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무기력과 권태, 졸림과 게으름의 경(S1.16)
배고프면 밥먹을 줄 알고
사람의 심리는 편안한 것만 쫒아 다닌다. 그래서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다. 누우면 잠자게 된다. 불교TV사이트에서 어느 선사는 다음과 같은 법문을 하였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스스로 배우지 않아도 배고프면 밥먹을 줄 알고 목마르면 물 마실줄 알고 기쁘면 하하 웃을 줄 알고 슬프면 엉엉 울줄 아는 것이 바로 여러분 자신이고 또 누구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49년동안 설법하신 법문입니다.”
(어느 선사, 불교TV 사이트, 불교TV 무상사 일요초청법회 제264회,2011-12-08)
배고프면 먹을 줄 알고, 졸리면 잘 줄 알고, 화나면 성낼 줄 아는 그 놈, 그 놈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이 이런 설법을 하였다고 한다.
이런 류의 법문은 불교tv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수백개에 달하는 선사의 법문에서 볼 수 있고, 또 매일 아침 불교방송 불교강좌에서 인천 Y선원의 S선사의 법문에서도 매일 들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법문에 대하여 부르기 쉽게 제목을 단다면 ‘배고프면’ 법문이 될 것이다. 대체 이런 법문은 어떤 것을 근거로 한 것일까? 검색해 보면 마조선사의 ‘평상심시도’와 연결된다.
평상심시도는 “중국 당나라의 유명한 선승 조주(趙州)가 수행승으로 있을 때, 스승인 남천(南泉) 스님에게 “도(道)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그는 선배인 마조(馬祖) 선사의 말대로, "평상심이 도이다(平常心是道)"하고 대답했습니다.”라고 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평상심시도는 본능대로 살라는 것은 아니라 한다. 인공을 가미 하지 않은 자연그대로의 삶이 평상이라 한다. 그래서 월호스님의 글에 따르면 “밥 먹을 땐 밥 먹을 뿐! 잠잘 땐 잠잘 뿐! 일할 땐 일할 뿐! 뛸 땐 뛸 뿐!( 달마, 영화를 말하다 – 월호]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포레스트 검프처럼 바보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포레스트는 오로지 제니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니를 화두 삼아 “오직 뛸뿐!”이었다고 설명한다.
졸고 게으르고 하품하고
선사들의 ‘배고프면 법문’ 즉, 평상심시도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비교하면 차이가 난다. 배고프면 밥먹을 줄 알고, 목마르면 물 마실줄 알고, 졸리면 잘줄 아는 평상시심시 도와 같은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Niddātandisuttaṃ
Sāvatthiyaṃ-
(Devatā:)
Niddā tandi6 vijambhikā7 aratī bhattasammado,
Etena nappakāsati ariyamaggo idha pāṇinanti.
(Bhagavā:)
Niddaṃ tandiṃ vijambhikaṃ8 aratiṃ bhattasammadaṃ
Viriyena 9 naṃ paṇāmetvā ariyamaggo visujjhatīti.
졸림과 나른함 경
2.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면전에서 이 게송을 읊었다.
“졸림, 나른함, 무기력함, 따분함, 식곤증 –
이런 것들 때문에 이 세상 중생들에게
성스러운 도는 전혀 빛이 나지 않습니다.”
3. [세존]
“졸림, 나른함, 무기력함, 따분함, 식곤증 –
이런 것들 정진으로 몰아낸 뒤에
성스러운 도는 실로 청정하게 되도다.”
(졸림과 나른함 경, 상윳따니까야 S1.16, 초불연 각묵스님역)
졸림과 게으름의 경
1. [하늘사람] “졸고 게으르고 하품하고,
불만스럽고 포식 후에 나른한 것
그것들 때문에 여기 뭇삶들에게
고귀한 길은 나타나지 않네.
2. [세존] “졸고 게으르고 하품하고,
불만스럽고 포식 후에 나른한 것
정진으로 그것을 쫒아내면,
고귀한 길은 맑고 깨끗이 드러나네.
(졸림과 게으름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6, 성전협 전재성님역)
Drowsiness and Lethargy
"Drowsiness, lethargy, lazy stretching,
Discontent, torpor after meals:
Because of this, here among beings,
The noble path does not appear."
"Drowsiness, lethargy, lazy stretching,
Discontent, torpor after meals:
When one dispels this with energy,
The noble path is cleared."
