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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노년출가의 어려움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7. 15:48

 

 

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노년출가의 어려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고귀한 자나 미천한 자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똑 같다. 이렇게 주어진 시간을 어떦게 보낼까? 거의 대부분 즐기는데 시간을 다 보낸다.

 

눈으로는 매혹적인 형상을 찾고, 귀로는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코로는 향기로운 냄새를 찾고, 혀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맛을 탐하고, 입으로 음식을 넘겼을 때 행복감을 느끼듯이 몸으로는 보드라운 촉감을 갈망한다. 그래서 부자는 부자나름대로 즐길거리를 찾아 오감을 만족시키고, 가난한 자 역시 자신의 형편에 맞게 즐길거리를 찾는다.

 

이렇게 누구나 즐길거리를 찾는 것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에서는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 S56.11)”라 하였다. 이런 갈애가 결국 미래의 존재를 일으킬것이라 하였다. 이것이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그렇다면 출세간적 삶이란 어떤 것일까?

 

 

Abhutvā bhikkhasi bhikkhu na hi bhutvāna bhikkhasi,

Bhutvāna bhikkhu bhikkhassu mā ta kālo upaccagāti.

 

(Samiddhi:)

Kāla vo'ha na jānāmi channo kālo na dissati,

Tasmā abhutvā bhikkhāmi mā ma kālo upaccagāti.

 

 

[천신]

비구여, 누리지도 못하고 그대 걸식하고 있으니

 누린 뒤에 걸식할 줄 그대 모르는구려.

비구여, 누린 뒤에 그대 걸식 행하시오.

세월이 그대를 지나치게 하지 마오.”

 

 [사밋디 존자]

세월이라 하는 것을 나는 아예 모르나니

세월이란 감춰져서 보이지 않는다오.

그래서 누리지 않고 나는 걸식한다오.

세월이 나를 지나치지 않게 한다오.”

 

(사밋디 경, 상윳따니까야 S1.20, 각묵스님역)

 

 

[하늘사람]

수행승이여, 그대는 향락 없이 걸식하네.

향락을 누리고 나서 걸식하지 않네.

수행승이여, 시절이 그대를 지나치지 않도록

향락을 누리고 나서 걸식하시오. 

[싸밋디]

그대가 말하는 시절을 나는 모르네,

그 시간은 감추어져 있고 볼 수도 없으니,

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나는 향락 없이 걸식하며 사네.

 

(싸밋디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0, 전재성님역)

 

 

“Without having enjoyed you seek alms, bhikkhu,

You don't seek alms after you've enjoyed.

First enjoy, bhikkhu, then seek alms:

Don't let the time pass you by!"

 

"I do not know what the time might be;

The time is hidden and cannot be seen.

Hence, without enjoying, I seek alms:

Don't let the time pass me by!"

 

(CDB, Bhikkhu Bodhi)

 

 

 

 

 

 

 

Bodhi tree

 

 

사밋디경은 짤막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 다른 경들과 달리 산문과 운문으로 이루어진 꽤 긴 경이다. 하늘사람과 사밋디 존자와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향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머리가 칠흑같이 검은 젊은 나이에

 

하늘사람은 사밋디에게 즐길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누구나 누리고 있는 젊음과 청춘을 허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사람]

수행승이여, 당신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 받았으니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누리지 않고 출가 했습니다. 수행승이여,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요.”

 

(싸밋디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0, 전재성님역)

 

 

나이가 어려서 출가한 경우를 동진출가라 한다. 이산혜연선사의 발원문에 아이로서 출가하여 귀와 눈이 총명하고”라는 구절이 있듯이 변성기 이전 어려서 출가할 경우 세상일에 물안드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그래서 어려서 부터 사원에 살며 공부를 하면 불도를 이루는데 있어서 매우 좋은 조건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일까 지난 34대 조계종총무원장 선거에서 후보로 출마한 전포교원장 혜총스님은 공약에서 동진출가 제도를 활성화 시키겠다고 공약하였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나이가 어렸을 때 출가 하는 것이 여로모로 불도를 닦는데 있어서 유리함을 말한다.

