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왜 다툼을 하는가? 세 가지 자만과 자만이라는 족쇄가 뿌리뽑힌 자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11. 11:27

 

왜 다툼을 하는가? 세 가지 자만과 자만이라는 족쇄가 뿌리뽑힌 자

 

 

 

번역비교 글을 올리고 있다. 주로 상윳따니까야이다. 상윳따니까야에서 첫 번째 상윳따에 속하는 데와따상윳따(S1)에 대하여 처음 경부터 차례대로 올리고 있다. 그래서 현재 20번째 경인 사밋다의 경(S1.20)’에 이르렀다.

 

번역비교를 하는 이유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전재성님의 번역과 초기불전연구원의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의 번역이다. 이렇게 두 종류의 번역을 갖게 된 것은 한국불자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행운이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번역서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가와 제도권불교에서는 과도하게 한쪽 방향으로 치우쳐저 있다. 그래서 비구들이여로 시작되는 경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본다.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는데 한편은 스님들이 번역한 것이라 하여 제도권 불교에서 교재로 채택하고, 또 한편에서는 재가불자가 번역한 성과물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너무나도 이상 하였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다른지 번역비교를 해보고 싶었다.

 

CDB번역에 주목하는 이유

 

번역비교를 하는데 있어서 네 가지 텍스트를 참고로 하고 있다. PTS에서 제공되는 빠알리원전과 초불연의 번역, 성전협의 번역, 그리고 빅쿠보디의 CDB번역이다. 특히 CDB번역에 주목한다. 아직까지 불자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고 접하기가 쉽지 않은 번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검색결과 책이 모두 복사되어 인터넷에 올려져 있음을 확인 하였다. ‘The Connected Discourses of the Buddha(CDB)’라는 일권(CDB1)과 이권(CDB2)이 올려져 있는 것이다.

 

빅쿠보디의 CDB번역을 주목하게 된 것은 초불연의 상윳따니까야 해제글 때문이다. 초불연의 해제글에서 각묵스님은 역자가 꼭 밝히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본서 번역에 있어서 보디 스님이 10여 년간 노력하여 번역 출간한 ‘상윳따 니까야’ 영역본인 The Connected Discourses of the Buddha(vol. 1&2)를 많이 참조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보디 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달아 놓은 주옥 같은 주해들은 역자의 번역과 주해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라고 써 놓았기 때문이다. 초불연의 상윳따니까야 번역에 있어서 CDB를 많이 참고하였다는 뜻으로 받아 들인다. 그래서 번역비교를 하는데 있어서 빅쿠보디의 번역과 각주를 참고하여 비교 하게 되었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것

 

니까야 번역비교를 보통불자가 시도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전문적으로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스님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보통불자로서 현실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마다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하는 의문에서 빠알리니까야를 떠들어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 되었다.

 

이렇게 번역비교를 하는 것은 자발적이다. 이는  걸식의 경에서 부처님이 결코 왕이 강요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고, 빚을 졌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그런 것도 아니다. (S22:80)”라고  탁발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 하셨듯이, 번역비교 하는 것 역시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이득을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것이다. 번역비교를 함으로 인하여 더 정학하게 원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관련된 경들을 알게 되는 부가효과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자만심에 대한 게송

 

상윳따니까야 사밋디의 경(S1.20)’은 마치 소설적 구성으로 되어 있는 긴 길이의 경이다. 그래서 짤막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와따상윳따(S1)와 매우 구별된다. 사밋디의 경에서는 많은 게송이 나온다. 그 중에 자만심에 대한 게송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Samo visesī udavā nihīno yo maññati so vivadetha tena,

Tīsu vidhāsu avikampamāno samo visesīti na tassa hoti,

 

 

동등하다거나 뛰어나다거나 못하다고 여기는 자

그 때문에 사람들과 논쟁하게 되노라.

이 세 가지 자만심에 흔들리지 않는 자

동등하다거나 뛰어나다는 것 존재하지 않도다.”

 

(사밋디 경, 상윳따니까야 S1.20, 초불연 각묵스님역)

 

 

[세존]

같다, 낫다, 또는 못하다’,

이같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 때문에 싸우네.

이 세 가지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님에게는

같거나 나은 것이 없다네.”

 

(싸밋디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0, 성전협 전재성님역)

 

 

One who conceives 'I am equal, better, or worse,'

Might on that account engage in disputes.