(CDB, Bhikkhu Bodhi)
경의 제목은 ‘Niddātandisutta’이다. 이는 닛다(niddā)와 딴디(tandi)의 결합어로서 sleep(졸림, 睡眠)와 weariness (싫증, 지루함, 倦怠 懶惰)의 뜻이다. 그래서 초불연에서는 ‘졸림과 나른함 경’이라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졸림과 게으름의 경’, 빅쿠 보디는 ‘Drowsiness and Lethargy(졸음과 무기력)’이라 번역하였다. 이와 같은 경의 제목으로 보았을 때 초기경전에서 오장애 중의 하나로 등장하는 ‘해태와 혼침(thīnamiddha)’이 연상된다. 실제로 각주에서는 정진의 방해 요소로서 해태와 혼침을 지적하고 있다.
게으른 자의 삶의 전형
경에서는 해태와 혼침과 관련하여 Niddā, tandi, vijambhikā, aratī, bhattasammada 이렇게 다섯 가지를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해석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어 |
초불연 |
성전협 |
CDB |
PCED194(사전) |
Niddā |
졸림 |
졸고 |
Drowsiness |
sleep , 睡眠, 眠り |
tandi |
나른함 |
게으르고 |
lethargy |
Weariness, 倦怠 |
vijambhikā |
무기력함 |
하품하고 |
lazy stretching |
Yawning, 欠呿, あくび |
aratī |
따분함 |
불만스럽고 |
Discontent |
non-attachment, 不楽, 不快 |
bhattasammada |
식곤증 |
포식 후에 나른한 것 |
torpor after meals |
drowsiness after a meal |
졸리고, 권태롭고, 하품나오고, 불만족스럽고, 밥먹고 난후 나른 한 것등에 대한 것이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듯이 게으른 자의 삶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 같다.
네 가지 올바른 노력이 있는데
게송에서는 게으른자와 수행자의 태도를 대비하고 있다. 그래서 게으른 것에 대하여 정진으로 쫒아 내면 성스런 도를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정진의 방해 요소는 졸리고, 권태롭고, 하품나오고, 불만족스럽고, 밥먹고 난후 나른 한 것등 임을 알 수 읶다. 이는 다름 아닌 해태와 혼침이다. 정진과 관련하여 성전협에서는 S43.6을 보라 한다. 찾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무위로 이끄는 길이란 무엇인가? 네 가지 올바른 노력이다. 이것을 수행승들이여, 무위로 이끄는 길이라 한다.
(올바른 노력의 경, 상윳따니까야 S43.6, 전재성님역)
사정근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정근이 무위 즉, 열반으로 이끌 것이라 한다. 그런 사정근은 어떤 것일까? 각주에 따르면 제어의 노력(律儀勤 samvarappadhana), 버림의 노력(斷勤 pahanappadhana), 수행의 노력(修勤 bhavanappadhana), 수호의 노력(守護勤 anurakkhanappadhana) 이렇게 네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팔정도에서 올바른 정진이란?
이는 팔정도에서 정근에 대한 설명과 일치 한다. 팔정도에서 정근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정진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1)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건전한 악하고 불건전 것들은 생겨나지 않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하고,
2) 이미 생겨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버리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하고,
3)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하고,
4)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여 잊어버리지 않고 증가시키고 확대시키고 계발시키고 충만하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정진이라고 한다.
(Vibhaṅgasutta-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8, 전재성님역)
이것이 사정근의 정형구이다. 정진이라는 것이 선방에 앉아 용을 쓰듯이 ‘육단심’으로 밀어 붙이는 것이 아니라 네 가지 형태의 정진을 말한다.
‘육단심’으로 밀어 붙이는 것이 아니라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네 가지 정근 |
내 용 |
비 고 |
제어의 노력(律儀勤) samvarappadhana) |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하고 불건전 것들이 생겨나는 것을 방지하는 것 |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으로 감관을 다스림 |
버림의 노력(斷勤) pahanappadhana) |
이미 생겨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버리는 것 |
궁극적으로 착하고 건전한 사유 마저도 소멸시켜야 함 |
수행의 노력(修勤) bhavanappadhana) |
아직 일어나지 않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일으키는 것 |
칠각지 수행으로 |
수호의 노력(守護勤) anurakkhanappadhana)
|
이미 생겨난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유지하고 계발하는 것 |
10가지 부정상 수행으로 |
표를 보면 선법과 불선법에 대한 것이다. 선법이면 증장시키고 불선법이면 쳐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선법은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如理作意)’으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다.