 

게송에서 하늘사람은 사밋디 존자를 유혹한다. 머리가 칠흑같이 검은 젊은 나이에 빛나는 청춘을 마음껏 즐기지도 못하고 출가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하여 연민을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당장 출가생활을 접고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을 마음껏 즐기는 삶을 살라고 충고 한다.

 

수수께끼 같은 말

 

그러나 사밋디 존자는 세월과 관련하여 그대가 말하는 시절을 나는 모르네라고 말하며 그 시간은 감추어져 있고 볼 수도 없으니라고 응수한다. 마치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각주에 설명이 없다. 그러나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In padas ab of his reply Samiddhi speaks with reference to the time of death (maranakiila), which is hidden (channa) in that one never knows when it will arrive. In pada d he refers to the time for practising the duty of an ascetic (samanadhammakaranakrfla), as it is difficult for an old person to learn the Dhamma, practise austerities, dwell in the forest, and develop the meditative attainments.

 

(빅쿠 보디 각주)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AB구절에서 사밋디는 죽음의 시간과 관련하여 그것은 언제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누구도 알 수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C구절에서 하늘사람이 금욕수행에 대하여 언급하자 사밋디는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면 담마를 배우는 것도 어렵고, 금욕수행도 어렵고, 숲에서 머무는 것도 어렵고 향상으로 이끄는 명상을 계발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이 게송과 관련된 각묵스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세월(kala)’이란 죽을 시간(marana-kala)을 두고 한 말이다.”

(SA.i.41)

 

 “’세월이 나를 지나치지 않게 한다(ma mam kalo upaccaga).’는 것은

사문의 법도를 행할 시기(samana-dhamma-karana-kala)를 두고 한 말이

.”(SA.i.41)

 

계속해서 주석서는 사문의 법도는 초년에 행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노년

에는 법을 배우거나 두타행 등의 엄격한 삶을 살거나 숲에 머물거나 삼매

를 닦아서 경지를 증득하는 것 등을 실천하기가 힘들다고 열거하고

있다.(Ibid)

 

(각묵스님 각주)

 

 

이와 같은 내용을 종합해 보면 사밋디가 그대가 말하는 시절을 나는 모르네, 그 시간은 감추어져 있고 볼 수도 없으니라고 말한 것은 사람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라고 말한 것은 젊었을 때 수행하지 않으면 늙어서는 못하게 됨을 말한다. 그래서 머리가 칠흑같이 젊을 때 열심히 수행을 해야 출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을 말한다.

 

피었다가 시들으면 다시 못 올 내 청춘

 

하늘사람이 유혹하는 게송은 마치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노래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가 떠올려 진다.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한 기타부기’노래도 떠올리게 한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
피었다가 시들으면
다시 못 올 내 청춘
마시고 또 마시어
취하고 또 취해서
이 밤이 세기 전에
춤을 춥시다~! ♬

 

(기타부기)

 

 

기타부기는 1960년대 유행하였던 노래이다. 지금도 가끔 이 노래를 방송에서 들을 수 있는데 가사가 매우 퇴폐적이다. 젊었을 때 열심히 놀자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늙어지면 누가 보아줄 사람도 없고 힘도 없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즐기자는 노래이다.

 

노년출가에 대하여

 

이렇게 젊어서 열심히 놀다가 늙어 졌을 때 수행할 수 있을까? 경에 따르면 늙어서 수행하기 힘든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리를 성취한다는 것은 노년의 출가자가 얻기 어렵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노년의 출가자가 가르침을 따르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기억하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잘 이해하기 어렵다. 설법을 하기 어렵다. 계율을 준수하기 어렵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리를 성취한다는 것은 노년의 출가자자 얻기 어렵다.

 

(노년의 출가에 대한 경, 앙굿따라니까야 A5.6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노년출가가 어려운 이유에 대하여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가르침을 따르기 어렵고, 기억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고, 설법하기 어렵고, 계율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노년에 출가 해 보았자 별 효과가 없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출가는 젊었을 때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찍하면 일찍 할수록 좋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 이산혜연선사 발원문에서도 아이로서 출가하여~”로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수행은 더 나이가 들기 전에 해야 한다.

