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적 번역에 대하여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불가에서 하는 말이 있다. 스님의 허물에 대하여 재가불자가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심지어 계행을 지키지 않는 스님에 대하여 신도가 비방하는 것에 대하여 좋지 않은 행위로 본다. 그래서 스님의 잘못에 대하여 보고도 못본척 넘어 가는 것이 재가불자의 미덕인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왜 이와 같은 발상이 나왔을까? 이는 대승보살계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범망경 보살계본에 따르면 십중대계 여섯번째 항목에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있다. 설명에 따르면 “불자들아, 만일 너희가 출가한 보살이나, 집에 있는 보살이나, 비구나, 비구니의 허물을 자기 입으로 말하거나, 다른 사람을 시켜서 말하게 하지 말지니”라고 되어 있다. 계행을 지키지 않는 등 허물이 있어도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 스님들은 계행에서 자유로운 것 같다. 왠만한 것은 눈감아 주기 때문이다.
허물없는 자를 비방하면
그런데 허물이 없어도 비방하는 경우가 있다. 아무 잘못이 없고 계행도 잘지키고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는 사람을 비방하였을 때 받는 과보는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잘 말해 주고 있다.
Phusatisuttaṃ
Sāvatthiyaṃ -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Nāphusantaṃ phusati ca phusantaṃ ca tato phuse,
Tasmā phusantaṃ phusati appaduṭṭhappadosinanti.
(Bhagavā:)
Yo appaduṭṭhassa narassa dussati,
Suddhassa posassa anaṅgaṇassa,
Tameva bālaṃ pacceti pāpaṃ,
Sukhumo rajo paṭivātaṃva khitto'ti.
닿음 경
2. [천신]
“[업을] 짓지 않은 자에게 [과보는] 닿지 않고
[업을] 지은 자에게 [과보는] 닿습니다.
청정한 자 망가뜨리는 자들이 있으니
그런 [업을] 지은 자에게 [과보는] 닿습니다.”111) {53}
3. [세존]
“누구든지 청정하고 흠이 없으며
순수한 그런 사람 망가뜨리면
그 죄악은 어리석은 그에게 되돌아가나니
바람을 거슬러 던진 먼지더미와 같이.”112) {54}
(닿음 경, 상윳따니까야 S1.22, 각묵스님역)
접촉의 경
[하늘사람] “접촉하지 않는 자에게
접촉하지 않지만 접촉하는 자에게 접촉하리.
그러므로 순수한 자에게 해를 끼친,
접촉하는 그 사람에게 접촉하리.”
[세존] “누구든지 허물이 없이 청정한,
순수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악은 어리석은 자 자신에게 돌아가리.
미세한 먼지가 바람을 거슬러 날리듯이.”
(접촉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 전재성님역)
It Touches
“It does not touch one who does not touch,
But then will touch the one who touches.
Therefore it touches the one who touches,
The one who wrongs an innocent man.”
“If one wrongs an innocent man,
A pure person without blemish,
The evil falls back on the fool himself
Like fine dust thrown against the wind.”
(CDB, Bhikkhu Bodhi)
상윳따니까야 S1.22는 허물없는 자를 비방하였을 때 받는 과보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 “누구든지 허물이 없이 청정한, 순수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악은 어리석은 자 자신에게 돌아가리.(S1.22)”라 하였다. 허물이 없는 성자, 천진무구한 아이, 선량한 사람에 대하여 비방하고, 괴롭히고, 중상모략하고 심지어 살해 하였을 때 그 과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빅쿠보디의 각주에서
데와따(하늘사람)가 말한 게송에서 첫 번째 구절을 보면 마치 수수께끼 같다. Nāphusantaṃ phusati ca의 뜻이 ‘접촉하지 않은 자를 접촉하지 않는다’이다. 이어지는 게송을 합하면 “접촉하지 않는 자에게 접촉하지 않지만 접촉하는 자에게 접촉하리.(S1.22)”가 되어 그 뜻이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대체 이뜻은 무엇일까? 먼저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The verse poses a riddle which hinges on two connotations of phusati, "to touch": (i) to acquire a particular kamma, here the grave kamma of wronging an innocent person; and (ii) to reap the result of that kamma when it comes to maturity.
At Sn 662 this verse refers to Kokaliya's calumny of Sgriputta and Moggallana (see 6:10, which includes the story but not this verse). A different, and less credible, background story is told at Dhp-a I11 31-33, commenting on Dhp 125; see BL 2:282-84. On the kammic result of harming innocents, see Dhp 137-40.