맛지마니까야의 쐐기론
그렇다면 이미 생겨난 불선법은 어떻게 할 것인가? 감관을 제어하여 아직 생겨나지 않은 장애를 극복하였다고 할지라도 과거의 업으로 유래되는 불선법이 남아 있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오장애를 들 수 있다. 이런 불선법은 ‘작은 쐐기를 이용하여 큰쐐기를 제거 하듯이(M20)’ 제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선법에 대한 사유마저 소멸되어야 하나, 그러기 이전에 선법으로서 불선법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맛지마니까야 ‘사유 중지의 경(M20)’표현된 ‘쐐기론’이다. 관련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마치 숙련된 미쟁이나 그의 도제가 작은 쐐기로 커다란 쐐기를 쳐서 뽑아 제거하는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어떤 인상에 관해 그 인상에 정신적 활동을 일으켜 자신 안에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나면, 그는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
(위따까산타나경-Vitakkasaṇṭhāna Sutta-사유중지의 경, 맛지마니까야 M20, 전재성님역)
다음으로 수행의 노력이다. 이는 선법이 계속일어나도록 수행을 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이 칠각지라 하였다. 수호의 노력은 선법이 계속 증장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해골과 뼈로 구성된 시체에 대한 지각 등 열 가지 부정상 수행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이렇게 초기불교에서의 정근은 선법과 불선법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더. 용맹정진한다고 하여 용을 쓰며 육단심으로 앉아 있는 것과 다른 것이다.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았더니
CDB에서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았다.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Arati, tandi, vijambhika, and bhattasammada recur at 46:2
(V 64,31-32) and 46:51 (V 103,1344). Formal definitions are
at Vibh 352.
Spk: The noble path (ariyamagga) is both the mundane and supramundane path. The clearing of the path comes about when one expels the mental corruptions
by means of the path itself, with the energy (viriya) conascent with the path. On the distinction between the mundane and supramundane , see the Introduction to Part V, pp.1490-92.
(각주, CDB, Bhikkhu Bodhi)
이를 우리말로 옮겨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아라띠(졸림), 딴디(게으름), 위잠비까(하품), 그리고 밧따삼만다(식곤증)는 46:2(V 64,31-32)와 46:51 (V 103,1344)에서 되풀이 된다. 공식적인 정의는 Vibh 352에 있다.
말한다(spk): 성스런 길(아리야막가)은 세간과 출세간의 길이 있다. 그 길을 명확하게 하는 것은 그 길 자체의 수단에 의하여 즉, 그 길을 성취하는데 수반되는 에너지(정진)와 함께 정신적 붕괴를 쫒아 버렸을 때 실현된다. 세간과 출세간의 길에 대한 차이는 파트 5의 1490-92 페이지를 보라.
(진흙속의연꽃 번역)
이렇게 번역해 놓고 초불연과 같은 내용이 많다. 초불연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졸림(nidda)’, ‘나른함(tandi)’, ‘무기력함(vijambhika)’, ‘식곤증(bhattasammada)’은 본서 제5권 「몸 경」(S46:2) §6과 「자양분 경」(S46:51) §6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설명은 『위방가』(Vbh.352)에 나타난다.
“여기서 ‘성스러운 도(ariya-magga)’란 출세간적인 도(lokuttara-magga)를 말한다.”(SA.i.36)
“’정진으로 몰아낸다.’는 것은 도와 함께 생긴 정진으로 이런 오염원의 무더기들을 몰아낸다는 것이다. ‘성스러운 도(ariya-cagga)’는 세간적인 도와 출세간적인 도(lokiya-lokuttara-magga) 둘 다를 말한다. 이처럼 오로지 도로써 오염원(upakkilesa)들을 없앤 뒤 도가 청정해진다고 말씀하셨다.”(SA.I.36)
(각주, 초불연)
CDB에서 빅쿠보디와 초불연의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공통적으로 세간의 도와 출세간의 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CBB 1490-92 페이지를 보라고 하였다. 검색해 보니 3페이지 걸친 37조도품에 대한 설명이다.