 

늙어서 수행하기 힘든 이유

 

늙는 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신체와 정신의 기능이 모두 늙었다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나이가 들면 주의력이 떨어지고 몸이 무겁게 된다. 또한 걷기도 힘들고, 앉아 있는 것도 어려 우며, 서 있는 것 조차 너무 고된 노동 이라는 것이다. 경행 하는 것도 피곤 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체적 결함이 있다는 것은 노쇠 했다는 증거이다.

 

신체가 노쇠하면 정신적인 기능 역시 노쇠 할 수 밖에 없다. 이것 저것 잊어 버리고 정신 또한 나태해진다. 좌선을 할 때도 자주 자세를 바꾸고 싶어 한다. 80대나 90대가 되면 자신을 훈계 주는 스승도 없을 뿐더러 젊은 사람과 어울리기도 쉽지 않다. 늘 거부 당하고 소외 되었다고 생각 하고 불행해 한다.

 

이렇게 소외된 노인들은  ‘제2 아동기’로 들어 서게 된다. 이런 생활이 계속 되면 자신은 쓸모 없는 인간이라 말하고 ‘불선업’의 원인을 만들게 된다. 그래서 수행은 나이가 들기 전에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출가하는가?

 

왜 출가하는가?

 

초기경전에서 출가란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라고 표현 되어 있다. 이렇게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가서 산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다는 말과 같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하고 세상과 인연을 끊어서 출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삶을 말한다. 그래서 걸식의 경(S22:80)’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탁발이라는 것은 삶의 끝이다. 이 세상에는 그대는 바루나 들고 다녀라!’라고 하는 저주가 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훌륭한 아들들은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 그러한 삶을 선택한 것이다. 결코 왕이 강요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고, 빚을 졌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그런 것도 아니다.

 

(Piṇḍolya sutta-걸식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80, 전재성님역)

 

 

걸식의 경을 보면 출가의 목적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바루를 들고 마치 걸인처럼 음식을 얻어 먹는 행위에 대하여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에서 탁발이라는 것은 삶의 끝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끝을 뜻하는 안땅(anta)이라는 말은 최후의, 가장 낮은또는 하찮은, 형편없는, 나쁜의 동의어라 한다. 그리고 그대는 바루나 들고 다녀라!”라는 말은 저주라 하는데, 이는 세상사람들이 분노할 때 하는 말이라 한다. 그래서 중옷이나 입고, 그릇을 들고 밥이나 빌러 돌아다녀라!”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고대인도에서 막행막식을 일삼는 반승반속에 대한 최대의 욕이라 보여진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에서 은처, 도박, 폭력, 음행 등 오계를 어기는 행위를 일삼는 승려에 대하여 무어라 이야기 해야할까? 바루는 들고 돌아다니지 않으므로 바루와 관련된 욕은 없지만 이런 식으로 막행막식을 일삼는 승려들이 활개를 친다면 조만간 사람사는 곳에 출입을 금지 당할지 모른다. 조선시대 5백년간 서울 사대문안 출입이 금지 되었듯이 사람사는 곳에 출입을 금지 당하고 발견되면 몰매를 맞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경에서는 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걸인처럼 걸식하며 살아는 것일까? 그것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러나 그들은 나는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 떨어졌다. 괴로움에 떨어져 괴로움에 둘러싸여 있다. 적어도 괴로움의 다발들이 종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S22:80)”라고 하였다.

 

걸식하며 출가의 삶을 사는 이유가 괴로움의 종식에 있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윤회의 종식이다. 그래서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보는 삶을 살게 된다. 이는 다름 아닌 행위의 두려움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인 행위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렇게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아 학습계율(sikkhapadani)을 지키며 도와 과를 이루어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빅쿠에 대하여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라 하였을 것이다.

 

불자라면 누구나 외워야 하는 법수념(dhammanussatikatha)

 

사밋디는 젊음을 즐기라는 하늘사람의 유혹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도사린 재난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말씀에 크게 의지한다. 경에서 사밋디가 들려 주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한 법수념이다. 이를 번역자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Na khvāha āvuso sandiṭṭhika hitvā kālika anudhāvāmi. Kālikañca khvāha āvuso hitvā sandiṭṭhika anudhāvāmi. Kālikāhi āvuso kāmā vuttā bhagavatā bahudukkhā bahūpāyāsā ādīnavo ettha bhiyyo. Sandiṭṭhiko aya dhammo akāliko ehipassiko opanayiko paccatta veditabbo viññūhīti.