(빅쿠 보디 각주, CDB 358p)
CDB에 실려 있는 빅쿠보디의 각주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이 게송은 접촉을 의미하는 빠알리어 푸사띠(phusati)가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서 수수께끼 같다. 하나는 특정한 업을 짓는 것이다. 이는 선량한 사람을 잘못되게 하는 중대한 업을 말한다. 또 하나는 그 업의 성숙에 따라 과보로서 받는 것을 말한다.
이 게송은 숫따니빠따 662번에서 사리뿟따외 목갈라나 존자의 에 대한 꼬깔리야의 중상모략에 대한 것과 관계가 있다. (6:10을 보라, 이것은 운문이 아니라 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차이가 나고 덜 신뢰가 가지만 법구경 125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 Dhp-a I11 31-33 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BL 2:282-84를 보라. 선량한 자를 해친 과보에 대해서는 Dhp 137-40을 보라.
(빅쿠 보디 각주 번역, 진흙속의연꽃)
빅쿠보디에 따르면 마치 수수께끼 같은 구절에 등장하는 빠알리어 푸사띠(phusati)는 두 가지 뜻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없을 짓는것과 업의 과보를 받는 것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숫따니빠따 꼬깔리야경(Sn3.10)에서도
빅쿠보디는 게송과 관련하여 숫따니빠따와 법구경을 보라고 하였다. 빅쿠보디가 언급한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Yo appaduṭṭhassa narassa dussati
Suddhassa posassa anaṅgaṇassa,
Tameva bālaṃ pacceti pāpaṃ
Sukhumo rājo paṭivātaṃva khitto.
청정하고 더러움이 없고 죄악이 없는 사람을 미워하는 자,
그 어리석은 자에게, 바람을 거슬러서 미세한 먼지가 불어 오듯,
반드시 그 악함은 되돌아 온다.
(Kokālika sutta-꼬깔리야의 경, 숫따니빠따 Sn3.10, Stn662, 전재성님역)
숫따니빠따 꼬깔리야의 경(Sn3.10)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이는 중상모략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왼팔과 오른팔이라고 볼 수 있는 두 상수제자, 즉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에 대하여 근거없는 소문을 퍼뜨려 모함하여 파멸시키려는 꼬깔리야에 대하여 부처님이 경고한 말씀이다. 그래서 허물 없는 성자를 비방하였을 때 반드시 그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라 하였다. 이런 내용은 상윳따니까야 꼬깔리야 경(S6:10)에서도 보인다.
법구경 Dhp125에서도
숫따니빠따의 Stn662 게송(Sn3.10)은 위에 언급된 접촉의 경(S1.22)의 내용과 거의 같다. 그런데 법구경에서도 유사한 게송이 보인다. 빅쿠보디가 언급한 대로 125번 게송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Yo appaduṭṭhassa narassa dussati 요 압빠둣타싸 나라싸 두싸띠
suddhassa posassa anaṇgaṇassa 숫다싸 뽀사싸 아낭가나싸
tameva balaṃ pacceti pāpaṃ 따메와 발랑 빳쩨띠 빠방
sukhumo rajo pativātaṃva khitto. 수쿠모 자조 빠띠와땅와 킷또.
죄악이 없고 청정하여
허물이 없는 님에게 해를 끼치면,
티끌이 바람 앞에 던져진 것처럼,
악의 과보가 어리석은 그에게 돌아간다.
(법구경 Dhp125, 전재성님역)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접촉의 경(S1.22)은 숫따니빠따와 법구경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다. 공통적으로 허물 없는자, 순진한 자, 착한 자를 근거 없이 비방하면 과보를 받는다는 내용이다.
법구경 인연담, 장로와 사냥꾼 이야기(Dhp125)
그런데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A different, and less credible, background story is told at Dhp-a I11 31-33, commenting on Dhp 125”라는 문구가 있다. “차이가 나고 덜 신뢰가 가지만 법구경 125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 Dhp-a I11 31-33 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라는 뜻이다. 다름 아닌 법구경 125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이다.
인연담이라는 것이 대중을 교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친설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교훈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허물 없는 자를 비방하면 어떤 과보를 받게 될까? 법구경 인연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전재성님의 법구경에서 인연담을 옮겨 보았다.
DhpA.III.31-33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숲에 계실 때, 사냥개를 데리고 다니는 사냥꾼 꼬까(Koka)는 손에 활을 들고 자신을 따르는 사냥개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한 수행승을 만났다. 수행승을 만나자 ‘재수없는 놈을 만났다. 오늘은 공쳤구나!’라고 생각하며 길을 갔다.
