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이나 말에 속지 말자, 전도된 지각 상락아정(常樂我淨)
암호문 같은 게송
‘사밋디의 경(S1.20)’에서 하늘사람과 대화를 마친 사밋디는 부처님에게 알린다.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 수행승인 사밋디에게 있어서 하늘사람의 유혹은 감내 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부처님에게 이야기 한다. 보고가 끝나자 하늘사람이 부처님 앞에 나타난다. 이미 내용을 들어서 알고 있는 부처님은 하늘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Akkheyya saññino sattā akkheyyasmiṃ patiṭṭhitā,
Akkheyye apariññāya yogamāyanti maccuno.
표현할 수 있는 것(오온)을 인식하는 중생들은
표현할 수 있는 것에 머물러 있나니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철저하게 알지 못하면
죽음의 굴레에 매이게 되도다.
(사밋디 경, 상윳따니까야 S1.20, 각묵스님역)
[세존]
말해질 수 있는 것을 지각한 존재들은
말해질 수 있는 것 가운데 확립되지만,
말해질 수 있는 것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
죽음의 영역에 떨어지네.
(싸밋디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0, 전재성님역)
Beings who perceive what can be expressed
Become established in what can be expressed.
Not fully understanding what can be expressed,
They come under the yoke of Death.
(빅쿠보디, CDB)
번역을 보면 마치 암호문 같아 보인다. 고도의 의미가 함축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은 각주를 참고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세 번역자의 각주를 보면 공통적으로 ‘Akkheyya saññino sattā’에 대하여 ‘오온’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전래되는 주석서에 그렇게 표현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빅쿠보디는 ‘Beings who perceive what can be expressed’라 하여 ‘표현된 것을 인식하는 존재들’라는 뜻으로 번역하였고, 각묵스님은 ‘표현할 수 있는 것(오온)을 인식하는 중생들’이라 하여 ‘오온’이라는 말을 괄호치기 하였다. 전재성님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을 지각한 존재들’이라 하였다.
전도된 지각 상락아정(常樂我淨)
경에서 ‘표현되다’ 또는 ‘말해지다’라는 빠알리어가 Akkheyya이다. Akkheyya는 ‘말해지는 것’의 뜻이 있지만, 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오온’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빅쿠보디와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공통적으로 AN.II.52 를 참고 하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빅쿠 보디는 ‘vipalldsa AN.II.52, 4-8’ 이라 하여 경의 이름까지 표현 하여 놓았다. 그래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Vipallāsasutta-전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4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네 가지에 대하여 지각, 마음, 견해의 전도가 있다고 하였다. 그 네가지란 무엇일까? 불자들이라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락아정’이다. 이 상락아정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하여 항상하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하여 즐겁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실체없음에 대하여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더러운 것에 대하여 청정하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Vipallāsasutta-전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49, 전재성님역)
흔히 무상, 고, 무아라고 말하는데 더러운 것을 하나 더 추가하여 네 가지가 되었다. 이렇게 네 가지에 대하여 전도된 지각을 가졌을 때 상락아정이 된다. 그렇다면 상락아정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어떻게 마음의 오염이 일아나는가?
상락아정에 일어나는 요인은 첫번째로 지각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지각의 오염은 마음의 오염을 초래하고, 마음의 오염은 견해의 오염으로 확대 된다. 그래서 네 가지, 즉 상락아정에 대하여 경에서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A4.49)”라고 표현 한 것이다.
이렇게 지각과 마음과 견해가 오염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표적으로 문둥병환자를 들 수 있다. 문둥병환자는 불속에서도 즐겁다는 전도된 지각을 갖는다. 가려움이 극에 달하여 불에 지졌을 때 오히려 시원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비유를 든다면 ‘숲속의 귀신’을 들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산길을 걷다고 숲속에서 움직이는 물체를 보았다고 하자. 그 때 귀신이라고 생가할 수 있다. 마치 밤중에 새끼줄을 모르고 밝았는데 뱀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지각의 오염’이다. 그런데 지각의 오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귀신을 보았다는 전도된 지각과 함께 마음에서 공포가 일어난다. 이것이 ‘마음의 전도’이다. 자신이 귀신들렸다고 마음에서 공포가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귀신을 떼어 버리기 위하여 ‘퇴마사’를 찾아 갈 것이다. 이것이 ‘견해의 전도’이다. 이렇게 전도된 지각은 마치 도미노처럼 마음과 견해의 전도를 일으켜서 그 사람을 무너뜨리게 된다.
종으로 횡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가르침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1.
Anicce niccasaññino dukkhe ca sukhasaññino,
Anattani ca attāti asubhe subhasaññino.