 

도반이여, 나는 절대로 목전에 분명한 것을 제쳐두고 시간이 걸리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나야말로 시간이 걸리는 것을 제쳐두고 목전에 분명한 것을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이란 시간이 걸리는 것이고 괴로움과 절망이 가득하며 거기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밋디 경, 상윳따니까야 S1.20, 각묵스님역)

 

 

[싸밋디]

벗이여, 나는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하여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벗이여, 세존께서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메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크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싸밋디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0, 전재성님역)

 

 

“I have not abandoned what is directly visible, friend, in order to pursue what takes time. I have abandoned what takes time in order to pursue what is directly visible.  For the Blessed one, friend, has stated that sensual pleasures are time-consuming, full of suffering, full of despair, and the danger in them is still greater, while this Dhamma is directly visible, immediate, inviting one to come and see, applicable, to be personally experienced by the wise.”

 

(CDB, Bhikkhu Bodhi)

 

 

법수념에 대해서는 담마눗사띠까타(dhammanussatikatha)라 하여 청정도론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이 법수념은 불교가 다른 어떠한 철학이나 종교와 구별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특징을 대변하는 유명한 말이다.

 

법수념 설명

 

이 법수념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각주를 참고 하여 단어별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법수념 구분

의 미

설 명

Sandiṭṭhiko

현세에서 유익한, 지금 여기의

(지금 여기에서 유익하다)

지금 여기에서 유익하다

akālika

무시간적인,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1. 즉시효과가 나타나는 것(붓다고사: 고귀한 길을 실천하면 즉시 결과가 나타난다.)

2.  즉시효과적인 것과 시간을 초월하는 것 두 가지의 의미임)

즉시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 지연이 있더라도 효과가 있다.

ehipassika

눈 앞에 보이는, 와서 보라

경험적인 가르침이다

opanayika

목표인 열반으로 인도한다

열반으로 이끈다

paccatta veditabbo viññūhī

슬기로운 자 각자에게 알려지는 것

지혜를 필요로 한다.

 

 

 

법수념은 1)Sandiṭṭhiko 2)akālika 3)ehipassika 4)opanayika 5)paccatta veditabbo viññūhī 이렇게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Sandiṭṭhiko),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akālika), 와서 보라고 할만한 가르침이며(ehipassika),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opanayika),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다. (paccatta veditabbo viññūhī)”의 뜻이다. 그래서 불자라면 누구나 믿고 의지하고 마치 주문처럼 외워야 하는 문구이다.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akālika)”

 

표에서 아깔리까(akālika)가 있다. 이를 전재성님은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라고 번역하였고, 빅쿠보디는 ‘immediate’라 하여 즉시적인 것이라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은 시간이 걸리지 않고라 번역하였다.

 

시간을 초월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항상 있다는 뜻이다. 각주에 따르면 법수념은 연기를 설명하는 구절이라 하였다. 연기는 부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연기법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즉시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번역자들은 아깔리까(akālika)에 대하여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전재성님)’ ‘immediate(빅쿠보디)’ ‘시간이 걸리지 않고(각묵스님)’등으로 번역하였다.

 

初期佛敎 緣起思想에서

 

이와 같은 가르침의 초월성과 즉시성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역자의 초기불교의 연기사상 102쪽을 보라고 하였다. 마침 몇 주전에 산 전재성님의 初期佛敎 緣起思想이 있었다.

 

초기불교의 연기사상 102쪽을 열어 보았다. 법수념과 관련된 아깔리까(akālika)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부처님의 연기법이 초월적이고, 무시간적이고, 즉각적인 것에 대한 설명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차원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연기의 특징이 그것의 무시간성이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상대적인 과거, 현재, 미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의 의미에서의 보편적인 시간의 무를 뜻하는 것이다.