장로는 마을로 탁발을 하고 아침을 먹고 승원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었다. 사냥꾼은 장로를 보고 ‘오늘 아침에 만난 재수없는 놈이구나. 숲에 갔다가 공쳤다. 내 앞에 불쑥 나타났으니 내 개들의 밥이나 되라.’라고 생각하고 사냥개들을 장로에게 들이댔다. 그러자 장로는 ‘재가신도여, 제발 이러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사냥꾼은 ‘아침 일찍 당신을 만났는데, 그 때문에 숲에 갔다가 공쳤다. 내 앞에 불쑥 나타났으니 네 개들의 밥이나 되라.’고 말하며 사냥개들을 풀어 놓았다. 그러자 장로는 허겁지겁 나무위로 기어 올랐다.
사냥개들이 그 나무를 둘러쌌다. 그리고 사냥꾼은 활을 쏘아 장로의 발바닥을 맞추었다. 장로는 ‘제발 이러지 마시오.’라고 빌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사냥꾼은 계속 활을 쏘아대서 장로의 양쪽 발바닥에 불이 날 지경이었고, 몸에서 가사가 떨어지는 것 조차 몰랐다.
가사가 바닥으로 떨어져 사냥꾼 꼬까의 몸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덥쳤다. 개들은 장로가 나무에서 떨어진 줄 알고 자신의 주인을 물어서 뼈만 남기고 삼켜버렸다. 이 광경을 보고 장로는 나무 위에서 마른 가지를 꺽어 개에게 던졌다. 그제야 사냥개들은 자신들이 주인을 죽였다는 것을 알고 숲으로 도망갔다.
장로는 자신의 가사가 떨어져 사냥꾼이 죽게 된 것에 죄책감을 느껴 부처님을 찾아 왔다. 자초지종을 들은 부처님께서는 장로에게 ‘수행승이여, 그대는 죄가 없다. 수행자의 삶을 잘 영위하고 있다. 그는 죄없는 자를 공격하여 파멸을 자초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냥꾼의 전생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의사였는데, 일거리를 찾다가 발견하지 못하자 문 앞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고 ‘뱀을 놓아 상처를 입으면 내가 치료해주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무의 구멍에 머리를 내민 뱀을 보고 아이들에게 ‘쌀리까(Salika)새를 보라, 잡아라!’라고 거짓말을 했다. 한 아이가 손을 집어넣어 뱀의 목을 붙잡아 구멍에서 꺼냈다. 손에 뱀이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뱀을 던졌는데 의사의 머리에 떨어졌다. 뱀은 의사의 어깨를 물었고, 의사는 그 때문에 죽었다(Jat.367).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장로에게 시로써 ‘죄악이 없고 청정하여 허물이 없는 님에게 해를 끼치면, 티끌이 바람 앞에 던져진 것처럼, 악의 과보가 어리석은 그에게 돌아간다.’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그 수행승은 거룩한 경지를 성취했다.
(법구경 125번 게송 인연담, 전재성님역)
문단은 편의상 나눈 것이다.
거해스님역 인연담과의 차이점은?
법구경 인연담은 거해스님의 법구경에도 있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인연담과 차이가 있다. 거해스님의 인연담을 보면 소설적 구성으로 되어 있지만, 전재성님의 인연담은 붓다고사의 법구의석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원문에 더 충실한 번역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차이는 내용에서도 드러난다.
거해스님의 인연담에서는 한 가지 빠진 것 있다. 그것은 사냥꾼 꼬까(Koka)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인연담에서는 자따까(Jat.367)를 근거로 하여 꼬까의 악행이 소개 되어 있다.
인연담을 보면 크게 두 가지에 대한 것이다. 하나는 허물 없는 성자를 해치려 한 것이고, 또 하나는 순진한 아이에게 상해를 입히려 한 것이다. 두 가지 시도 모두 자신의 죽음으로 끝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아무 근거도 없이 성자를 비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순진한 사람을 꼬드겨서 이익을 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허물 없는 자를 비방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그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라 한다.
과보로 받는 열가지 재난
그런 과보는 어떤 것일까? 빅쿠보디는 각주에서 ‘법구경 Dhp 137-40을 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Yo daṇḍena adaṇḍesu 요 단데나 아단데수
appaduṭṭhesu dussati 압빠둣테수 두싸띠
dasanamaññ ataram ṭhānaṃ 다산나만냐따랑 타낭
khippameva nigacchati. 킵빠메와 니갓차띠.
죄가 없고 위해가 없는 자를
폭력으로 해치는 자는
참으로 아주 빠르게
열 가지 경우 가운데 하나를 받는,
Vedanaṃ pharusaṃ janiṃ 웨다낭 파루상 자닝
sarīrassa va bhedanaṃ 사리라싸 와 베다낭
garukaṃ vāpi ābādhaṃ 가루깡 와삐 아바당
cittakkhepaṃ va pāpuṇe. 찟딱케빵 와 빠뿐에.