But one not shaken in the three discriminations

Does not think, 'I am equal or better.'

 

(CDB, 빅쿠보디역)

 

 

 

self-conceit

 

 

 

이 게송이 나오게 된 것은 하늘사람의 자만심(māna)’ 때문이다. 이는 게송의 말미에 부처님이 만약 야차여, 당신이 안다면 말해 보시오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야차(하늘사람)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저는 세존께서 간략하게 가르쳐 주신 말씀의 뜻을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라고 발뺌하는 것에서도 역시 알 수 있다. 하늘사람(야차)이 새내기 수행승에게 머리가 칠흑같이 검은 젊은 시절에 마음껏 감각적 쾌락을 누리고 수행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꼬드기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이 게송으로서 질문한 것이다.

 

부처님은 자만심에 대하여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 이렇게 세 종류로 설명하고 있다. 자만심에 대한 이와 같은 분류방법은 놀라운 것이다. 대게 우월감만이 자만심인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대한 상윳따니까야에서 제1권 제1상윳따에서 자만심에 대하여 명쾌하게 정의 하였다. 자만심은 우월감뿐만 아니라 동등감도 자만심이고, 심지어 열등감도 자만심이라는 사실이다!

 

아주 불쌍한 사람을 만났을 때

 

세 가지 자만심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강연에서 알게 되었다.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에서 전재성님이 법문을 하였는데 이를 녹취하여 글(“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전재성박사의 동국대 정각원 법회를 보고)을 올린 바 있다.

 

전재성님은 세 가지 자만심에 대한 이야기는 사밋디의 경에 있는 내용과 똑같다. ,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강연에서 누구나 알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전재성박사는 대중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들이 길을 가다가 아주 가난한 사람을 만났어요. 아주 가난하고 초라하고 빈곤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마음에 어떤 생각을 해야 죄를 짓지 않은 것일까요. 어떻게 해야 잘못이 없겠습니까?

 

(전재성박사,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 2012-03-03일자, 미디어붓다 2012-04-10)

 

 

길이나 전철에서 걸인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전철에서 보는 걸인들 중에는 신체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볼 수 있고 매우 불행에 처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았을 때 어떤 마음이 드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불쌍한 사람을 보았을 때 그런 사람들을 보았을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죄를 짓지 않는 바른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박사는 대중들에게 어떠한 생각을 해야 될 것인지에 대하여 여러 차례 되묻는다.

 

불행에 처한 사람들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유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라 한다. 왜 그럴까. 불쌍하고 느꼈다면 우월감에 빠질 수 있고, 상대방은 자괴심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불쌍하다는 마음을 일으킨 것이 올바른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일으켜야 할까. 그런데 칸트철학이나 서양철학을 뒤져 보아도 안나온다는 것이다. 선불교를 아무리 닦아도 그 답은 안 나온다고 한다.

 

이주 부유한 사람을 만났을 때

 

이번에는 반전을 시도하는 질문을 던진다. 거꾸로 부유한 사람을 만났을 때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굉장히 부자가 지나간다고 봅시다. 어마 어마하게 잘살고, 어마하게 검은세단을 타고 아주 부유한 사람이 지나간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한 마음이 들까요.

 

(전재성박사,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 2012-03-03일자, 미디어붓다 2012-04-10)

 

 

이번에는 어마어마한 부자에 대하여 말한다. 고급아파트에 살며 최고급승용차를 몰고 최고급 브랜드의 옷을 걸친 부자를 보았을 때 어떠한 마음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앞서 걸인과 비교되는 것이다. 아주 불행한 자와 매우 행복한 자를 대비하여 질문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매우 부유한 자를 보았을 때 일어나는 마음은 “부럽다”이다. 그런데 이런 부러운 마음이 과연 올바른 마음이냐는 것이다.

 

세 가지 자만에 따른 번뇌

 

전박사는 “불쌍하다” 또는 “부럽다”라는 마음은 올바른 마음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마음을 가졌을 때 ‘번뇌’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이와 같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초기경전의 가르침에 따르면 열등감이나 우월감이나 동등한 감정 이런 감정이 다 자만심이라 했어요. 자만심을 부처님이 세가지로 구분했어요. 열등감, 이것도 일종의 자만심이에요. 우월감, 이것은 당연히 자만심이죠. 그 다음에 동등하다는 것도 자만심이에요.