 

(初期佛敎 緣起思想, 전재성님)

 

 

연기의 초월적이고 무시간이고 즉각적인 특징에 대하여 러셀의 글을 인용하여 상대성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선형적 인과

 

아인슈타인 이전의 고전물리학에서는 시간이라는 것이 빨래줄 처럼 선형적이었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에 따른 선형적으로 흐르는 시간이 있다고 보았지만 상대성이론이 출현하면서 무너졌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예전의 실체의 본질은 시간을 통해 지속했지만 이제는 보편적인 시간이 없어 졌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시간과 공간은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빅뱅이 일어 났을 때 우주 공간의 작은 점에서 출발하였다고 보는 것이 아니다. 특이점에서 빅뱅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시간과 공간이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공간이 팽창함에 따라 시간도 동시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시공간은 분리가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고전물리학에서 설명되는 선형적인 시간개념을 깨뜨렸다.

 

일반적으로 원인과 결과의 인과관계에 있어서 언제나 시간지연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러셀에 따르면 만일 원인과 결과가 있다면 그것들은 유한한 시간 간격으로 분리되어 있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또 하르트만은 인과성이란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나중에 일어난 것은 앞에 일어난 것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시간적으로 선형적 인과론은 때로 운명론적으로 변질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인과의 동시성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반드시 시간에 따른 선형적인과관계라 볼 수 없다. 이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若有此卽有彼)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若生此卽生彼)”는 원리를 검토해 보면 알 수 있다. 이 연기법에서 시간적 우선성이 포함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재성님의 책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그것들은 결과가 일어나려면 원인이 있어야 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 그것들의 시간상의 계기를 수반하지 않는다. 인과성은 공간상의 어떤 특정한 점에서든, 아니면 공간상의 서로 다른 지역에 위치한 계들 사이에서든 상관없이 동시적 연결과 모순되지 않는다.

 

(初期佛敎 緣起思想, 전재성님)

 

 

인과의 동시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인과라는 것이 시간을 축으로 하여 마치 빨래줄 처럼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과는 동사발생도 가능함을 뜻한다. 이는 초기경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식과 명색의 관계에 있어서 명색이 있으면 의식이 있고,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 (識緣名色 名色緣識, S12:65)”가 좋은 예이다. 또 오온의 상호작용 역시 동시발생적이다. 인과의 동시발생과 관련된 경이 몰리야 씨바까의 경(S36.21)’이다. 경에서는 불운한 사건, 우연한 피습 등 여덟 가지 느낌이 발생되는 것에 대하여 반드시 업이 원인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교통사고 등 뜻하지 봉변등은 과거에 지은 업과 무관함을 말한다. 접촉에 따른 인과의 동시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설일체유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존재하여 과거의 원인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숙명론적 결정론을 배제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존재론에 바탕을 둔다. 이는 세상이 하나의 원인에 의하여 창조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주나 궁극적 실재에 바탕을 두는 것이 존재론이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것이 과거, 현재, 미래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있었다거나 있다거나 있을 것이다라는 언어 사용에 붙여진 명칭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나의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는 연기법은 시간을 초월한 것이다. 그리고 연기법은 무시간적이다. 이처럼 초월적이고 무시간적인 연기법에 대한 시간 개념은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시간이란 그 자체로서는 없고, 연속이 다소간 잘 조절된 연속적인 업과 불연속적 업들이다.

 

(初期佛敎 緣起思想, 전재성님)

 

 

이문구는 각주에 따르면 호진 스님이 무아윤회의 연구에서 인용한 것을 재인용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불교에 있어서 시간 개념은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고 보는 존재론적 인과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의미는?

 

시간과 관련하여 법수념에서는 아깔리까(akālika)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연기법이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빅쿠보디는 ‘immediate’  하여 직접적이며뜻으로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은 시간이 걸리지 않고(각묵스님)’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가르침이 즉각적이고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기 위하여 청정도론을 열어 보았다.

 

청정도론 1권에는 40가지 사마타 명상주제중의 하나로서 법수념이 상세하게 설명 되어 있다. 아깔리까(akālika)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시간이 걸리지 않고]: 자신의 결과를 주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지 않음이 바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5일이나 7일 등의 시간을 경과하지 않고 결과를 준다. 즉 그것은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결과를 주는 것이라고 설했다.