심한 고통이나 궁핍,
신체적 상해나
중대한 질병이나
정신의 착란을 얻거나,
Rājato vā upasaggaṃ 라자또 와 우빠삭강
abbhakkhānaṃ va dārunaṃ 압박카낭 와 다룬앙
parikkhayaṃ va ñātīnaṃ 빠릭카양 와 냐띠낭
bhogānaṃ va pabhaṇguraṃ 보가낭 와 빠방구랑.
국왕으로부터의 재난이나
무서운 중상모략
친족의 멸망이나
재산의 망실을 당하거나,
Atha vāssa agārāni 아타 와싸 아가라니
aggi ḍahati pāvako 악기 다하띠 빠와꼬
kāyassa bhedā duppañño 까야싸 베다 둡빤뇨
nirayaṃ so papajjati. 니라양 소 빠빳자띠.
또는 정화자인 불을 만나
그 불이 자신의 집을 태운다.
마침내 어리석은 자는
몸이 파괴된 뒤에 지옥에 태어난다.
(법구경 Dhp137-40, 전재성님역)
법구경 137번에서부터 140번에 이르는 게송을 보면, 허물없는 자를 근거 없이 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죽음에 빠뜨렸을 때 받을 수 있는 과보가 구체적으로 명기 되어 있다. 이들 ‘열 가지 재난’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 심한 고통이나 궁핍을 겪는다.
2) 신체적 상해를 당한다.
3) 중대한 질병을 얻는다.
4) 정신의 착란을 얻는다.
5) 국왕으로부터의 재난을 당한다.
6) 무서운 중상모략을 당한다.
7) 친족이 멸망한다.
8) 재산의 망실을 당한다.
9) 불이 자신의 집을 태운다.
10) 몸이 파괴된 뒤에 지옥에 태어난다.
이렇게 열가지 재난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허물 없는 자를 비방하고 해치는 강도에 따라 점차 과보가 강해짐을 알 수 있다. 최종적으로 지옥에 떨어진다. 이는 법구경 125번 인연담에서 사냥꾼 꼬까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아무 이유 없이 지나가는 빅쿠에게 “재수없는 놈을 만났다. 오늘은 공쳤구나!”라고 생각하며 악심을 품었을 때 그에 따른 과보는 즉각적으로 나타남을 말한다.
초불연과 성전협의 각주를 보면
다른 번역자의 각주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초불연과 성전협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 안은 주석서를 참조해서 넣은 것이다. 앞의 ‘닿음(phusanta)’은 업(kakka)을 짓는 것을 말하고 뒤의 닿음은 그 과보(vipaka)를 받는 것을 말한다.(SA.i.48~49)
이 게송은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를 근거 없이 심하게 비방하다가 죽어 지옥에 떨어진 꼬깔리까 비구에 관계된 게송으로, 『숫따니빠따』(Sn.127)(662)로도 나타난다. 꼬깔리까 비구에 대한 자세한 일화는 본서 「꼬깔리까 경」2(S6:10-『앙굿따라 니까야』「꼬깔리까 경」(A10:89)에 나타나고 있으므로 참조할 것. 이 경에는 본 게송이 나타나지 않는다.
(초불연 각주, 각묵스님)
Nāphusantaṃ phusati ca : 글자 그대로는 ‘접촉하지 않은 자를 접촉하지 않는다.( Nāphusantaṃ phusati)’라고 되어 있다. 동사 √Phus는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다. ‘만지다’, 즉 ‘취하다’는 의미와 ‘만나다, 도달하다’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의 이 수수께끼 같은 시의 의미는 Srp.I.49에서 제시하듯이 ‘접촉하다’는 두 가지 함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허물없는 자에게 잘못을 범하는 특수한 업(kammaṁ)을 행하는 것과 그것이 성숙한 뒤에 오는 과보를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성전협 각주, 전재성님)
초불연과 성전협 각주 역시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수수께끼 같은 ‘Nāphusantaṃ phusati ca phusantaṃ ca tato phuse’구절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업을] 짓지 않은 자에게 [과보는] 닿지 않고 [업을] 지은 자에게 [과보는] 닿습니다.(S1.22)”라 하여 주석적 번역을 하였다. 전재성님은 “접촉하지 않는 자에게 접촉하지 않지만 접촉하는 자에게 접촉하리. (S1.22)”라 하여 직역하였다. 빅쿠보디는 “It does not touch one who does not touch(접촉하지 않는 자에 접촉하지 않는다, S1.22)”라 하여 역시 직역하였다.
‘주석적 번역’임을 고백하는
이와 같은 수수께끼 게송은 각주를 보아야 이해가 된다.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허물없는 자에게 잘못을 범하는 특수한 업(kammaṁ)을 행하는 것과 그것이 성숙한 뒤에 오는 과보를 거두어들이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어서 “접촉하지 않는 자에게 접촉하지 않지만 접촉하는 자에게 접촉하리.(S1.22)”라는 수수께끼 같은 구절을 풀어 준다.
