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대하여(S1.18)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0. 30. 11:53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대하여(S1.18)

 

 

 

비난 받지 않고 사는 사람

 

이 세상에 비난 받지 않고 사는 자가 있을까? 번뇌 다한 아라한이라면 모를까 그 어떤 존재도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양심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비난 받는 것이다. 양심과 부끄러움에 대한 게송이 있다.

 

 

Hirisutta

 

Sāvatthiya-

 

(Devatā:)

Hirīnisedho puriso ko ci lokasmi vijjati,
Yo ninda
appabodhati asso bhadro kasāmivāti.

 

(Bhagavā:)

Hirīnisedhā tanuyā ye caranti sadā satā,
Anta
dukkhassa pappuyya caranti visame samanti.

 

 

 

양심 경

 

2.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면전에서 이 게송을 읊었다.

 

이 세상에는 양심으로 [악을] 금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마치 좋은 말이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 달려도 달리듯

비난으로부터 물러서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3. [세존]

양심으로 [모든 악을] 금하면서 행하고

항상 마음챙겨 괴로움의 끝에 도달하여

평탄치 못한 길을 올곧게 걸어가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드믈도다.”

 

(양심 경, 상윳따니까야 S1.18, 각묵스님역)

 

 

 

부끄러움의 경

 

1. [하늘사람]

이 세상에 어떠한 자라도

부끄러움을 알아 악을 억제한다면,

잘 달리는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도 달리듯,

비난 받을 필요가 없으리.”

 

2. [세존]

부끄러움을 알아 악을 억제하고

언제나 올바로 걷는 사람은

괴로움의 종극에 이르러

험난한 길을 평탄하게 걸어가리.”

 

(부끄러움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8, 전재성님역)

 

 

 A Sense of Shame

 

 "Is there a person somewhere in the world

Who is restrained by a sense of shame,

One who draws back from blame

As a good horse does from the whip?"

 

 "Few are those restrained by a sense of shame

Who fare always mindful;

Few, having reached the end of suffering,

Fare evenly amidst the uneven."

 

(CDB, Bhikkhu Bodhi)

 

 

경의 제목은 히리숫따(Hirisutta)’이다. 히리는 여성명사로서  ‘shyness(수줍음),sense of shame(부끄러워 하는 감정)’의 뜻이다. ‘Shame(부끄러움), modesty(겸손)’의 뜻도 있고, ‘, への(안으로의 수치심)’의 뜻도 있다. 이렇게 히리는 자신의 정당하지 않은 행위에 대하여 부끄러함을 알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양심으로 번역된다.

 

잘 달리는 말은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선한 마음이다. 이런 선심은 불선심을 억제하는 것에서 나온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의 비유로 설명하였다. 잘 달리는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서도 달린다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잘 달리는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므로 실제로 채찍질이 필요가 없듯이 부끄러워할 줄 알아서 악을 억제하는 사람은 비난 받을 필요조차 없다는 뜻이다. 이 시는  Dhp.143:Uv.19:5에도 나온다.

 

(각주, 전재성님)

 

 

각주에 따르면 잘 달리는 말은 채찍질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채찍질을 하지 않아도 째찍만 보고도 잘 달리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라 한다. 하지말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 하는 자는 억제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자는 결코 불선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가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각주에서는 법구경의 게송을 소개 하고 있다. 법구경 게송 Dhp.143은 다음과 같다.

 

 

Hirīnisedho puriso         히리니세도 뿌리소

koci lokasmi vijjati       꼬찌 록카스미 윗자띠

yo nidda apabodheti      요 닛당 아빠보데띠

asso bhadro kasāmiva.      앗소 바드로 까사미와.

 

누가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알아 자제하는가?

준마가 채찍을 보듯,

창피함을 알아챌 것인가?