 

(청정도론, 7 80, 법수념)

 

 

5세기 스리랑카의 붓다고사에 따르면 아깔리까(akālika)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여 실천하면 즉각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이라 한다.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는 연기법은 이렇게 선형적인 시간적인 인과관계에 매여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이나 브라만 등 개념적으로 존재하여 결과를 알 수 없는 것과 달리 언제든지 접하여 실천하면 즉각적인 결과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재가자라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흔히 와서 보라! (ehipassika)”라는 말로 짧게 설명한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또한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다. 따라서 불자라면 누구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른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있을까? 초기경전에서 비구여라고 시작하였다고 하여 출가자를 위한 가르침이고, “장자여라고 하였다고 하여 재가자에게만 적용된다고 볼 수 있을까? 연기법이 시간을 초월하여 원리로서 확정된 보편적 진리이듯이 부처님의 말씀 하신 모든 가르침에 출가와 재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출가자와 재가자를 엄격히 구분하고자 한다. 그래서 불교에는 출세간과 세간의 법이 있어서 출가자에게 적용되는 가르침이 있고 재가자에게 필요한 가르침이 있다고 구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경전을 접하지 않음에 따라 스스로 한계를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재가자라 하여 오로지 믿음과 지계와 보시의 생활만 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하나마경(S55;37)에서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준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만 부처님은 단계적 가르침을 펼치셨다. 그래서 어느 정도 지혜가 성숙하면 사성제와 같은 더 높은 단계의 법문을 하여 해탈과 열반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또 밧차곳따경에서는 재가자로서 재가의 속박을 끊지 않고서 몸이 파괴 된 후에 하늘나라에 도달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 숫자는 백명이 아니라…(M71)” 라고 부처님이 말씀 하셨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재가자라 하여 믿음과 지계와 보시에만 국한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현세에서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출가와 재가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재가자는 재가자로서 삶이 있고 출가자는 출가자로서 삶이 있어서 경전상의 가르침 역시 구분하여 적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는 넌센스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출세간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불자들의 실천덕목인 팔정도 역시 출세간의 가르침이다. 십이연기, 오온 등 불교 교리가 모두 다 출세간의 가르침이다. 만일 출재가를 구분하여 재가자는 오로지 밈음, 지계, 보시에만 충실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재가자는 초기경전을 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팔정도, 연기법 등의 가르침은 출세간의 진리로서 출가자에게나 해당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는 보편적인 가르침이다. 그리고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 (Sandiṭṭhiko)’이다. 따라서 누구나 가르침을 실천하면 즉각적인 결과 (akālika)’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열반은 선업 공덕을 쌓아 다음 생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현세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출가자이건 재가자이건 누구나 가르침을 실천하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 하여 목표인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opanayika)’이라 하였다.

 

가르침을 접하고 실천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출가자이어야 하고 출가해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재가생활속에서도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재가자의 역할만을 강조한다는 것은 식욕, 성욕, 수면욕, 명예욕, 권력욕과 같은 오욕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출가와 재가를 구별하려 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스스로 한계를 드러내며 무식을 폭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 하나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생각이다. 주변에 나이가 팔십 또는 구십이 되는 사람을 보고서 자신도 그렇게 오래 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팔십이니 구십이니 하는 것은 기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기대수명이라 한다. 단지 팔십이나 구십살 살것을 기대하는 것일 뿐이지 어느 누구도 팔십이나 구십살까지 살도록 보장해 주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인간이 업대로 살기 때문이다. 이전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로 인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수명이 보장 되어 있는 천상의 존재의 달리 인간의 수명을 보장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일까 부처님도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M121)"라 하였다. 이렇게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는 것이 뭇삶이다. 내일은 커녕 한시간 후의 일도 예측이 되지 않는 것이 삶의 현실이다.

 

이렇게 내일을 알 수 없는 현실에서 하늘사람은 수행승이여, 당신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 받았으니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누리지 않고 출가 했습니다. 수행승이여,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요.”라고 말한다. 젊었을 때 마음껏 쾌락을 누리고 나이가 들어 수행해도 늦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무책임한 말이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현실에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M131)"라 하였다. 이는 무슨말인가? 지금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수행하라는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열반을 미루는 것은 달콤한 악마의 유혹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재가자라 하여 다음 생을 기약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가르침에 따르면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한다.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가르침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밋디는 하늘사람의 모순을 간파하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대가 말하는 시절을 나는 모르네,

그 시간은 감추어져 있고 볼 수도 없으니,

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나는 향락 없이 걸식하며 사네.(S1.20)"

 

  

2013-11-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