하지만 각묵스님의 본문 게송을 보면 이와 다르다. 각묵스님은 본문 게송에서 “[업을] 짓지 않은 자에게 [과보는] 닿지 않고 [업을] 지은 자에게 [과보는] 닿습니다.(S1.22)”라 하였다. 대괄호 치기를 이용하여 ‘[업을]’과 ‘[과보는]’의 문구를 삽입하였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 안은 주석서를 참조해서 넣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 번역한 게송이 ‘주석적 번역’임을 실질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주석적 번역이란 무엇인가?
주석적 번역이라는 말이 있다. 주석적 번역은 원문에 없는 내용이 본문에 부가된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주석에 있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실린 경우를 말한다. 또 주석에서 설명되어 있는 내용이 본문에 그대로 실려 있어서 원문을 크게 훼손한 경우를 말한다.
각묵스님이 번역한 “[업을] 짓지 않은 자에게 [과보는] 닿지 않고 [업을] 지은 자에게 [과보는] 닿습니다.(S1.22)”역시 주석적 번역의 대표적 예에 속한다. 그래서 대괄호치기를 이용하여 ‘[업을]’ 과 ‘[과보는]’가 본문에 첨가 되었다.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된다면 대괄호치기를 모두 삭제 하여 “짓지 않은 자에게 닿지 않고 지은 자에게 닿습니다.(S1.22)”가 될 것이다.
주석적 번역의 장단점
주석적 번역에는 장단점이 있다. 단점으로서는 앞서 지적하였듯이 원문에 실려 있지 않은 내용이 첨가 됨으로 인하여 원문을 크게 훼손한 케이스가 이에 해당된다. 수수께끼 같은 원문에 대하여 각주에서 설명이 되어야 함에도 본문에 친절하게도 괄호치기로 설명을 해 놓았을 때 마치 흐름을 방해 하는 것처럼 보여 ‘시어(詩語)’로서 맛이 떨어진다. 사람들은 좋은 게송이 있으면 외우기도 하는데 괄호치기가 있을 때 이를 포함에서 외워야 하는지, 아니면 무시하고 외워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주석적 번역의 장점도 있을 것이다.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는 자, 또는 초심자에게 있어서 본문에 없는 내용을 첨가하여 길게 설명할 경우 상당히 도움이 된다. 칼의 경(S1.21)에서 ‘Sakkāyadiṭṭhippahāṇāya(유신견을 극복함)’가 있는데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불변하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견해[有身見] 버리기 위해’라고 길게 번역 하였다. 이처럼 각주에서 설명되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실린 경우 그 뜻이 명확해진다. 마찬가지로 수수께끼 구문에서 “[업을] 짓지 않은 자에게 [과보는] 닿지 않고 [업을] 지은 자에게 [과보는] 닿습니다.(S1.22)”라고 번역한 것은 초심자에게 매우 상세하고 친절한 번역이 된다.
M스님의 글에서
초불연의 주석적 번역에 대하여 많이 지적하였다. 이에 대하여 반론도 만만치 않다. 초기불교를 연구하는 M스님의 경우 글을 통하여 견해를 밝혀 주셨다.
M스님은 주석적 번역에 대하여 관대한 듯하다. 스님의 글에 따르면 주석적 번역에 대한 혜택을 받은 것으로 묘사 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자신의 블로그에 기고한 글에서 전재성님의 번역과 각묵스님의 번역을 비교하면서 각묵스님의 번역을 다음과 같이 칭찬 하였다.
위에 인용한 전재성 번역과 각묵스님의 번역을 비교해 보라. 누구의 번역이 더 원문에 충실한 번역인가를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M스님, 번역의 중요성과 어려움)
M스님은 윌폴라 라훌라 책 ‘What the Buddha Taught’을 번역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초고에서 중대한 실수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남이 번역한 책을 그대로 인용한데서 발견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앞서 번역한 전재성과 진철승의 잘못된 번역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대해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전재성님과 각묵스님의 번역을 비교하여
M스님은 전재성님의 번역과 각묵스님의 번역을 비교하여 실어 놓았다. 블로그 오른 쪽 마우스버튼을 허용하지 않아 일일이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그 질문에 대해서는 내가 그대들에게 준 가르침 속에서 나는 이미 여러 가지로 대답했다.
(Puṇṇamāsutta-보름날 밤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82, 전재성님역)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법들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으로 그대들을 훈련시켰다.