무상에 대하여 항상하다고
괴로움에 대하여 즐겁다고 지각하고
실체없음에 대하여 실체가 있다고
더러움에 대하여 청정하다고,
2.
Micchādiṭṭhigatā sattā khittacittā visaññino,
Te yogayuttā mārassa ayogakkhemino janā.
삿된 견해에 빠지고 마음이 혼란하여
지각이 전도된 자들은
악마의 멍에에 묶여
멍에로부터 안온을 얻지 못하고,
3.
Sattā gacchanti saṃsāraṃ jātimaraṇagāmino,
Yadā ca buddhā lokasmiṃ uppajjanti pabhaṅkarā.
뭇삶들은 태어남과 죽음으로 이끄는
윤회를 거듭하지만,
광명을 비추는
깨달은 님들이 세상에 출현하여,
4.
Temaṃ dhammaṃ pakāsenti dukkhūpasamagāminaṃ,
Tesaṃ sutvāna sappaññā sacittaṃ paccaladdha te.
괴로움의 종식으로 이끄는
이러한 가르침을 밝히네.
지혜로운 님들은
그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성찰하니.
5.
Aniccaṃ aniccato dakkhuṃ dukkhamaddakkhu dukkhato,
Anattani anattāti asubhaṃ asubhataddasuṃ,
Sammādiṭṭhisamādānā sabbaṃ dukkhaṃ upaccagunti.
무상을 무상으로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실체없음을 실체 없음으로
더러움을 더러움으로 관찰하고
올바른 견해를 취하여
일체의 괴로움을 제거하네.
(Vipallāsasutta-전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49, 전재성님역)
앙굿따라니까야 ‘전도의 경’을 보면 상윳따니까야의 ‘사밋디의 경’에 실려 있는 게송을 모두 설명한듯이 보인다. 사밋다의 경 게송에서 “말해질 수 있는 것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 죽음의 영역에 떨어지네.(S1.20)”라 하였는데, 이는 전도의 경 게송에서 “지각이 전도된 자들은 악마의 멍에에 묶여 멍에로부터 안온을 얻지 못하고, 뭇삶들은 태어남과 죽음으로 이끄는 윤회를 거듭하지만(A4.49)”구절과 같은 뜻이다. 이로 보았을 때 부처님의 말씀은 종으로 횡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명칭이나 말에 속지 말자고
사밋디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이나 언어로 표현된 개념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 중생, 천신이니 하는 말은 하나의 표현에 불과한 개념임에도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명칭이나 말에 속게 되면 죽음의 굴레에 매이게 된다고 본 게송에서 부처님께서는 강조하신다. 명칭이나 말에 속지 않고 이런 것들은 단지 오온일 뿐임에 사무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다. 이렇게 볼 때 오온 각각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가 드러나게 되고, 이처럼 오온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에 사무칠 때 염오-이욕-소멸 혹은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가 드러나서 깨달음을 실현하고 해탈ㆍ열반을 실현하게 된다고 본서 제3권 「무더기 상윳따」(S22)의 많은 경들은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3권 「무상 경」(S22:12) §3의 주해를 참조할 것.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의 각주에 따르면 명칭이나 말에 속지말자고 한다. 그리고 오온을 해체하여 보았을 때 무상, 고, 무아가 드러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무상, 고, 무아에 ‘사무치자’고 하였다. 여기서 ‘사무치다’는 말은 ‘강하게 느끼다’라는 말이다. 아마도 지역에서 많이 쓰는 말같다.
‘억수로’와 ‘겁나게’
이렇게 특정지역에서 많이 쓰는 말 가운데 ‘억수로’라는 말이 있다. 이는 ‘대단히 많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런 특정 지역에서 쓰는 말이 경전에 삽입되어 번역 되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실제로 그런 예가 있다.
각묵스님이 번역한 상윳따니까야 기반경(S12:23)에서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이러하다. 산꼭대기에 억수같이 비가 내리면…(S12:23)”이라는 문구가 있다. 놀랍게도 특정 지역에서 사용되는 말인 ‘억수같이’라는 말이 번역어로 사용된 것이다. 이 문구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비가 굵은 알갱이가 되어 떨어질 때…(S12:23)”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억수같이’ 라 하였지만 전재성님은 ‘굵은 알갱이가 되어’라 하여 표현 방법이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억수로'라는 말은 '매우 많이'라는 뜻이디. 그런데 이와 비슷한 말로 또 다른 특정지역에서는 ‘겁나게’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래서 ‘억수로’와 ‘겁나게’는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만일 어떤 번역자가 ‘겁나게’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산꼭대기에 겁나게 비가 내리면(S12:23)”이라고 하였을 때 과연 수용할 수 있을까?