 

(전재성박사,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 2012-03-03일자, 미디어붓다 2012-04-10)

 

 

자만심에는 세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이다. 그런데 우월감 뿐만 아니라 동등감과 열등감도 자만심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중 열등감도 자만심에 해당한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상대를 인정하려 하지 않을 때

 

열등감도 자만심인 이유는 이런 것이다. 나보다 더 나은 자가 있다.그는 학력도 높고 잘 생기고 인품도 원만해 보인다. 더구나 재산도 많다. 그것도 나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재산형성 과정에 의문을 품는다. 혹시 불법, 탈법, 투기를 일삼아서 형성된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그래서 무시한다. 이것이 열등감이다. 나 보다 잘난 남에 대하여 인정하려 않고 깍아내리는 것이다.

 

한국불교는 17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그러다보니 스님들은 종종 기독교와 비교하곤 한다. 전래 된지 불과 200여년 밖에 되지 않는 천주교와 이제 100년이 조금 지난 기독교는 비교대상이 아니라 한다. 또 불교의 우수한 교리를 예를 들어 마치 유치원 동화 같은 창조론 등을 반박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지금 불교세가 기독교에 밀려, 사회 전분야에서 기독교가 주류로 부상하였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열등감이다. 1700년 역사와 전통을 운운하면서 상대방의 종교를 애써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런 열등감 역시 자만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대를 인정하려 하지 않을 때 다툼이 일어난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서 부처님은 “사람이 ‘동등하다’든가 ‘우월하다’든가‘열등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때문에 다툴 것입니다.(Sn4.9)”라고 말씀 하셨다. 우월한 자는 우월심으로 사람들을 깔보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고, 열등한 자는 자신 보다 뛰어난 자를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현실세계 뿐만 아니라 넷상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우월감을 바탕으로 한 자비심은

 

전재성님의 강연에서 감동한 것은 우월감에 대한 태도에 대한 것이다. 이제까지 나 보다 가난한고 불행해 보이는 자를 보면 자비의 마음을 내라고 교육 받았으나 전재성님의 강연을 들으면 이런 고정관념을 뒤집어 엎는다. 자비를 내는 사람과 자비를 받는 사람의 관계가 불평등함을 말한다. 한편에서 자비심을 낸다고 하여 측은한 마음으로 도와 준다고 하지만, 반대로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는 결코 기분이 좋을 리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월감을 바탕으로 한 자비심은 다름 아닌 자만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으로 자애의 마음을 내어야 할까? 전재성님은 강연에서 상윳따니까야에서 불행의 경(S15:11)’을 낭송하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Duggata-불행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11, 전재성님역)

 

 

 한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며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 불쌍하고 불행에 처한 사람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라 한다. 왜냐하면 자비를 배푸는 자나 자비의 배품을 당하는 자나 모두 동등하게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자애사상은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자애사상은 중생계가 다하는 한, 허공계가 다하는 한 남김 없이 성불시키겠다는 대승보살의 우월적 지위에 따른 거창한 자비와 다른 것이다. 또 “우주공간이 존재하고 중생이 남아 있는 한 나 역시 여기 남아서 세상의 고난을 없애도록 하소서 !” 라고 외친 산띠데바류의 공허한 발원과도 다르다. 우월감 없이 한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자만없는 마음으로 대하였을 때 진정한 자애의 마음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소나의 경(S22:49)’에서

 

초기경에서 자만심이 우월감 뿐만 아니라 동등감, 심지어 열등감도 자만심이라고 하였다. 이는 전에 듣지 못하던 놀라운 가르침이다. 특히 자비에 대한 이제까지의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가난한 자나 동등한 자나 부자를 대하는 태도가 한 순간에 바뀐 것이다. 바로 이런 가르침이 타종교에서는 볼 수 없었고 아직까지 다른 사상에서도 접해 보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자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된 경이 있다. 성전협과 초불연, CDB의 각주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된 경은 S22:49이다. S22:49를 찾아 보았다.

 

 

[세존]

쏘나여, 어떠한 수행자이건 성직자이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물질을 두고 나는 우월하다고 여기고 나는 동등하다고 여기고 나는 열등하다고 여긴다면 누구든지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자 밖에 될 수 없지 않은가?

