌가 부수어진다고 하였다. 독서를 할 때 다른 생각이 안나는 것과 같다.이는 뜨개질, 삽질 등 일에 몰두 하고 있을 때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속상하고 분하고 억울하고 스트레스 쌓일 일이 있을 때 무언가에 몰두 하면 일시적으로 잊어 버리는 이치와 같다.
선정상태에서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하였을 때 감각적 욕망이 억압되는 것은 일시적이다. 그래서 선정상태의 해탈에 대하여 ‘세간적 해탈’이라 하였다. 이는 아비담마에서 89가지 마음의 분류에 따르면 선정상태의 마음을 세간적은 마음으로 분류한 것과 같다.
세간적 마음과 출세간적 마음
아비담마에서 마음분류표에 따르면 색계의 다섯 가지 선정과 무색계의 네 가지 선정은 모두 ‘세간적 마음’으로 분류 된다. 반면 수다원의 도와 과, 사다함의 도와 과, 아나함의 도와 과, 아라한의 도와 과 이렇게 여덟 가지 마음은 ‘출세간적 마음’으로 분류 된다. 그래서 선정에 따른 일시적 마음의 해탈에 대하여 ‘세간적 해탈’이라 보는 것이다.
2013-11-1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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