대미를 장식하는 게송
사밋디경은 긴길이의 경이다. 게송과 산문이 번갈아 나오며 소설적 구성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게송을 보면 마치 암호문 처럼 되어 있어서 각주를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사밋다경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게송 역시 암호문 같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Pāpaṃ na kayirā vacasā manasā kāyena vā kiñcana sabbaloke,
Kāme pahāya satimā sampajāno dukkhaṃ na sevetha anatthasaṃhitanti.
이 세상 어디서도 악 행하지 말지라.
감각적 욕망 끊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려
고통주고 이익 주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 결코 받들어 행하지 말지라
(사밋디 경, 상윳따니까야 S1.20, 각묵스님역)
[하늘사람]
온 누리 어떠한 세계에서도
언어와 정신과 신체로 악을 짓지 말지니,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떠나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
고통스럽고 해로운 길을 좇지 말아야 하리.
(싸밋디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0, 전재성님역)
One should do no evil in all the world,
Not by speech, mind, or body.
Having abandoned sense pleasures,
Mindful and clearly comprehending,
One should not pursue a course
That is painful and harmful.
(빅쿠보디, CDB)
이 게송에 각주를 보면 십선과 팔정도를 설명한 것이라 한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이에 대한 빅쿠 보디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Spk explains the avoidance of evil in body, speech, and mind by way of the ten courses of wholesome kamma (see MN I 47~2-172,8 7-288, etc.).The phrase having abandoned sense pleasures rejects the extreme of indulgence in sensual pleasures; one should not pursue a course that is painful and hamful rejects the extreme of self-mortification. Thus, Spk says, the verse points to the middle way that avoids the two extremes.
The whole verse can also be construed positively in terms of the Noble Eightfold Path: doing no evil by body and speech implies right speech, right action, and right livelihood; "mindful" implies right effort, right mindfulness, and right concentration; "clearly comprehending" implies right view and right intention.
(빅쿠보디 각주, CDB)
이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도덕적으로 해로운 열가지 업에 따라 몸으로, 말로, 그리고 마음으로 짓는 악업을 피함으로 설명된다, 구절에서 감각적 쾌락을 포기하는 것은 감각적 쾌락들을 탐닉하는 극단을 거절하는 것이다. 또 고통을 수반하고 유해한 히자기학대의 극단을 거절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게송의 요점은 양극단을 피하는 중도에 대한 것이다.
전체 게송은 팔정도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사용하여 재구성할 수 있다. 몸으로 말로 악을 행하지 않은 것은 바른 언어(right speech) 와 바른 행위(right action)와 바른 생활(right livelihood)로 함축된다. 마인드풀은 바른 노력(right effort)과 바른 마음챙김(right mindfulness)과 바른 집중(right concentration)을 의미한다.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바른 견해(right view)와 바른 사유(right intention)를 의미한다.
게송에 대한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주석서는 이 게송을 10선업도와 팔정도와 중도와 연관 지어서 설명하고 있다. 즉 말과 마음과 몸으로 악을 행하지 않음은 각각 말로 네 가지, 마음으로 세 가지, 몸으로 세 가지인 십선업도를 말씀하신 것이고 감각적 욕망을 버림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도 여기에 관계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팔정도로 설명하는 방법은 이러하다. 말과 몸으로 악을 행하지 않음은 팔정도의 바른 말과 바른 행위와 바른 생계에 배대되고 마음챙김은 바른 정진과 바른 마음챙김과 바른 삼매에 배대되고 알아차림은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에 배대된다.
그리고 본 게송에 나타나는 감각적 욕망을 버리는 것과 괴로움과 해로움과 관련된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각각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것과 자신을 학대하는 것을 버리는 것이니, 이것은 두 가지 극단(anta-dvaya)을 피하는 것(vajjana)이어서 양 극단을 따르지 않는 중도(中道, majjhima-patipada)를 드러낸 것이라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 역시 10선도와 팔정도에 설명이라 한다. 특히 팔정도와 관련이 있는데 “마음챙김은 바른 정진과 바른 마음챙김과 바른 삼매에 배대되고”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빅쿠보디의 각주 “마인드풀은 바른 노력(right effort)과 바른 마음챙김(right mindfulness)과 바른 집중(right concentration)을 의미한다.”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10선도에 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주석을 인용하여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라는 두 극단을 떠나 중도를 선택하는 것이고, 신체와 언어와 정신으로 악을 짓지 않는 것은 여덟 가지 고귀한 길(팔정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짤막하게 설명되어 있다.