 

(Pahamasoa sutta-쏘나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49, 전재성님역)

 

 

경에서 부처님은 오온에 대하여 자만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오온이라는 것이 무상하고 끊임 없이 변화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오온에 대하여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을 느껴서야 되겠느냐는 말씀이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이와 같은 세 가지 교만에 대하여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The "three discriminations" (tayo vidha) are the three modes of conceit: the conceit "I am better" (seyyo 'ham asmimanu), the conceit "I am equal" (sadiso 'ham asmimdna), and the conceit "I am worse" (hino 'ham asmimana). See 22:49 (I11 48-49), 45:162, 46:41. At Vibh 389-90 it is shown that these three become ninefold in so far as each triad may be entertained by one who is truly better, truly equal, or truly worse. one "not shaken in the three discriminations" is the arahant, who alone has completely eradicated the fetter of conceit. Spk points out that the first couplet shows how sensual pleasures are time-consuming, while the second couplet discusses the supramundane Dhamma

 

(빅쿠보디 각주, CDB 355p)

 

 

이를 번역해 보았다.

 

 

세 가지 분별(tayo vidhā)은 세 가지 자만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 자만은 내가 더 낫다(seyyo 'ham asmimāna)”,  나는 동등하다(sadiso 'ham asmimāna)”, “나는 못하다(hino 'ham asmimāna)”이다. 22:49 (I11 48-49), 45:162, 46:41. 보라. At Vibh 389-90 에서는 이들 세 가지 자만이 더욱 더 확장되어 진짜 좋은, 진짜 동등한, 진짜 나쁜 형식으로 되어 삼개조로 형성된 아홉가지 형태로 보여진다.

 

누군가 세 가지 분별에 흔들리지 않는다라 한다면 그는 아라한이다. 아라한은 자만이라는 족쇄가 뿌리뽑힌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한다. 2행연구의 첫 번째 구절은 감각적 욕망이 시간을 소모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고, 두 번째 구절은 출세간의 담마에 대한 말씀이다.

 

 

이 부분에 대한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뛰어나다(visesi, seyya), 동등하다(sama, sadisa), 못하다(nihina, hina)라는 이 세 가지는 세 가지 자만 (mana)이라 불리고 본 게송에서처럼 자만심(vidha)이라고 불린다. 세 가지 자만심은 본서 제3권 「소나 경」1(S22:49) §3과 제5권 「자만심 경」(S45:162) §3과 「자만심 경」(S46:41) §3에도 나타나며, 이것은 『위방가』(Vbh.389~390)에서 9가지로 확장되어 설명되고 있다. 『위방가』의 9가지는 뛰어남(seyya)과 동등함(sadisa)과 못함(hina)의 셋을 다시 뛰어남의 뛰어남 등(pali 원문 생략)의 아홉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초불연 각주)

 

 

빅쿠보디와 초불연 각주에서는 소나경(S22:49)와 자만심 경(S46:51)을 참고하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위방가에서는 자만이 삼개조로 형성된 9가지 형태로 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진짜 좋은, 진짜 동등한, 진짜 나쁜 (truly better, truly equal, or truly worse)” 형식이라 하였다.

 

자만이라는 족쇄가 뿌리뽑힌 자

 

그런데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초불연과 성전협의 각주에서 볼 수 없는 내용이 더 있다. 그것은 아라한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라한은 자만이라는 족쇄가 부수어졌기 때문에 자만이라는 족쇄가 뿌리뽑힌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무슨이야기일까? 각주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자만이 제거 되어 아라한이 되었다는 경이 있다. 이전에 어떻게 자만(mana) 제거할 것인가? 초기불교의 훈습(熏習)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던 케마까의 경(S22:89)이 그것이다.

 

케마까경에 따르면 자만이 제거하는 과정이 묘사 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케마까]

벗들이여, 예를 들어 더러워져 때가 묻은 옷이 있는데, 주인은 그것을 세탁업자에게 맡겼고, 세탁업자는 그것을 소금물이나 잿물이나 쇠똥에 고루 뒤섞어, 맑은 물에 세탁했다고 합시다.