(Puṇṇamāsutta-보름밤 경, 상윳따니까야 S22:82, 각묵스님역)
인용문에서 필요한 부분만 옮긴 것이다. M스님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다. 그리고 각주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부분을 번역하면서 전재성은 어떠한 각주나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반면 각묵스님은 다른 이본들과 일일이 대조하여 자신이 번역한 것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질의응답을 통한 훈련’이 바로 아래에 나오는 오온의 무상-고-무아에 대한 교리문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M스님, 번역의 중요성과 어려움)
M스님은 각묵스님의 번역을 칭찬하고 있다. 각묵스님의 번역에서는 자신이 궁금하게 생하였던 부분에 대하여 각주도 있었고, 더구나 본문에서도 누구나 알 수 있게 쉽게 알 수 있게 번역해 놓은 것에 대한 칭찬이다.
초불연의 각주(S22.82)를 보면
M스님은 각묵스님의 각주를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초불연 상윳따니까야 각주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자아가 없이 지은 업들은 도대체 어떤 자아와 접촉하는가?;는 맛지마니까야 긴보름밤 경(N109/iii.19) 14절의 anattakatāni kammāni kathamattānaṃ phusissanantī로 읽어서 옮긴 것이다. Be, Se는 kam attānaṃ 대신에 katham attānaṃ으로, Ee는 Kam attānaṃ으로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맛지마니까야 주석서에는 이 비구는 상견(상견, sassata-dassana)에 빠져 이렇게 말했다고 적혀 있다.
**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법들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으로 그대들을 훈련시켰다.’는 Be, Se : Paṭipucchāvinitā kho me tumhe bhikkhave, tatra tatra tesu tesu dhammesu.를 옮긴 것이다. Ee는 이렇게 고쳐서 읽어야 한다. 주석서는 ‘질의응답을 통한 훈련(Paṭipucchā-vinātā)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바로 아래에 나타나는 오온의 무상-고-무아에 대한 교리문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초불연 각주, , 번역의 중요성과 어려움)
빠알리 원문을 찾아 일일이 옮겨 보았다. 이와 같은 각주는 초불연 번역에 보이지만 성전협 번역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전협의 맛지마니까야에는 각주가 나와 있다. 전재성님의 맛지마니까야 번역에서는 “그대들은 여러 가지 것에 대해 그때 그때 경우에 따라 질문을 통해 나에게서 수련을 받았다.(M109”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각주에서는 Paṭiccavinitā에 대하여 “조건에 따라 수련을 해 왔다는 뜻이다. 그러나 SN.III.104에서는 Paṭipucchā vinātā로 되어 있어서 역자는 후자를 취한다.(M109각주, 전재성님)”라고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비록 상윳따니까야에서 각주는 없지만 맛지마니까야에서 각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M스님은 초불연의 보름날 경의 각주에 대하여 매우 고마워 하고 있다. 그리고 성의 있게 각주를 단 것에 대하여 감사의 마음을 담고 있다. 그래서 “각묵스님은 다른 이본들과 일일이 대조하여 자신이 번역한 것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과연 그럴까?
빅쿠보디의 각주를 찾아보니
빅쿠보디의 각주를 찾아 보았다. 먼저 빅쿠보디의 ‘ The Full-Moon Night(S22:82)'에서 문제의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Now, bhikkhus, you have been trained by me through interrogation here and there in regard to diverse teachings.143
(빅쿠 보디, The Full-Moon Night, S22:82, CDB 927p)
이를 직역하면 “이제 빅쿠들이여, 그대들은 여기 저기에서 다양한 가르침에 대하여 질문함을 통하여 나에게 교육받았다.”가 될 것이다. 이는 빠알리 원문 'Paṭipucchāvinitā kho me tumhe bhikkhave, tatra tatra tesu tesu dhammesu.'을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질문함을 뜻하는 interrogation에 해당되는 빠알리어가 ‘Paṭipucchāvinitā’이다. 이 Paṭipucchāvinitā에 대한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 I prefer the reading of the parallel at MN I11 19,12-13, anattakatāni kammāni kam attlānam phusissanti. In the SN text, Be and Se read katham attānam, and Ee katam attlānam, which perhaps should be amended to kam attānam. Spk is silent, but MA explains that this monk had slipped into an eternalist view.
** Patipucch-vinitli kho me tumhe bhikkhave tatra tatra tesu tesu dhammesu. The readings in Ee and MN (Ee) should be amended accordingly. Neither MA nor Spk offers any explanation, but it is clear enough that the "training
through interrogation" is the catechistic method to be applied in the following paragraph.