 

(법구경, Dhp143, 전재성님역)

 

 

부끄러움을 알아 자제하여 비난받지 않는 사람은 매우 드믈다. 부끄러움을 인지하여 자기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을 몰아 낼 사람이 드믈다는 것이다. 그런 자는 아마도 번뇌가 다한 아라한일 것이다. 그래서 하늘사람이 비난으로부터 물러서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S1.18)”라고 물은 것은 아라한을 말한다. 아라한 만이 모든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번역처럼 보이는데

 

히리숫따(S1.18)에서 부처님이 읊은 게송을 보면 번역자의 번역 내용이 매우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마지막 구절이다. 각묵스님은 드믈도다라 하였고, 전재성님은 걸어가리라 하여 전혀 다른 번역처럼 보인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았다.

 

 

  

       

  

빠알리원문

Hirīnisedhā tanuyā ye caranti sadā satā, Anta dukkhassa pappuyya caranti visame samanti(S1.18)

tanuyā

각묵스님

양심으로 [모든 악을] 금하면서 행하고 항상 마음챙겨 괴로움의 끝에 도달하여 평탄치 못한 길을 올곧게 걸어가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드믈도다.

드믈도다

전재성님

부끄러움을 알아 악을 억제하고

언제나 올바로 걷는 사람은

괴로움의 종극에 이르러

험난한 길을 평탄하게 걸어가리.

걸어가리

빅쿠 보디

Few are those restrained by a sense of shame Who fare always mindful; Few, having reached the end of suffering, Fare evenly amidst the uneven.

Few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것은 이전 게송에서 하늘사람이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의문하는데서 비롯된다. 이와 관련하여 빅쿠 보디는 영문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Spk: As a good thoroughbred who knows to pull back from the whip does not let it strike him, so a bhikkhu who is keen to avoid blame-who knows to pull back from it-does not let any genuine ground for abuse strike him. The

deva asks: "Is there any such arahant?" But no one is wholly free from abuse on false grounds. The Buddha answers that such arahants, who avoid unwholesome states from a sense of shame, are few.

 

(빅쿠 보디 각주, CDB)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순혈종의(서러브레드종의) 말은 채찍을 허용하지 않아도 뒷걸음 친다. 마찬가지로 예민한 비구는 어떤 진실된 바탕이 그로 하여금 비난을 허용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에 뒷걸음질 침으로서 비난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그래서 하늘사람(deva)은 여기 아라한 있어요?” 라고 묻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잘못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부끄러움의 감정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매우 드믄 아라한이라고 답한다.

 

(빅쿠 보디의 영역에 대한 번역)

 

 

빅쿠 보디의 각주에 따르면 비난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운 사람은 아라한이라 하였다. 그래서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매우 드믈다고 하였다. 그래서 알까 빅쿠 보디는 “Few are those restrained by a sense of shame(양심으로 억제된 사람은 매우 드믈다)”라 번역하였을 것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각묵스님은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드믈도다.”라고 번역하였다. 공통적으로 드문 사람즉 아라한을 염두에 둔 번역이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경우 드물다는 표현은 보이지 않고 험난한 길을 평탄하게 걸어가리라 하였다.

 

이렇게 두 개의 번역을 보면 전혀 다른 번역처럼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마도 빠알리어 tanuyā를 어떻게 번역하였느냐의 차이로 본다.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tanuyā는 여성명사로  ‘a daughter’의 뜻이다. 그런데 빠알리-일본어 사전에 稀薄(희박의)’ 라는 뜻도 보인다.  이는 Hirīnisedhā tanuyā’와 관련이 있는데 Hirīnisedhā양심을 유지하는뜻이고, tanuyā이기 때문에 이를 직역하면 양심을 유지 하는 딸이 될 것이다. 양심을 뜻하는 히리(Hirī)가 여성명사이기 때문에 딸을 뜻하는 tanuyā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Hirīnisedhā tanuyā’에 대하여양심을 유지하는 자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Tanuyà희박의뜻으로 보면 양심을 유지하는 자는 매우 드믈다의 뜻이 된다.  이런 차이로 인하여 두 종류의 번역이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본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대하여

 

부끄러움과 관련된경은 숫따니빠따에서도 볼 수 있다. 숫따니빠따 작은 법문의 품에도 히리숫따(Hirisutta)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1.