사띠마 삼빠잔노(satimā sampajāno)
게송에서 강조된 것은 ‘사띠마 삼빠잔노(satimā sampajāno)’이다. 사띠와 삼빠잔나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사띠와 삼빠잔나는 항상 ‘페어’로서 함께 한다. 이는 경전 도처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이 ‘사띠마 삼빠잔노(satimā sampajāno)’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Mindful and clearly comprehending’라 하여 ‘마음챙기고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은 ‘마음챙기고 알아차려’라 번역하였다. 전재성님은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라고 번역하였다.
각 번역자의 번역을 보면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는 각묵스님의 번역이다. 각묵스님은 sampajāno에 대하여 ‘알아차림’이라고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챙기고 알아차려’가 되었다.
삼빠잔나란 무엇인가?
삼빠잔나에 대하여 대부분 번역자들은 분명한 앎으로 번역한다. ‘분명한(clearly)’이라는 뜻이 들어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각묵스님은 단지 알아차림 정도로만 번역하였다. 사띠와 삼빠잔나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사띠의 확립은 분명한 앎(sampajañña)을 일으킨다. 사띠가 대상에 마음을 보내서 대상을 포착하고 기억하는 마음작용이라면, 사띠의 확립은 대상을 포착하여 기억하는 작업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대상의 일어남과 머묾과 사라짐을 아는 분명한 앎이 생긴다.
.
.
즉 신수심법에 사띠를 확립하면 분명한 앎(sati-sampajaññāya)을 일으키고, 분명한 앎은 대상의 생멸을 통찰한다. 여기서 사띠의 확립으로 생기는 분명한 앎은 위빠사나 수행을 실천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초기경전은 사띠(sati)와 분명한 앎(sampaiañña)을 함께 강조한다. 사띠와 분명한 앎은 사마타 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에 다 적용되는 것인데, 사마타 수행은 집중인 삼매(三昧)를 강조하고 위빠사나는 법을 통찰(觀)하는 지혜를 강조함으로서 일반적으로 이 두 가지 수행을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마타의 선정인 3선의 정형구에는 사띠와 분명한 앎이 함께 언급된다. 그러므로 사띠와 분명한 앎은 선정의 계발이나 통찰지의 계발에 다 적용된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 수행에서는 사띠와 분명한 앎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 보통 사띠(sati)를 마음챙김이나 주시로 번역하고, 삼빠잔나(sampajañña)를 알아차림 또는 분명한 앎이라고 번역하지만, 위빠사나수행처에서 수행자에게 ‘알아차림’을 하라고 지도할 때는 ‘사띠와 분명한 앎’의 의미가 함께 들어있다. 이는 사띠의 확립이 곧 분명한 앎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염처의 의미)
사띠와 삼빠잔나에 대한 설명이다. 사띠는 대상을 확립하는 것이며, 삼빠잔나는 확립된 대상에 대하여 분명하게 아는 것이라 한다. 즉, 현상이 생멸하는 무상, 고, 무아에 대하여 분명히 아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수행처에서 ‘알아차려라'라고 알아차림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하는데 이는 사띠와 삼빠잔나 모두 해당되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마음챙기고 알아차려’라는 번역은 기억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사띠의 의미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고, 분명한 앎의 의미인 삼짜잔나의 의미도 만족 시켜 주지 못하고 있다.
마음챙김은 어떻게 탄생되었나?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어가 빅쿠 보디를 비롯한 서양에서 사용되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의 번역과 유사하다고 본다. 마인드풀니스는 마인드(mind, 마음)과 풀(ful, 가득한)의 결합어인데 마인드풀(mindful)은 ‘주의하는, 염두에 두는, 신경을 쓰는’의미이다.
마인드풀이 명사화 되면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가 된다. 그래서 사전에 따르면 ‘명상, 주의 깊음’의 뜻이 된다. 사띠가 마음의 의미가 없음에도 마음(mind)이라는 말을 넣어 mindfulness가 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초기불교 수행법이 도입되던 1990년대에 이 마인드풀니스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에 대하여 위빠사나 수행 일세대라 불리우며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널리 보급한 김재성님은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는 ‘사띠’,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의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챙김, 상업주의 용어 단정은 억지”, 법보신문 2009-12-24)”라고 하여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영어사전에 실려 있는 마인드풀니스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라고 ‘사실상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권오민 교수는 “ ‘마인드풀니스’를 비롯하여 영어로 번역된 불교어를 무비판적으로(다만 영어사전에 근거하여) 우리말로 재역하는 데에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따른다. (“사띠논쟁, 念과 慧의 혼동서 비롯” , 법보신문 2010-03-04)”라고 언급함으로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영어권의 마인드풀니스를 우리말화 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은 적절한 번역어가 아니다. 단지 영어의 마인드(마음)와 풀(챙김)의 결합어에 지나지 않다고 본다.
2013-11-0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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