(각주, 빅쿠 보디, The Full-Moon Night, S22:82, CDB 1077p)
빅쿠보디의 각주를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나는 anattakatāni kammāni kam attlānam phusissanti에 대하여 MN I11 19,12-13와 병행으로 읽기를 권유한다. SN텍스트에서는 Be 와Se는 katham attānam이라 읽고, Ee에서는 katam attlānam이라 읽는다. 이것은 아마도 kam attānam으로 수정 되어야 할 것이다. 주석서(spk)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MA에서는 승려가 영원주의적 견해로 미끄러졌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 Paṭipucchā-vinitā kho me tumhe bhikkhave tatra tatra tesu tesu dhammesu. Ee 와 MN (Ee)에서 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읽기는 적절하게 수정되어야 한다. MA에서 뿐만 아니라 주석서에서도 어떤 설명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어지는 구문에서 적용되고 있는 것처럼 교리문답 방식의 ‘질문함(interrogation)을 통한 교육’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빅쿠 보디 각주, 진흙속의연꽃 번역)
빅쿠 보디에 따르면 빠알리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 경은 제자와 부처님의 질의응답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리문답 방식의 ‘질문함(interrogation)을 통한 교육”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래서일까 빅쿠보디의 번역을 보면 “trained by me through interrogation (질의 응답으로 나에게 훈련된)”의 뜻으로 되어 있다.
각묵스님의 번역에서도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으로 그대들을 훈련시켰다.(S22.82)”라 하여 질의응답을 강조하였다. 이 부분에 대하여 M스님이 크게 공감한 듯 하다. 그 질의응답이라는 말로 인하여 그 동안 쌓였던 의문이 풀렸고 오역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되었다고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묵스님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글을 남겼다. 하지만 이는 빅쿠보디의 번역에 대한 영향이 어느 정도 작용하였으리라 본다. 이는 각주를 보면 알 수 있다.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의 각주를 비교해 보면
보름날 경(S22.82)에서 전재성님은 각주를 남기지 않고 단지 “그 질문에 대해서는 내가 그대들에게 준 가르침 속에서 나는 이미 여러 가지로 대답했다.(S22.82)”라고 번역하여 넘어 갔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나는 이런 법들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으로 그대들을 훈련시켰다. .(S22.82)”라고 하여 대괄호치기를 이용한 주석적 번역을 하였다. 그런데 빅쿠보디의 각주와 각묵스님의 각주가 너무나 유사한 것이다. 이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빅쿠 보디 각주 |
각묵스님 각주 |
*나는 anattakatāni kammāni kam attlānam phusissanti에 대하여 MN I11 19,12-13와 병행으로 읽기를 권유한다.
SN텍스트에서는 Be 와 Se는 katham attānam이라 읽고, Ee에서는 katam attlānam이라 읽는다. 이것은 아마도 kam attānam으로 수정 되어야 할 것이다.
주석서(spk)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MA에서는 승려가 영원주의적 견해로 미끄러졌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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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가 없이 지은 업들은 도대체 어떤 자아와 접촉하는가?;는 맛지마니까야 긴보름밤 경(N109/iii.19) 14절의 anattakatāni kammāni kathamattānaṃ phusissanantī로 읽어서 옮긴 것이다.
Be, Se는 kam attānaṃ 대신에 katham attānaṃ으로, Ee는 Kam attānaṃ으로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맛지마니까야 주석서에는 이 비구는 상견(常見, sassata-dassana)에 빠져 이렇게 말했다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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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ṭipucchā-vinitā kho me tumhe bhikkhave tatra tatra tesu tesu dhammesu. Ee 와 MN (Ee)에서 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읽기는 적절하게 수정되어야 한다.
MA에서 뿐만 아니라 주석서에서도 어떤 설명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어지는 구문에서 적용되고 있는 것처럼 교리문답 방식의 ‘질문함(interrogation)을 통한 교육’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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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법들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으로 그대들을 훈련시켰다.’는 Be, Se : Paṭipucchāvinitā kho me tumhe bhikkhave, tatra tatra tesu tesu dhammesu.를 옮긴 것이다. Ee는 이렇게 고쳐서 읽어야 한다.
주석서는 ‘질의응답을 통한 훈련(Paṭipucchā-vinātā)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바로 아래에 나타나는 오온의 무상-고-무아에 대한 교리문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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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각주를 비교해 보았다. 대체적으로 일치 한다. 공통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라고 되어 있고, Be 와Se 등 판본이 언급되어 있다. 빅쿠 보디의 CDB가 먼저 출간 되었기 때문에 초불연에서 참고하여 각주를 단 것이라 보여진다. 그러나 M스님은 “각묵스님은 다른 이본들과 일일이 대조하여 자신이 번역한 것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M스님, 번역의 중요성과 어려움)”라고 극찬하였다. 과연 그럴까? 일대일 대조를 해보면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에 M스님이 언급한 내용과 다르다. 만약 초불연에서 CDB의 것을 참고하지 않았다면 Be 와Se 등 판본까지 언급된 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있을까?
어떤 번역이 잘 된 번역일까?