Hiri taranta vijigucchamāna
Sakh
ā hamasmi2 iti bhāsamāna,
Sayah
āni kammāni anādiyanta
Ne so mamanti iti ta
vijaññā.

 

부끄러워 할 줄 알지 못하고 혐오하여

‘나는 당신의 친구다’라고 말하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도맡아 도와주지 않는 사람,

그는 나의 친구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2.

Ananvaya piya vāca yo mittesu pakubbati,
Akaronta
bhāsamāna parijānanti paṇḍitā.

 

친구들에게 실천 없이

사랑스런 말만 앞세운다면,

현명한 자들은 그를 말만하고

실천하지 않는 자로 알아야 합니다.

 

3.

Na  so vitto yo sadā appamatto
Bhed
ā sakirandhameyānupassī,
Yasmiñca seti uras
īva putto
Sa ve mitto so parehi abhejjo.

 

항상 전전긍긍하며, 금이 갈까 염려하면서도,

벗의 결점만을 보는 사람은 친구가 아닙니다.

아들이 아빠의 품에 안기듯 의지하고,

타인 때문에 금가지 않는 사람이야 말로 친구입니다.

 

4.

Pāmujjakaraa hāna pasasāvahana sukha,
Phal
ānisaso bhāveti vahanto porisa dhura.

 

훌륭한 결과를 바라는 사람은

인간으로서 적당한 짐을 지고,

기쁨을 낳고, 칭찬을 받으며,

안락을 가져올 조건을 닦습니다.

 

5.

Pavivekarasa pītvā rasa upasamassa ca,
Niddaro hoti nipp
āpo dhammapīti rasa pibanti.

멀리 떠남의 맛을 누리고,

고요함의 맛을 누리고,

진리의 기쁨이 있는 맛을 누리는 사람은

고뇌를 떠나고 악을 떠납니다.

 

(Hirisutta-부끄러움의 경, 숫따니빠따 Sn2.3, 전재성님역)

 

 

경에서 부끄러워 할 줄 알지 못하고 (Hiri taranta)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부끄러움이란 무엇을 말할까? 각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부끄러워하는 양심을 말한다.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인간사회를 수호하는 두 가지의 법이다.

 

부끄러워함이란 악한 일을 하는 것을 내심으로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즉 자기의 혈통, 연령, 능력, , 명성, 학력 등을 고려해서 ‘나와 같은 자는 살생 등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해서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창피스러워함은 악한 일을 하는 것을 외부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악한 일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비난할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두려워하여 악한 일을 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법이 인간 사회를 수호하는 법이다. 그 법이 없다면 사회에서 인간의 규범은 사라진다.

 

(부끄러움 각주, 전재성님)

 

 

 

 

 

 

 

Shyness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부끄러움이란 악한 일을 하는 것에 대하여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것이고, 창피함이란 비난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법이 사회를 수호하고 지탱하는 법이 될 것이라 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

 

만일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창궐할 것이다. 그래서 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될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수치심을 잃어버린 사회를 말한다. 법과 규범이 흔들리고 자칫 무질서 내지 무정부상태로 가는 것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이다.

 

질서가 유지되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규범과 약속을 지키려는 도덕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의 바탕이 되는 도덕성이 저버렸을 때 그 사회는 혼란의 극에 달할 것이다. 그래서 제자가 스승을 패고, 자식이 부모들 죽이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사태에 직면한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양심불량은 넷상에서도 볼 수 있다. 근거 없이 중상모략을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다 하여, 자신의 스승이 아니라 하여, 자신들의 편이 아니라 하여 인격적으로 매도 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 사람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면서 일부분을 전체인양 오도 하며 심지어 사기꾼으로 몰아 간다. 또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마치 인민재판식으로 여론을 형성하여 강퇴시키도록 한다. 비록 넷상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라 하지만 현실세계에서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 모두가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모르기 때문이다.

 

 

 

2013-10-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