먹는 것 조차 잊어 버렸을 때
천상에 사는 존재는 수명이 보장된다고 한다. 그래서 수명이 보장 되지 않은 인간과 달리 수명대로 산다. 그런데 수명이 다 될 쯤 징조가 보인다고 한다. 그것은 빛이 바래지 지고, 지위가 낮아지고, 더러워진다고 한다. 더구나 즐기는 것에 열중하다 보니 먹는 것 조차 잊어 버렸을 때 죽음이 가까이 오는 것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어서 오로지 즐기는 생활만을 하였을 때 게으르고 무기력하고 권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을 해도 즐겁지 않고 그게 그것인 것처럼 보여서 도무지 삶의 의욕이나 활력을 찾아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마치 파장 분위기와 같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을 때 죽을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이라 한다. 이런 모습은 인간세상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남는 것은 무기력과 권태 뿐
죽을때까지 생활이 보장 되고 갖출 것을 다 갖춘 자에게 있어서 삶에 대한 희망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원담스님은 다음과 같이 글을 남겼다.
호사와 사치와 모든 유흥과 향락이 권태로워진다. 권태를 이기기 위해 전위적이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쾌락을 추구해본다. 변태성 섹스에 마약까지도. 과도한 쾌락은 심신을 소진시키고, 권태는 정열을 식게 만든다. 삶은 무의미해지고 무력감에 빠진다. 어릴 때부터 부족함을 모르고 살아왔기 때문에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누리고 소비하고 즐기는 식으로 살아왔으니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젠 누리고 즐기는 일조차 심드렁해졌다. 남아나는 게 시간이라, 눈을 뜨면 ‘오늘은 뭐하고 지내지, 뭐 재미난 일 없나?’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뭐 한번 해봤으면 하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 방황의 끝은 어디인가?|, 원담스님)
부처님 당시 부유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재벌2세에 해당되는 장자의 아들에게 있어서 삶이란 그저 즐기는 것 뿐이다. 그러나 즐기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평생동안 아무리 오욕락을 누려도 만족하지 못한다. 쾌락이 보장된 삶에서 이런 방법 저런 방법으로 즐길거리를 찾아 보지만 금새 시들해진다. 남는 것은 무기력과 권태 뿐이다. 마치 ‘졸림과 게의름의 경(S1.6)’에서와 같이 “졸고 게으르고 하품하고, 불만스럽고 포식 후에 나른한 것”과 같은 삶의 연속이다. 과연 이런 삶이 누구나 바라는 삶일까?
누구나 천상에 태어나고 싶어 한다. 그런데 하프만 켜며 천상에 사는 존재가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더구나 영원히 하프만 켜고 산다면 그런 천상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아마도 천상이 아니라 지옥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권태로 인한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면
어느 선사는 법문에서 “배고프면 밥먹을 줄 알고 목마르면 물 마실줄 알고 기쁘면 하하 웃을 줄 알고 슬프면 엉엉 울줄 아는 것”이 45동안 부처님이 설법한 것이라 하였다. 물론 본능대로 살라는 말은 아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밥먹을 때 밥먹을 뿐, 목 마를 때 물을 마실 뿐, 기뻐서 웃을 땐 웃을 뿐, 슬퍼서 울 때 울 뿐”이라 하여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라는 것을 말한다. 이는 있는 그대로의 삶, 평상시 삶을 말한다. 하지만 범부에게 배고프면 ‘밥먹을 줄 알고’와 같은 가르침은 ‘막행막식’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래서 언제나 그렇듯이 졸립고 게으르고 무기력하고 참을 수 없는 권태로 귀결될 것이다.
할 것 다하고 더 이상 할 것이 없어서 참을 수 없는 권태를 느꼈을 때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허(虛)’와 ‘무(無)’일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이 근기 낮은 중생들을 대상으로 “배고프면 밥먹을 줄 알고 목마르면 물 마실줄 알고 기쁘면 하하 웃을 줄 알고 슬프면 엉엉 울줄 알고 하고”처럼 ‘하고 싶을 때 할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허무법문’이 되기 쉽다.
권태로 인한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게송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부처님은 “정진으로 그것을 쫒아내면, 고귀한 길은 맑고 깨끗이 드러나네.”라 하셨다. 참을 수 없는 권태는 정진으로 극복 될 수 있다는 말이다.
201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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