어떤 번역이 잘 된 번역일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다. 게송이라면 그대로 번역해야 한다. 설령 수수께끼 같은 게송일지라도 그대로 두어야 한다. 설명이 필요하다면 각주에서 하면 된다. 게송은 상징적 언어로 쓰여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묘미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우고 심지어 주문처럼 입에 달고 다니기도 한다. 그런데 각주에나 있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실려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초심자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지 몰라도 원음을 크게 훼손하게 된다. 특히 수수께끼 같은 게송으 그렇다. 그 차이가 어떤 것인지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금새 드러난다.
구 분 |
내 용 |
비 고 |
빠알리 원문 |
Nāphusantaṃ phusati ca phusantaṃ ca tato phuse |
|
각묵스님역 |
[업을] 짓지 않은 자에게 [과보는] 닿지 않고 [업을] 지은 자에게 [과보는] 닿습니다. |
주석적 번역 |
전재성님역 |
접촉하지 않는 자에게 접촉하지 않지만 접촉하는 자에게 접촉하리. |
원문번역 |
빅쿠 보디역 |
It does not touch one who does not touch |
원문번역 |
게송에 대한 번역이 어렵다고 한다. 운문은 산문과 달리 고도로 상징적 의미가 함축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각묵스님은 상윳따니까야 해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쏟아지는 게송을 운치있게 옮겨낸다는 것은 역자에게는 너무 큰 부담이었고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역자는 문학적인 자질이 없는 사람이라서 오직 게송을 잘못 이해하여 오역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역자는 가급적이면 주석서의 전통적 이해를 그대로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각묵스님, 상윳따니까야 1권 해제)
각묵스님의 글에 따르면 게송번역이 가장 어려웠음을 실토 하고 있다. 그래서 “가급적 주석서의 전통적 이해를 그대로 따르려고 노력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주석적 번역에 대한 언급이다. 그래서일까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도처에서 대괄호치기를 이용한 주석적 번역을 볼 수 있다. 이런 주석적 번역에 있어서 게송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업을] 짓지 않은 자에게 [과보는] 닿지 않고 [업을] 지은 자에게 [과보는] 닿습니다.”와 같은 주석적 번역이 나오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주석적 번역에 대하여 찬성하는 사람도 있다. M스님도 주석적 번역에 대하여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워 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석적 번역을 하면 원음이 크게 훼손된다. 원문에 없는 내용이 삽입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쩐 일인지 M스님은 각묵스님의 번역에 대하여 “위에 인용한 전재성 번역과 각묵스님의 번역을 비교해 보라. 누구의 번역이 더 원문에 충실한 번역인가를(M스님, 번역의 중요성과 어려움)”이라 하였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주석적 번역이 원문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임에도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라니!
보통불자가 번역비교를 하였더니
보통불자가 번역비교를 하면서 주로 초불연의 주석적 번역에 비판 하였다. 이런 비판에 대하여 불편해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M스님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처럼 번역은 참으로 중요하면서도 또한 힘든 작업이다. 역경가들은 이렇게 힘들여 작업한 번역물들을 세상에 내놓는다. 붓다의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널리 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원전을 읽을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번역서의 도움을 받아 원전의 내용을 이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자의 노고에 대한 칭찬에는 매우 인색하다. 후학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고 비난하기 일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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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훌륭한 번역은 다른 논문에 인용되어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번역은 사라지게 된다. 마치 시장의 원리에 의해 수요와 공급이 이루어지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필자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못 번역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고, 오직 잘못된 번역이나 오류에 대해서 주로 지적한다. 이처럼 역경가들이 욕을 먹는 것은 그들이 감당해야 할 숙명인지 모르겠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역경작업에 종사하지 않는 필자는 상대적으로 욕을 덜 먹는다. 불행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M스님, 번역의 중요성과 어려움)
M스님은 번역자의 어려움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오로지 번역에 매진하고 있는 역경가들이 칭찬 보다 비난 받기 일쑤라는 것이다.
건전한 비판은 장려하고 격려 되어야
비난과 비판은 다르다. 또 비방과 비판도 다르다. 접촉의 경(Phusatisutta, S1.22)에서와 같이 허물 없는 자에게 비방하고 중상모략하는 것은 커다란 죄업이 된다. 그러나 비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만일 이 세상에 비판 기능이 사라진다면 악취가 날 것이다. 따라서 건전한 비판은 수용되어야 한다. 특히 공인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조계종 청규에 따르면 모든 스님은 공인이라 하였으므로 일거수일투족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번역물 역시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더구나 불자들의 신행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번역물에서 잘못이 발견된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불법의 쇠퇴로 이어진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건전한 비판은 장려하고 격려 되어야 한다.
2013-11-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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