 

아무리 그 옷이 청정하고 깨끗하더라도 아직 거기에는 남아 있는 소금물 냄새나 잿물냄새나 쇠똥냄새가 가신 것은 아닙니다. 세탁업자가 그것을 주인에게 주면, 주인은 그것을 향기가 밴 상자에 넣어 보관해서, 그는 거기에 배어있는 소금물냄새나 잿물냄새가 쇠똥냄새를 없애버립니다.

 

(Khemaka sutta-케마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89, 전재성님역)

 

 

‘냄새가 밴다’는 훈습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무리 옷을 깨끗이 빨아도 비누 냄새 등이 남아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 냄새를 제거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에서는 ‘향기가 밴 상자(gandhaparibhāvite karaṇḍake)’를 언급하였다. 향기가 밴 상자안에 세탁물을 넣으면 비누 냄새 등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향기가 밴 상자는 무엇을 뜻할까?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gandhaparibhāvite karaṇḍake  : Srp.II. 317에 따르면, ‘번뇌를 부순 자가 가진 계행의 향기와 비교된다. 배우지 못한 범부의 정신은 흙 묻은 옷과 같다. 세 가지 특징(삼법인)에 대한 명상은 그것을 씻는 세 가지 세척제와 같다.

 

돌아 오지 않는 님(불환자)의 정신은 이 세 가지 세척제로 세탁을 한 것과 같다. 거룩한 경지를 향하는 길의 지혜는 향기로운 냄새가 배어 있는 상자와 같다. 길을 통한 모든 번뇌의 파괴는 옷이 향기 상자에 넣어진 뒤에 세척제의 남은 냄새가 모두 제거 되는 것과 같다.

 

(gandhaparibhāvite karaṇḍake 각주, 전재성박사)

 

 

주석에 따르면 냄새가 배어 있는 옷은 배우지 못한 범부의 정신상태와 같은 것이라 한다. 탐욕, 성냄 등 온갖 오염원으로 가득찬 범부의 옷을 세탁하려면 불환자의 정신으로 세탁해야 함을 말한다. 불환자가 되면 다섯 가지 거친 결박은 제거 되기 때문이다. 특히 탐진치 삼독중에 탐욕과 성냄이 완전히 제거 된 상태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자만’ 등 다섯 가지 미세한 마음의 오염원이 그것이다. 이런 오염원은 아라한이 되어야 없어진다. 경에서 빨래를 마친 옷에서 나는 비누냄새 마저 없애기 위하여 향기가 배어 있는 상자 이야기를 하였다. 향기가 배어 있는 상자에 빨래한 옷을 넣으면 비누 냄새도 잡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이때 향기가 배어 있는 상자가 아라한의 정신과 같은 것이다. 아라한이 되면 자만 등 미세한 오염원이 남김 없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아라한이 되어야 없어지는 자만

 

전에 올렸던 글에서 일부 가져와 설명한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한이 되면 자만이라는 결박이 사라진다. 즉 아라한이 되면 색계 집착(rūpa-rāga), 무색계 집착(arūpa-rāga), 자만(māna), 들뜸(uddhacca), 무명(치심, avijjā) 이렇게 다섯 가지 결박이 풀려서 더 이상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된다. 어찌보면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결박(오상분결)은 아라한이 되기 까지 동력으로 작용했는지 모른다. 특히 나와 너를 구분하는 자만이라는 번뇌가 아라한이 되기 위한 원동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자만이라는 동력을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됨을 말한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기 이전, 즉 아나함에 이르기까지는 번뇌를 소멸 하기 위하여 비누냄새가 나는 세탁세제를 이용하였다면,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자만이라는 비누냄새를 지워 버려야 한다. 그래서 경에서는 지혜라는 향기가 베어 있는 상자에 넣을 것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향기나는 지혜상자에 세탁물을 넣어 비누냄새가 제거 되었을 때 향기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번뇌다한 아라한은 지혜의 향기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빅쿠보디는 각주에서 아라한은 자만이라는 족쇄가 뿌리뽑힌 자라고 설명한 것이라 보여진다.

 

이와 같은 아라한과 자만에 대한 이야기는 두 번역서에 보이지 않고 오로지 빅쿠 보디의 각주에만 보인다. 그러나 빅쿠 보디의 각주에도 자만이 소멸되는 경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초기경을 읽고서 전에 글을 올렸던 케마까의 경(S22:89)’에서 어떻게 자만이 사라지는지에 대하여 언급해 보았다.

 

 

 

2013-11-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